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72 전체: 178,866 )
잠언 9-11장
lhyunsik

잠언(3) 2005-07-04 07:16:16, 조회 : 3, 추천 : 0 말씀: 잠언 9-11장 요절: 잠언 10:31 잠언 9장입니다. 1-12절은 지혜가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13-18절은 어리석음이 지혜처럼 의인화되어 역시 초청합니다. 지혜는 집을 세웁니다. 지혜는 반석 위에(마7:24), 확실한 기초 위에(고전3:11) 집을 세우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집은 종교나 철학, 세상 재료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이 집의 기둥은 일곱 기둥입니다(1). 일곱은 성경에서 언제나 완전을 나타내는 수이며, 하나님의 수(數)입니다. 성령께서는 일곱 가지 영으로 표현되며(사11:2,3), 계시록에는 일곱 영이라고 일컫습니다. 솔로몬은 두 개의 기둥을 세웠지만 주님은 일곱 기둥을 세우셨습니다. 지혜는 단순한 자를 불러 명철하게 하고(4), 부족한 자를 불러 배부르게 합니다(5). 지혜는 지혜로운 자를 꾸짖고, 훈계를 주며, 의로운 자를 가르칩니다(7-8).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들었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9절은 우리의 배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재능이나 교양, 집안 환경, IQ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와 의로움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주를 두려 하고, 혼을 이겨오고, 악을 피하는 자들이 진정한 지혜로운 자요, 이런 자들은 계속적으로 배움을 더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의를 덧입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배움을 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 3:7). 1-10절까지 종합하면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시작하라(10). 둘째, 지혜가 값없이 부르는 초청, 거저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라. 셋째, 배움을 더하기 위해서 구령을 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라(9). 넷째, 거룩한 것들을 아는데 힘쓰라(10). 다섯째, 하나님의 지혜로 훈계를 받으라. 오늘날 교육에 엄청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이런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배우면 배울 수록 진리와 멀어지고, 학문이 높은 사람일수록 고등 사기꾼을 양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의와 결부되지 않는 지식과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혜가 어찌 지혜라 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함이 없는 것은 명철이라 할 수 없습니다(10). Education without salvation is damnation(구원없는 교육은 저주이다)-Bob Jones Sr. 13절의 어리석은 여자는 잠언 19:14의 신중한 아내, 31장의 덕있는 여인, 지혜로운 여인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어리석은 여자의 인생 철학은 구원받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의 본성과 일치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도둑질 한 물이 달고 은밀히 먹는 빵이 맛이 있다, 하기 때문이로다](9:17). 옛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 본 사람들 가운데 ‘서리’라고 하여 이런 짜릿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남다른 감흥을 느낄 것입니다. 남의 과일밭에서 주인 몰래 따먹는 사과, 주인 몰래 훔친 참외나 수박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 채 그리워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엄마 몰래 훔쳐먹는 꿀단지의 꿀맛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맛에 이끌린 사람들의 종착역이 18절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녀의 객들이 지옥의 깊음들 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8). 때로 너무나 맛있고, 달콤하고, 화려하고, 매력있고, 인기를 끌고, 아름답다는 찬사 아래에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그런 지옥의 입구란 사실입니다. 이곳 미국은 학교에서 포르노 잡지를 보는 것은 법으로 규제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10장입니다. 10장부터 22장까지는 잠언의 제 2부에 해당합니다.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를 날카롭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즐겁게 합니다(1). 성도들은 혼을 이겨옴으로써(11:30), 주님과 함께 고난받음으로써 영광을 유업으로 받고(3:35), 주님의 계명을 받고(10:8), 조언을 듣고(12:15), 자기 혀를 붙들고(29:11), 지식을 찾고(18:15), 지식을 전파하고(18:15), 악을 떠남으로써(14:16)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히11:6).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립니다. 2-3절은 ‘사악한 보물, 사악한 자의 재산’의 결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악한 보물은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하나 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의로운 자의 혼이 주리는 것은 [주]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나 사악한 자의 재산은 내던지시느니라.](2-3). 사악한 보물은 악한 방식으로 획득된 재물, 수고 없이 얻은 재물을 다 포함합니다. 술, 담배, 춤, 영화, 도색 잡지, 인신 매매 등으로 이익을 올린 모든 재물은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안식년을 어기면서 벌은 모든 재산을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모조리 잃어 버렸습니다. 영국은 제국주의로 온 세계로부터 재산을 긁어모았지만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다 사라졌습니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재산을 탈취해갔지만 그들의 재산은 원폭 투하와 함께 다 날아갔습니다. 종업원들의 임금을 착취한 고용주들의 재산, 인권을 유린해가며 벌어들이는 재산, 미성년자나 불법 취업자들을 고용해서 임금을 착취하고 유린해서 모은 모든 재산은 주님께서 내 던지십니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으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것은 끝나고 맙니다. 4-5절은 부지런 한 자와 게으른 자의 대조입니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은 잠언 12:11,24; 13:11, 14:23은 이 구절을 자세히 주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의 속담이나 격언을 보아도 잠언의 진리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위대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6절은 복과 폭력의 대비입니다. 복은 의인의 머리 위에 임합니다. 폭력은 사악한 자의 입을 덮습니다. 이는 악인들의 머리나 입에 무엇을 덮었던 고대 관습에 기인한 말입니다. 7절은 의인과 사악한 자의 이름의 대조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어야 하는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의인을 기념(기억)하는 것은 복된 일이거니와 사악한 자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7). 우리는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넘쳐도 롯이란 이름은 거의 없습니다. 룻이란 이름은 많아도 오르바란 이름은 잘 없습니다. 바울이란 이름은 많아도 데마란 이름은 거의 없습니다. 주께서 시편 9:5절에, [주께서 이교도들을 책망하시고 사악한 자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무궁토록 없애셨나이다.]고 말씀하신 대로 사악한 자들의 이름은 생명 책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보다 좋은 이름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재물보다 훌륭한 이름을 택할 것이요, 금이나 은보다 사랑 많은 은총을 택할 것이니라.](잠22:1). 10절을 보십시오. [눈으로 눈짓하는 자는 슬픔을 끼치되 수다를 떠는 어리석은 자는 넘어지리로다.](10). 윙크하는 자(눈짓하는 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이는 윙크가 비밀스런 동의요, 비밀스러운 공모이며, 거짓말이며, 비밀스런 불륜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12절은 베드로전서 4:8에서 인용된 구절입니다.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거니와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12). 실로 우리 주님의 사랑은 모든 죄를 그 피로 덮었습니다. 성경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모든 허물과 죄를 갈보리의 십자가로 가져가 처리하는 사랑입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모든 사실을 보고,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감상적이거나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범죄자들, 죄인들이 구하는 사랑은 자신들의 범죄와 죄를 눈감아 주거나, 묻지 않고, 그냥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알지만 용서해 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모든 허물과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피를 덧입은 자로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받은 동일한 사랑을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내 안에는 그 피의 증거가 있고, 쉼없이 흐르는 피의 흐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살아 있는 동안 쉼없이 피가 흐르듯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영원히 십자가의 피가 그 속을 순환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동족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대신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던 스데반이나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기를 구했던 바울은 이 피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의 더러운 과거를 알게 되거나, 자신을 배신하거나,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함께 살 수 없게 되거나...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은 사랑했던 만큼 커다란 미움과 분노로 바뀝니다. 사실과 실체를 몰랐을 때는 사랑할 수 있었지만 알게 되었을 때는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사람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눈감은 채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용서한 후에 덮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범죄한 혼에 대해, 이웃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그런 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것, 구원의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야고보서 5:20,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할지니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죄인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 역시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말씀으로 비교해 볼 때 최상의 이웃 사랑은 바로 구령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이것은 바로 용서의 사랑입니다. 서로 훈계하고 바로 잡아 주는 일은 형제로서 해야 할 사랑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완전히 덮어 버리고, 감추어 버린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들을 반복해서 말하는 자는 사악한 자입니다. 잠언 17:9, [범죄를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이거니와 문제를 거듭 말하는 는 친한 벗들을 갈라놓는 자니라.] 18-21절은 입술에 관한 잠언입니다. [거짓말하는 입술로 미움을 감추는 자와 헐뜯는 말을 내는 자는 어리석은 자니라. 말이 많은 곳에는 죄가 부족하지 아니하거니와 자기 입술을 금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 의인의 혀는 최상의 은 같거니와 사악한 자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로운 자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먹이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가 부족하여 죽느니라.](18-21). 사악한 자의 혀는 자신을 숨기거나, 자신을 과장하거나, 남을 헐뜯는데 사용됩니다. 반면 의로운 자의 입술은 최상의 은 같고, 사람을 먹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음성은 말이 많음으로 알려집니다(전5:3). 교회에는 어디에나 참견하기 잘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마땅히 해서는 안되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딤전5:13). 우리는 20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의 혀는 최상의 은같거니와...”(20a). 은은 구속의 몸값입니다(슥11:13, 출21:3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십자가, 피, 부활에 대해서 전파하는 혀와 입술은 하면 할수록 저 하늘에 은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고전3:3-12). 이런 입술이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인 양식으로 풍성하게 먹입니다. 하늘의 양식, 하늘의 음료를 먹이는 의인들의 입술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22-32절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입니다. 22절은 현재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더해 주시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물질적인 복을 누렸습니다.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22). 23절은 말이 필요없는 구절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사악한 자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려니와 의로운 자에게는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느니라.](24). 사악한 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임합니다. 그 이후에는 더 무서운 지옥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원하는 것은 속히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의와 거룩함이 가득한 것입니다. 영원한 평화가 지속되고 병과 죽음이 없고, 악과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루어집니다. 완전한 지혜와 지각을 가지고 죄없이 살아갑니다. 시편 145:19, [그분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25절을 보십시오. [사악한 자는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는 것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아니하나 의로운 자는 영존하는 기초가 되느니라.](25). 이 구절은 실제적으로 재림에 관련된 구절입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마귀가 없습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연수는 짧아집니다(27). 주를 두려워 하면 장수합니다(27). 의로운 자의 소망은 즐거움이 됩니다(28). 의로운 자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30).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합니다(30). 의인은 영원히 거합니다(25). 사악한 자의 기대는 사라집니다(30). 11장입니다. 11-15절은 의인과 악인의 철저한 비교입니다. 이런 표현 기법을 병립(竝立)법, 또는 이원론(dualis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리를 부각하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 세상 교육이라면 성경은 이 둘의 극명한 대조와 대비를 더욱 드러나게 하는 기술 방법을 택합니다. 1절은 ‘거짓된 저울과 꼭 맞는 추’(1)입니다. 실제로 장사하면서 이런 거짓된 저울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대할 때, 상이(相異)한 기준으로 대하는 것 역시 주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매주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1년에 한 두 번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저울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교만과 겸손의 대조입니다. 3절은 곧바른 자들과 범죄자들, 4절은 재물과 의, 5절은 완전한 자와 사악한 자 6절은 곧바른 자와 범죄자, 8절은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9절은 위선자와 의인, 10절은 다시 의로운자와 사악한 자, 11절은 곧바른 자와 사악한 자, 12절은 지혜가 없는 자와 명철한 자, 13절은 소문을 퍼뜨리는 자와 신실한 영을 지닌 자, 14절은 지략이 없는 것과 지략이 있는 자(모사), 15절은 보증을 서는 자와 서지 않는 자의 대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16-31절 역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 주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16절은 ‘은혜로운 여자와 강한 남자’가 대비되어 있습니다. 은혜로운 여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잡고 있는 여자입니다. 은혜는 겸손과 더불어 오는 것이므로 겸손한 여자이며, 은혜는 덕을 끼치므로 덕있는 여자입니다. 이런 여자는 남편을 자기 머리로 두고 순종하는 여자이며 외적 치장보다 하나님의 영으로 자신의 내면을 치장하는 여자들입니다. [이는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였음이니](벧전3:5). 17절은 긍휼을 베푸는 자와 잔인한 자의 대조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얻을 것입니다.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임이요,](마5:7). 주님은 희생물보다 긍휼을 더 원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이는 내가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음이라, 하시니라.](마9:13). 바리새인들은 긍휼보다 희생물을 더 원했습니다. 그들은 긍휼보다 율법의 심판과 정죄를 더 일삼았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동일한 자세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은혜와 긍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판단과 저주는 ‘잔인한 자’의 행태입니다. 18절은 사악한 자와 의를 뿌리는 자의 대조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뿌리는가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뿌리는 것은 종류도 중요하고, 양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씨를 좋은 땅에 뿌리는 농부여야 할 뿐 아니라, 거두는 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in season and out of season) 풍성히 뿌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6, [오직 내가 말하려는 바는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후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후하게 거두리라 하는 것이라.](고후9:6). 우리는 복음의 씨를 다른 사람들에게 뿌리는 일에 열중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자신을 위해 뿌리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호세아 10:12,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씨를 뿌리지 않고 주님께 열매를 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수확을 거둘 수 없습니다. 야고보 3:18,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씨를 뿌려 /거두는/ 것이니라.](약3:18). 성경은 말합니다. [...의를 뿌리는 자에게는 확실한 보상이 있느니라](18). 19절은 의를 따르는 자와 악을 따르는 자의 결과입니다. 20절은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와 곧바른 자들의 대조입니다. 21절은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의 결과입니다. 22절은 외모가 아름답지만 분별이 없는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평입니다. 분별없는 아리따운 여자는 돼지 코의 금고리와 같은데, 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를 돼지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돼지 코의 금고리에 비유하고있습니다. 본문에서 돼지는 분별없음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타(star)라고 불리는 많은 여자들의 외모가 금고리처럼 빛나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이 캘린더의 술 광고나 부도덕한 성적 문란을 미화하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면 얼마나 분별이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3절은 의로운 자의 소원과 사악한 자의 소원의 결과에 대한 대조입니다. 이 둘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그들의 소원하는 것이 다르며, 그 결과 역시 천양지차입니다. 24-28절은 역설의 진리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재물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얻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란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 헌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얻은 재물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만 관심을 두지만 아무리 적은 재물이라도, 그것이 단돈 1달러에 못미치는 것이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믿고,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전도서 5:19, [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을 주사 그것을 먹고 자기의 소유를 취하며 자기의 수고한 것을 기뻐할 권능을 주셨나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로다.](전5:19). 이런 믿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도저히 헌금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행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재물보다 재물을 주시는 근원, 주시는 분을 보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명기 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그분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7). 우리는 부(副)하지 않다 할지라도 먹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만큼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대기상 29:12, [재물과 존귀가 다 주께로부터 나오며 또 주는 모든 것을 다스리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일단 주님이 주시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소득을 얻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겠습니다. 소득에는 의(義)가 있어야 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의가 없는 소득은 날개를 가지고 스스로 날아갈 것이며, 그런 소득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질식시키며, 믿음을 파선시킵니다.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주님이 번성케 하신대로 얻은 소득이어야 합니다(고전16:2). 이제는 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본문입니다(24-28). [흩을지라도 더욱 불어나는 일이 있으며 지나치게 아낄지라도 가난에 이르는 일이 있느니라. 후하게 주는 혼(魂)은 풍부하게 될 것이요,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게 되리라. 곡식을 움켜쥐는 자는 백성이 저주할 것이나 곡식을 파는 자의 머리에는 복이 있으리라. 부지런히 선을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해악을 구하는 자에게는 해악이 임하리라. 자기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넘어지려니와 의로운 자는 나뭇가지와 같아서 번성하리라.](24-28). 첫째, 재물을 흩어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난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더욱 부자가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24-225). 졸부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지만 쓸 줄을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여시 세상의 영에 지배를 받고 있는지라, 헌금이나 자선을 베푸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24-25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확고한 경제관이 되어야 합니다. 쌓아둔 재물을 자신의 일신만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했던 부자를 주님은 그날 바로 데려가 버리셨습니다(눅12:16-19).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줄 때 주님은 보상하십니다. 시편 112:9절,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고 그의 뿔이 영화로이 높임을 받으리로다.](시112:9).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잠9:17). 둘째, 재물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28). 이는 재물이 아니라 재물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것이며, 재물을 주신 분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해야 함을 말합니다. [자기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넘어지려니와 의로운 자는 나뭇가지와 같아서 번성하리라.](28). 의로운 자는 나무 가지 같은데, 이는 세 가지 적용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지이십니다(렘23:5, 슥3:8, 6:12,13, 사4: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요15:1-6). 의로운 구약 성도는 번성하는 가지입니다(창49:22). 그렇다면 이 가지를 통해 열매가 맺힐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 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30). 결국 재물을 흩어 뿌리는 일은 의로운 자들이 생명의 열매를 얻기 위해 사용될 때 가장 바르게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혼들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얻는데는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by any means)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9:22). 이 시대는 자본(資本)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재화를 더 귀한 가치를 창출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