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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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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 구약 성경 OUTLINE(III)
lhyunsik

04. 민수기 2005-01-24 20:52:05, 조회 : 33, 추천 : 0 -구약 성경 개요 구약 성경 OUTLINE(III) 말씀: 민수기 1-36장 요절: 민수기 1:2, 26:2 03. 민수기 민수기는 인구조사서입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 조사가 있습니다. 책 이름은 거기에서 유래했습니다(1-4, 26-27). 첫 번째 인구 조사는 출애굽한 세대들에 대한 조사이며, 두 번째 인구 조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유업을 얻을 세대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란 “백성의 수를 세다”란 뜻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 출애굽기는 인간의 구속, 레위기는 구속받은 성도의 예배와 친교에 관한 책이라면 민수기는 성도의 섬김과 행함에 대한 책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하며, 어떻게 하나님과 친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남은 것은 그 말씀들을 믿음으로 실천하느냐? 불신으로 불순종하는가?입니다. 그 점에서 민수기는 시험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란 책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서 있게 제시해 줍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여 줍니다. 민수기는 모세와 아론의 세대를 종결짓고, 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민수기에 상응하는 신약 성경은 고린도후서 12장, 히브리서 3-4장입니다. 민수기에는 수많은 섬기는 종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되었습니다. 이는 신약 교회에서도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일을 맡기시고, 성도들은 지체로서의 자기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가지 민수기가 주는 교훈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그들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성도의 필연적인 결과를 잘 보여 줍니다. 신약 성경은 민수기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 1-20장은 출애굽한 1세대들의 이야기입니다. 21-36장은 제 2세대들의 이야기입니다. 1세대들은 모세의 지휘아래 출애굽했지만 불신으로 인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며,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2세대들은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1-4장은 인구 조사입니다. 5-10은 조언을 받습니다. 11-12장은 징계를 받습니다. 13-20장은 정죄를 받습니다. 21-25장은 광야의 여행입니다. 40년간을 광야에서 돌아야 했습니다. 26-27장은 다시 인구 조사입니다. 28-30장은 백성들이 낼 헌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31-36장은 지파별로 유업을 나누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1장은 성막이 세워진 후 이스라엘의 총수를 그들의 가족과 조상 집에 따라 세도록 하셨습니다.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지파별로 다 세었는데, 그 수는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습니다(1:46). 이 수는 출애굽기 38:25-26에 나오는 성소에 헌물을 낸 20세 이상의 회중의 수와 동일합니다. 인구 조사는 군사적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는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있을 전쟁을 대비한 것입니다(3). 18절에 따르면 자기 조상 집과 가족에 따라 자기 혈통을 밝혔습니다. 이는 이들 가운데 “섞여 있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출12:38, 민11:4). 이들은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이 많았고, 실제로 악한 충동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적 전쟁을 수행할 군사들을 계수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군사입니까? 영적 전쟁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으며, 계수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3-4절, 에베소서 6:10-18, 고린도후서 10:5을 참조하십시오. 1:47-54에 따르면 성막의 임무에 종사하는 레위 지파는 계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2장은 주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이는 대장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막이 있었습니다. 1-2을 보십시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각 사람은 자기 조상 집의 기(旗)와 함께 자기 군기 옆에 진을 치되 회중의 성막에서 멀리 칠지니라.](1,2).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중심에는 주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지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고전12). 지파별 배열을 보면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3-9),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10-16),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18-24), 북쪽으로는 단, 아셀, 납달리(25-34)가 위치하도록 배정 받았습니다. 가운데 성막과 더불어 레위 지파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각 지파들이 있어야 할 곳, 장소를 뜻대로 배정해 주셨듯이 오늘날 각 지체들을 이렇게 있어야 할 곳을 지정해 주십니다. 형제, 자매님들은 부름 받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4장은 성막을 섬기는 레위 지파의 수와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1-4절은 제사장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 둘은 죽고 둘이 제사장으로 섬겼습니다(3-4). 주님은 레위 지파를 야곱의 첫 아들인 르우벤을 대신해서 제사장으로 섬기게 하셨고, 특별히 주의 성막을 섬길 특권을 주셨습니다(11-13). 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사람들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태를 연 자들 곧 처음 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레위 사람들은 내 것이니](12). 이는 신분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직분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러냄을 받았고,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목사, 교사, 집사, 부흥사 등은 다시 택함을 받아서 그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계급이나 영적 신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과 역할의 차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특이한 점은 다른 지파들이 20세 이상을 계수한 것과는 달리 레위 지파는 한 달 이상의 아이들을 모두 계수하게 하셨습니다(3:15). 4:1-20은 레위의 아들 중에서 고핫의 아들들, 4:21-28절은 게르손의 아들들, 4:29-49은 므라리의 아들들의 수를 계수하고, 회중의 성막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정해주셨습니다. 회중의 성막에서 일할 자들의 나이는 30세에서 50세입니다(4:3, 23, 35). 이들은 광야의 순례길 동안 주의 성막을 보호하고, 성막의 거룩한 물건들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것이 주는 신약적 교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거룩한 성령과 기록된 말씀, 성도들에게 단 한번 전달된 믿음(유3)들”과 같은 귀한 영적 유산들을 세상이란 광야를 순례하는 동안 흠없이 지키고, 전달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세에 성막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한 것은 성도가 단지 거듭났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숙과 성장을 통해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레위 지파와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이 일은 신약의 성도들이 교회를 통해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귀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5장은 더러움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말씀입니다(2-3). 이는 이미 레위기에서 규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병 환자, 유출이 있는 자(레13-14), 죽은 자들과 접촉한 자”(2, 레15)들은 진영 밖으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므로 부정한 모든 것들과 죄를 심판하고, 밖으로 내 보내야 합니다. 5-10은 죄를 범하고 범법한 사람이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신약적 본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든 여자든 사람들이 범하는 어떤 죄를 범하고 주를 거역하여 범범하고 유죄가 되면 그 지은 죄를 고백하고 자기가 범법한 것을 그 본래의 것으로 갚되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자기가 범법한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이라.](5,6). 신약 성도는 죄를 범하면, 첫째 고백하고(요일1:7-9), 둘째 회개하고, 셋째 자기 자신을 심판하여 주님과 친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용서에 제한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하는 가장 큰 비극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숨김으로서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친교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주님께서 대속해 주신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은혜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디도서 2:11-2,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주어(하나님의 은혜)와 동사(가르치시되)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가르치시며, 은혜가 다스리도록(롬5:21)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분리된 삶을 사는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11-31말씀은 지금 현재 거의 행해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율법 시대에 행해졌으며,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음행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음행한 자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행하신 능력이셨습니다. 6장은 나사르 사람(나실인)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삼손이나 침례인 요한과 같은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한 나실인들에 관한 법입니다(2). 나실인들은 첫째 술에 대해서는 입에도 대지 말 것, 둘째 자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 셋째 시체에 가까이 가지 말 것(6)에 대해서 명을 받았습니다. 22-27은 나실인들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향해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신약 성도들에게 주실 3중 축복을 보여 주시는 아름다운 예표입니다. 첫째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며(24), 둘째 주께서 자신의 얼굴로 네게 빛을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며(25), 셋째 주께서 자신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을 주십니다(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두 나실인으로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려 이런 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무엘, 삼손, 침례인 요한과 같이 미리 천사를 통해 수태 고지를 받거나, 구분되지 않아도 자신이 스스로 주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때 누구나 나실인이 될 수 있습니다. 7장은 헌물을 드리는 통치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파의 통치자들이 차례대로 헌물을 드렸는데, 주님은 그것을 일일이 다 기록하셨습니다. 12,18,24,30,36,42,48,54,60,66,72,78절에 이름과 그들이 드린 헌물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이 드리는 헌물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원해서 내는 헌물로 성막과 성막을 섬기는 사람들을 운영해 나가십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자원해서 섬기는 헌금과 헌물로 교회와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고린도후서 9:12, [이는 이 섬김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인하여 넘쳤음이니라.](고후9:12). 예수님 역시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사역을 하셨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자기 재물로 그분을 섬기더라.], 이런 행위는 신약 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이방 교회들은 거액의 헌금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주님께 드리는 희생물입니다. 빌립보서 4:18,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성도들이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주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는 것,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드리는 헌물입니다. 히브리서 13:15,16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찬양과 헌물(헌금)은 여러분이 영적 제사장이란 증거입니다. 돈만 밝히는 세속적이고, 물욕적인 타락한 교회들과 성직자들로 인해 의롭고 경건한 신자들이 반발하여 성경적 헌금과 헌물 자체가 마치 모든 죄악의 온상인 것처럼 반발하는 현상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적 가치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8:1-4은 등잔불과 등잔대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요8:12)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일곱 등잔대는 계시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를 통해 빛을 공급받아 살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비추시고, 전파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5-22은 레위 사람들을 정결케 하는 내용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할지니 곧 정결하게하는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하여금 온 몸을 삭도로 밀게 하고 자기 의복을 빨게 하여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7). 정결하게 하는 물은 말씀의 물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성도들은 말씀의 물로 씻어 늘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요17:17, 요15:3, 엡5:26). 온 몸을 삭도로 미는 것은 자연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적 할례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개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복을 빨게 하는 것은 성도들의 행위의 의(義)를 말합니다. 삶의 습관, 거룩하고 의로운 행위, 선한 행실 등은 모두 우리의 의복이 됩니다. 8절에 죄 헌물을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제물에 기초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어떤 의도, 거룩함도, 정결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9:1-14은 광야에서 지키는 두 번째 유월절입니다. 첫 번째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지냈습니다. 6-14절은 여행자나 타국인도 정해진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는 모두에게 미칩니다. 15-23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 모양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광야 여행은 오직 “주의 명령에 따라”(18,19,20,23) 움직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순례길 역시 주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주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귀한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10:1-10은 은 나팔 두 개를 만들게 하셔서 집회를 소집하고 진영을 이동할 때 쓰게 하셨고, 전쟁 전에 경고 나팔로 사용하였습니다. 경고 나팔을 불 때 주님께서 친히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9). 나팔은 하나님의 뜻을 회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위기에 처한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께 알리는 도구도 되었습니다. 11-36은 시내 산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장인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29-32).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육신을 신뢰하려는 경향은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11장은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회중들을 징계하시는 장면입니다. 11:1-3은 불평하는 회중들에게 불을 보내셔서 징계하셨습니다. “다베라”라는 지명은 “불이 붙은”이란 뜻입니다. 주님을 대적해서 불평하는 것은 매우 큰 죄입니다. 성도들의 입술은 모든 일에 감사와 찬양이 넘쳐야 합니다. 11:4-35은 백성들이 탐욕을 부렸고, 그들의 욕심대로 고기를 주신 장면입니다. 주님은 때로 정욕대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요, 심판입니다. “섞여 사는 무리들”(4)이 탐욕에 빠지자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악한 사귐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신약의 교훈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무리는 순수한 양무리 속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과 같습니다. 모세도 주님께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지쳐 버렸습니다. 11-15절은 자기 중심적인 모세의 기도입니다. “내가, 나를”이란 말이 반복됩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기도는 믿음을 파괴하며, 성령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15절의 기도는 한계에 달한 모세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백성들과 모세가 한 잘못된 기도 가운데 몇 가지는 들어 주셨고, 몇 가지는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혼자 진 짐을 나누어 지게 하신 것은 응답해 주셨고, 백성들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망도 들어 주셨습니다. 22-23은 모세의 불신을 책망하시는 장면입니다. 불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결과 그들은 재앙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자기를 죽인 것입니다(33-34). 이는 “육신적인 생각은 사망이요”란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입니다(롬8:6). 신약 성도들은 이 기사에서 경고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12장은 모세를 비판한 지도자들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의 혈육인동시에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시기심으로 모세의 아내가 이방인이란 문제를 물고 늘어져 비방했습니다(1-2). 모세는 온유하여(3)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데,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영적 시기심과 주님이 세우신 종을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병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것을 악용하는 목사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는 동시에, 이런 것에 질린 성도들이 목사를 무시하고 업신여김으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입으라...] 11-16은 아론이 회개하고, 모세의 중보 기도를 통해 미리암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 간에 다툼과 시기는 자신은 물론이고, 온 회중을 악으로 몰아 넣는 무서운 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3장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12명의 정탐꾼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26-27에 따르면 그들이 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불신의 “그럼에도 불구하고”(28)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환경을 이기는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불신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란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들 열명은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악한 보고는 더욱 힘을 얻었고, 백성들은 불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지지했습니다. 30-3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갈렙과 다른 사람들의 보고입니다. 동일한 땅을 보고도 왜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며, 다른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의 유무에 따른 것입니다. 이 기사는 히브리서 3-4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3:7-13절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축복들, 약속들, 유업들을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4:1-4절은 백성들의 반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탐꾼들의 불신의 보고는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개적인 반역의 씨를 뿌렸습니다. 불신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체험과 역사를 한순간에 무로 돌려 버립니다. 6-9절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촉구하는 권면입니다. 그러나 한번 완악해진 마음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10). 11-25은 주의 진노에 대한 백성을 향한 모세의 중보기도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엿보게 하는 예표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열 번이나 주를 시험하셨다고 말씀합니다(22). 그 열번은 출애굽기 14:11-12, 15:23-24, 16:2, 16:20, 16:27, 17:1-3, 32:1-10, 민수기 11:1, 11:4, 14:2입니다. 26-39은 이스라엘의 불신과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입니다.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 죽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40-45절은 이들의 새로운 죄입니다. 심판을 받았으면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 전쟁을 하겠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정리하면 홍해를 건넌 것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와의 단절을 나타내는데, 이는 신자들이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을 못박은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냅니다(갈6:14). 마라는 시험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엘림은 순례의 길에 들어선 성도들에게 주시는 안식과 새 힘을 예표합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앞에 선 인간들의 타락한 본성을 보여 줍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실패는 성도들에게 경고를 위해 주어진 것이지 결코 흉내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고전10:11).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홍해를 건너는 침례를 받았지만, 막상 주님이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을 향유하기 위해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할 약속의 땅 앞에서 실패함으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5장은 약속의 땅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법규들입니다. 1,17절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은 남은 자들만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2-36은 안식일을 어긴 자가 어떤 형벌을 받는지 보여 줍니다. 모세의 율법을 경히 여긴 자들이 받을 형벌이 이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클지 생각해 보십시오. 38-40절은 옷단에 붙일 푸른 술(fringe)에 관한 규례입니다. 푸른 리본을 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 주의 명령을 기억하여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의 색깔이 푸른 색이기에 옷 단의 푸른 리본을 볼 때마다 하늘의 하나님이 주신 명령, 거룩하고, 분리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6장은 고라의 반역입니다. 반역에 동참한 사람은 지도자급 250명이었습니다(1,2). 이들이 내세운 반역의 명분은 ‘만인 대제사장 직분’, ‘만인 평등’, ‘민주주의’였습니다(3). 반역의 명분은 언제나 정당하고 듣기에 좋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고 함께 모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넘치게 행하는도다. 온 회중 곧 그들 각 사람이 거룩하고 주께서도 그들 가운데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 자신을 주의 회중보다 높이려 하느냐? 하니](3). 이들은 주님께서 세우신 직분과 제도를 폐하고 임의로 직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0,11절, [...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 직분도 구하느냐? 이런 까닭으로 너와 너의 모든 무리가 다 함께 모여 주를 대적하는도다. 아론이 누구이기에 너희가 그에게 불평하느냐?](10b,11). 그러나, 이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모세에게 덮어 씌웠습니다(13-14). 그리고, 온 회중들을 집단으로 동원해서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엎으려는 혁명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19). 민심은 결코 천심이 아닙니다. 19-35절은 반역자들을 모두 멸하시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이런 무서운 주의 심판을 겪고 난 다음날 주의 백성들은 어떤 경고나 교훈을 받았습니까? 모세와 아론의 말에 순종하자, 다시는 불평하지 말자, 이런 자정 결의를 하였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여 이르되, 너희가 주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41). 마음이 비뚤어지면 입이 발라도 비뚠 소리만이 나옵니다. 주님은 다시 그들을 심판하셨고, 그날 고라의 일로 죽은 자들을 제외하고 만사천칠백명이 죽었습니다(49).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을 이용하여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것은 악한 일이요, 책망받을 일입니다(계2:6,15). 주님은 모두가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8). 그러나, 직분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목사, 교사, 부흥사, 집사 등은 성경적 직분이며, 형제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고전12:4-31, 엡4:11,12, 딤전3:1-13, 딛1:5-9). 17장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관한 기사입니다. 5절, [내가 택하는 사람의 막대기에는 싹이 나리니 이로써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 곧 그들이 너희에게 불평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 주님은 마른 막대기에 싹이 나고 봉오리가 나오고 꽃이 피어 아몬드가 열리게 하셨습니다(8). 이는 주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부활의 주님이란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 한명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고, 무수한 부활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18장은 레위 제사장직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1-7절은 성소의 불법을 담당해야 하는 레위 제사장 직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5절, [너희는 성소의 책무와 제단의 책무를 맡으라. 그리하면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5). 이는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레위 지파는 유업의 땅이 없었습니다. 20절, [주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서 상속도 없겠고 그들 가운데서 아무 몫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 몫이요, 네 상속이니라.](20). 레위 지파는 나머지 지파에서 성소에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는 다른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한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보여 줍니다. 이는 또한 오늘날 주의 사역자들이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이 되기도 합니다. 19장은 붉은 암송아지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민수기에만 나오며, 광야에서만 행해졌습니다. 성도가 세상이란 순례의 길을 가면서 짓는 모든 죄를 어떻게 속죄하는가?에 대한 진리를 보여 주는 귀한 장입니다. 첫째, 희생물인 점도 없고, 흠도 없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않는 붉은 암송아지를 잡습니다. 붉은 색은 죄의 색을 예표합니다(사1:18).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무결성을 보여 줍니다. 멍에는 무엇인가에 속박된 것을 말하는데, 주님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것을 말합니다. 진영 밖에서 잡은 것(히13:12)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진영 밖이란 점을 보여 줍니다. 둘째,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3). 이는 완전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셋째, 재를 모아두었다가 정결하게 하는 물에 사용합니다(9). 넷째, 재를 거둔 자도 자기 옷을 빱니다. 물은 흔히 성령과 말씀을 의미합니다. 피로 씻음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는 늘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요13:3-10, 요일1:7-9). 20장은 모세의 죄와 아론의 죽음에 관한 장입니다. 미리암의 죽음(1)으로 시작해서 아론의 죽음으로(29)으로 장이 끝납니다. 민수기는 죽음의 행진곡이 계속 울리는 장례행렬같습니다. 2-5은 다시 회중들의 불평이 쏟아집니다.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8). 하나님은 이들의 반복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에게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10-11절은 모세의 심각한 죄가 나옵니다. 이 죄로 인해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첫째, 말을 해야 하는데 두 번을 내리쳤습니다(11·출17:5과 비교). 둘째, “하나님께서”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가”라고 말함으로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였습니다(10). 23-29에서 아론이 죽고 아들 엘르아살이 뒤를 이었습니다. 아론의 죽음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방황은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때로 멈춘 적도 있었지만 더 이상 방황은 아니었습니다. 21장은 놋뱀에 관한 유명한 기사입니다. 1-3절은 가나안 족속에 대한 승리입니다. 4-9절은 다시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주님이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죽게하셨습니다. 8-9절,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8-9). 놋 뱀은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가 되신(요3:14-15, 고후5:21) 주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금이 신성을 은이 구속을 나타내는 광물이라면 놋은 언제나 죄와 저주에 관련된 심판을 나타냅니다. 놋 제단, 놋 대야 등은 죄를 씻어내는 곳입니다. 놋 뱀이 죄와 저주를 담당하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후에 이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까 히스기야 왕이 부숴 버렸습니다(왕하18:4). 놋 뱀은 죄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답을 줍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공부해 봅시다. 우리가 그것이 주는 교훈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구원받기 위해 취해야 할 단계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뱀에게 물렸고, 그 뱀의 독이 자신을 죽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인이요, 그 죄가 나의 영혼을 파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준비하신 치료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뱀에 물렸을 때 놋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무지로 말미암아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구원의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준비하신 치료책도 그것을 쓰기 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기를 거절한다면 죽을 수 밖에 없듯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면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입니다. “뱀에 물린 한 이스라엘 사람이 "놋 뱀"을 바라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 나는 구리 조각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아요. 나는 파스찜질을 해보거나 집에 있는 약을 마셔보겠어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선행, 고행, 음악, 세속적인 오락, 그리고 종교적인 습관과 같이 양심의 고통을 순화시켜주는 인공의 치료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인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놋 뱀'이 어떻게 치료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알기 전에는 그 '놋 뱀'과 아무런 상관도 아니할 것이오. 나는 어떻게 그것이 나를 치료하는지 그 철학을 알고 싶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뱀의 형상으로 된 놋 조각으로 물린 상처를 문지르거나, 놋 조각을 취하여 약간의 풀과 함께 달여서 먹을 수 있는 약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사물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단순히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짓이오. 나는 그것을 보기 전에 죽을 거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그같은 속죄의 철학(이론)을 이해할 수 없소. 그래서 당신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까지는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뱀에 물린 한 이스라엘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내 상태가 좀더 나아지는지 보기 위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겠소. 만일 내가 좀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그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놋 뱀'을 쳐다보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내일은 영적인 상태가 좀더 나아지겠지'라는 바램 속에서 살고 있으며, 만일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종교에 한번 "의지"해 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이웃과 비교해 보면서 "내 상처는 내 이웃의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그가 살아있는 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이웃과 비교해 보면서 "나는 그들만큼 나쁘지 않아. 만일 그들이 구원받는다면 나도 그렇게 될걸."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그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치료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하는 것은 "놋 뱀"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고, "바라보는 것"이 그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계획에 관한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이웃과 우리 자신과 교회와 장식물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떼어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고정시키고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룩하신 일을 받아들입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놋 뱀"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치료약입니다. 어떤 다른 이 안에서도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행4:12). "놋 뱀"을 바라보기를 거절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듯이,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거절하는 모든 이들도 죽을 것입니다.”(라킨의 Rightly dividing the words of truth 중에서 발췌 인용). 놋뱀을 통해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노래합니다(17). 21절에 왕의 큰길(왕의 대로)란 말이 나옵니다. 이 길은 후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걸으실 재림의 행로입니다. 26-35절까지는 계속 승리하는 이스라엘입니다(26,28,29,30,32,35). 22장은 모압의 대언자 발라암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 장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과 주의 종들이 배워야 할 교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12절에서 주님은 발람에게 세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르시되, 1)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2)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지니 3) 이는 그들이 복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니라.](12). 하지만 발람은 2/3를 삭제하고 첫 번째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나마 직접 화법이 아니라 대충 메시지만 전했습니다(13). 20절과 2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발람은 다시 한번 주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오사 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오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할지니라, 하시니](20). 그러나 발람은 일어나자 마자 바로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의 통치자들과 함께 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발람을 향해 칼을 빼 드셨습니다(22). 35절에서 주님은 다시 한번 [너는 오직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할지니라]고 단단히 경고해 주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발람과 같이 주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임의대로 행하는 자들은 주의 칼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발람은 돈을 위해 길을 떠난 대언자입니다. 이것을 발람의 길(벧후2:15)이라고 합니다. 주의 종들은 어떤 경우에도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됩니다. 발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고, 심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발람의 잘못(유11)이라고 합니다. 발람은 발락을 가르쳐 자신이 저주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음행 하도록 하고, 그들의 신에게 절하도록 함으로 거룩한 백성들이 세상과 연합하고, 순례의 길을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민31:16 vs 민25:1-3). 이것을 발람의 교리(계2:14)라고 합니다. 이는 마귀의 전략 전술의 전형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할 수 없기에 항상 앞에 걸림돌을 두어 음행 하게 유도하고, 세상과 연합하게 함으로 주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게 합니다. 23장입니다. 발람은 어떤 대언자 못지 않게 위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24절에서 드러났습니다. [보라, 이 백성이 큰 사자같이 일어나고 젊은 사자같이 스스로 일어나서 탈취한 것을 먹으며 죽인 것의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니라.](24).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것의 피를 마실 수 있도록 신전 희생제에 유도했고, 자연스럽게 신전의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했습니다. 24장입니다. 주의 성령을 통해 대언하는 발람의 대언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장차 세워질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초림)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이 일어나서(재림)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자녀들을 다 멸하리로다.](17). 25장입니다.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의 죄에 가담합니다. 1-2절,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무르더니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하니라. 그 여인들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1,2). 행음하고 그들과 먹고, 우상에게 절을 함으로 순례의 길에서 이탈하여 세상과 연합하고,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동화되고,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4b,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이날에 죽은 사람이 24,000명입니다. 고린도전서 10:8에는 23,000명이라고 나오는데 1,000명은 미리 죽었습니다. 이 와중에 주님을 위해 질투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비느하스였습니다(11). 비느하스 덕분에 이스라엘 자손은 전멸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불의한 일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열심을 내는 모습과 같습니다(요2:17). 주님은 분명히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속였다고 말씀하십니다(18). 이것은 발람이 발락에게 가르쳐 준 마귀적인 지혜였습니다. 속임수!! 이것은 마귀가 성도들을 괴롭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속지말라!! 이것은 주님이 성도들에게 주는 반복적인 명령입니다. 26장입니다. 다시 인구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세대는 대부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가난안에 입성해서 전쟁을 수행할 새로운 세대입니다(2). 이들의 수는 1세대에 비해 약간 적었습니다(민1:46, 출38:25-26).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모두 죽었습니다(64,65). 27장입니다. 1-11은 상속자가 없을 경우에 대한 상속법입니다. 주님은 딸들이 상속을 받게 하셨습니다. 대신 딸들은 반드시 자기 지파의 사람과만 결혼해야 했습니다(민36:8). 12-13절은 모세가 들어갈 약속의 땅을 보지만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율법의 수여자는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영적 진리를 조명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주님 앞에 한 가지 기도를 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한 명의 목자를 세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15-18). 사람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한명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6-18, [주 곧 모든 육체의 영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우사 그로 하여금 그들 앞에 나가고 들어오게 하시며 또 그들을 인도하여 내고 들어오게 하사 주의 회중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니라.](16-18). 주님은 여호수아를 목자로 세우셨습니다(17-23). 모세나 여호수아는 목자로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28-29장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려야 할 헌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해 주시고, 규례들을 지킬 것을 철저히 명하셨습니다. 39-40, [너희는 정한 명절에 주를 위하여 이것들을 드릴지니 이것들은 너희의 서원이나 자원 헌물 외에 드리는 것으로 번제 헌물, 음식 헌물, 음료 헌물, 화평 헌물로 드릴 것이니라. 이에 모세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라.](39-40). 30장입니다. 서원, 맹세에 관한 규례입니다. 1-2절은 남자, 3-16절은 여자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7장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지난 시간 교제나 테잎을 참고하십시오. 31장은 미디안과의 전쟁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완벽한 승리를 주셨고, 이전에 속임수로 괴롭혔던 이들을 보복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날들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인들을 주님께서 원수 갚으시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32장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많은 가축으로 인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정착하고자 했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편리한 사고 방식입니다(5). 모세는 이전의 정탐꾼들이 행했던 죄와 그에 따른 주님의 심판을 통해 이들의 죄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16-19절입니다. 이들은 요르단 강을 건너 선봉에서 싸우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상속을 얻지 않고 이곳 길르앗에 상속을 얻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22,23). 이들의 결정은 롯과 같이 눈에 좋은 대로 행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또한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왕하15:29, 대상5:25-26). 33장입니다. 이집트 땅에서부터의 여정을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전체 여정을 요약 정리해 주신 것입니다. 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손 밑에서 자기들의 군대와 함께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때의 여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주의 명령대로 그들의 여정을 따라 그들리 나아간 것을 기록하였으니 곧 그들이 나아간 대로 그들의 여정이 이러하니라.] 1-15절까지는 이집트에서 시내산까지, 16-17절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입니다. 18-49절은 38년간의 광야 생활입니다. 50-56절은 가난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입니다. 55절은 왜 그들을 몰아내야 하는가?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 땅의 거주민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그들 가운데서 남겨 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너희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55). 34장은 유업의 분배입니다. 1-12절은 땅의 경계이며, 13-39은 땅을 받은 지파와 지파의 우두머리 이름입니다. 35장입니다. 레위 지파가 거할 도시들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유업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살 도시가 필요했습니다. 총 48개의 도시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6도시는 도피성으로 정했습니다(6).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우연히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그들이 피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도피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실 것임을 보여 줍니다. 36장입니다. 주님께서 딸들이 받은 상속이 남편의 것이 되어 지파별로 받은 상속의 땅이 변하지 않게 하신 법규입니다(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