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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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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에서 첫둥지를 틀다
evergreenon

캐나다에서 첫 둥지를 틀다 원래 남편은 잠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절대 늦잠 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둘째 날도 다른 사람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에 혼자 살며시 새벽 조깅을 한다고 나갔다. 아침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괜히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난 그를 믿는다.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는 그 이고 보면 별반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도 내 마음은 왜 이럴까? 그이가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정말 공기도 좋고 주변에는 호수도 있고 호숫가로 자전거 트레일러도 있고 등등 좋은 점들을 이야기 하면서 타운하우스 단지쪽에 Rent Available이라고 적혀 있어 우리 아침 식사 후에 그곳에 들러 보자는 제의를 했다. 나라가 너무나 커서 그런지 주변에 산이 없어서 그런지 아침 조깅 시에는 그렇게 좋은 날씨였는데 하는 남편 말을 식사시간에 들었는데 우리가 밖으로 나올려는 순간 비가 쏟아져 내린다. 둘은 비를 맞으면서 남편이 아침에 보아 두었다는 렌트 오피스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연세가 지긋한 두 분께서 근무를 하고 계셨는데 처음에는 부부가 아닌 줄로 알았지만 나중에는 부부가 함께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랜트할 집이 있느냐는 질문에 너무나도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을 하면서 우리가 금방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렌트회사는 아주 렌트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큰 회사인데 항상 몇 년 만에 이 단지 저단지로 인사 이동을 시킨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능하면 부부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것 같았다. 보통 여자는 메니저로서 일을 하고 남자는 유지 보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메니저의 말에 의하자면 마침 빈집이 한곳 있긴 한데 안내인과 함께 가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안내인을 따라 갔다. 타운하우스 였다. 쉽게 이해를 돕자면 한국의 연립주택 개념으로 보면 옳을 것 같다. 2층 타운하우스 였는데 2층엔 3개의 방과 조그마한 화장실 또 창고가 있었고 1층에는 거실과 식사할 수 있는 공간과 부엌이 있었다. 1층 부엌 창으로는 자그마한 뜰이 보이면서 나무탁자와 그 뒷편에 낯설지 않는 개나리가 만개하고 있었다. 우선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할것 같았다. 한국 있을 때는 훨씬 이보다 깔끔하고 좋고 큰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잖는가. 오피스로 돌아와 보니 메니 져는 마음에 있는가라고 물어왔다. 우리는 마음에 있다고 대답을 했더니 내일 예약시간을 주면서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중에서 보증인을 한분 모시고 오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조 선생님에게 한 달에 1100불,주차료 35불을 지불하면 전기세,물세,온난방료는 모두가 포함된다는 얘기를 들였더니만 좋은 조건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쾌히 내일 보증을 서주겠다고 하셨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보증이란 단어를 너무나도 흔하게 들어 보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좋은 일 궂은일이 비일비재하게 상존 되어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보증을 서주고 잘되었다고 감사의 보답으로 떡 사 들고 방문했다는 말을 경험으로 들어본 사람은 있는가? 오히려 잘못되면 은행이나 채무회사에서 연대 보증인에 대한 변제만을 요구하는 것 밖에 더 보았는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 Yes” 라고 승낙해준 조 선생님께 실지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의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실지 나중에 중간중간에 거론이 되겠지만 만약의 승낙이 없었다면 실지 아주 어려운 케나다의 생활 출발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이렇듯 남에게 배 풀고 도움을 서로 주고받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머나먼 이국 이땅에서 한국의 친척 누구보다 더 가까이 지내고 서로의 감사함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명절이면 서로 모여 외로움을 달래고 자주 안부 전화도 하면서 누구보다도 더욱 가깝게 지내고 있다. 지금 역시 40분 정도 떨어진 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언제나 이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삿짐도 조선생님댁에서 했다는 회사에다 부탁을 했다. 하지만 이삿짐을 찾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까 해서 너무 걱정이 되었다. 이는 내가 영주권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많은 양의 짐부터 부쳤기 때뭉에 방문 여행객으로서 또 유학생으로서 이 많은 짐들이 필요한지에 대해 추궁이라도 하는 날이면 또 곤란한 직면에 부딪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한가지 일을 해결하면 한가지 걱정이 앞서는 그야말로 걱정의 연속만 줄을 지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사 짐 업체 사장이 직접 우리의 사정을 알고 세관에 들러 고 설명도 잘 하시어 일사 천리로 첫번째 정착의 보금자리로 우리 짐을 모두 옮겨 주셨다. 물론 돈을 지불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마운 분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가끔씩 연락이 오고 간다. 우리는 집을 랜트 하여 입주하기까지 3일이라는 기간을 조 선생님 댁에서 기거를 했다. 4일째에 렌트한 집에서 우리물건 하나도 없이 남편과 나는 캐나다에서의 4일째 밤을 비행기로 가져온 담요와 몇 가지의 물건을 가방에서 꺼내 들고 이제 우리의 캐나다 삶의 장은 이 집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서로 조아리며 잠을 청했다. 며칠동안 정신없이 이삿짐 정리를 대충 끝내고 저녁에 아이들 방엘 들렀다. 갑자기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 나면서 보고 싶었다. 아직 전화도 없고 또 연락할 길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일은 전화신청도 하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