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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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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22장
lhyunsik

열왕기상(2) 2005-06-15 06:33:58, 조회 : 4, 추천 : 0 말씀: 열왕기상 17-22장 요절: 열왕기상 열왕기상 17장부터 끝까지는 아합 왕과 대언자 엘리야의 사역에 대한 기사입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잠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죽은지 불과 반세기란 짧은 역사 동안 무려 북왕국 10지파는 일곱 명의 왕이 바뀌었습니다. 첫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한 일은 백성들의 신앙을 북돋워 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되자 마자 한 일은 배교(背敎)였습니다. 열왕기상 12:28-33에 그가 한 행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의논하고 두 금 송아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큰 일이로다. 오 이스라엘아, 보라, 이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 하고](28). 그가 처음 한 행동은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무용하게 만든 것입니다. 29절,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므로 30절,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금송아지 중 하나 앞에 경배하였음이더라. 31절, 그가 또 산당들을 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우리는 여기서 배교가 제사장직을 더럽히는 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세우시지도 않는 사람,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는 사람을 성직에 앉힌 것입니다. 여로보암에 이어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나답 역시 죄인 중의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26, [그가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되 자기 아버지의 길로 걸으며 또 자기 아버지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가운데 걸으니라.] 신앙으로 양육해도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보고 배운 것이 우상 숭배요, 죄악뿐이라면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배교는 대(代)를 거듭할수록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그 다음 왕은 나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바아사였습니다(왕상15:27). 그 다음 왕은 엘라였습니다(왕상16:8,9). 그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취해 있다가 부하 장군이었던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음모를 꾸며 왕을 죽였다는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백성들은 군대대장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시므리의 평생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는 그가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는 가운데 범한 죄들로 인함이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걸으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죄 가운데서 걸었더라.](왕상 16:19). 시므리를 대신해 왕으로 추대된 오므리는 죄를 회개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전 왕들보다 더 악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오므리가 주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걸으며 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가운데 걸어 그들의 헛된 것으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음이더라.](왕상16:25,26). 역사는 계속해서 돌고 돌며 악순환의 연속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깔아놓은 배교의 철로로 그 후대의 사람들은 거침없이 달려갔습니다. 그 절정에 달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 가운데 걷는 것을 오히려 가벼운 일로 여기고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또 가서 바알을 섬겨 그에게 경배하고...](왕상16:30,31).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과 벧엘에는 금송아지가 사마리아에는 바알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졌습니다. 바알의 사당이 건축되고, 도처에 바알 상이 세워지고, 바알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교계를 완전히 주름잡게 되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국교를 바알 종교로 정착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연한 배교와 불신의 시대에 주님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셔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배교를 보고 하나님 앞에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길르앗 거주민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 그는 심판을 선포하기에 앞서, 주님께 보냄을 받기에 앞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가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이라고 증언합니다(약5:17). 엘리야는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구약 성경, 특히 모세 오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 신명기 11:16,17 말씀은 엘리야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두렵건대 너희 마음이 유혹을 받아 너희가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므로 주의 진노가 너희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그분께서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며 땅이 열매를 내지 아니하게 하시므로 주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할까 염려하노라.](신11:16,17). 엘리야는 이 말씀에 따라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약5:17). 우리는 말씀에 따라 구하는 기도야 말로 참된 기도요, 능력의 기도요, 응답받는 기도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하고 범죄가 횡횡하는 이 시대를 향해서 뭔가를 하기에 앞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잠28:9, 요일5:14,15). 엘리야는 기도로만 자신의 일을 마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어나서 증거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고 사악한 왕 아합 앞에 혈혈단신으로 나아가 거인처럼 우뚝 섰습니다. 그는 배교한 왕에게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담대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시편 3:6에 [수만의 백성이 나를 에워싸고 대적한다 하여도 내가 그들을 무서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향해 다가 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증거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비를 내리고, 안 내리고는 전적으로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든, 인공비를 만들든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비는 고사하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습니다. 욥기 28:26에 [그분께서 비를 위하여 법령을 정하시고 천둥이 칠 때 번개를 위하여 길들을 정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헛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이 우주를 창조하신 이는 자연 만물을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환경을 마음대로 주장하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그분에게 밀착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심판을 선포한 뒤에 주님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에 숨어 버렸습니다(2,3). 이는 가뭄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영적 심판이요, 영적 가뭄입니다. 주의 말씀이 바로 영적인 비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2,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말씀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영적인 단비요, 맺히는 이슬이요, 가는 비요, 소나기를 내릴 수 있는 존재란 사실에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30:20-21,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사30:21,22). 말씀을 가르칠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겨버리는 일이야말로 백성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주님은 다시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8). 민수기 9:18-23을 펴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장막 안에서 안식하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날 동안 오래 머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명령을 지켜 이동하지 아니하였으며 20.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 간 머무를 때에도 그들이 그리하더니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에 거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으며 21.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머물다가 아침에 떠 오를 때에는 그들이 이동하였고 밤이든 낮이든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림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장막에 거하고 이동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이동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장막에서 안식하였고,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였으며 또 모세의 손으로 주신 주의 명령에 따라 주께서 맡기신 책무를 지켰더라.](민19:18-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머물렀는가? 이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충분한 교훈을 주고도 남을 것입니다.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주의 명령에 따라]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양무리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머물러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하루 하루를 인도하셨고, 그들이 나아갈 때에나 머물 때를 조성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구름 기둥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면, 그들은 만나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나 그의 사역을 받는 양들이나 모두 동일한 원칙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릿 시냇가에 얼마나 머물지, 그리고 나서 어디로 가겠다든지 하는 식의 생각이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기 임의대로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8-12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순종의 첫발을 떼지 않으면 다음 조명을 받을 수 없다”입니다. 주님은 한 걸음씩 인도하시고, 한 걸음 앞만 보여 주십니다. 가면 보여 주십니다. 보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주님은 앞서 일하시는 분이시다.”-엘리야가 갔을 때, 이미 과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주의 깊게 확인하라.”- 엘리야는 자신의 인도함을 확신하기 전에 주의깊게 확인했습니다(11). 넷째,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하신다.”- 과부는 은혜를 받기 전에 두 번의 시험을 받았습니다(11,12). 다섯째,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물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가난한 과부가 엘리야를 섬기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요, 마음의 문제란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여섯째,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자.- 과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나무 가지를 줍고, 빵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12). 사르밧에 거하는 동안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대로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도록 공급하셨습니다(14). 엘리야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양을 두지 못했지만 이방 땅 사르밧의 과부는 어려운 순간에도 엘리야의 말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17). 엘리야는 이 아이를 살렸는데(23), 이는 엘리야의 기도와 더불어 과부의 믿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첫째, 믿음의 단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정금이 뜨거운 풀무에서 단련되듯이 믿음은 시련의 풀무에서만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정련되지 않은 금과 같습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함이니라.](벧전1:7).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단련합니다. 하나님은 일보다 사람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벧전4:12,13a).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단련하기 위해 불같은 시련이 임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체험,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련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 사르밧 과부는 기나긴 가뭄과 기근의 환란 속에서도 엘리야를 통해 주님의 손길과 공급이란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시험과 고통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에게 외아들의 죽음은 엄청난 고통이요, 시련입니다. 때로 내게 닥치는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을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그 원인을 알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께서 나의 깊은 곳까지 다 보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겸손히 주의 손아래서 회복되기 위함입니다. 욥기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께서 나와 다투시는지 내게 보여 주소서](욥10:2). 이것은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가 아닙니다. 겸손히 주님께 아뢰십시오. 둘째, 우리는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평소에 나 자신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이 고난을 통해 낮아 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첩경이며, 더 많은 은혜를 얻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하신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셋째, 주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고난 뒤에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10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 은혜 입은 성도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도록 해 주시기를 빌고, 이 고통이 그냥 무의미하게 고통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뭔가 깊은 교훈과 배움을 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성도는 있을지언정, 실제로 문제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여인으로 우뚝 솟았습니다. [믿음으로...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히11:35). 18장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다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셨습니다(1). 엘리야는 비를 내리기 전에 먼저 아합을 만났고, 바알의 대언자 450명과 작은 숲을 섬기는 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19,20),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바알 중 양자 택일을 결단하도록 촉구했습니다. 1-14절은 하나님의 숨은 일꾼 오바댜가 나옵니다. 오바댜는 아합의 궁정 대신으로서 어려운 때에 100명의 하나님의 대언자를 굴에 숨겨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4). 이는 하나님께서 암흑의 시대에도 자신의 종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두신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오바댜는 어릴 적부터 주님을 섬겼습니다(12). 어린 시절 신앙을 가졌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의 어린 시절부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지금까지 내가 주의 놀라운 일들을 밝히 드러내었나이다.](시71:17). 오바댜는 역경 속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배교와 우상 숭배로 타락한 아합 왕을 섬기고, 왕궁에서의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의 특권과 지위를 주님의 일에 사용했습니다. 오뱌다는 자신의 재물과 지위를 이용해서 주의 대언자들을 50명씩 데려다가 100명이나 굴에 숨겨두고 먹였습니다(4,13). 이것은 큰 위험을 무릅쓴 선행이었으며, 주의 종들을 보존하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특권, 물질과 시간을 주님을 위해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인간적인 약점들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반갑게 맞았지만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8).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주의 대언자 100명을 먹이고 보살필 수 있었지만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종 엘리야 한 명을 위해서는 선뜻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9,12,14).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자란 평가를 받았습니다(3).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속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종들이 모두 오바댜와 같이 한 가지 이상씩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멜산의 전투는 영적 전쟁의 본이 되는 귀한 교훈입니다(20-46).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에게 누가 참 하나님이며, 누구를 따를지를 결정하도록 결단을 촉구했습니다(21). 하지만 이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갈라져 있었고 우상 숭배로 믿음은 파괴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양심과 이성에 아무리 호소해 보아도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는 우상은 엄격한 도덕적 순결과 거룩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우상을 매개로 자기 만족과 자기 유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들 앞에서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직접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23-24).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누가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인가?에 대한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바알 숭배자들이 시작했지만 아침부터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까지 별의별 짓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26). [그들의 우상들은 금과 은이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4-8).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사탄이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욥기 1장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양들과 종들을 태워 없애 버렸습니다(욥1:16). 계시록에서도 사탄은 하늘에서 불을 내립니다. 계시록 13:13, [그가 큰 이적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 오게 하고](계13:13). 하지만 이 순간에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이 불을 내리는 것은 이런 이적을 통해 온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보는데서 무너진 주의 제단을 보수했습니다(30). 이는 백성들의 마음에 신앙을 호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하나님 앞에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옵소서.](38). 그의 기도는 매우 간략하였지만 강력했고,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했습니다. 주의 종들은 자신이 주의 종이란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주의 종인 것을 알게 되어야 합니다. 갈멜산의 전투를 통해 백성들은 주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두려움 가운데 고백하게 되었습니다(39).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정리하면 1. 먼저 주의 제단을 보수하라. 2. 성경의 본을 따라, 말씀이 정한대로 주님께 예배하라. 3. 주의 종과 죄의 종은 작은 것에서 차이를 냅니다(33). 4. 언약에 기초해서 기도하라(36). 5. 주의 불을 보는 것보다 주의 말씀이 불같이 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6. 주의 종인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라. 7.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40). 40-46절은 신약 성도들에게 기도의 본으로 제시된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42). 첫째, 엘리야는 무리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이 사역했던 장소에서 더 높은 곳, 아무도 없는 갈멜산의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 세상의 소란과 일들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의 꼭대기 대신 골방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문을 닫는데 실패하면 여러분의 기도는 실패합니다. 둘째, 엘리야의 기도 자세를 보십시오. 얼마전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백향목처럼 우뚝 솟아 있던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풀잎처럼 구부려져 있습니다. 대적들 앞에서 사자처럼 담대했던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우고 겸손히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종들은 모두 이러했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자신을 낮추는 일이야말로 기도의 응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셋째, 엘리야의 기도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목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너무 오용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보면 천박스러움을 지나 신성 모독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그럴 때는 더욱 황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방해받기 일쑤였고, 성전 재건은 몇 년씩이나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란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의 뜻이기에 만사 형통이 아니라, 더욱 방해를 받고,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지체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안되는 경우에 우리는 더욱 힘을 내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37a,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의 집이 이것을 위해 내게 구하여 나로 하여금 자기들을 위해 이 일들을 행하게 하여야 하리라. ...]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들을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배우고, 체험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 엘리야의 기도는 구체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두루뭉실하고, 추상적이고, 지나치게 영적입니다.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기도가 아니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분명히 “비를 구하라”(슥10:1)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기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지 놀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살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5,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친구가 있는데 한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여 내게 빵 세 개를 빌려다오.] 그냥 먹을 것을 달라가 아니라 빵 세 덩어리(서너개가 아님)라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다섯째, 엘리야의 기도는 열렬하고 뜨거웠습니다. 성경은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칠 때 crying and pra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열렬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7,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 여섯째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응답 여부를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기도한 다음에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4:2, [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watch)](골4:2). 일곱째, 엘리야의 기도는 인내의 기도였습니다(43).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43) 기도하면서 인내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말씀도 있고, 기도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도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환은 [아무 것도 없나이다.]를 여섯 번이나 반복했고, 엘리야는 일곱 번이나 [다시 가라] 말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세 번 한 후에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내가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 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사 땅에서 찬양이 되게 하시기까지 안식하시지 못하게 할지니라.](사62:7).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19장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이후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부흥을 꿈꾸며 예스르엘로 달려왔지만 그가 들은 소식은 이세벨이 내일까지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는 살기(殺氣)넘치는 위협이었습니다(2).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쳤고, 다시 광야로 하룻 길을 더 들어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4). 모세 역시 주님께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11:14,15,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대하실진대 원하옵나니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거든 즉시 나룰 죽여 나로 하여금 내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는 사역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지쳤던 것입니다. 요나 역시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요나서4:3,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 주의 일을 수행하다 지치고 힘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은 목사들이 어디 한 두 명이겠습니까? 죽기를 구하지는 않더라고 멀리 도망이라도 가 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시편 55:6,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로다.](시55:6). 이것은 인간의 약점이요, 허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향해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 엘리야를 시중들었고, 힘을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밤낮 사십일을 호렙 산으로 갔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엘리야를 만나 주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계속해서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가 반복됩니다. 주님은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에 계시지 않으시고 ‘고요한 작은 소리’에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지진도, 강한 바람도, 불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소리없는 조용한 빛으로 임하셨고, 조용히 마음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의 불을 내렸지만 아합이나 백성들은 아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사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고요한 작은 소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영혼을 구원하며, 새 생명을 줍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대신해서 엘리사를 대언자로 세우도록 하심으로 대언자로서의 그의 사역은 끝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자신 하나 밖에 없는 줄 알았지만 주님은 엘리야를 대신할 수 있는 사역자를 얼마든지 세우실 수 있습니다. 20장입니다. 시리아와 왕 벤하닷과 아합과의 두 차례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절대 열세의 군사력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보내셔서 전쟁을 승리하도록 해 주셨습니다(13,14). 시리아는 다시 한번 이듬해 전열을 가다듬어 전쟁을 벌였지만 역시 대패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나 시리아나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8). [그들이 이레동안 서로 마주 보며 진을 치니라. 일곱째 날에 싸움이 붙어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시리아 사람들의 보병 십만명을 죽이니라.](29). 하나님은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겼는지 졌는지 모를 그런 승리가 아니라 아주 끝장을 보았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30절,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이 아벡으로 도망하여 도시로 들어갔더니 성벽이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져 내리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도시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쳐 죽이지 못한 병사들은 성벽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완벽한가를 보여 줍니다. 성벽이 무너진 것이 운(運)의 문제입니까? 시리아 병사들이 지지라도 운(運)이 따르지 않아서 전멸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아합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의 대언자의 말을 들었던 것 뿐입니다. 그가 일생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일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위대한 교훈을 줍니다. 성도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도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란 사실입니다. 지혜도 용기도 없는 불신자요, 악한 아합일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했을 때 그는 어느 위대한 장군이 거두었던 승리보다 더 위대한 승리를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아합의 보물들과 자식들까지 다 자기 것이라고 큰 소리쳤던 벤하닷 왕은 목숨을 건지려고 골방에 숨어들었습니다. 아합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망친 시리아 왕을 찾아내어 완전히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내 형제라며 병거에 태우고 언약을 줘서 보냅니다(34).. 아합이 자기 의지대로 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과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피아(彼我)의 구분도 없고, 하나님의 편에 선 자와 하나님의 대적자들에 대한 구분도 없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산들의 신이라며 이기겠다고 전쟁을 걸어온 벤하닷을 풀어 줌으로 그는 스스로 재앙을 뿌렸습니다. 만약 아합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대언자에게 물어서 처리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21장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병이 들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대언자가 전해 준 심판보다도 나봇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금식해 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지만 이번에는 침상에 누워 빵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5). 악한 부자들은 자신의 탐욕이 채워지지 않을 때 병이 듭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히13:5a)는 주의 말씀은 거의 순종할 수 없는 말씀 같습니다. 주님은 “탐욕을 조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5,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탐욕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눅12:15). 잠언 기자는 탐욕을 미워하라고 말합니다. 잠언 28:16, [명철이 부족한 통치자는 또한 크게 학대하는 자이거니와(아합처럼),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 날들을 길게 하리라.] 신약 성도들이 탐욕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경배(숭배)하는 자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곧 우상 숭배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재물의 신(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탐욕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다면 분명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탐욕이란 하나님이 현재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한 불만족을 나타내는 반역행위입니다. 아합의 탐욕으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21,22). 아합은 무서운 심판의 말에 일시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외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 2:13a,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a). 위선자라도 위험에 처하거나 심판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 일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한번만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는 아합처럼 주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믿음에서 나온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서 피하고 보자는 심산에서 나온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겸손히 행했지만 결코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악된 길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아합은 버리지도 않았고, 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합이 겸손하게 행했다고 인정하셨지만 그가 회개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두려워하면서도 완전히 죄를 버리지 못하는 신자들과 같습니다. 아합이 회개했다면 이세벨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들을 혁파하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부활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가 회개했다면 포도원을 다시 돌려 주고, 율법에 따라 변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악행을 바로 잡는 일이 없고, 그 다음에 주님께로 돌아와 진지하게 의로 훈육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이 그의 심판을 유예했지만 결국 말씀한 모든 심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임했습니다. 22장입니다. 아합은 라못길르앗을 수복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전쟁에 나가 그날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400명의 대언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주님께서 보낸 거짓말하는 영에 속아 거짓을 대언했습니다. 주의 대언자 미가야가 주의 말씀을 증거해 주었지만 그는 듣지 않고, 도리어 미가야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니라.](14). 미가야의 이 고백은 주의 종들이 모두 가져야 할 투철한 자세입니다. 이전의 대언자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 보십시오. 미가야는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적당히 돌려서 전하지 않습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전한 말씀의 결과에 대해서 앞 뒤를 재어 보지 않습니다. 아합과 같은 악한 배교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엘리야 외에도 미가야 같은 주의 대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과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속이시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도 속일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울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의 말씀을 버렸을 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성령 충만이 기쁨과 담대함을 주는 반면 악한 영은 괴로움을 줍니다. 사무엘상 18: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삼상18:10).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혔을 때 악령이 찾아 왔습니다. 악령이 임해도 대언을 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표적과 기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입니다. 재판관기 9: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판9:23).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자식들이요, 자기 형제들을 하룻만에 73명이나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하실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지금 아합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대언자들이 거짓말로 대언할 때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교회들에 주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셨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과 상관없는 거짓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둔다면 그는 분명히 속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우상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셨습니다. 에스겔 14:4, 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4), [만일 대언자가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속임을 당하였으면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 위로 내밀고 그를 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그치게 하리라.](9). 이런 이유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체험이란 이름 아래 성경적 진리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우상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신 줄로 압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것, 집 한 채 장만하는 것,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채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래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들이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는 줄을 모르고, 주님께 속은 줄도 모르고 성경과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No로 응답하시는 편이 속이시는 경우가 얼마나 더 큰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