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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n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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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유감
jny0801

피난길이 생각 납니다

.

그리고  아쉬움이

 

67 년전  고요한 일요일 아침 북한은 대군을 이끌고

남한을 침공 했읍니다

비행기 한대 대포 하나 없던 대한민국  더군다나  전날

한국군은  국방부청사 준공에 대한 축제를 하느라  모두가

깊은 잠에 들어 잇었읍니다

우리 군은 속수 무책으로 후퇴를 하였고 거의 부산만 남겨

놓은채 대한민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젔읍니다

이 때에 미국을 선두로 유엔군이 진입해 인민군을 몰아 부치고

평양까지 진격 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하고 3팔선이

그어지고 휴전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읍니다

그리고 북한은 오늘도 우리를 핵으로 위협하며 적하 통일을

노리고 있읍니다

6 25 는 북한의 남침으로 이루어 젔으며 남침으로 날미암아

시가가 페어로 변하고 무수한 인명 피해를 입었읍니다

 

군인 사망 실종     281261 명

민간인 사망실종   676811 명

유엔군 사망 실종   4600 0 명

합계                 1004072 명

이렇듯 많은 회생자를 내었고 재산적 피해는 이루 말할수 없는

피해를 주었읍에도  6 25 는 많은 젊은이들이 북침을 했다는 말을

할때 또 북의 위협속에 그어느때보다 나라 안보가 소중한 이때

사드배치 반대나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볼때 실로 안타깝고

가슴이 앞으지 않을수 없읍니다

저는 조금이나마 6 25 의 진실을 알리고자 나의 고향 개성에서 격은

6 25 을 적어 봅니다

..

6.25 를 맞아

 

오늘밤 하늘의 별이 몆개인지 새어 보세요 이것이 오늘 숙제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어떻게 별을 새나 걱정을 하다가 날이 샜읍니다

날이새자 먼동이 트기전에 개성쪽에서 쿵쿵 대포소리가 들리시작

했읍니다

 

개성은 우리집에서 8키로 정도되었읍니다 우리가족은 놀라서

밖으로 나왔고 이웃들도 밖으로 나와 웅성대었고 전쟁이 났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읍니다 우리가족은 서둘러 짐을 차리고 피난길에

올랐읍니다

우리는 큰길로 통하는 집옆에 길을 택하지 않고 논둑을 딸아 샛길을

택했읍니다 우리가 개울을 따라 가로지른 큰 미르나무 벽을 지나

백여미터 지났을 때 였읍니다

생 소리가 들이는가 싶더니 큰 나무에 로켓포가 맞는 소리가

들렸읍니다

우리가족은 공포에 떨었고 가슴을 쓸어 내렸읍니다 우리는

행운이었읍니다

만약에 그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족은 전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였읍니다

건너편 대로에는 말을탄 공산군들이 줄을 지어 남쪽으로 가고 있었읍니다

이미 우리는 피난길이 막혔던 것입니다 그길로 우리는 근처 친척집에 머물다

다시 제집으로 돌아와 공산 치하의 생활이 시작 되었고 1,4후퇴와 함께

어려운 피난길에 올랐읍니다

피난길에는 삼춘 엄마 둘째형 삼춘아들 그리고 나를 합해 5식구였읍니다

남쪽을 향해 얼마 못가 우리는 임진강을 만났읍니다

그리고 강뚝에는 강을 건너지 못한 수만의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진을 치고 있었읍니다

모두가 공산치하를 경험 하였고 그들은 자유를 찾아 피난길을 택한 피난민

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불안 했읍니다

정말 절망 적이었읍니다

그런데 깊은밤 삼춘이 용케 쪽배를 빌려 왔읍니다

우리는 들킬세라 몰래 몰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배를 저었읍니다

그리고 배는 우리를 강을 절반 넘었을 지음 우리를 내려주고 그냥 되돌아 가

버렸읍니다

우리는 목에 차는 물을 헤 저으며 무사히 강을 건너 왓읍니다

정말 우리는 천운이 엇읍니다

우리는 그때 그 쪽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공산치하에 남아 북한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강을 건넜으나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읍니다

이미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잇어 피난길을 방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난민 행렬을 따라 가다 기차를 만나 기차를 타려니 인파가 너무밀려

았읍니다 올라타기가 쉽지 않았읍니다

차를 ?삼춘이랑 아들은 기차를 탓으나 나머지는 타지못해 헤어지고 다시

형은타고 어머니와 저는 타지를 못해 우리는 각각 헤어지고 말앗읍니다  

다행이 다음 정거장에서 형은 만났으나 결국 삼춘과 삼춘아들은 만날수

없엇읍니다 ......

피난민 행렬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가다가 충청도의 어느 산골짜기에

머물게 되었고 우리는 산나물을 뜯어  시장에 가서 보리쌀이랑 바꾸어

생계을 이어 갔읍니다

얼마후 우리는 삼춘과 만났으나  이번에는 삼춘과 형마저 잊어 버리고

달랑 어머니와 떨어진 저는 살길이 막막 했읍니다

어머니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늘 사과랑.배 .포도. 떡이랑 .빵.과자.

사탕등을 이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읍니다

나는 그때 나이 열살 아무것도 할수 없엇고 동내 아이들이랑 놀고만

잇엇읍니다

그렇게 김포에서 어머니께서 가은 갖은 고생을 고생을 하시는 중에

서울에사는 큰형을 만났읍니다

그리고 서울로 왓읍니다   

그리고 형님과 살다가 형님이 월남 기술자로 갔다가 카나다로 이민을

그리고 1977년 저도 카나다에 이민을 왔읍니다 .

 

이민을 와서 이제껏 토론토에 머물고 있읍니다 지난 4월 22일 우리 내외는

캐나다에 온지 35 년만에 처음 3박 4일의 뉴욕 관광에 나섰읍니다 3박

4일중에 루레이 동굴관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도착 하기전 가이드가

동굴에 관한 이야기와 고장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가슴이

저리고 고마움에 눈물이 핑도는 순간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평온하기만한

아름다운 이마을에서 16 명의 꽃다운 젊은이 들이 이억만리 미지의 나라인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6 25 전쟁에 목슴을 바첬다는 설명이었읍니다

하물며 미국전역에서 수만의 젊은이 들이 회생이 되었음을 생각하니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수 없읍니다 캐나다에서도 516 명의 젊은이들이 회생되었다고

하니 새삼 고마움에 젖어 듭니다 또한 그외에도 16개국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수많은 피를 흘렸다 하니 오늘 한국의 발전된 문화혜택이

그들의 회생위헤 이루어 졌음을 생각할때 고마운 마음 금할수 없고 그들의

소중한 회생이 헛되지 않도록 굳건이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호국영현들의 명복을 두손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