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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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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10장
lhyunsik

에스라 2005-06-20 06:20:09, 조회 : 5, 추천 : 0 말씀: 에스라 1-10장 요절: 에스라 7:10 에스라는 유대 포로기에 바빌론에서 태어나 바빌론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평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친 진정한 성경 학도였습니다. 역대기를 통해 유다의 전(全)왕조를 모두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한 왕들은 하나같이 국운의 융성과 강성함을 맛 보았습니다. 대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가증한 왕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가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히 기울어진 유다는 마침내 이방 땅에서 70년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 포로기 동안에 활동했던 대언자가 다니엘과 에스겔입니다. 에스라는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유대로 돌아 온 대언자입니다. 느헤미야, 스가랴, 학개, 말라기 등도 모두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주도하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친 위대한 대언자들입니다. 더 이상 유다에 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본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권이었는데 후대에 나누어졌습니다. 에스라의 저자는 서기관 에스라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7:6,10). 구약 성경은 유대 중심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방 역사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기록된 것은 유대 민족과 연관된 민족들만 기술했을 뿐입니다. 세속 역사를 잠깐 살펴 보면 605- 536B.C. 까지는 포로기 70년입니다. 주전 605,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니엘, 에스겔은 모두 바빌론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대언자들입니다. 538 B.C.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의 귀환 칙령을 내립니다(1:1). 536 B.C. 일차 귀환이 이루어지는데 돌아온 수가 49,897명이었습니다(2:64,65). 그해 돌아와 각 도시에 흩어져 있다가 7월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어 희생제를 드렸습니다(3:2,3). 535 B.C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 원수들의 방해로 중단되었습니다. 520 B.C.에 성전 건축이 재개되었습니다. 이 때 성전 건축을 주도한 사람이 학개와 스가랴 대언자입니다. 515 B.C에 성전 건축이 완료되었습니다. B.C 458년에 에스라가 귀환했습니다. 445B.C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았습니다. 당시의 세계 상황을 보면 인도에서는 불교가 일어났습니다(주전557-447). 중국에서는 유교가 일어났습니다(551-478B.C 공자). 에스라가 귀환할 즈음에 그리이스에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논하고 있었습니다(470-399B.C). 역사가 헤로도투스(485-425 B.C) 역시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입니다. 70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은 유대인들에게 최악의 시기였지만 하나님은 그 기간을 통해 세계 선교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바빌론은 3개 대륙으로 이어지는 요충지며, 모든 문화를 전 세계로 파급시키는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70년간의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을 함으로써 헤브라이즘이라고 일컫는 유대의 문화, 정신, 특히 구약 성경의 지혜가 중국, 인도, 그리이스 등으로 골고루 전파되어 이들이 귀환할 즈음에는 불교, 유교, 그리이스 철학이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솔로몬의 잠언은 동방으로 이동하여 중국에 정착되어 유교의 원류를 이루었고, 솔로몬의 전도서는 인도로 들어가 불교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훗날 동방에서 현자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메시야를 만나러 오는 장면은 구약 성경이 이방 세계에 널리 퍼졌다는 증거입니다. 바빌론의 낯선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주님은 계속해서 대언자들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70년 내내 믿음을 지키고, 대를 걸쳐 왕궁의 총리를 역임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에스겔 역시 백성들 가운데서 먼 훗날 이스라엘의 회복과 천년 왕국의 소망을 전하는 설교를 했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걸출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서기관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7:1-6).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8:21-23).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노심초사했습니다(9:3-4). 에스라라는 이름은 “도움”(help)이란 뜻입니다. 그는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군대의 보호를 받지 않고 기꺼이 단독으로 여행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말로 하면 평신도입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도 아니었고 특별한 소명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의 백성, 주의 성읍에 대한 소식으로 인한 피끓는 마음으로 인해 위대한 사명을 이룬 사람입니다. 스룹바벨(1:8,11; 5:16, 2:3, 3:8) 역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데 그의 공식 직함은 ‘다르시다’(2:63-통치자)였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여수아(학1:1,12,14 슥3:1-10, 에스라3:2)였습니다. 대언자로는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했습니다. 에스라는 처음 유대인의 귀환 때 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 유대인의 귀환은 스룹바벨과 여수아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빌론에 있다가 느헤미야와 함께 활동합니다(느8:9,12:26). 에스라의 전체 개요를 살펴보면 1-6장까지는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첫 번째 귀환한 유대인들의 역사적 기술이며, 7-10장까지는 에스라의 지도하에 영적 각성과 개혁이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며,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입니다. 1:1,2절은 역대기하 36:22-23절과 같습니다. 이는 역대기의 저자가 에스라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house of God(하나님의 집)이란 표현이 에스라에는 총 24회(1:4,2:6,8. 3:8,9 4:24, 5:2, 5:13...)나 등장하는데 역대기에는 35번이나 등장합니다. 역대기와 에스라는 공히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이 점 역시 동일 저자를 뒷받침합니다. 역대기와 에스라에는 레위 지파와 성전 건축의 조력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이 점 역시 역대기와 에스라가 같은 저자일 것이라고 믿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에스라는 역대기의 끝 부분을 에스라의 첫 부분으로 다시 잡아서 기술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고레스는 왕이 되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4절은 고레스의 칙령입니다. [이제 페르시아 왕 고레스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靈)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에 선포도 하고 또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을 내게 주시고 또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그분의 백성인 자가 누구냐?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니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그 남은 자가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금과 은과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자원 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였더라.](1-4). 이 구절은 성경의 예언의 정확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칠십년이 차면 백성들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0, [¶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빌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고 너희를 향한 나의 선한 말을 이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렘29:10). 그래서,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말씀의 종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9:2,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여러 책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달았나니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은 미리 자신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한 나라가 일어서고 망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이 천하대업을 이룬 사실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란 사실을 알았습니다(2). 그는 분명히 다니엘을 통해 이런 영적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단1:21). 대언자 이사야는 그가 태어나기 170년 전에 이미 고레스의 본명을 들어 그가 해야 할 일을 미리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사야 44:28-45:1,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 [주]께서 자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은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이는 잠언 21:1의 말씀 대로입니다. [왕의 마음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이 마치 강물과 같으니 그분께서 친히 원하시는 곳으로 그것을 돌리시느니라.](잠21:1).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면 정치 상황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에 저는 대학을 다닐 때 동료들과 함께 10년 이내에 소련이 무너지고, 개방이 되도록 기도한 적이 있는데 당시 국제 정세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지 10년이 훨씬 덜 되어 소련은 어느날 무너지고 선교사들이 대거 몰려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소련을 붕괴한 것은 바로 소련을 개척하려는 신실한 크리스챤들의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노예 해방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반국가 투쟁이나 무장 활동을 전개한 것도 아니며, 고레스의 천하 정복에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바빌론에 원폭이 투하되어 항복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군주요, 위대한 왕 중의 하나인 고레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파라오가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과 달리 고레스는 완전히 주께로 마음이 향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원 헌물을 드려 성전 건축의 자금을 충당했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귀환하지 않고 여전히 바빌론에 그냥 정착하여 살았지만 주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은 일어나서 황폐화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약속의 땅에 먹을 것이 없고, 황폐하다 해도 우리는 일어나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그곳이 먹고 입을 것이 있는 바빌론보다 낫습니다. 8,11절에 나오는 ‘세스바살’이란 인물은 스룹바벨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전에 느부갓네살에게 빼앗겼던 주의 전에 있던 보물들을 다시 다 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시험을 겪었던 욥에게 처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주셨듯이,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값진 체험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장은 돌아온 유대 자손들의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느헤미야 7:6-73에 한번 더 나옵니다. 1-2절은 지도자들입니다. 63절에 ‘디르사다’는 정부 공무원의 공직 명칭인데, 이 때 ‘디르사다’는 바로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만이 나오기 때문에 흔히 잃어버린 지파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북왕국 지파를 잃어버린 지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문안 편지를 썼습니다(약1:1). 사도 바울 역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행26:7)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주님도 온 이스라엘을 도셨지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돌아다니시지 않으셨습니다. 에스라 6:17에는 이스라엘의 지파대로 열두 마리의 숫염소로 희생제를 드렸습니다(8:35참조). 예수님은 언젠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것입니다(눅22:20).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지파 이야기는 성경적인 사실이 아니라 허구에 불과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정착해서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선진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갔습니다. 거기서 대학을 만들고 탈무드도 편찬했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물질에 매여 버렸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주님께서 땅 끝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실 때도 이런 일은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박해나 위협이 가해진다면 다 모여 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출애굽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수는 너무나 적습니다. 5만명 남짓이 전부였습니다. 의(義)로 인해 번창해야 할 나라가 죄로 인해 한없이 낮아지고 초라해진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는 어느 국가나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가리지 않고 형편없이 망가뜨립니다. 3장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번제 헌물을 드렸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두려움 가운데 아침, 저녁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며, 장막절도 지켰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단번에 성전을 건축할 수는 없었지만 제단을 쌓을 수는 있었습니다. 주위의 위협과 공포는 이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에게 적이 많다면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더욱더 친구되시고, 도움되시는 주님과 선한 교제를 지속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과 외적 두려움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무릎을 꿇도록 유도합니다. 백성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원해서 헌물을 드렸습니다. 사실 갓 돌아온 이들에게 성전 건축이란 대 공역은 엄청난 부담이며, 벅찬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성전 건축 준비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하도록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지체없이 헌신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들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드디어 주의 집의 기초가 놓였습니다(11).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 함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지만 눈물은 사뭇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전에 솔로몬의 성전을 보지 못했던 젊은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이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을 본 적이 있던 늙은 사람들은 그 때와 비교해 너무나 초라한 지금의 성전 기초를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전에 솔로몬의 성전은 주님을 믿고 순종했던 때 주신 주님의 축복과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죄가 가져온 고통스런 기억과 비참한 현실로 인해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3). 4장입니다.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습니다. 적들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1-10). 이 작업을 방해한 사람들은 앗시리아 왕이 사마리아에 이주시킨 사람들로 이교도들이었습니다(2). 사람들은 흔히 연합, 하나되는 것이 선이요, 하나님의 뜻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는 언제나 분리가 주의 뜻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생한 것은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들 때문이었습니다(출12:38, 민11:4). 이들은 언제나 불신과 불순종을 부채질하고 선동했습니다. 여긷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니면서 유대인 흉내를 내며 성전 건축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습니다(2).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3). 그러자 그들은 건축일을 방해하였고 괴롭게 했습니다(4,5).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이십니다. 성전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십니다. 반면 마귀는 파괴자입니다. 원수들은 먼저 타협을 제안했습니다(1-3). 이들은 이교도들로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 신들도 섬기는 신앙의 타협자들이었습니다(왕하17). 당시 사마리아에는 각국에서 앗시리아의 혼혈 정책으로 각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였습니다. 열왕기사 17:29-34을 참조하십시오. 결국 이들은 그림신산에 자기들의 신전을 세우고 유대인들과 분리되었습니다. 이들은 약 15년 동안 극심하게 성전 건축을 방해하여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이 통치할 때까지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스룹바벨과 지도자들을 배워야 합니다. 힘들 때면 어김없이 찾아 오는 것이 자기 합리화를 바탕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고후6:14-15). 성전 건축과 같은 하나님의 일에 당장 일손이 부족하고,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교도들과 손을 잡아 버리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신실함으로 시작한 일을 외부의 도움없이 주의 도움으로 완수했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집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것을 끝마칠 것이요, 만군의 [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슥4:8). 눈에 보이는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뢰하고 그분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 성전 건축의 영광스런 직분을 완전히 수행해 낼 뿐 아니라 천년 왕국의 성전 건축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학개 2:23,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를 인장(印章)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6절의 아하수에로는 파라오처럼 왕의 타이틀입니다. 실제로 왕 이름은 캠비시즈(530-522 B.C)였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캠비시스 왕이나 그 뒤를 이은 스메르디스(Smerdis, 522-520 B.C) 왕의 다른 이름입니다. 원수들은 왕에게 고소를 했고, 왕은 이들의 고소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때 찾아오는 원수들의 대적과 핍박, 방해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리고, 환경이 잘 조성되는 것이라고 믿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말고, 감각을 단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악을 구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히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흔히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이 하나님의 뜻이다’, ‘환경의 조성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을 때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의 감정과 느낌이 어떻게 들어오든 굴하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5장입니다. 성전 건축이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대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건축을 촉구했습니다(5:1). 그리고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앞장 서 중단된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이 승리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원수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일을 하고, 한 편으로는 왕에게 상소하여 꾸준히 일을 추진했습니다. 학개서에 보면 학개는 하나님으로부터 4번에 걸쳐 말씀을 받았습니다(1:1,3; 2:1, 2:10, 2:20). 첫 번째 받은 말씀은 성전 건축을 중단한 채 그것이 주의 때가 임하지 않았다며 변명하며 각자 자기 일에만 열심인 유대인들을 향한 엄중한 책망의 말씀입니다(학1:1-15). 두 번째 받은 말씀은 위로와 확신의 말씀입니다(5). 주님은 솔로몬의 성전, 지금 건축하는 성전, 앞으로 지어질 성전을 비교해 주셨습니다. 학개는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과 앞으로 다가올 천년 왕국의 성전을 비교했습니다. 학개 2:3,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로서 이 집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그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2:3). 그러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후에 더 영광스러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실 것입니다. 학개2:9, [나중에 지은 이 집의 영광이 이전에 있던 집의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2:9). 세 번째 받은 말씀은 부정함으로부터 깨긋하게 하면 복을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서부터 부정함이 들어왔는지, 언제부터 그러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제거하여 정결하게 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네 번째 받은 말씀은 메시야 왕국의 영광스런 통치에 대한 예언입니다. 학개의 이런 메시지는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들의 힘을 돋우어 주어 어려움 가운데서도 넉넉히 성전 건축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6장입니다. 다리오 왕은 이전에 고레스 왕이 성전 건축에 대한 칙령을 내린 조서를 발견하고(2-5), 자신이 다시 좀 더 보강하여 칙령을 내렸습니다(6-12). 다리오 왕은 다시 성전 건축에 따른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도록 했고, 자신과 왕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도록 했습니다. 그의 명령은 얼마나 엄하였던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15절에서 성전 건축을 완료했는데 이 성전은 이전 성전보다는 못했지만 유대인들은 다시 성전을 가졌습니다.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고, 자기들을 정결케 하며, 이교도들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했습니다. 이레동안 무교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섭리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장애물이 제거되고, 도움의 손길을 얻게 됩니다(다리오의 도움과 앗시리아의 마음을 돌이킴-22). 셋째, 성전 건축은 현재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몸된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돌들로서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고 있습니다(벧전2:5).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넷째, 반대자들의 방해와 반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뿐입니다(시76:10). [참으로 사람의 진노가 주를 찬양할 것이요, 그 진노의 남은 부분은 주께서 억제하시리이다.](시76:10). 요셉의 형제들의 분노와 시기는 요셉을 총리요, 구원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압 왕이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으나 그의 입술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위대한 예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민22:1-6,24:17).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장대를 세웠으나 자기가 메달려 죽었습니다(에스더7:10).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그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로마 황제는 요한을 밧모 섬에 유배했으나 거기서 요한계시록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원수들의 방해와 핍박을 그대로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듯하지만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적하시는 일들을 수행하시고, 승리를 쟁취하십니다. 7장입니다. 6장과 7장의 사이는 약 58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때에 바빌론에서는 그 유명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한 민족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7:1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은 465-425 B.C에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왕입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자손이었습니다(7:5). 아닥사스다 재위 7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다님 사람들 중 몇을 데리고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7:7). 그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했습니다(6).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개월 정도의 거리입니다(9). 왕은 에스라에게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모든 경비를 제공했습니다. 21절은 파격적인 명령입니다.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왕의 보고에서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관계된 사람들에게는 면세 혜택을 부여했습니다(24). 에스라의 주 임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25).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들을 행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 강 건너에 있는 온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너희가 가르치라.](25). 그리고, 사법권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법과 왕의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처벌할 권한을 주었습니다(26). 이 모든 것은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26-7). 8장입니다. 8:1-14절은 에스라와 함께 올라온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중에 레위인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레위인들은 자발적으로 에스라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았습니다(15). 에스라는 레위 사람들을 설득하여 데려 왔습니다(18,19). 마땅히 주를 위해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뒤로 빠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21-23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기도입니다. [¶ 이때에 내가 아하바 강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여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과 모든 소유를 위해 바른 길 주실 것을 그분께 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그분을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되 그분의 권능과 진노는 그분을 버리는 모든 자를 향하나이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원수를 막고 우리를 도와 줄 병사와 기병 무리를 왕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부끄러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청하였더니 그분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받으셨느니라.](21-23).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왕에게 병사와 기병 무리를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약간의 도움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넙죽 넙죽 손을 벌리려는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세상에 빚을 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이 호의처럼 보여도 후에는 다 값이 매겨저 있습니다. 금과 은과 많은 보물들을 옮기는 일에 군사들의 호위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에스라는 군대의 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31절에 보면 이들을 노리는 매복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와 같이 모든 면에서 사람보다 주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옮길 물질이 없지만 영적 보화들을 잘 지키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8:29, "Watch ye, and Keep them!" 9장입니다.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 유대의 사람들은 엉망이었습니다(1-4). 이방 민족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고, 그들의 풍습대로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1).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과 결혼하여 스스로 섞였습니다. 에스라는 이 소식을 듣고 기가 차서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앉아 있었습니다(3). 하지만 이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4, 히4:12). [이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들로 인하여 떠는 자마다 이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범죄로 인하여 다 내게로 모였더라. 내가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아 있었노라.](4). 말씀에 떠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진실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작입니다. 이사야 66:2,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이 지금까지 존재해 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 이사야 66:5, [¶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타나사 너희의 기쁨이 되실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사66:5). 5-15절에 나오는 에스라의 기도는 다니엘 9장의 다니엘의 기도, 느헤미야 9장의 느헤미야의 기도와 흡사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다니엘의 기도는 역대기하 7:14에 기초한 기도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대하7:14). 기도 가운데 주목할 만한 말씀은 8절에 “또 자신의 거룩한 곳에서 우리에게 못(nail)을 주셨사오니...”(8b)란 표현과 9절에 “우리에게 성벽을 주셨사오며”(9)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못(nail)이란 물건을 고정시키거나 장막을 치거나, 무엇을 걸어 두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못(nail)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2:23, [내가 그를 단단한 곳에 박힌 못같이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자기 아버지 집의 영화로운 왕좌가 될 것이요](사22:23). 10장입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였고, 함께 슬퍼하고 애통하고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2절, [엘람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응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의 백성으로부터 이방 아내를 취하였으나 이제 이 일에 관하여 이스라엘에 아직 소망이 있나이다.](2).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에스라의 권고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느헤미야에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와 회복은 늘 함께 갑니다. 회개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이방 아내를 취한 자들을 조사하고 모두 내어 보는데 4개월이 걸렸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들 가운데 이방 아내를 취한 자들이 17명, 레위 자손들이 10명이나 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과 죄악은 훨씬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영적 각성과 회개, 부흥없이 성전만 건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전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부흥이요, 정결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거룩하신 것같이 거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