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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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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
lhyunsik

마태복음(6) 2005-05-24 06:32:15, 조회 : 8, 추천 : 0 말씀: 마9:1-10:42 요절: 마 9:36-38 주님은 마귀들린 두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 도시 주민들로부터 떠나 달라는 배척을 받고, 다시 배를 타고 본 도시로 돌아왔습니다(1). 그 때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마비 환자를 친구들이 주님께 데려 왔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좀 더 상세히 기술했는데, 친구들의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마가복음 2:2-4,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많은 사람들이 즉시 함께 모여들어 문 앞에도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마비 환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그분께로 오는데 무리로 인해 가까이 갈 수 없으므로 그분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마비 환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리거늘](막2:2-4). 주님이 말씀하시는 도중에 지붕으로부터 마비 환자가 침상에 달려 내려 왔습니다. 이 환자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으로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실로 이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믿음으로 상림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환자의 병을 고치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들아, 기운을 내고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2). 죄의 용서는 오직 한 분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유대인들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한다고 단정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죄가 용서될 수도 없거니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합니다. [이때에, 보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 모독을 행하는도다, 하니](3). 지금 침상에 달려온 이 마비 환자가 죄로 인해 병이 걸린 것이고, 죄사함을 선포함으로써 일어난다면 주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공개적으로,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생긴 병은 죄의 용서함을 통해서만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마비 환자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매](5-6). 주님은 서기관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이 대답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기관들에게 둘 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둘 다 쉽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 주님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왕국 복음에 표적이 따르는 것은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란 사실을 증거 하는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늘의 왕국을 가져 올 왕이란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8절은 표적의 올바른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침상에서 병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날 표적을 행한다는 거짓말쟁이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보십시오. 9-13절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증거하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더불어 2대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인식과 시대적 편견에 전혀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 집에서 음식을 먹었고,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어울렸습니다(10).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행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11).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자칭 의인(義人)들은 죄인들이 받는 은혜와 긍휼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합니다. 죄인을 회심시키는 일은 모든 율법사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맡은 자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출회할 뿐 아무도 그들을 보살펴 주지 않았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12-13). 주님은 그들에게 가서 호세아 6:6을 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호6:6). 이 말씀은 성전에 희생물만 드릴 줄 알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절기마다 율법에 따라 소나 양을 잡는 것보다 긍휼을 더욱 원하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이 행위가 결코 잘못이 아님을 입증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회개는 근심이나, 자책,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며 이를 물고 굳게 결심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죄를 버리고, 주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없는 회심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회개와 동시에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20:21). [먼저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 온 유대 지방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 함을 보이매](행26:20). 14-17절은 금식에 관련된 유명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을 했는데,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9:14b).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심각하게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니와...](9:14a). 실제로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누가복음 18:12에 어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2). 그러나, 주님은 지금 제자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많은 신앙 선배들이 금식을 했지만 금식은 구약 어디에도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58:3-7, 스가랴 7:5-6절에 주님이 정의하신 금식의 의미가 나옵니다1). 그렇다면 금식해야 하는 때가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부방 아이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애곡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날들이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없을 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신 후, 장차 교회가 휴거되고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통과할 때 그들은 금식해야 합니다. 16-17절은 간단한 비유로 15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나니 이는 기우려고 붙인 것이 그 옷을 당기어 그 찢어짐이 더 심할 것임이라. 새 포도즙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즙이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사람들이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넣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16-17). 새 옷감 조각과 새 포도즙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옷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갈라디아서 3:27,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새 포도즙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새 포도즙이지 절대 술이 아닙니다(창40:11). 이것은 포도송이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사65:8, 신29:6, 32:14). 우리는 거듭나기 전까지 새 부대가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날 때 새 부대가 되고, 성령으로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8-26절은 죽은 자를 일으키신 주님입니다. 어떤 치리자의 딸이 죽어 가는데, 예수님께 와서 안수를 부탁했습니다(18). 이 사람의 이름은 야이로이며, 딸은 열두 살이요, 외동딸이었습니다(눅8:41-42). 야이로가 주님을 찾아 왔을 때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실 때에, 보라, 어떤 치리자가 나아와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내 딸이 지금 막 죽었사오나2) 내 딸에게 안수하소서. 그러면 내 딸이 살겠나이다, 하매](18). 모두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급한 걸음을 멈추게 하는 믿음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주님과 몸이 부대끼고, 옷 자락이 마주쳤지만 오직 한 여인에게만 주님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그녀만이 믿음으로 만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녀가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온전하게 되리라, 하였음이더라.](21). 이 여인은 자신의 병으로 인해 세상 의원들에게 살림을 다 허비하였고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눅8:43).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믿음으로 은밀히 주님께 들고 나와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문제, 사람들의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믿음으로 들고 나갈 때 이 여인과 같이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이 여인의 치유를 통해 자신의 딸아이도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아이는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주님의 일하는 손 길이 멈출 때, 더 큰 재앙을 만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지체하심은 더 큰 영광을 위한 준비 걸음입니다. 주님은 죽은 아이를 일으켜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23-25). 사람들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24). 병든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주님은 천천히 오셨고, 죽은지 나흘이 지난 뒤에야 도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요11:11) 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 앞에 죽음은 없습니다. 27-30절은 눈먼 자를 고치시고, 32-35절에서는 마귀들려 말 못하는 자의 마귀를 쫓아내시고, 모든 백성들에게 왕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이 땅에 천년 왕국이 세워질 때에 질병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현재 교회 시대에 성도들은 질병을 앓을 수 있습니다. 왕국 복음은 표적과 이적, 기사가 동반됩니다. 은혜의 복음 사역에는 그런 표적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런 사역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33절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에서 결코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나](33b)였고, 바리새인들은, [...그가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는다, 하더라.](34)였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 동일한 말씀을 듣고, 동일한 시간에 함께 있어도 증거하는 내용은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보는 것이 결코 믿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 주는 예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결코 바리새인들을 회심시키지 못했고, 믿음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표적과 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 순수한 양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란 사실입니다. 36-38절은 오늘날 우리의 간절한 기도제목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 이에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들이 적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시는 {주}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자신의 추수 밭에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하라, 하시니라.](36-38).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목자 없는 양같았습니다. 양들에게 문제는 풀이 없는 것, 물이 없는 것, 이리가 오고, 도둑들이 오는 것이겠지만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목자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에스겔 34:5,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들의 모든 짐승에게 먹이가 되었도다.](겔34:5). 오늘날 양들의 가장 큰 문제 역시 목자가 없는 문제입니다. 목양 받기를 거부하는 양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목양 하기를 거부하는 목자들이 넘쳐납니다. 수확에 관한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 시대의 끝에 문자적으로 백성들을 수확할 것을 말합니다(마13:20, 계14:15). 또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35-38에 이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게 되어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같이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참되도다.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나니 다른 사람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느니라.](요4:35-38). 10장입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 가운데 12 사도를 부르셔서 본격적으로 왕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왕국의 복음이 전파되고, 주님을 메시아로 영접한다면 이제 왕국 건설은 시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부르시고 사도들에게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고 내쫓으며, 온갖 질환과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1). 이것을 사도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능력은 사도들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과 이적과 능한 행위로써 사도의 표적들을 행하였도다.](고후12:12). 오늘날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의 흉내를 내는 많은 거짓 사도들이 교회 내에 넘쳐 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질병을 다 고칠 수 있었습니다. 2절은 사도들의 명단입니다. [이제 이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우선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별명이 다대오인 렙배오와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룟 유다 곧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라.](2-4). 이들은 모두 사도로서 사도의 표적을 행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웠음을 선포했습니다(7). 그들은 모든 민족에게 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만 갔습니다(5). 그들은 이방인들의 길로나 사마리아의 어떤 도시로 가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5). 이것은 오늘날 은혜의 복음과는 내용과 전파 대상이 너무나 다릅니다. 이것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왕국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국 복음을 선포할 때 동시에 표적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표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병든 자를 고쳐 주고 나병 환자들을 정결하게 하며 죽은 자를 일으키고 마귀들을 내쫓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만약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한다면 대부분의 목사들들은 목사직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능력있는 목회자의 요건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거짓 목사로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16-23절은 전도자들이 겪는 위험과 어려움과 더불어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역 현장으로 보내시면서 지혜롭고 순결하게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해를 끼치지 말라.](16). 중세와 근대에 캐톨릭은 군함을 동원해서 종교를 전파했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과 정반대입니다. 왕국 복음이든 은혜의 복음이든 강제로, 상대를 위협하며 전할 수는 없습니다. 17-23절은 당시 12사도가 겪었던 일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고 난 후 기뻐하며 즐거이 돌아왔습니다(눅9:10,막6:30). 이 말씀들은 훗날 겪을 일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공회에 넘겨지기도 했고, 채찍질 당하고, 왕들 앞으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상 사역 동안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자기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요, 또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왕들 앞으로 끌려가 그들과 이방인들을 대적할 증거가 될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그 시각에 /지시를/ 받을 것임이라. 이는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라. 또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음에 넘겨주며 자식들이 자기 부모를 대적하여 일어나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환란 때에 다시 왕국 복음을 증거하려면 이런 일은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22절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2).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지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이란 것은 구약이나 신약 둘 다 인생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때가 끝날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대환란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란 의미입니다(신9:26-27,8:17-19; 7:26,11:35-40, 12:8-13, 마24:13,14). 23절 말씀도 당시 12사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다니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23). 이는 주님의 문자적 재림을 의미하는데, 환란전 유대인들이 왕국 복음을 들을 시기를 말합니다. 42개월, 1260일의 대환란이 끝나면 복음 전파의 유무와 관계없이 주님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지상 재림하십니다. 24-42절은 제자의 요건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스승이 당한 모든 것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스승이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는데 그의 제자가 존경과 높임을 받는 예는 없습니다. 교주가 사이비면 그 교주를 추종하고 따르는 신도는 모두 사이비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바알세붑이라고 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바알세붑의 종밖에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24-25, [제자가 자기 스승보다 높지 못하며 종이 자기 주인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자기 스승처럼 되고 종이 자기 주인처럼 되면 족하도다. 그들이 그 집 주인을 바알세붑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안 사람들이랴?](24-25). 주님은 이 땅에서 모욕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졌는데, 우리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려 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반복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25,28,31)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우리가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29-31,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그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29-31). 성도는 환란 중에서도 주님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습니다. 32-33절은 유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 가운데 예수를 믿었다가 협박이나 강요로, 어떤 위협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살하면? 주님을 부인하면(마10:32-33)?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막13:13)?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으면(마12:31,눅12:10)? 배교하면(히6:6)?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으면(요일5:16)?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들과 믿고 난 후에 어떤 일로 부인하는 것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시인할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고, 부인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본문은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지 못하고, 부인하는 경우입니다. 믿었는데 믿음을 고백했다가 닥칠 위해(危害)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는 경우에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예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세 번에 걸쳐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로 맹세까지 했습니다(마26:34). 그러나, 그는 구원받은 사도였습니다. 주님이 구원받은 성도를 부인하다고 할 때는 유업과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2,13절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임이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2-13). 유업은 부인할 수 있지만 구원은 결코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34-36절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34-36). 주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라 화평의 창시자이십니다(고전14:33).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히13:20). 주님은 화평의 왕이십니다(히7:2). 복음은 화평의 복음(엡6:15)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화평의 신을 신고 전하는 화평의 대사들입니다(롬10:15)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음을 믿는 순간 믿지 않는 자들과는 불화하게 됩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화평이 아니라 trouble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탄생 순간부터 예루살렘과 헤롯의 궁은 평강이 아니라 소란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순간에도 소란의 도가니였고, 부활의 소식은 더 많은 사람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각 도시에 전해지는 복음 전파는 그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사람들’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어떤 형제들을 끌고 도시의 치리자들에게 가서 외쳐 이르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는데](행17:6).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주님과 주님의 원수된 죄인들간의 화평입니다(롬5:1, peace with God). 죄인들이 복음을 통해 주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의 화평(peace of God)이 그 안에 머물게 됩니다. 주님은 믿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는 주님의 주시는 평안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우리는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아뢰고, 맡길 때 이성을 초월하고,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그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37-39절에 다시 한번 제자의 자격 요건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구절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은 가정을 박살내 놓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이혼을 하고, 가출을 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특정 구절, 특정 진리가 다른 구절, 다른 진리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과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37절은 주님께서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주안에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의 사랑이 아닌 것은 의(義)가 결여되고, 진리가 배척됨으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음보다, 소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지만 반드시 주안에서 사랑이어야만 참 사랑인 것입니다. 38-39절은 자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하고(눅14:26),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도들에게 주어진 크고 위대한 두 가지 계명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29-31,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이것이니,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주}시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둘째 /명령/도 그와 같으며 곧 이것이니,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명령이 없느니라.](막12:29-31, 마22:37-40 참조). 40-42절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주님의 종은 주님을 대신합니다(고후5:20). 우리의 신분은 매우 고귀한 것입니다. ------------------------------------- 1) 스가랴 7:4-7, [이에 만군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땅의 모든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가 그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곡하였거니와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 자신을 위하여 먹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마신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그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슥7:4-7). 주님은 금식보다 말씀들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금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 58:3-7, [...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3-7). 2) (My daughter is even now dead...; 내 딸이 막 죽은 것과 방불하오나.../아직 죽지 않은 상태이다. 주님과 가는 도중에 죽었다는 전갈이 온다-눅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