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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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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의 케나다 방문
evergreenon

정신 없는 몇 개월 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적응 하느라. 내 조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연락을 제대로 못하였다. 어느날 7월 22일경에 대구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와 조카 그리고 내 동생이 카나다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 중 내 조카와 우리 아이들은 한국 있을 때부터 정말 가까이 지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과 이별을 한 후에 서로가 보고 싶어서 그의 메일 전자우편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었다. 우리 아이들은 달력에 오는 날짜를 그어가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벌써 봄은 물러가고 여름은 코앞에 와 있었다. 우리가 사는 주변 호수에는 낚시를 즐기는 어른과 아이들로 시끌벅적 했다. 그리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시에서 나무로 안정스릅게 데크를 지면과 물과 일치하도록 잘 설치해 둔 곳이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 있었을 때 20년 정도의 낚시 조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곳에 짐을 부칠 때 자신의 낚시 도구를 약간 챙겨왔다. 혹시 쓰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남편이 낚시하는 데는 항상 구경꾼들이 만원 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있을 때도 낚시 대회를 가면 항상 1.2등을 다툴 정도로 아주 과학적인 낚시를 한다. 모르면 연구하고 이유가 어찌 된 건지 이것저것 실험을 하고 낚시춘추나 월간낚시를 매달 받아 보면서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고 야튼 다른 사람보다 좀 특출한 그런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한번은 호수에 사람들이 웅성거려 가 보았더니 남편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낚시를 하고 있는지 구경하는 구경 꾼이었는데 1시간 정도에 메기를 50여 마리를 잡아 올리니 모든 사람들이 그 기술에 놀라고 있었다. 당연히 잡힌 고기는 손 맛 만을 보고 되돌려 보내곤 했고 어떤 아시아인들은 잡은 고기를 자기를 달라고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메기 매운탕이라면 소주 생각이 나고 또 당연히 잡은 고기로 매운탕 끓이는 게 당연하지 않든가. 그럭저럭 남편은 그 주변에서 인기가 대단해서 유명인사가 다 되어 버렸다. 아이들에게 낚시하는 방법, 방류, 미끼선택 등 다양하게 그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를 만나면 같이 놀기를 좋아하고 그야말로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 소문이 나 있었다. 캐나다는 써머타임제를 적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시기가 4월7일 첫째 일요일이 시작 기점인데 한 여름철엔 일몰시간이 저녁 9시30분이 되어야 해가 서서히 내려간다. 그리고 보통 직장인들도 4시30분이면 퇴근을 하여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족 우선 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직장을 파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가족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공원 등을 다니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으로 배려한다. 7월22일 드디어 한국에서 올 친척들을 위해서 우리는 온 가족이 집의 대청소를 실시했다. 한국서 보다 사는 게 누추하게 보일까 봐 꽃도 사서 꽃꽂이도 하고 분위기를 바꾸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그리곤 음식 준비도 아울러서 해두고 우리는 공항을 향했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있었는데 공항에서 대기하면서 나는 내가 영주권을 받고 이렇게 마중 나와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왜 이렇게 상봉을 할 때 눈물이 날까? 괜한 그런 눈물은 아니다.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차로 집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쉼 없이 서로의 안부와 고국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집 앞에 차가 주차 되는 순간 아이들은 환성을 지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집은 그런대로 외국 풍의 기분이 드는 타운하우스 여서 이곳의 아파트 보다는 그래도 첫인상이 덜 서글펐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골프장과 여행 지를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며칠 후 서울에 살고 계시는 숙모가 캐나다로 여행 중 벤쿠버에서 우리의 집을 방문하신다는 것 이었다. 이렇게 합세하여 3 bed room인데 거실까지 활용하여 그야 말로 집단 생활을 했으나 모두가 집안 사람들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삼촌이 3분 계셨는데 둘째 삼촌은 일찍 타계를 하셨고 작은 삼촌은 아직 부산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제일 큰 삼촌께서는 소아과 의사로서 3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는데 아버지께선 한번도 미국 삼촌 네 집을 방문한적이 없으셨다. 그래서 캐나다에 오신김에 미국 동생네 집에 한번 다녀 가게 하시자고 동생과 나는 결정을 하고 남편에게 부탁을 했는데 남편은 조심스럽게 아직까지 영주권도 받지 않은 상테속에서 미국에 어떻게 가고 또 행여 불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너무도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나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에서 무리지만 시행하자고 맘을 먹고 다음날 아침 미국을 향하기로 했다. 삼촌께서는 미국 West Virginia에 살고 계셔서 이곳에서 차량을 이용하여 가려면 약 17시간 정도가 소요가 된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리라곤 생각도 못했고 대부분의 초행자가 느끼는 것과 같이 조금만 더 가면 하는 마음에서 조금씩 더 가다 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러했다. 캐나다 국경을 통과하여 미국국경에서 검문을 받고 여행 승인서를 받자마자 그저 마음은 삼촌 집에 다 왔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너무나 머나먼 길이였다. 내가 지도를 보고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17시간이 소요되어 목적지에 도착이 되었다. 지금 그 누가 돈을 준다 해도 이런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와 삼촌의 상봉이라는 커다란 과제와 연로하신 아버지를 위한 먼 이국 땅에서의 마지막 효도 라 고나 생각할까. 어쨌든 머나먼 그 여정을 마치고 우리는 돌아오는 도중에 이렇게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부산 숙모님의 말씀에 따라 Philadelphia에서 하루를 묵고 뉴욕주변 관광을 했다. 말로만 듣던 만하탄 거리를 거닐고 쌍둥이 빌딩 배경과 자유의 여신상등에서 우리는 사진도 찍고 재미있는 여행을 하였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우리집 서재에 지금도 걸려있는 쌍둥이 빌딩을 배경으로 한 이사진이 마지막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아버님과 동생이 이곳에 온지 벌써 한달 이 되었고 이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별할 때 보다 그 감정이 달랐다. 또한 앞으로 2개월 후면 이곳의 체류 6개월 만료가 되니 우리 식구 모두가 한국을 한번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고 그때 또 만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주권 나오기를 빌겠다면서 비행기에 올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