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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겨울 훈련 집회 메시지9. 신성한 건축의 일(요약)
oikos

2005년 겨울 훈련 집회 메시지9. 신성한 건축의 일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기 위한 선결 조건"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열 가지 선결 조건이 있다. 이 열 가지 중점들은 신성한 건축의 일에 대한 이 메시지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여 준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건축물이 하나님-사람임을 보아야 한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하나님-사람이 하나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우리는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말해서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완결된 위대하고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을 볼 수 있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은 계시와 조성에 의해 알 수 있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으로 건축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 이전에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일이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순히 “주여, 하나님의 건축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 존재 안에 건축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의 일은 반드시 그분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복음 전파, 목양, 가르침, 훈련은 모두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들을 세우고 확산하는 것도 몸을 위한 것이다. 몸은 일의 순수성을 판가름해 주는 척도이다. 몸을 위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세우는 일을 하는 이들은 큰 손상을 입힌다. 그들의 일은 몸을 위하기보다 몸에게서 봉쇄되고, 자신들의 가장된 권위로 통제하는 어떤 지역이나 국가 혹은, 대륙 단위의 제국을 산출한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몸을 건축하기 위해 몸의 일을 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의 생활과 일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일은 참되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일은 단순히 직업이 되고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일과 부합하지 않게 된다. 찬송가 655장은 “생명이 흘러 나가야 참다운 봉사이니 / 생활과 일 하나 돼야 참 열매 맺게 되네 / 산 체험 안의 말씀이 사람을 살려 내니 / 체험과 일치되어야 능력의 말씀이라”라고 말한다. 건축자이신 주 예수님께는 생활과 일이 동일했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는 이들은 생활과 일이 동일해야 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처음 사랑과 처음 일을 가져야 한다. 처음 사랑은 모든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첫째 지위를 내드리는 사랑이다. 처음 일은 처음 사랑에 의해 유발된 봉사의 행위들이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그 기름을 주 예수님의 발에 쏟았을 때 그녀는 나드 기름을 주님께 허비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하며 이 일들은 사랑에서 분리된 단순한 행위들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가서 7장 11절과 12절처럼 우리는 우리의 연인에게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해야 한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행위들을 표현하며 우리가 어떤 봉사의 일에 참여할 때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며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엄중하며 귀중한 원칙이다. 안식과 누림과 신선하게 됨이 없이 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나서 안식하셨지만 사람은 안식하고 나서 일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누리며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이 메시지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위탁하실 수 있는 일의 네 가지 특징을 볼 것이다. 우리는 은혜 시대 안에 있고 주님은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복음을 축복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분께서 제한적으로 축복하시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완전히 위탁하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그분과 함께 일하고 우리의 일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일이 우리를 주님에게서 단절되고 고립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신격에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과 조성과 표현과 기능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사람인 솔로몬의 복사판인 술람미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기능이나 보좌에서 온 우주를 주관하는 기능에 있어서가 아닌, 건축의 기능에 있어서 하나님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술람미,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분이신 솔로몬의 복사판이 되어야 한다. <아가서 결정-연구>에서 우리는 술람미가 솔로몬의 다른 형태인 것을 배웠다. 이는 마치 하와가 다른 형태의 아담이었고 교회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인 것과 같다. 술람미라는 이름도 솔로몬의 여성형이다. 솔로몬은 건축자였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연인이 솔로몬의 복사판인 술람미라는 것은 그녀가 건축의 일의 면에서도 그분의 배우자요 복사판이며 재생산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녀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며 또한 그분의 의도와 목표도 안다. 그녀는 그분과 내재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동일한 일을 한다.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대행자인 지혜로운 주 건축자와 하나 되어야 한다. <사무엘상 ․ 하 라이프 스타디>에서 이 형제님은 사무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했고 그의 존재도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였으며 하나님을 대표했던 그가 바로 하나님의 대행자였다고 지적하셨다. 고린도후서와 다른 책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도 분명히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 메시지 6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3장 10절의 ‘주 건축자’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키텍톤’이라는 것을 보았다. 히브리서 11장 10절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라고 하면서, 설계자에 대해 말한다. 한 면에서 설계자는 하나님이셨지만, 다른 면에서 ‘주 건축자’라 불린 설계자는 사도 바울이었다. 구약에서 모세가 식양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그 어떤 사도들보다 더 완전한 식양을 받았다. 바울은 그 일을 감독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부분에 상응하는 두 지역의 일-유대인 가운데서의 일과 이방인 가운데서의 일-만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분명했다. 이방인의 지역은 매우 방대했지만 하부 지역은 없었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나 마케도니아를 위한 하부 지역이 없었고 국가들에 속한 사도들도 없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족속들이 거하는 이방인 세계에서의 일을 감독하는 지혜로운 주 건축자였다. 오늘날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지혜로운 주 건축자와 하나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는 먼저 그들이 바울과 하나이며 바울의 계시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본 것을 보고 이해하며 그가 받은 식양을 받기 위해 시대의 사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원칙적으로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이 형제님께서 지혜로운 주 건축자였다는 것이다. 건축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형제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신약의 본은 디모데이다. 고린도전서 16장 10절은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라고 말한다. 바울은“그가 주님의 일을 한다.”라는 말로 끝내지 않고 “그도 나와 같이”라는 말을 추가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라고 편지를 섰다. 디모데는 바울과 하나였고 지혜로운 주 건축자와 한 혼이 된 사람이었다. "신성한 건축의 일은 새롭게 됨과 변화를 통해 수행됨" 새롭게 됨이나 변화가 없다면 건축의 일은 없다. 우리는 새롭게 되고 변화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건축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새롭게 되고 변화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여, 건축을 위해 저를 새롭게 하소서. 건축을 위해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 존재 안에 더해져 우리의 옛 요소를 대체하고 배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여, 당신의 요소를 제 안에 더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해야한다. 새롭게 하시는 영은 우리의 거듭난 영과 연합된 한 영이 되시도록 연합되심으로 우리의 생각 안으로 퍼지셔서 우리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주여, 몸과 교회 생활과 건축을 위해 저의 생각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변화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진대사적인 기능이며, 신성한 생명의 요소를 우리 안에 더함으로 우리가 밖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변화는 하나님-사람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대량 재생산을 위한 것이며, 우리를 신성한 형상으로 형체 지어 하나님의 맏아들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기 위한 것이다. 새롭게 함은 변화를 가져오고, 변화는 건축을 가져온다. 새 예루살렘의 벽옥 성벽의 건축은 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우리는 변화를 건축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도록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가 건축이다.’ 우리의 건축은 결코 우리의 변화보다 많을 수 없다. 신성한 건축의 일은 믿는 이들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신성한 생명 안에서 함께 결합되는 것임 우리는 자람으로써 일하고, 그 후에 자람은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결합을 가져온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신성한 생명 안에서 함께 결합될 때 건축 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건축은 믿는 이들이 생명 안에서 성장함으로 이루어진다. 생명의 성장이 건축이다. 우리는 생명의 성장이 건축이라고 나팔을 불어야 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일을 한다고 해서 건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건축물 안으로 건축되지 못한다. 우리의 건축은 생명의 성장과 정비례한다. 장막의 널판들은,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믿는 이들을 예표한다. 띠들은 초기의 영이 연결하시는 영이 되시는 것을 상징하고, 이 영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신다. 장막에 서 있는 널판들은 띠로 연결되는데, 그 띠는 금이 덮인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건축에 이르도록 자라실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 완전하지 않으며 완전한 단위가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짝을 이룰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 이러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독립적인 개체들이다. 그들은 개인적이며 독립적이고 건축될 역량이 없다. 일에 있어서 어떤 형제가 자신을 놀랍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며 자신 옆에 서 있는 널판도 없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다. 몸의 지체들은 머리를 붙듦으로 함께 맞추어진다. 몸의 지체들은 서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데, 이는 모든 관계가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즉 머리를 통해, 머리 안에서 모든 관계가 이루어진다. 몸의 지체들은 머리를 붙듦으로 함께 맞추어지는 것이지 서로를 붙잡거나 건축에 있어서 ‘친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건축에 있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은 건축의 원칙에 위배된다. 몸 안에서는 지체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를 붙잡는다. 모든 관계들은 간접적이다. 즉, 머리를 통한 것이고 머리 아래 있다. 신성한 건축의 일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점유된 그들의 영 안에 계신 그 영에 의해, 다시 말하면 한 영으로 연합된 그 영과 그들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는 것임 에베소서는 몸에 관한 책이며, 매 장에 사람의 영에 관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몸이 전적으로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있는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예루살렘인 우리의 영-우리 영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우주적으로 광대하여 우리 개인의 영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영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영 안에 있을 때 신성한 생명, 신성한 인격, 신성한 영을 만지고 있다는 의식이 있다.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영과 함께 몸, 곧 건축물을 갖는다. 몸은 지방적이지 않다. 몸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지 않다. 몸은 초월적이다. 바울의 영이 여기 있으며 요한의 영이 여기에 있고 워치만 니 형제님의 영이 여기 있으며 이 형제님의 영이 여기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각으로 점유되지는 말라. 다만 주님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리고 “주여, 우리의 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라.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단지 개인적인 믿는 이로 있는 것에서, 우리의 영 안에서 벧엘 안에, 건축물 안에, 몸 안에, 왕국 안에 있는 그러한 지점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은 참으로 놀랍다! 건축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각 지체에게 여러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그 영의 운행에 의해 이루어짐 삼일 하나님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시려는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믿는 이들 안에서 움직이신다. 우리는 그 영의 다른 분깃 혹은 다른 은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 영의 나타남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생명 안에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고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집의 식양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신성한 건축의 일의 원칙들을 보아야만 한다. 이 원칙은 출애굽기 31장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얻어진 것으로서,<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의 메시지 172번과 회복역의 뛰어난 각주를 통해 볼 수 있다. 출애굽기 31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건축하는 일에 관한 명령을 주셨다. 이때는 성막을 실제로 건축할 때였다. 12절부터 17절까지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삽입된 단락이 있다. 분명히 안식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건축의 일을 수행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으며, 이러한 연관성은 안식일의 원칙에서 알 수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육 일 동안 일하시고 나서 제칠 일에 안식하셨다. 그런데 제육 일의 마지막 무렵에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에 따라 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칠 일은 사람의 첫째 날이다. 아울러 하나님께 제칠 일은 안식하고 시원케 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이 행한 처음 일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누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안식하고 나서 안식과 공급으로 말미암아 일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많이 하더라도 육 일이 지나면 또 다시 안식해야 했다. 그러므로 안식하고 일하고 안식하는 것이 순서였다. 일은 반드시 안식과 누림과 채워짐과 하나 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범하면서 신성한 건축의 일을 하는 것은 심각한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사역을 수행하면서 밤낮으로 수고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일은 값진 것이지만 우리는 안식일의 원칙을 범하는 덫을 반드시 피해야 하며 “주님, 당신은 이제 건축할 때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아멘’이라고 말하지만, 주님, 저는 먼저 당신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한 일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보상받을 것임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은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 안에 넣는 일을 하셔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하나로 만드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수행하고 계신 일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일이다. 사역의 원칙은 사역을 수행하는 사람이 단지 객관적인 것을 공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의 조성 곧 그 안에 새겨진 것을 공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하는 것이라고 말만 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건축되셨다는 증거,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겨지셨다는 증거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말할 때 건축되신 하나님 곧 자신 안으로 건축되신 하나님을 말한다. 나는 이것이 내가 이 형제님을 알아 왔던 그 모든 시간 동안 형제님이 행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형제님은 형제님 자신을 공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만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형제님 안에 새겨진 하나님을 공급했다. 우리가 사역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공급받는다. 이것이 우리의 일의 내재적인 요소이다. 만일 우리가 조성되지 않았다면, 만일 우리 안으로 건축되신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건축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객관적일 뿐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일 수 없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건축의 일을 하기 위한 선결 조건 중 하나가 우리 안으로 건축되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 당신의 건축물을 위하여, 건축하는 일에 제가 참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 존재 안으로 건축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역의 유일한 일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사람 안으로 건축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위탁하실 수 있는 일에는 네 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계시가 있어야 한다. 일의 근원과 시작이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비롯된다. 우리는 일에 있어서 주제넘은 죄-하나님 밖에서 행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지시하시지 않은 일을 시작하는 죄-를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의 진행과 진전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의 결과는 우리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건축하는 우리의 일이 우리의 타고난 사람(나무)이나 타락하고 육체에 속한 사람(풀)이나 땅에 속한 근원에서 나온 것(짚)으로 된다면, 우리의 일은 불태워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귀하고 변화된 재료이신 신성한 삼일성으로 건축하는 이들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