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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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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4)
lhyunsik

마태복음(4) 2005-05-23 06:09:09, 조회 : 7, 추천 : 0 말씀: 마6:1-7:29 요절: 마 6:33 산상수훈의 6장과 7장은 실제 생활 가운데 주님의 의(義)를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의 생활과 집에서의 생활과 직장에서의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주님은 위선자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위선자란 헬라어 의미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6:1-18절은 성도의 바른 예배관, 6:19-34절은 신자들의 경제관, 물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7:1-12절은 성도들의 행실에 관한 말씀입니다. 순서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주님은 먼저 왕국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하기 위해 올바른 예배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 왕국의 백성들에 속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들입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1-4절은 구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제의 원칙은 첫째, 은밀하게입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거나,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위선자(僞善者)들의 소행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의 결과보다 동기에 더 초점을 맞추시고 계십니다. 숨은 동기와 목적이 자기 영광이라면 이미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에 모르게 은밀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4). 하늘 왕국 백성들은 이 땅에서 유업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드러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구제의 원칙은 둘째 ‘사랑으로’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성도들에게 한 단계 더 나아가 은밀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행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성도들의 모든 행동은 외적으로는 은밀해야 하고, 내적으로 사랑이 동기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의 헌금 액수를 공개하거나, 그들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을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행5:1-11).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은밀히 해야 할 일을 공개적으로 했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영광을 구했고, 마지막에는 교회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상대로 한 그들의 행위는 성령을 속이는 일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란 정죄를 받았습니다. 은밀하게, 사랑으로 하는 일에 넘치는 주님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5-15절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의 원칙 역시 첫째, ‘은밀하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쓸모없는 것입니다(5-6). 물론 우리는 대표기도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 기도 생활이 없이 없다면 그것 역시 의미없는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친교 시간입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6). 물론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나, 어느 때나(딤전2:8)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둘째, 헛된 반복을 하지 말 것입니다(7-8). 기도는 의미있는 대화이지 주문(呪文)이 아닙니다. 셋째, 마음 가운데 형제들을 용서할 것(6:14-15)입니다. 9-13절은 흔히 말하는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기도문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manner)으로 기도하라...](6:9)고 말씀하셨지, 이것을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기도는 정확하게 말하면 왕국의 백성들이 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이 땅에 하늘 왕국을 세워 주실 것을 구하는 내용입니다(9-10). 11절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이 구할 수 있는 기도이겠지만 12,14-15절 말씀은 그대로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용서를 받았고,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써 깨끗하게 됩니다. 결코 형제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수하시기 전에 지상의 유대인들은 형제의 빚진 것을 용서해 줌으로써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의 범법을 용서할 때 하나님 아버지 역시 그들의 범범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구약 아래에서, 이들은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도들의 모든 죄를 일정한 조건 하에서 용서하셨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출34:7). 13절 말씀은 앞으로 대환란 때에 문자 그대로 행해질 유대인들의 기도입니다. 현재 성도들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약4:7, 벧전5:9)1),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 까지 대항하라”(히12:4)고 합니다. 16-18절은 금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금식은 몸의 징계가 아니라 혼의 징계여야 하며, 몸이 아닌 마음을 낮추는 것이어야 합니다. 금식은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흔히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종교적 행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주님은 모든 설교에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하도록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을 향해서 하는 것은 종교요 인본주의입니다. 그것이 자선이든, 구제이든, 기도이든, 금식이든 무엇이든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금식의 예를 몇 구절 살펴 보겠습니다. · 금식은 기도와 동반될 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 없이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나가느니라.](막9:29). · 고넬료는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시간까지 금식하고 아홉시에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보라, 한 남자가 빛나는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행10:30). ·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 기도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그들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기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맡기고](행14:23). · 바울 사도는 사역을 하는 동안 여러 번 금식했습니다(고후11:23). 그러나 생활과 동반되지 않는 금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은 생활이 없이 단지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으로 하는 금식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스가랴 7:4-7, 이사야 58:3-7절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스가랴 7:4-7, [이에 만군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땅의 모든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가 그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곡하였거니와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 자신을 위하여 먹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마신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그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슥7:4-7). 주님은 금식보다 말씀들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금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 58:3-7,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도다.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가 쾌락을 구하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하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함은 다툼과 논쟁을 위함이요, 사악한 주먹으로 치기 위함이니 너희가 이 날에 하는 것같이 너희 목소리를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면 금식하지 말지니라. 이러한 금식이 내가 택한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겠느냐? 너는 /과연/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른 금식과 기도 생활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마음을 낮추고, 혼은 징계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금식이 되도록 합시다. 19-24절 말씀은 성도들의 경제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어떻게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행한 사랑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히6:10). 그것은 심판석에서 분명히 상급으로 돌아옵니다. 둘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입니다. 믿음은 보상이 주어집니다(히11:6). 셋째, 구령함으로써입니다. 혼을 이겨오는 것은 가장 위대한 행위입니다. 넷째, 주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함으로써입니다. 고린도전서 3:12에 ‘금, 은, 보석’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저 하늘에 쌓아 두었다면 우리의 보화가 있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을 것입니다(6:21). 재물은 문제가 아닙니다. 재물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딤전 6:10). 돈을 탐내면 잘못하게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돈을 사랑하면 절대로 영적 성장이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재물에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25-34절은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몸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공중의 날짐승들, 들의 백합과 같은 들풀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입었는지를 통해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짐승들과 식물들을 다 먹이시고 입히신다면 그분의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2,33). 성도는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기 위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애쓰는 대신 생명의 빵과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7장입니다. 1-5절은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1-3절은 전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판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또한 어찌하여 너희에 관하여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2:57). 성경은 우리가 판단할 잣대요, 법전이며, 최종권위입니다. 우리는 판단할 때 겉모양으로 하지 말고 성경으로 해야 합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요7:24).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성경을 펴서 세상 일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은즉 참으로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14:4). 그렇다면 지금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와 동일한 영적 지식, 동일한 교리적 일치점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았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와 같은 사소한 교리 문제를 트집잡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사물, 일, 어떤 것을 성경으로 판단하되 같은 형제들, 그리스도인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6절에는 개와 돼지가 나옵니다. 성경은 동물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부류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합니다. 기도하는 일꾼들을 독수리로 비유합니다. 사역자들을 일하는 소에 비유합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개는 믿지 않는 남자들, 돼지는 믿지 않는 여자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참된 잠언(箴言)의 /말씀/과 같이, ,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여기서 개는 남성 대명사 his로 받았고, 돼지는 여성 대명사 her로 받았습니다. 이는 개와 돼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 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함이라.](7:6). ‘거룩한 것’은 성전에 관련된 물건들, 하나님 앞에 봉헌된 것들, 구별된 것들입니다. 진주는 신구약 모두 성도들을 가리킵니다(잠31:10, 11:22, 말3:17, 출28:11, 계21:12). 이 말은 절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죄인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작은 책자들을 주고, 설교 테잎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고, 믿음의 식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구원받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부주의하게 교리집이나 주석서, 찬양집, 성경을 나누어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한 것들을 그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방송국이나 학교, 사회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7-12절은 기도에 대한 위대한 약속입니다. 7-8절은 반복과 점층법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임이니라.](7-8). 성도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얻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하는 것’입니다. 악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은 악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때로는 불필요한 것들을 주기도 하고, 주지 말아야 할 것들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기도하는 것,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정확히 아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11). 여기서 좋은 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12절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니라.](12). 율법과 대언자는 침례인 요한까지입니다(마11:13, 눅16:16). 고로 이 말씀은 구약적 상황에서 율법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도들의 행동 기준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행하라’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얻어 마시고 싶다고 술을 사주는 것은 성도의 생활 윤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을 도와주면서 당신도 언젠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신약 성도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이 내게 어떻게 해 주는 가에 대한 기대나 대가를 접어버리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은 정확히 나누어서 적용해야 합니다. 13-29절은 우리가 참된 성도인지 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세 가지 시험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부인의 시험입니다(13-14). 둘째, 열매의 시험입니다(15-23). 셋째, 순종의 시험입니다(24-29). 13,14절을 보십시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 꼭 어려운 길은 아닙니다. 양의 문이시며,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길이 된 것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문이요, 하나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아무 길로 가도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무엇을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한 길뿐입니다. 15절에서 주님은 거짓 대언자들의 정체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 사도행전 20:29, [이는 내가 알거니와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임이요,](행20:29). 이들은 열매를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2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23). 둘째, 우리 입술의 열매입니다(히13:15). 셋째, 거룩한 삶의 열매입니다(롬6:22). 넷째, 선행의 열매입니다(골1:10). 다섯째, 구령의 열매입니다(롬1:13). 거짓 교사들과 거짓 대언자들, 경건한 종교인들은 각종 기독교 행사와 인간 관계에서 좋은 본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겠지만 결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모조품이 너무나 진짜같아서 속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말투, 멋진 기도, 적극적인 교회 활동 등으로 인해 감쪽같이 속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경이란 잣대로 좋은 열매인지 썩은 열매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면 그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약화시키거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언행을 한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사람을 높이면 그는 분명히 거짓 열매입니다. 회개와 자백을 멀리하면 그는 거짓 열매입니다. 동정녀 탄생, 피의 속죄, 문자적 부활, 휴거, 승천, 재림과 같은 원색적인 성경 진리들을 피하고 꺼리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 교사들입니다. 지옥과 저주, 심판에 대해 멀리하고, 부인하거나 설교하려 하지 않는 교사, 목사들도 거짓입니다. 대신 이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 더 나은 인간적 관계, 교회 일치 운동, 교회의 사회 참여, 교회의 문호 개방, 진리를 배제한 사랑의 강조 등을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완전한 성경은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거짓 교사들입니다.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자들, 말씀에 대한 믿음보다 찬양과 경배, 교회 프로그램을 동일시하거나 더 중요시하는 모든 자들은 다 그 열매가 썩은 자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21-23절은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 거짓 신자들이 이적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고, 마귀들을 내 쫓고,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경에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야만 방언을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마귀의 영을 받아도 얼마든지 방언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캐톨릭, 은사주의, 오순절을 비롯한 모든 이단 종파들에서 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 회교, 라마교, 힌두교도들도 방언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대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살후2장 참조). 이런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마치 성령을 받아서, 주의 일을 하는 것처럼 설칠 때, 많은 사람들이 속습니다. 당사자 자신도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23). 마귀는 오늘날 교회 내에 수많은 자신들의 일꾼들을 세워 놓고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24-29절은 순종의 시험입니다.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의 차이를 보십시오. 동일한 재료, 동일한 설계도, 동일한 집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지은 집이야 말로 좋은 집이요, 시험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세상은 아무도 이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도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들입니다(약1:22-25). 성도들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축을 합니다(고전3:1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이는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0-1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남은 유대인들은 지혜로운 건축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모두 어리석은 건축자들입니다. 교인들이라고 다 같은 교인이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을 최종 권위로,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으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말씀으로 받는 성도와 성경을 단지 기독교 경전으로 믿거나 영적이고 교훈적이기는 하나 완전하지는 않다고 믿는 사람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주님은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28절에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기록은 11:1, 13:53, 19:1, 26:1에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WORD)이신 하나님께서 말씀(words)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처럼 남의 말, 남의 생각, 남의 견해를 옮기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추측과 생각, 짐작의 설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음이더라.](눅4:32). ---------------------------------------- 1)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