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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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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
lhyunsik

마태복음(13) 2005-05-27 05:58:57, 조회 : 5, 추천 : 0 말씀: 마 20:1-34 요절: 마 20:27 마태 복음 20장입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을 통해서 부자들이 재물을 신뢰할 때, 탐욕을 버리지 못할 때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자신은 모든 것을 버렸는데, 얻을 보상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28-29절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입이 찢어질 만큼 만족스런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열 두 왕좌에 앉게 되고 주와 복음을 위해 버린 것의 100배를 약속받았습니다(마19:28-29). 문제는 그 다음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19:30).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처음 된 사도들은 이 말에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20:1-16절까지 하늘 왕국의 비유를 통해 이 말의 실제적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20:16은 19:30절의 진리를 다시 한번 반복하신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한 수고의 삯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값없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2:8-9, 딛3:5-6).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순전히 사역에 대한 보상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고전3:8, 요4:36참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 한 페니(데나리온)는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일꾼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두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찍 부름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세 시쯤에, 어떤 사람들은 여섯 시와 아홉 시쯤에 어떤 사람은 열한 시에 부름을 받아 포도원으로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3-7). 포도원 주인은 누구나 다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응해서 포도원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가 일한 수고의 삯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에 대해 값을 치르십니다(고전15:58, 히6:10, 계22:20). 주님은 해지기 직전인 열한 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 정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뒤에 온 사람들을 축하해 주고, 주인의 인색하지 않는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받을 몫이 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0). 사람의 타락한 성품 중의 하나는 나와 주님과의 절대적 관계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 관계, 비교 우위를 늘 생각합니다. 이는 믿음이든 사역이든 모두 한 가지입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든 나는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알고, 믿느냐?가 중요하듯이, 남이 무엇을 얼마나 받든지 나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는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요한과의 비교 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1:21-23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그런데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에 이 말씀이 형제들 사이에 퍼져 나가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신 것이라.](요21:21-23). 사역의 동기, 주님을 섬기는 동기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은혜에 대한 감사에 기인해야 합니다. 얼마나 보상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이기심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종은 일을 다 마친 후에도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일들을 다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이다, 할지니라.](눅17:10). 10-13절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대신 불평하는 일꾼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주기로 한 것 이상으로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는 마치 탕자의 형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열심히 일했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송아지 한 마리라도 잡아서 잔치를 열어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을 때, 아버지에게 심한 불평을 토로했는데, 이는 아버지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먼저 일하러 들어간 일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유를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삯을 받을 것입니다. 매튜헨리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1.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다. 2. 늦게 시작하고, 종교적으로도 약속을 적게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서 때로는 더 큰 지식과 은혜와 유용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성도들에게 상급이 보상으로서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회심한 시기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 구원받는 것보다 60대나 70대에 할 일없을 때, 죽기 전에 구원받는게 일찍 구원받는 것보다 더 낫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보상이 똑같다 할지라도 일찍 구원받는 것이 늦게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세 사람을 통해 일찍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① 마가복음 5:35-42, 12살 먹은 여자 아이- 일어나서 걸었다. ② 누가복음 7:11-15, 나임성 과부의 아들- 일어나서 말했다. ③ 요한복음 11:43-44, 나사로- 손과 발이 묶인 채 서 있었다. 14절을 보십시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도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4). 보상은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묻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20:15). 우리의 악한 눈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서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막7:22). 주님은 제자들의 논쟁 거리였던 누가 더 크냐의 문제, 보상은 얼마나 받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 해 주셨습니다. 17-19절은 마태복음에서만 4번째 반복되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언입니다. 12:38-42, 16:21-28, 17:22-23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이루실 대속의 사역과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듣기 싫어했습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중심이요, 인류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갈라 줍니다(롬6:6). 십자가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권능입니다(고전1:18). 우리의 메시지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는 설교의 중심이요,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중심된 말씀입니다(고전1:23). 십자가의 도(道)야 말로 생명과 부활, 세상과 율법에 대한 승리를 주는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제자들은 이 진리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9절은 다시 한번 누가 큰가?에 대한 논쟁에 대한 답변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아들들을 주의 왕국에서 하나는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20-21). 주님은 살로메의 부탁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2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 하매](22).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영적 무지요, 영적 망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때로 탐욕과 야심에 사로잡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광야에서 탐욕으로 고기를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육신에 따라 무엇을 구함으로써 오히려 저주를 먹고 마시려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잔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잔은 진노의 잔입니다. 주님이 받는 침례는 죽음의 침례입니다. 침례는 언제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때 요한과 야고보는 자신들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입니다. 지금 이들은 오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탐욕으로 앞 뒤 생각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한 것이지,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전도서 5:1-6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는 말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저야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의 대답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주님의 좌 우편에 앉는 일은 이미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로, 엘리야는 대언자로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입니다(마17:1-3, 계11:3-10, 슥4:11-14).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최후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들이 기도한 대로 응답되었습니다. 이 때, 다른 10제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이 두 형제에게 분개하거늘](24). 십자가의 복음은 전혀 받아 들이지 않고, 권력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2:10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는 마치 북왕국 10지파와 남왕국 2개 지파로 나누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10지파가 2지파에 대해 분개하고 시기했듯이 10명의 제자들이 2명의 제자들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24-28절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 지도자의 자격 요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 권력자들과 달리 성도들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을 보여야 하며, 낮아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8과 베드로전서 5:2을 보십시오. 목자는 양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Note:28절 : ransom for many- ransom for all(딤전 2:6). 30-34절은 소경들린 자들(2명)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막26:46-52참조-1명). 그들은 눈 먼자들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눈먼 자들입니다(고후4:1-6). 그들의 눈은 오직 주님만이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나와 간구했습니다.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무리들은 그들의 간구를 방해했습니다(31).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외쳤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의 자세입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매](32-33). 소경들은 살로메와 야고보 형제와는 달리 자신들의 탐욕이 아니라 필요를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눈 뜬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 눈 먼 자들은 오히려 ‘다윗의 자손이여,’로 부르며 주님을 부르고 영접했습니다. 요한복음 9: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눈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이스라엘 민족들은 눈 먼 소경이었습니다(고후3:14-16, 롬11:8-10). 아직도 그들의 눈은 감긴 채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간구할 때까지, 주님의 손길이 다시 만져질 때까지 그들의 눈은 결코 떠지지 않을 것입니다. 21장입니다. 21-27장까지는 먼저 전체적인 개요를 정리한 후에 본문을 요약하겠습니다. 21-27장까지는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일련의 과정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1:1-22절까지는 주님이 세 가지 표적을 보이신 장면입니다. 21:1-11절은 왕으로서의 승리의 입성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백성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고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소경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22:12-16절은 성전에 입성한 주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적으로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21:17-22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매없는 종교성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21:23-22:14절은 세 가지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21:23-32절은 두 아들에 관한 것인데 이는 백성들이 주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배척한 백성들을 고소하신 것입니다. 21:33-46절은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로서 주인의 아들을 죽인 포도원 농부들의 죄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이는 악행에 대해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22:1-14절은 혼인 비유입니다. 이는 성령을 거역한 죄악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2:15-46절은 세 가지 질문을 하신 장면입니다. 22:15-22절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문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주님을 시험하시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공세를 바치는 것이 율법에 맞는가? 그렇지 않는가? 질문했습니다(17). 이것은 정치적 질문입니다. 22:23-33절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주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28). 이는 사두개인들의 종교적 질문입니다. 22:34-46절은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입니다(36). 이는 율법사들의 율법에 대한 질문입니다. 23:1-26:46절에는 세 가지 강론이 나옵니다. 23장은 바리새인들에게 8번에 걸쳐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24-25장은 앞으로 오게 될 왕국에 대한 강론입니다. 26:1-46절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앞둔 시점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가룟 유다의 배반, 주의 만찬 제정, 제자들의 흩어짐 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6:47-27:66절은 주님이 받으신 세 번의 재판입니다. 26:47-75절은 심야 재판으로서 가야바와 공회 앞에서 받은 재판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과 백성들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65-66). 이 재판 과정에서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27:1-10절은 아침에 공회에서 다시 한번 사형을 확증했습니다. 이때 주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죽었습니다. 27:11-66절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채찍에 맞은 뒤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상은 전체적인 간략한 개요입니다. 이것을 요일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성하신 날을 일요일로 잡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을 금요일로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12:40절에 “사흘낮, 사흘 밤”이란 축자 영감을 그대로 믿습니다1). 우리는 전통적으로 해마다 유대인들의 종교력으로 지켜지는 유월절이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0일에 죽일 양을 선택해서 14일에 양을 잡습니다(출12:3-8). 15일에 누룩없는 빵을 먹는 유월절을 지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압니다.(고전5:7). 주님은 아달월 14일에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밤 삼일 낮을 땅의 심장부에 계셨다가 18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날짜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에 아침에 맞추어 역산한 것입니다. 3월 9일: 목요일 저녁 6:00- 금요일 저녁 6:00,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습니다(요12:1). 여기서 마가복음과 약간 혼선을 빚는 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성하신 것은 베다니에 오신 다음 날입니다(마가복음 11장과 요한복음 12장을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3월 10일: 금요일 저녁 6:00- 토요일 저녁 6:00, 승리의 입성(요12:12-19에 ‘그 다음날에’라고 말함). 3월 11일: 토요일 저녁 6:00- 일요일 저녁 6:00, 성전 청소, 무화과 나무 저주(막11:12-18). 3월 12일: 일요일 저녁 6:00- 월요일 저녁 6:00, 비유, 질문들, 올리브산의 설교(마21:23-25:46). 3월 13일: 월요일 저녁 6:00- 화요일 저녁 6:00, 유월절 예비일(마26:2-‘이틀 후’에 라고 말함) 3월 14일: 화요일 저녁 6:00- 수요일 저녁 6:00,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의 만찬을 하심, 저녁에 겟세마네로 가심, 체포되시고, 심야에 재판을 받으심, 십자가에 못박히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심. 3월 15일: 수요일 저녁 6:00- 목요일 저녁 6:00,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심, 요한복음 19:31-high day. 유월절 안식일임(출23:6-7에 나오는 안식일). 주님의 몸은 무덤에 계심. 3월 16일: 목요일 저녁 6:00- 금요일 저녁 6:00, 여자들이 향유를 샀음(막16:1). 3월 17일: 금요일 저녁 6:00- 토요일 저녁 6:00, 매주 찾아오는 안식일. 3월 18일: 토요일 저녁 6:00- 부활하심,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돌무덤에 이른 찾아 왔지만 이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베다니에 입성한 날을 일요일로 잡으면 제가 위에서 계산한 것과 앞부분에서 이틀의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는 마가복음 11장을 근거로 계산한 것으로 요한복음 12장의 차이를 무시한 결과입니다. 요한복음 12:1과 12을 유의해서 보라!! 주님은 베다니에서 하룻 밤을 묵으시고(막11:12),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제자들은 화요일에 무화과 나무가 마르는 것을 보았습니다(막11:20). 이 날은 이틀 후가 유월절이므로 제자들은 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유월절 만찬을 한 것이 됩니다(마26:2). 주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한 후에 올리브산으로 가서 기도하셨고 그 날 잡히셨습니다. 그 이후 일정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계산해도 주님이 수요일에 잡히시고, 주의 첫날(토요일 오후 6:00, 우리 시간으로는 일요일 0:00)에 부활하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런 견해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과 너무나 달라서 성경에 미숙한 성도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들 수 있지만 기록된 말씀에 따라 정확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2:40에 근거해서 주님이 삼일밤 삼일낮을 무덤에 땅의 중심에 계셨고 말씀하신 대로 토요일 저녁 6:00에 부활하셨습니다. 토요일 저녁 여섯시는 성경에 따르면 주의 첫날입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루의 시작은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 1) 예수님은 언제 십자가에 못박혔는가?-New Christian Series 참조, sermoned b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