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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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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울님과 함께 나이아가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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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는 1년 정도 먼저 온 남편의 대학원 동기 한분 이 있었는데 대학원 시절에는 서로 집을 오가며 공부도 하고 식사도 하곤 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는 분이 실지 있었다. 그런데 전화 연락을 하려 해도 짐을 쌀 때 어딘가 중요하게 넣어둔다고 남편이 넣어 두었는데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의 한인거주 전화 번호부를 뒤졌더니만 전화번호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전화를 했더니만 깜짝 놀라면서 왜 연락을 안 했느냐는 것이다. 자신도 바뀐 전화 번호를 알려 줬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 연결이 된 후 남편 친구는 바로 우리집으로 달려 왔다. 약 40분 정도가 소요되는 토론토 다운타운 이였기에 비교적 가까운 편에 속한다. 그리고는 무조건 아직 대충 이삿짐 정리는 끝났지만 완전하지는 않다고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안내로 그의 집으로 가다가 집에서 가까운 유명하다는 월남 쌀국수집이 유명하다고 대접차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똑 같은 양을 각각 주문을 했는데 이곳에 살면 먹는 음식양도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반 정도를 먹었을 때 이미 배가 부르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들은 국물까지 다 비우는 것 이였다. 이곳에 살려면 아무래도 식사양이 불규칙하고 한번 식사할 때 많이 하게 된다 나….. 이런 저런 한국에서 있었던 대학원 생활시의 주변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순간 너무나 이들이 부럽다는 것을 느꼈다. 이 집은 아빠친구의 형님께서 토론토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며 2년 전에 이곳에 부인과 아이들을 보내 적응시키고 또 학교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친구 혼자 한국에 있으면서 직장 일을 끝내고 청산한다고 1년 정도가 더 소비되었다고 했다.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부러울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시원하게 잘 끊인 곰탕 국으로 식사를 했는데 실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국 고유의 음식이 아닌가 싶었다. 아빠 친구가 교회분들 과 약속이 있다고 식사 후에 나이아가라로 달래를 캐러 간다고 하는것이였다. 동행 하자기에 우리는 별로 할일 없는 사람이 아니든가 그래서 승용차에 몸을 싣고 그들과 함께 카나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관광지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하게 되었다. 원래 관광의 목표가 아니 였고 달래를 캐러 가는 것이 였다. 나이아가라로 향하는 401고속도로와 연계되는 QEW도로는 평일이라서 그런지 한산 하였고 또 보통 6-8차선으로 되어 있어 한국에서 몇몇 군데서나 볼 수 있었던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가 너무나 맘에 들었다. 바쁜 사람들은 주행 차선을 이용했지만 남편 친구는 도로가 좋아서 이런 곳에서는 Cruise장치를 이용해서 다닌다고 했다. 한국의 도로 사정과는 대조적이고 또 장거리 이용률이 많기 때문에 Accelator 밟기에 피곤을 느끼면 이런 장치를 이용하고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어느덧 나이아가라 근방의 한 농장에 이르렀다. 한국과는 달리 이곳 농장주들은 이것을 잡초쯤으로 여기는가 보다 온 농장 밭이(전년도 에 콩밭) 달래 투성이다. 일행들은 소연한 농장 가에 주차를 하고 모두 내려 한 사람은 삽으로 엎어주고 한 사람은 흙을 틀며 수확 물을 거두었다. 나의 식견으로 한국 있을 때 보통 산으로 남편과 산행을 하면서 산골 양지 녘에서 달래를 캐곤 하였는데 이곳은 진흙 밭 속에서 케는게 너무나 이상한 기분을 가지게 만들고 있었다. 일행들의 말에 의하자면 이 달래로서 달래김치도 담고 달래 초고추장 무침, 전 등 모든걸 다할 수 있고 봄철의 단백한 채식으로서는 그저 그만 이라는 것 이다. 일행들과 좁은 차 안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면서 남편친구가 일일이 우리들에게 일행들을 소개 시켜 주었고 대부분의 일행들이 이곳에서 몇 년씩 오래된 분은 10년 이상의 이민 생활을 했었단 분들 이였다. 내 생각으로는 하나부터 끝까지 모든 게 부러울 따름이다. 이들과 헤어진 후 우리는 생전 처음가보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게 되었다. 말로 듣고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그 장엄한 나이아가라 폭포는 너무나 장관 이였고 케나다 지역에서 관광을 하면 미국 폭포나 카나다 폭포를 다 감상 할 수 있지만 미국쪽에서는 그 장엄한 두 곳을 보기가 힘들다 는 것이다. 캐나다 폭포는 낙차가 54m,너비가675m로 모양이 말발굽 같다 하여 홀스슈(Horse Shoe)폭포라 하기도 한다고 했다. 고트섬을 끼고 건너편 쪽에 있는 미국 폭포는 낙차가 56m,너비320m로 케나다 폭포에 비하면 지류이기 때문에 수량은 1/6에 불과하다고 했다. 미리 온 선배이자 남편의 친구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이해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람을 마치고서 우리는 Niagara on the lake 이라는 관광 루트를 따라서 돌아 보기로 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로 소문이 나있는 나무로 지은 약 6명정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한 교회를 가는 도중에 들르게 되었다. 이 교회는 Way Side Chapel이라고 불리어 지는데 사실 주변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는 신혼 부부들의 허니문 장소로 또한 결혼식 장소로 매우 인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신랑신부와 주례신부, 증인 2명이 들어가면 교회가 꽉 차게 된다는 남편 친구의 귀뜸…우리는 우리가 왔다는 사인을 하고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가게 해달라고 ……. 우리는 발길을 돌려 계속 온더 레이크를 향했다. 실지 이곳은 19세기 영국의 영향이 짖게 남아 있는 자그마한 소도시로서 넓은 온타리오 호수에 면하고 있다. 이곳은 거리마다 영국풍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산책을 겸하며 골동품도 구경하면서 그 클래식한 분위기에 만취해보면 그만이다라는 것이다. 온 더 레이크 입구에서 1814년 미국군에 의해서 장악되었던 요세를 영국군이 다시 장악했다는 Port Erie를 지나 치면서 영국풍의 즐비한 건축양식과 상점들이 나타났는데 메스컴에서 본 영국을 이곳에 옮겨 놓은듯한 인상을 풍겨 주기에 충분 할 것 같았다. 잘 정리된 거리를 따라 상점들에 전시해둔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보면서 이곳의 관광을 후에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면서 오리라고 다짐하면서 나이아가라 관광을 끝내게 되었다. 다시 남편 친구의 집으로 돌아오니 어언 해는 서녘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오늘 캐온 달래로서 다양한 음식을 반찬 겸 만들었고 우리는 고향을 생각하며 맛있게 들었다. 잠시 바람을 쇠러 밖에 나왔는데 복도 입구부터 시작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한국인들이다. 이곳은 한국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다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을 때 들은 얘기지만 나는 혹 나중에 캐나다에 정착을 한다면 이곳과 한국인이 밀집되어 있는 이런 지역은 아니 택하겠다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또한 저녁에 둘러 앉아 예기 도중에 이곳에도 한국 못지않게 학구열이 대단해서 치맛바람이 실지는 한국보다 더 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