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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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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
lhyunsik

마태복음(12) 2005-05-27 05:58:14, 조회 : 3, 추천 : 0 말씀: 마 18:1-19:30 요절: 마 19:29 마태 복음 18장입니다. 1-6절은 ‘하늘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변입니다. 이 땅에서나 저 하늘에서나 지위와 권세의 문제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대상입니다. 제자들은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미리 서열을 정했으면 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그 사람의 관심사, 가치관, 수준등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바 [형제 사랑으로 서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롬12:10)란 말씀과 달리 서로가 밟고 올라서려는 자세입니다. 자리와 지위에 얽매이는 것은 영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며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어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스스로 지혜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롬12:16).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입니다(4). 주님은 이 진리를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될지니라.](마20:27). [오직 너희 중에 가장 큰 자는 너희 종이 될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1-12). 아내는 남편보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엡5:22).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엡5:21). 젊은이들은 자신을 낮추어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벧전5:5). 성도들은 자신을 낮추어 목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히13:17,고전16:16).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신을 성도들보다 더 낮추었습니다(고후11:7). 그는 모든 사도들보다 자신을 더 낮추었습니다(엡3:8). 주님 역시 자신을 가장 낮추셨습니다(빌2:8). 우리는 이런 본을 따라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주님이 높여 주시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약4:10, 벧전5:6). 7-10절은 경고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은 갓 거듭난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갓난 아이(벧전2:2)로부터, 어린 아이, 아이, 청년, 어른, 장로, 나이든 사람들(빌레몬1:9)까지 성장 단계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단순해서 무엇이든지 잘 받아들이는 잇점이 있는 반면에 쉽게 흔들리고 잘 속습니다(엡4:14).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4:14). 갓난 아이들은 젖을 사용할 뿐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어려운 교리적인 문제가 나오면 실족합니다.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히5:13). 우상 숭배 문제나 음식 문제, 교회에서 작은 trouble만 있어도 시험에 빠지고, 신앙 생활을 하느니 마느니 고민하고 시끄럽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작은 자들을 갓난 아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전3:1). 주님은 이런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경고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지적했습니다(롬14:13, 고전8:9). 10절 말씀은 천사론에 대한 깊은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천사는 단지 메신저가 아니라 현현(appearance)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의 천사들이 저 하늘에 있습니다. 이는 캐톨릭이 말하는 수호천사가 아니라 이 땅에 모든 것을 주님이 저 하늘에서 다 보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저 하늘의 주님께서 그들의 천사들을 통해 다 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이 땅의 일들이 저 하늘에서 단지 동영상으로 화면에 비치는 정도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는 입체적인 전달입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로서 이 땅에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보냄 받았습니다(히1:14). 11-14절은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11절 말씀과 누가복음 19:10절 말씀을 주의깊게 비교해 보십시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왔음이라](마18:11). 누가복음에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to seek) 구원하려고 왔음이라](눅19:10).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지금 본문은 구원받은 자가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11절은 성육신의 목적입니다. 주님의 사역에서 최우선 순위요, 최대 관심사는 영혼 구령이요, 양육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 교회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자신의 우리에 든 양들 중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15-35절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의 치리 문제, 징계 문제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은밀히 일러 주라(15).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犯法)하거든 그를 꾸짖고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눅17:3). 개인적인 문제를 교회 문제로 만들지 말고,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먼저 공개적으로 소문을 내거나 다른 사람들과 의논을 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 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를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형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책망을 듣고, 바로 잡힌다면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서 권고하라.](살후3:15). [형제들아, 너희 중에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 자가 있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할지니라.](약5:19-20). 둘째, 만약 거부하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는 신명기 19:15, 민수기 35:30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것을 확증했습니다(고후13:1). 셋째, 그대로 듣지 않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권면까지 거부했을 때 출회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치리의 예가 있습니다(고전5:1-5). 징계의 대상-롬16:17(교리적 문제), 살후3:14(성경 문제), 딤후 2:23-26(온유함으로 일깨워 줄 것), 딛3:10(이단들을 한 두 번 훈계한 뒤에 거절할 것). 18절은 마태복음 16:19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치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묶는다는 것은 금한다, 징계한다는 의미이며, 푼다는 것은 용서한다, 회복을 의미합니다. 19-20절은 문제 해결의 최후 수단이 바로 합심 기도임을 보여 줍니다. 합심으로 기도할 때, 땅에서 묶고 여는 문제가 저 하늘에서 그대로 묶이고 열린다는 것입니다. 21-35절은 얼마나,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용서하는 삶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인이 성도들일진대, 자신에게 범범한 형제를 용서하는데는 너무나 인색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왕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할 때 왕은 진노하십니다. 33-35절은 구원에 관련된 말씀이 아닙니다. 형제 간에 용서의 문제이지 하나님과 죄인간의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을 참조할 것. 18장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을 정리하면 죄인들이 회심하듯이 성도들 역시 회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18:3에서 “너희가 회심하여(converted)...”란 말은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하고, 자백하며, 심판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죄로부터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고, 죄에 대해 각성하고 돌이키는 일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천사들은 구원받은 성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18:10). 하늘에서는 하나님 앞에 있고, 땅에서는 섬기도록 보냄을 받았으며, 구원받는 순간 천사들의 눈 앞에는 기쁨이 있습니다(눅15:10). 마태복음 19장입니다. 1-13절은 이혼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한국은 현재 전 세계에서 이혼율이 제 3위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혼한 가정들을 다시 통계를 내 보면 그 중에 2/3이상이 크리스천 가정입니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이혼을 해서는 안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며, 하나님이 합하신 것을 사람이 깨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19:6).왜 결혼을 해야 하는가? 첫째, 남자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창2:18).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둘째, 주님의 명령을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산하고 번성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혼자서 다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창1:28). 셋째,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7: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고전7:2). 선천적으로 신체적 결함으로 음행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결혼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캐톨릭 사제, 수녀, 중, 비구니, 정녀 등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창조 목적과 완전히 동떨어진 마귀적인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심성은 결혼 후에도 자기 아내, 자기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것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음행, 간음이 계속 일어나자 주님은 모세를 통해 이혼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신명기 24:1-4에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발견했을 때, 이혼 증서를 써서 내 보내도록 허락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마19:8).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성도라면 당연히 이혼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혼 사유는 음행(9)입니다. 이것은 다른 죄와 달리 몸에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5-18). 사별했다면 결혼의 법에서는 완전히 자유입니다(롬7:2-3). 재혼할 때는 반드시 주 안에서 해야 합니다(고전7:39). 성경은 재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정욕을 억제할 수 없다면 하는 것이 낫습니다(고전7:9). 불신자와 신자가 부부로 살 때, 종교적인 이유로 먼저 이혼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고전7:10). 만약 불신자인 배우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고 떠나 버리면 붙들 필요는 없습니다(고전7:15). 마지막으로 부득이 이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욥의 아내같은 경우입니다. 남편의 믿음을 흔들고 주를 저주하라고 할 때입니다(레24:15-16). 이 경우에도 욥이 이혼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욥의 아내가 먼저 떠났습니다. 11절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세 부류의 사람입니다. 첫째, 선천적으로 고자로 태어난 사람. 둘째, 후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내시, 병이나 사고로 기능을 잃은 사람). 셋째, 하늘의 왕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들입니다. 16-30절은 부자 청년과 구원에 관련된 성경의 예입니다. 16절에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Good Master)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16).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대해 이런 질문을 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행2:37).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일행의 간수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16:30)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모두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오직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17). 주님은 부자 청년의 질문을 받아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란 말씀대로라면 하나님 한 분외는 선한 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되물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답변하셨습니다. [오직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17). 이는 베드로의 답변과 사도 바울의 답변과는 많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행2:38)고 했고,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16:31)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대적 구분, 대상의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이후로부터 십자가 이전의 구약 성도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런즉 너희는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킬지니 사람이 이것들을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리라. 나는 [주]니라.](레18:5). 로마서 10:5, [모세가 율법에서 난 의를 묘사하되,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거니와](롬10:5). 구약의 유대인들은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상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18-19에서 주님은 지켜야 할 계명들을 일러 주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계명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을 잘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 때 주님은 마지막 계명은 탐심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은 주님이 좀 심한 요구를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제자의 길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팔아 주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 내셨던 것입니다. 마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문제를 지적하셨듯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처럼,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땅에서의 보화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름으로서 하늘의 보화를 쌓으라고 하셨는데, 부자 청년은 하늘의 보화보다 땅의 재물에 더 집착했습니다. 22절은 그의 고민이 너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청년이 많은 재산을 가졌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청년은 진지하게 영적인 문제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왔으나 정작 자신이 구하는 대답이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답이 나오자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은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코멘트했습니다. [그들이 백성이 오는 것같이 네게 오며 내 백성같이 네 앞에 앉아 네 말들을 들으나 그것들을 행하려 하지는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겔33:31). 23-26절은 제자들의 당황스런 질문입니다. 주님은 부자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막10:24). 23절에 hardly란 말은 어렵다는 hard의 부사형이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단어로서 준 부정어입니다. 이는 “거의 ...없는”이란 뜻입니다. 직역하면 ‘부자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의 의미입니다. 구원을 받는 문제이든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제이든 어렵고, 쉽고의 문제는 없습니다. 주님이 제시한 기준은 남녀노소, 빈부 계층의 차이 없이 모두 다 동일할 뿐입니다. 25절은 제자들이 구약적 상황에서 부는 곧 하나님의 축복이란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입니다. 26절에서 주님은 구원문제에서도 불가능이 없음을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부자였음에도 구원받았고 아리마대 요셉 역시 부자였지만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구원받은 부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얻을 보상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우실 때 그들은 열두 지파의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29절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인하여), 가족이나 재물, 동산, 부동산을 잃었을 때 주님은 백배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30절은 영적 성장의 속도, 열매맺는 양의 차이, 주님으로부터 얻는 보상이 연륜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가?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는 “내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지만 후에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주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6을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까?에 대한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삶이 아니라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모두 계산에 넣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