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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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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
lhyunsik

마태복음(5) 2005-05-23 06:26:19, 조회 : 7, 추천 : 0 말씀: 마8:1-8:34 요절: 마 8:10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큰 무리가 주님을 따랐습니다(1). 이제 왕국의 백성들은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가복음 6:17-49의 ‘평지 설교’와 많이 헷갈려 하는데, 이 둘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점에 설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산에서, 제자들이 아직 정해지지 않는 상태였던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에서, 12제자들이 이미 정해진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질병을 고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2-4절은 ‘나병 환자’를 5-13절은 마비증세를 앓는 사람을 14-17절은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나병은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에나 인간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질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설교를 들은 나병환자는 ‘주님이 원하시면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주는 믿음이요,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때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할지어다](8:3). 주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연약함을 직접 담당하시고자 손을 내밀어 대신 것입니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나병 환자와 접촉했던 옷이나 집은 불로 태우도록 되어 있습니다(레13:52). 그러나, 주님은 불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나병 환자에게 대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나병환자였습니다. 이사야 1:5-6,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너희의/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氣盡)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들뿐이거늘 이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도 못하였도다.](사1:5-6). 주님은 죄인을 향해 손을 내미셨고,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시며 대셨습니다. 연민과 동정심이 많으신 주님의 모습이 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5:8에 [[주]는 은혜로우시며 동정심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크시도다.](시145:8). 이때 이방인 백부장이 자신의 종을 위해 주님께 나왔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께 나아오는 이방인들이 지금 이곳과 15:21-28에 두 번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복음서요, 유대인들의 왕으로 기술된 마태복음에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두 번 다 멀리서 고쳐 주셨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엡2:12-13). 이방인들은 두 번다 표적이나 이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잘 예시해 주는 사건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사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10).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믿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성경에는 몇 단계의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no faith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마17:19-20). 둘째, little faith(적은 믿음)입니다. 이는 중도에 포기하는 믿음입니다(마14:28-30). 처음에는 믿음 가운데 확신있게 출발하지만 환경과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대신 그것을 바라보다 실패하는 것이 바로 적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다 풍랑을 보고 겁에 질려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끊임없이 [믿음의 적은 자들아]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책망을 받으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늘 염려 가운데 삽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하나님과 세상, 성령과 육신, 믿음과 행위 사이에서 저울추처럼 왔다갔다 하며 삽니다. 먹고 입을 것이 염려된다면 그는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아니하겠느냐?](마6:30). 셋째, 큰 믿음입니다. 큰 믿음이란 오직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이 족한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하는 주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오직 말씀만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마8:8)했습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고, 말씀이외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에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사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나의 기도는 항상 “주여 한 말씀만 해 주옵소서!”로 족합니다. 큰 믿음이란 환경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말씀에 따라 자신을 고쳐가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어떤 믿음의 영웅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처절했던 한 여인의 승리를 담은 기사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나와 소리질렀습니다.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되](마15:22). 딸을 향한 애끓는 어미의 모정으로 외치는 그녀의 간구에 닥친 가장 큰 시련은 냉담한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주님의 침묵보다 더 큰 시련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에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15:23a). 다급하고 애끓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성도들은 누구나 낙담하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해 본 적이 없습니까? 이 여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쳤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이라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님께 중보해 주면 좋을텐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간청하여 이르되, 그녀가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매] 제자들은 더 야멸찼습니다. 12제자 중 누구도 자신에게 한 마디의 동정이나 위로는 고사하고 연민의 눈빛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 주위의 형제들이 위로와 도움은 고사하고 힘빼는 소리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요, 설상가상이었습니다. 침묵하시던 주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비벼대 볼 언덕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기사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먼저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왜 이토록 모질게 대하시고 계실까요?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주님은 여인의 잘못된 기도를 고쳐 주시고 계십니다. 22절과 비교해서 읽어보십시오.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이 다윗의 자손을 찾은 것은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속되는 침묵이나 NO로 응답하실 때, 우리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NO란 응답에는 올바른 가르침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나와의 관계성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분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처럼 주님께 구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니](마15:25). 이제 여인은 주님만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분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제는 되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주님은 다시 한번 NO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매] 주님은 여인의 신분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당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백성”이 아니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께 정당하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였기에 하나님께 이것 저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 줘야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면 주님이 이유없이 무조건 도와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은 이제 한번 더 성숙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르되,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제 여인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신분이요, 존재란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습니다. 지성인으로 자부하는 현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 가운데서 주님이 주시는 시험을 이겨낸다면 큰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받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바로 그 시각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게 되니라.](마15:28). 14-17에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마귀들린 모든 자들과 모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은사주의 사역자들이 신유 은사를 베푸는 장면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보십시오. 9:35에서도 주님은 모든 질병을 다 고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대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 당한다, 하였노라.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이사야 53:4,5). 이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기 전부터 전 사역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십자가의 구속에 다 포함되어 있지만 이 시대에 모두 다 발효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는 초림과 재림을 다 포함하지만 어떤 것들은 재림의 때에 효력을 발휘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질병을 없애는 일은 재림 때에 집행될 일들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구속과 함께 우리의 고통과 슬픔, 상함은 완전히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의 몇몇 교회들에서 성도의 병은 모두 불신과 마귀 들림의 결과로 주장하며 이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말씀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8-22절은 제자의 요건과 자격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제약 요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에게는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한 제자는 자원해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지만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과 놀라운 설교와 가르침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 삶이 영광의 삶이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20). 주님은 서기관이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보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름으로써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자신의 모든 소유는 물론이고 자신을 기꺼이 부인하고 포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 다른 한 제자는 [또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거늘](21).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 아니라 집안 일을 정리하며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마음 상태를 정확히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22). 여러분은 제자들입니까? 제자로의 입문은 지금보다 결코 나은 부와 명예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의 요건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제자의 관심과 애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제자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제자의 또 하나의 요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23-27절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을 통해 전능하신 능력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과 배에 오르신 주님은 주무셨습니다. 그때 큰 폭풍에 배가 파도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그만큼 바다에 대해 두려움도 많습니다. 그들은 폭풍과 파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25절은 그들이 얼마나 큰 위기를 느꼈는지, 그 부르짖음이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때릴 정도입니다. 파도가 치는 거대한 폭풍의 바람 소리보다 제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더 클 것 같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깨우며 이르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매](25).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폭풍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더 크게 덮칩니다. 폭풍이 없기를 바라며, 폭풍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기복 신앙이라면, 폭풍을 당당히 맞이하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기를 간구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고난과 시련, 재앙이 없기를 구하는 것이 종교라면, 고난과 시련을 당당히 맞이하며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독교입니다. 세상의 대양을 그리스도와 함께 지나는 사람들은 폭풍을 각오해야 하며, 폭풍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8-11,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1). 고난을 당하고, 난처한 일을 당하고, 절망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은 성도나 불신자나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해결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일을 당하지만 괴로워하지 아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버림받지 않고, 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반면, 불신자들과 세상 종교는 이런 것들이 닥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공양하고, 뭘 갖다 바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닥치면 자신이 믿던 신을 저주하든지,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해서 더 갖다 바칩니다. 우리는 이런 시련을 통해서 더욱 믿음이 성장하고, 의의 평강한 열매를 갖게 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26). 큰 믿음의 소유자였던 백부장과 믿음이 적은 제자들의 생생한 차이를 보십시오.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믿음이 적은 믿음입니다. 바다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배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폭풍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비와 이슬, 서리와 안개, 우박과 눈, 폭풍과 번개를 명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풍우제를 지내고, 기우제를 지내고, 기청제를 지내고,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은 그런 우상들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인생의 항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03:23-31, [배로 바다에 나가는 자들과 큰 물에서 사업을 하는 자들은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깊음 속에 있는 그분의 이적들을 보나니 이는 그분께서 명령하시매 폭풍이 일어나 파도들을 높이 일으키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깊음들로 내려가나니 고난으로 인하여 그들의 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고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며 좋은 수가 없어 어찌할 바 모르는도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사 폭풍을 고요하게 하시므로 그 파도들이 잔잔하게 되는도다. 파도들이 조용하게 되어 그들이 즐거워하나니 이처럼 그분께서 그들이 원하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시는도다. 사람들아, [주]의 선하심과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할지로다!](시103:23-31). 28-34절은 사탄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28절에는 무덤 사이에 마귀들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의 영혼과 몸은 완전히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29절, [그런데, 보라,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되기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나이까? 하더니](29). 마귀들린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본다는 점입니다. 마귀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마귀들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알아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6:17에서 점치는 영에 사로잡힌 여자가 바울과 그 일행을 향해, [그 소녀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 하며](행16:17) 정확히 알아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Mark 5:1; Luke 8:26 참조.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마귀는 영이며, 사람들이나 짐승들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들린 사람의 최후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 안에 있는 마귀들을 몰아 내셨습니다. 마귀들은 주님께 ‘때가 되기 전’이라고 했는데 이는 심판의 때가 되기 전이란 말입니다. 30절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돼지는 율법에 금지된 가축입니다. 이스라엘은 양 떼를 키우는 민족이지 돼지 떼를 키우는 민족이 아닙니다. 이것을 키워서 파는 것은 율법을 범하게 하는 범법행위로서 이는 대마초를 재배해서 공급하는 것과 같은 악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들이 그리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하셨습니다. 무려 이천 마리의 돼지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막5:13). 이는 그 지역의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의 큰 재앙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그 도시에 전해지자 온 주민들이 주님께 나아와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34). 그들은 돼지 떼를 자신들의 혼이 구원받는 것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마귀를 물리치신 주님의 능력과 신성에 무릎꿇고, 영접하는 대신 주님을 떠나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주님과 돼지가 영혼보다 중요한 도시의 주민들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주민들과 같은 마음을 지닌 세대가 오늘날 자본주의에 살고있는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돼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돼지들이 죽은 것은 마귀의 역사이지 주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빌어먹을 마귀놈들!!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돼지 떼가 거기 있는 한 언제라도 제 2, 제3의 마귀 들린 사람들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돈을 사랑하고, 영혼을 업신여기고, 주님을 배척하는 이 세대를 심판해 주시길 빕니다. 여기서 잠깐 성경적 마귀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게습니다. 1. 마귀는 영적이며, 종교적입니다. 마귀는 그 당시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고, 심지어 경배했으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마귀들린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적인가?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마귀는 물이 있는 곳, 뜨겁고 습지인 곳을 좋아합니다(마17:15, 막5:13). 이는 해변 도시들에 왜 그렇게도 우상 숭배와 이단 종교들이 들끓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예입니다. 3. 마귀는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막5:5, 사14:12-14). 4. 마귀는 죽은 시체들을 좋아합니다. 이는 그가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막5:5.13). 5. 마귀 들린 사람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막5:4). 6. 마귀 들린 사람은 자학하거나, 변태 성욕에 빠집니다(막5:5, 왕상18:28). 그리고 노출을 좋아합니다(눅8:27-28). 갈수록 노출 증세가 심한 현 세대는 그만큼 마귀들린 사람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7. 마귀들린 사람은 정신 분열증적 증세를 나타냅니다(막5:9).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서 주님이 왜 폭풍우를 거쳐가면서 이곳에 온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마귀들린 이 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마귀의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주님께 ‘돼지들에게 들어 갈 수 있기를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들을 통해 죄악된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을 징계하고, 경고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버리고, 돼지를 키우는 이 도시에 주님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주민들은 주님께 ‘자기들의 도시에서 떠나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드릴 수 있는 최악의 기도입니다. 고침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도시에 남아 주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전하도록 남겨 두셨습니다. 마가복음 5:18-19,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지들에게 고하라, 하시니](막5:18-19). 주님은 자신이 구원하신 성도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성도들을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도시의 주민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미워했지만, 주님은 그 도시의 주민들에게 말씀을 증거할 증인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증인들을 남겨 두셔서 계속해서 말씀의 사역을 하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이 땅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1:23-24,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니라.](빌1: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