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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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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장, 24-25장 개요
lhyunsik

마태복음(15) 2005-05-29 06:14:44, 조회 : 4, 추천 : 0 말씀: 마 23장, 24-25장 개요 요절: 마 23:11,12 마태 복음 23장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율법사들, 헤롯 당원들의 질문과 도전을 기록된 말씀으로 답변하심으로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성도들 역시 이런 주님의 본을 따라 기록된 말씀으로 답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우리의 선행으로 원수들의 입을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너는/ 반드시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하리라. ...](딛1:11a)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을 향해 공격하던 자들의 실체에 대해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12절은 바리새인들의 말은 듣지만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400년 동안 대언자들이 없고, 주의 환상이 없던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독점 위치를 점유하였습니다. 그들의 해석이 곧 주의 법이었습니다. 그들이 정한 전통이 곧 모세의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차지했습니다. 3절은 그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꾸짖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살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4절은 이들이 각종 성전세를 비롯하여 종교적 의무를 무겁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한 이야기입니다. 금식과 헌금을 강요했습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모세의 율법을 임의대로 세분화해서 백성들의 행동을 규제했습니다. 주님은 이들과는 정반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행15:10).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설교자들, 성경 교사들, 선교사들, 부흥사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입니다. 입만 살아 있는 성도들 역시 이와 같은 부류입니다. 이에 못지 않는 죄악 중 하나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경건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려는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 곧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며 옷단을 큼직하게 하고](5).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영의 무게를 달아 보십니다.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며란 말씀은 이들이 종이나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 경문에 성경 4구절씩을 적어 넣어서 손에 감고, 이마 위에 붙인 것입니다(출13:2-10; 13:11-16; 신6:4-9; 11:13-21). 그들은 성구함을 넓게 만들어서, 율법을 향한 열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이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민15:38). 이것은 그들이 특별한 백성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보통사람보다 더 크게 만듦으로써, 마치 자신들의 신앙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처럼 보이려 했습니다. 지도자들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를 자랑하려는 교만입니다.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지만 가르치는 자가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지는 것은 죄입니다. 6-7절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와는 반대로 섬기고, 낮아지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기 마련입니다. 아벨 이후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모두 사람들로부터 고난과 배척, 핍박과 멸시를 받은데 비해 종교인들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8-10절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일컬음 받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일컬음을 받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이니 곧 그리스도요, 너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라.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 일컬음을 받지 말라. 이는 너희 지도자는 한 분이니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8-10). 랍비는 선생이란 뜻인데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성령님이십니다.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다 기억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님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2:27). 이는 교회 내에 교사의 직분이나 역할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교사는 성령을 스승으로, 성경을 text로 조명을 받은대로 가르칠 뿐 우리의 선생은 한 분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주님은 교회 내에서 교사란 직분을 주셨습니다. 또 목사는 잘 가르쳐야 합니다.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오직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딤후2:24). 목사(pastor and teacher)란 말은 목자와 교사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랍비라 불리는 사람들은 성령을 스승으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지혜를 얻어 진리를 깨우친 사람들인 것처럼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 우리 민족의 스승이니, 우리 시대의 사표(師表), 큰 가르침을 주는 사람 등의 수식어가 붙는 사회 명사들의 가르침은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일 뿐입니다. 평생동안 단 한마디의 진리도 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이 시대의 스승이었으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큰 가르침을 주시던 분이라는 신문 기사를 볼 때면 주님이 하신 8절 말씀을 절감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바하, 미국의 아버지 죠지 워싱턴, 나라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사에는 교부(敎父)로 추앙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캐톨릭은 사제들을 일컬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땅에 있는 사람들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6).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 일컬음을 받지 말라. 주님은 “나를 따르라”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란 누구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의 지도자이십니다. 8-10절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역할, 성부 하나님의 역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사람들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주님께서 높이십니다. 13-33절은 주님의 저주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8가지 복되도다!란 말씀에 짝을 이루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8가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13,14,15,16,23,25,27,29). 주님이 선포한 화를 정리하면 첫째, 왕국의 문을 닫을 때(13)- 이들은 지식의 열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들이여! 이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가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또 들어가는 자들도 막았음이라, 하시니라.](눅11:52).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 증거된 동방 박사들의 말에서부터,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증거 역시 받지 않음으로써 화를 자초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려는 사람들을 공회에서 출회함으로써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식의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전통 뒤에 교묘히 숨김으로써 하늘 왕국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행태와 동일합니다. 성경 대신 교회의 전통과 사람들의 교리를 그대로 가르치고, 성경을 읽는 대신 교회의 프로그램에만 충실하게 함으로써 믿음대신 행위로 복음을 대체해 버렸습니다. 둘째,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할 때(14)-개역을 비롯한 현대 역본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는데 이는 이 구절이 카톨릭의 죄악상을 잘 묘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과부들의 집을 약탈했는데, 이들은 죽은 남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처럼 속임으로써 이런 일을 했습니다. 캐톨릭 사제들이 하는 수법과 동일합니다. 과부들의 남편을 위해 연옥에서 낙원으로 옮겨 준다는 명목으로 헌금과 재산을 갈취하는 수법인데, 이는 오늘날 돈에 눈먼 교회들이 성도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셋째, 개종자를 얻어 지옥 자식으로 만들 때(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모든 이단들이 행하는 수법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충실한 사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전통과 인습을 확실히 계승할 사람을 찾아서, 종교 교육을 시킵니다. 이런 종교 교육은 위선과 기만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외적 형식과 권위를 가르치고, 목양이 아니라 탈취를 가르침으로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넷째, 물질적 탐욕을 부릴 때(16-2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치관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을 더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금과 성전, 예물과 제단, 성전과 하나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뒤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교회가 영혼 구령과 선교, 성도의 양육, 기도와 말씀에 계속해서 전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을 때 화(禍)가 임합니다. 설교와 성경 공부 모임보다 우선하는 모임, 더 빈번한 모임이 있다면 그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다섯째, 율법의 정신을 버리고 형식만을 취할 때(23-24). 주님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무시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과 순종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땀과 피를 통해 얻은 소득보다 마음의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여섯째, 겉은 깨끗하면서 속은 썩었을 때(25-26). 사람들은 외모를 취하면서도 흔히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은 영이 거듭나고, 중생의 새롭게 함으로써 씻음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딛3:5). 일곱째, 위선으로 가득 차 있을 때(27-28). 유대인들은 무덤에 회칠함으로써 행여나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치한 것입니다(민19:16). 그들의 이런 철저하고 빈틈없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속은 무덤 안에 있는 썩은 뼈들과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덟째, 의인들을 죽인 살인자요, 박해자의 후손이며, 자신들도 동일한 동참자일 때(29-3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조상들의 행한 죄악을 정죄하며 자신들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결코 죽이거나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남의 죄,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더 큰 죄 가운데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심판함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정죄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행위들을 정죄하시고, 저주를 선포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적 진리와 깊은 교훈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교회 내에 득실거리는 지금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식과 위선, 물질적 탐욕으로 가득하며, 사랑과 자기 희생이란 성경의 근본적 진리를 외면한 채 경건의 모양만 갖춘 위선의 물결이 교회를 채우고 있지 않는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식의 열쇠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가치관의 전이(轉移)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보다는 영적 교제가 더 중요하고 예배와 설교, 성경 공부보다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교회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겉을 꾸밀 뿐 속은 온갖 부정과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실 때 증오에 차서 저주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연민과 슬픔, 동정을 품으신 채 경고하셨습니다(37). 이는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34-36절은 일차적으로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짐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 이후 20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핍박을 받았고, 이제 남은 대환란을 통해 남은 분량을 다 채우게 될 것입니다. 23:37-39절은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1)(눅19:41). 이것은 마지막 경고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보내시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보내시지만 지옥까지 전도자를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너희들이 원치 아니하였도다!”란 말씀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8절은 버림받아 황폐화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임을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24-25장은 대환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서 매우 주의깊게 읽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먼저 개요를 살펴 본 후에 다음 시간에 본문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이단들이 마태복음 24-25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생겼습니다. 24,25장은 주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으며, 환란 성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결코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25:31-46절은 이방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에서 24:45-25:30절 말씀을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말씀으로 적용하고, 설교합니다. 영적으로, 교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시대적으로, 대상별로 잘못된 적용입니다. 성전에서 말씀하시던 주님은 성전을 떠나셨습니다(24:1-2).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과 이 세상 끝의 일어날 표적에 대해서 3가지 질문을 했습니다(3). 성전은 언제 무너지는가? 답은 누가복음 21:20-24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표적은 무엇인가? 답은 마태복음 24:29-44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에 일어날 표적은 무엇인가? 답변은 마태복음 24:4-28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두 가지를 더 답변해 주셨는데 하나는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오시는 시점입니다(마24:36-44). 또 하나는 이방 민족들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마25:31-46). 주님은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매우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14절의 왕국 복음이란 말과 16절의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이란 말을 통해 주요 대상이 유대인들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왕국 복음은 침례인 요한이 전파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전파했지만 지금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환란 때에 다시 전파될 복음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유대에 있는 자들’로 한정했는데, 교회는 이미 휴거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주님은 안식일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안식일은 교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5절에서는 ‘대언자 다니엘’을 언급하셨는데 이는 다니엘서 9:20-27절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예언했던 대언자였습니다(단9:24). 25장은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 적용하셔 해석함으로써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구절들입니다. 1-12절은 열 처녀 비유입니다. 14-30절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31-46절은 민족들의 심판입니다.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하늘의 왕국에는 선악이 공존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같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요한 계시록을 연관시켜 공부해 보겠습니다. 1. 슬픔의 시작(4-8) (1) 적그리스도(4-5) 계6:1-2(적그리스도) (2) 전쟁과 전쟁의 소문(6) 계6:3-4 (3) 기근(7a) 계6:5-6 (4) 죽음(7b-8) 계6:7-8 (5) 순교자들(9) 계6:9-11 (6) 세계적인 혼란(10-13) 계6:12-17 (7) 세계적인 복음 전파(14) 계7장(14,4000명) 그 때에야 끝이 오리니.... 대환란으로 일컬어지는 후삼년 반이 시작된다. (1)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15) 계13장 (2) 유대인들의 도망(16-20) (3) 전무후무한 대환란(21-27) 계16 (4) 아마겟돈에 민족들을 모음(28) 계19:17-18 대환란이 끝난 후...천년 왕국이 시작되기 전 (1) 하늘에 있는 표적들(29) (2) 주님이 권능으로 재림하심(30) 계19:11-21 (3) 이스라엘(택함받은 자들)을 모으심(31)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의 말씀(32-44) (1) 무화과 나무의 비유 -때가 가까운 줄 알라(33) (2) 노아의 날들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42), 노아는 환란을 통과했다. 유대인들 역시 환란을 통과한다. (3) 유익한 종과 무익한 종-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44). 민족들의 심판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을 영접했는가? 그들을 박해했는가?에 따라 나누어집니다. 계시록에 따르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용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144,000명이 전하는 왕국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환란 때에는 유대인 외에도 환란 성도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들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 유대인들을 돌보아 주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접함으로써 주님의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대환란 때 유대 민족들을 보호할 나라들이 얼마나 될지, 누구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캐톨릭의 영향력이 적은 나라들 가운데 기독교 국가였던 나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는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 1)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슬피 우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