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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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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9)
lhyunsik

마태복음(9) 2005-05-26 05:50:30, 조회 : 4, 추천 : 0 말씀: 마 14:1-15:39 요절: 마 마태 복음 13장에서 다루지 않는 왕국 비유 다섯 가지를 간략하게 다루고 14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8:23-25에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18:23-25)를 통해 하늘의 왕국에 갈 지체들이 서로간에 해야 할 행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늘의 왕국의 백성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를 간직하고, 형제들에게 긍휼 베푸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바로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1-6에는 “포도원 지기”의 비유를 통해 하늘의 왕국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일꾼들을 고용하여 노동의 삯을 지불합니다. 일꾼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지 삯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침 일찍 고용된 사람, 세시, 여섯시, 아홉시, 열한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주님께 나아온 죄인들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 구절은 흔히 초기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 중세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 지금처럼 마지막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처럼 영적 적용을 하거나, 개인의 일생에 적용해서 어릴 때 구원받은 사람, 청년기에 구원받은 사람, 노년에 구원받은 사람 등으로 설교되어 왔습니다. 문맥을 통해 볼 때, 이 비유는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의 정신과 같은 자세에 대한 책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19:27-3). 사람들이 복음 사역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동기로 하였는지에 대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일한 양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시대에서 일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자신이 일한 것이 무엇인지, 그가 나무나 짚이나 그루터기로 지었는가를 드러 것입니다(고전3:9-15).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어떻게 일했는가?는 더욱 중요하며, 주인은 자신의 뜻대로 무엇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14에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의 비유를 통해 하늘의 왕국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결혼 잔치”(마22:1-14)의 비유는 누가복음 14:16-24에 기록된 “성대한 저녁 식사”의 비유와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성대한 저녁 식사의 비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석달 전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행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죽고 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주셨으며, 이후에 펼쳐질 복음의 사역에 대한 암시를 이 비유에서 충분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결혼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인 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많은 무리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하신 비유중에 “혼인 잔치의 비유”는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모세의 율법을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까지 포함합니다. “어떤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첫 번째 내려진 명령은 유대인들에게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대언자들은 “혼인잔치”를 선포합니다. 침례인 요한과 열두 사도와 칠십명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왕국이 가까웠음을 선포하면서 이 사실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셨을 때, 결혼 잔치를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베드로를 포함한 많은 종들이 마을로 보내졌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부름이었습니다(행3:19-21).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주 경히 여겼습니다. 스데반이나 야고보를 비롯한 남은 자들에게 마음대로 대하였고, 결국은 죽여 버렸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의 군대를 보내셔서 이 도시를 불로 태우셨습니다. 이 일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Titus)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많은 주의 종들이 결혼 잔치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고자 하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볼 때, 초청받은 손님들 가운데도 서로 다른 부류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책망을 받고 쫓겨납니다. 이 비유의 끝과 “열처녀의 비유”의 끝과 비슷합니다. 현명한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분리되는 것처럼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쫓겨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모으실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했던 환란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기서 열 처녀는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신부(a virgin)이지 처녀들(virgins)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부로서 결혼 당사자이지만 열처녀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손님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결혼한 사람(신랑)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눅12:36). 처음에는 모두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 일부(다섯 처녀)는 기름을 잃어 버렸습니다. 기름이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기름을 잃어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교회의 휴거에 관련된 눈깜짝할 사이라든가 ‘순식간에’란 표현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4:1-6에 처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 6:8,9절, 시편45:13,14절에서 역시 처녀들을 봅니다. 다음은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와 누가복음 19:11-27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먼 나라”는 하늘입니다. “떠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합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므나의 비유에서 한 므나를 가진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기고 그가 받을 한 고을 다스릴 권세마저 빼앗기지만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쫓겨납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의 사역을 섬길 것인가?입니다.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은 주인을 엄격한 사람으로 알았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손수건에 싸서 감추어 두었던 것 뿐입니다. 모든 비유에서 보듯이 주님이 오실 때,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주의 사역에 신실한 종과 그렇지 못한 사람사이에는 분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행한 대로 상을 주시고 보응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는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의 분명한 차이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14장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극심한 반대와 배척을 받으신 후(11-13장) 이제 무리들로부터 떠나 제자들과 주로 홀로 지내셨습니다(14-20). 14:1-12절은 침례인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사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침례인 요한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교회사 2000년을 관통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겪는 일입니다. 13-21절은 복음서마다 모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먹이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리스도의 종은 양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통해 공급하시는 능력을 받아 5000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는 주님의 명령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주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셨듯이, 기드온과 그의 병사들이 지닌 나팔과 항아리, 등불을 사용하셨듯이(삿7:20), 다윗의 돌맹이를 사용하셨듯이 주님은 우리 손에 지니고 있는 작은 것들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22-36절은 보호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에 관한 기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해 주셨습니다(23,27). 여기서 헤롯에 대해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헤롯은 성(family name)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이 등장하는데, 헷갈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2살 아래의 아이들을 죽인 헤롯은 헤롯 대제(Herod the Great)입니다(마2:16-18). 헤롯 대제의 아들이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인데 그는 왕이 아니라 왕국의 1/4을 다스리는 사분영주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침례인 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사분영주 헤롯은 요한의 말을 달게 듣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그를 주시(注視)하며 또 그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일이 많으며 그의 말을 달갑게 들었음이더라.](막6:20).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마14:3,4). 헤롯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14:7). 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매우 중요시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자신이 말한 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근심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침례인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10:9). 주님은 이런 헤롯의 행위에 대해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시니](막8:15).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기를, 보라, 오늘과 내일 내가 마귀들을 내쫓고 치료하다가 셋째 날에 완전하게 되리라, 하라.](눅13:32). 이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 이적을 보고 싶어했고, 자기 앞에서 표적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눅23:5-12). 사도 행전에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넣었던 사람은 헤롯 아그리파(Herod Agrippa)였습니다. 이는 헤롯 대제의 손자였습니다(행12). 사도 바울을 재판했던 헤롯은 헤롯 아그리파 2세였습니다(행25:13). 이 사람은 헤롯 대제의 증손자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에돔 족속이었고, 유대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였고,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셔서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만큼, 그 이상을 행하시는 분이시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돈이 없다고 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적은 것이 주님 앞에 드려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먼저 부수십니다. 주님을 빵을 쪼개셨습니다. 옥합 속의 향유는 옥합이 깨어질 때만 그 향기가 집안을 진동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겉사람은 철저히 부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 없는 광야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넷째, 주님 앞에는 어려움이 없으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해결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돈이 없다, 이곳은 광야이다, 지금은 저녁 때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등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진 것을 취하셔서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채움을 받은 것보다 육신의 채움을 입은 것이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때 주님은 무리를 서둘러 해산시키고,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기도하셨는가?를 볼 때 우리가 언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큰 역사를 이루신 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14:23). 우리는 주일 집회가 끝나고, 부흥회가 끝나고, 성경 공부 모임이 끝난 후가 바로 더욱 기도해야 할 시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을 때, 우리의 명성이 퍼질 때, 교회가 성장할 때, 그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바로 물러나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물러가사 기도하시더니](눅5:16). 주님은 큰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른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외진 곳으로 나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주님은 때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니라.](눅6:12).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하신 뒤 팔 일쯤 되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시더니](눅9:28). 우리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바다에서 풍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저 하늘에서 기도하시는데, 이 땅에서 성도들이 세상이란 바다에서 풍랑으로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셔서 풍랑을 잔잔하게 해 주셨는데, 그 시각이 밤 사경이었습니다(14:25). 이는 주님의 재림 시점이 바로 3-6시 경이란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요한복음 6:21을 보면 주님이 오셨을 때, 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간적으로 그들이 가려던 뭍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더라.](요6:21).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저 하늘에 순간적으로 도착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험은 우리 성도들의 영적 경험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동일한 능력과 체험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이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즉시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전무후무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28-30). 시선을 주님에게로 향하는 대신 다른 것을 향할 때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 빠집니다. 들었던 말씀대신 보이는 것이 마음을 차지할 때 실패합니다. 주님의 명을 받고 걸어가는 베드로에게 즉시 사나운 바람이 일었다면, 우리 역시 순례의 길에서 주님을 향해 갈 때 사나운 바람이 일어난다는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해서 발을 내딛을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나운 바람이 일어납니다. 주님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천진난만한 성도들입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위험한 순간에 입을 벌려 주님께 도움을 구할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손을 붙드시고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15장입니다. 15장은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1-20), 예수님과 이방인들(21-39)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전통이냐? 성경이냐?의 문제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고소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전통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1-2). 주님은 이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3,6). 4-6절은 어떻게 전통으로 십계명을 교묘히 파괴하는지 그 예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29:13을 인용하셔서 이들의 죄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7-9절,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대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9). 마음이 없는 입과 입술로 드리는 경배,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헛된 경배(예배)’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예물을 바치고, 규율을 준수한다 해도 참된 경배자(예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경배자는 참된 경배자(true worshippers)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들이 참된 예배자들입니다(요4:23).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3-24). 주님은 무리들을 불러모아 공개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공격했습니다(10-11).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실족했습니다(12). 그들은 눈먼 안내자요, 주님께서 심지 아니하신 초목이었습니다(13-14).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마음에 심겨져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과 명령은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자였던 베드로조차 이 말씀을 비유로 생각했습니다(15). 그러나,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간단한 진리입니다. 사람의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오직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거니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8-20).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롬10:9-10),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며(마22:37), 마음으로 노래하며(골3:16), 마음으로 순종하고(롬6:17), 마음으로부터 나와 자선을 베풀고(고후9:7),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시51:10,17). 참된 의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1-28절은 큰 믿음의 소유자인 한 이방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으로 향하셨습니다(21). 딸이 마귀에 들려 고생을 하는 여자의 처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여자의 간구에 4가지 방법으로 대하셨습니다. 첫째, 침묵하셨습니다(23). 둘째, 거절하셨습니다(24). 셋째, 꾸짖으셨습니다(26). 넷째, 응답하셨습니다(28). 주님은 왜 바로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첫째, 그녀는 이방인이면서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소리질렀습니다(22). 이방인이 유대인 행세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가나안 여자가 다윗의 자손을 찾는 것은 위선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을 때, 유대인식 용어, 유대인식 접근법을 찾아내어 유대인인체 구해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주님은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소리친다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무조건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 우리의 종이 아니시며, 우리의 물주(物主)가 아니십니다. 우리는 겸손히 구해야 하며,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은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요4:22). 이방인들이 은혜를 입었지만 유대인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 허물어졌지만 유대인의 나은 점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3:1,2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이라.](롬3:1-2).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자)은 유대인에게서 나왔으며, 유대인들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던 종의 신세요, 개와 같은 자였지만 이제는 자녀가 되어 주님이 차려놓은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입었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을 안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고, 기다리게 하시고, 꾸짖으실 때,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29-31절은 이방인들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나온 모든 병자들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1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31b). 32-39절은 14:15-21절의 오병이어 사건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오병이어때는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주로 이방인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갈릴리 벳세다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면 본문의 사건은 데카폴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막8:31). 오병이어의 기적은 말 그대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만 본문에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지난 번에는 12 바구니에 가득 남았지만 이번에는 7 바구니에 남았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은 여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때 무리들은 주님과 하루를 같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리들이 주님과 사흘을 함께 있었습니다. 32절에는 주님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돌아가는 도중에 쓰러질까 염려되어 그냥 보내지 못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사건으로부터 진리를 배우지 못했습니다(33). 주님은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똑 같이 병을 고쳐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심으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첫째, 사람의 전통과 사람의 계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는 것은 헛된 경배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참된 경배자가 되어 참된 예배를 주님께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전통과 성경이 말하는 전통은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 2:15,3:6, 고린도후서 11:2에서 전통을 말했는데, 이는 신약이 기록되기 전에 사도들이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그런 가르침은 모두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외에 전통이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전통을 첨가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진노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넷째,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