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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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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
lhyunsik

2005-05-26 06:05:26, 조회 : 4, 추천 : 0 말씀: 마 16:1-28 요절: 마 16:16 마태 복음 16장은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공적 사역에서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시고,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고난,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음을 정하셨습니다. 1-5절은 바리새인들과의 충돌, 6-12절은 제자들의 오해, 13-20절은 믿음의 고백, 21-28절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시는 주님에 대한 기사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와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일치점이 없는 대립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시험하고, 죽이는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연합했습니다. 적들의 적은 뭉친다는 격언 그대로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힘을 합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눅23:6-12). 그들은 주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1). 주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이 행하신 표적을 믿지 않았거나 속임수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면 바알세붑을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과장난 소문이라고 여겼는지 모릅니다. 이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를 원했거나,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 기적을 베풀어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엘리야의 불이나 모세의 만나는 엘리야나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준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빵을 주시나니](요6:32).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으며, 하늘을 보면서 날씨는 예측하면서 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2-3). 대신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바로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5).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은 분별할 줄 알면서 영적인 것은 전혀 분별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선자들이며, 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지킴으로써 영적으로 음란(간음)한 세대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상태였습니다. 누가 표적을 구하는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합니다. 주님의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가 이방인들을 향해 사역했고, 이방인들이 요나를 통해 구원받았던 것을 말해 주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받을 주 대상이 바로 이방인들이란 사실을 함께 선포한 것입니다. 6-1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6)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누룩이 빵의 누룩이 아니라 교리의 누룩이란 점을 직접 해석해 주셨습니다(12).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말씀보다 전통이 우선이며, 진리보다 사람의 계명이 우선입니다. 그들은 영적이고 내적인 것보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위선과 가식의 누룩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영과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고,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과 거짓 교리의 누룩입니다. 마가복음 8:15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시니](막8:15). 헤롯의 누룩은 세속적인 탐욕과 부정입니다. 우리는 누룩에 관련된 한 가지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만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8).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누룩을 문자 그대로 물질적인 누룩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때로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의 혼동은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서 본래의 의미를 놓쳤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를 받아 들였지만 영적인 의미를 놓쳤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주님의 만찬에 쓰이는 빵과 포도즙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만찬식이 성도들이 인육을 먹는 카니발 축제가 되고 맙니다. 반면 이런 해석의 부작용에 따라 모든 것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년 왕국의 천년은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다. 새예루살렘의 진주 문은 문자적인 진주가 아니다. 하늘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다. 지옥은 문자적인 지옥 불이 아니다...이런 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오류를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첫째,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누룩 비유를 오해한 이유가 바로 마음의 문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없으므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아직도 굳어 있느냐?](막8:17). 사람은 본대로, 들은대로 믿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대로 보이고, 들립니다. 똑같은 사건, 똑같은 현장에서도 증인들의 말이 다 다른 것은 그들이 보고들은 것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하고, 순수한 마음, 선한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지고, 말씀으로 물로 씻음 받은 그런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둘째, 진리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셋째, 변개되지 않는 순수한 말씀, 정확한 text가 필요합니다. 본문에 변개와 첨삭, 오류가 있는 성경으로 바른 성경 해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말씀으로 어휘와 어휘를 비교해서 해석하도록 하셨습니다(고전2:13).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2:13). 제자들의 문제는 본문의 문제나 성령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13-20절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곧 나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 하느냐?(13) 물어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예수님은 다양했습니다. 침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대언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한명, 기독교의 창시자, 민중 혁명가, 위대한 사상가, 비운의 청년 구도자, 붓다의 제자, 새시대 운동가, 수퍼 스타 등으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아는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반드시 정확한 답변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세상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엇이라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에 대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아는 것은 바른 믿음, 올바른 고백보다 앞서며, 구원의 필수 요건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베드로가 주님을 알았던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17)에 힘입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이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10:9). 누구도 성령을 힘입지 않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Professing Christian(입으로만 고백하는 교인), 믿음과 관계없는 교인, 교회 회원 등은 성령을 힘입지 않고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고백이 아니라 lip service입니다. 고백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연스런 행위이고, lip service는 마음과 상관없이 입술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18-19절은 캐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적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구절입니다. 첫째, 반석에 관련된 해석입니다. 캐톨릭은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고,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유의해서 보면 별로 어려운 구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8-19). 베드로(페트로스)는 반석이란 뜻이 아니라 작은 돌이란 뜻입니다. 반석을 의미하는 단어는 페트라입니다. 이 반석이라고 말할 때 이 반석은 베드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을 받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통해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신32:4,15). 사도 바울은 이 반석이 예수님을 직접 밝혔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4).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결코 베드로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1, [이는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1). 둘째, 왕국의 열쇠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왕국의 열쇠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열쇠는 구원의 열쇠가 아닙니다. 이 열쇠는 교회의 열쇠도 아니며, 지옥과 사망의 열쇠도 아닙니다. 하늘 왕국의 열쇠들은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마16:19). 베드로가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하늘 왕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 혼자 만이 아니라 곧 모든 제자들에게 다 주어졌습니다(마18:18). 하늘 왕국의 열쇠는 바로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왕국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인에게 공개된 key word이며,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비밀 번호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열쇠를 주심으로 제자들은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누구든지 하늘의 왕국을 들어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리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적어집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 열쇠가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 하늘 왕국의 열쇠, 지옥과 사망의 열쇠, 지식의 열쇠, 바닥없는 구덩이의 열쇠입니다. 다윗의 열쇠(계3:7), 지옥과 사망의 열쇠(계1:18)는 주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지식의 열쇠는 율법사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눅11:52). 그들은 율법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의 열쇠입니다. 끝없이 깊은 구덩이의 열쇠는 한 천사가 가지고 있습니다(계9:1, 20:1). 베드로는 하늘의 왕국을 부지런히 전파했습니다. 오순절에 처음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고, 3000명이나 회심시켰습니다. 그는 열쇠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가서(행8)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행10) 열쇠를 잘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베르도의 사역자로서의 종의 모습이지 교회를 주관하는 주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로마 교회는 이 점을 정반대로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교리를 합리화했습니다. 셋째, “묶고 푸는” 문제입니다(19).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말은 캐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 교회가 전우주적인 권세를 위임받아 사람의 구원 문제를 주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묶고 푸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일상 생활 용어로서 랍비들이 어떤 일을 금지하든가 허락할 때 쓰는 관용구입니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 내의 죄를 치리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 자칭 유대인들, 거짓 사도들, 사탄의 일꾼들을 가려내어 쫓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교회는 풀고 묶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상 숭배에 관한 한 ‘제사 금지’를 묶을 수 있습니다. 복술, 점 등에 관련된 행위를 묶을 수 있고, 반체제 활동 금지 같은 것을 묶을 수 있습니다. 반면 전통에 얽매인 것들을 모두 풀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인도에 간 선교사들은 제일 먼저 성도들에게 소고기를 먹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권세를 성도들에게 위임하심으로서 교회는 말씀대로 묶고 풀 수 있게 하셨습니다. 중세의 캐톨릭 교회는 얼마나 잘못되이 묶고 풀었는지 그 시대를 일컬어 세속의 사가들조차 암흑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가 저 하늘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주님과 한 몸이란 사실은 성경의 입증된 진리입니다. 실제로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주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이곳에서 교회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21-28절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시는 주님에 관한 기사입니다.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그들에게 입 조심을 하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20).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은 더 많이 퍼뜨려야 하는데 주님은 왜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지상 메시야 왕국의 건설을 주도하는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로소 공개적으로 다가올 고난과 죽임 당하는 것과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베드로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22). 베드로는 얼마나 놀랐든지 주님을 붙잡고 꾸짖기(rebuke) 시작했습니다(22). 베드로는 주님이 곧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만 백성에게 선포하고 다윗의 왕국, 영광의 왕국을 하셔서 왕으로 등극할 것을 꿈꾸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는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없이 곧 바로 왕국을 건설하라는 제안은 이미 광야에서 사탄이 제안했던 것입니다(마4:8-10).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는 사탄의 음성을 금방 알아채셨습니다. 23절은 벽력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투와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의 말투가 거의 같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했지만 실은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는 사탄에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 곳곳에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는 마귀들을 몰아내실 때 하는 화법과 동일합니다.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로다. 이는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로다, 하시니라.](23). 전에 주님은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마4:10)고 명하셨는데, 이번에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사탄이 제자 베드로를 사용하여 주님의 길에 걸림돌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일시적이지만 사탄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23). 마귀에게 틈을 줄 때 마귀는 침투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보십시오. 그들은 물질로 영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마음에 사탄이 가득 찼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고 경고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다시 한번 마귀의 혹독한 시험을 당합니다. 주님은 이 일로 인해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1,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 하시니](눅22:31-32). 충분한 믿음의 성숙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한번 패배했다고 해서 다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런 치명적이고 반복적인 실수가 자신이 충분히 깨어 있지 못한 것에 기인한 실수였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5:8-9). 베드로는 육신을 의지했고, 깨어 있지 못함으로 인해 시험에 빠졌고, 마귀에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어떤 영적인 깊은 각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를 시험으로부터 보호 해 주거나 마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영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귀 역시 그만큼 더 나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4-27절은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제자도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로 요약됩니다(24). 제자는 강제 조항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If any man will come after me....)](24). 이는 의지적인 결단의 문제요, 자발적인 문제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먼저 주님께 꿇는 것이며, 몸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결코 좋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와 기쁨, 하나님과의 친교의 기쁨, 하늘의 소망, 보상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일은 고행의 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것 보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더 잘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도 저 사람 같으면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겠다 싶고, 저 형제 같은 환경이면, 저런 상황이면 좀 더 헌신하고, 좀 더 열매를 맺을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더 쉬워 보인다고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십자가를 끌어내려서는 안됩니다. 내 것을 팽개치고 다른 짐을 골라 질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다면 마땅히 그것을 지고 가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자의 칭호와 명예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에게 제자의 의무를 행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25절은 역설의 진리입니다. 26절은 생명의 존귀함, 27절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주님의 보상에 관한 약속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는 진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고통과 영광이 함께 한다는 성경적 진리들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