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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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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evergreenon

케나다로 향한 비행기에 오르다. 4월14일 나는 완전히 정리를 못해놓고 떠나는 찜찜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체 남편과 함께 케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속에서 천가지 만가지 생각이 엄섭 해왔고 엉켜붙은 실타래 마냥 어디에서 그 첫부분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 것 같다. 기내식이 나와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마냥 배는 불러 있었지만 옆에 있는 남편은 나오는 기내식 모두를 다들고 좁고 불편한 기내에서 잠만 너무나 잘 자곤했다. 잠자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편안해 보인 것이 실지 나에게 힘을실어 주는 계기가 된지도 모른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는 숫자라는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있다가 마침 옆자리에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과 얘기를 나누는 계기가 있었다. 아줌마 본인도 정식적인 케나다 비자를 갖고 살고 있는게 아니라 아이 공부를 시킬목적으로 체류해 있으면서 현지의 어떤분의 도움으로 아이는 학교에 다니고 있고 또 본인은 한국을 한번씩 오간다는 그런 처지라고 너무 걱정을 말라는 이야기였다. 듣던중 실지 반가운 소리였고 좋은 뉴스여서 나의 자신감에 더욱 일조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내에서 오랜시간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기내 방송을 통해 케나다 피어슨 공항을 알리는 페이징이 울렸다. 정말 가슴 울렁거리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가 친척 한사람없는 미지의 세계로 제2의 인생을 이곳에서 보낸다고 생각한 첫발을 내딧는 피어슨 국제공항 앞서가는 여행객들의 뒤를 따라 열심히 따라 나가고 입국절차를 무사히 끝내고 공항내의 짐을 찾았다. 이민짐은 원래 항상 많은것이질 않는가. 정식적인 이민 비자를 갖고 들어 오는것도 아닌데도 나중에 아이들이 도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많은 짐을 챙겼기 때문이다.공항내에 짐꾼이 25불을 요구하기에 그것도 5불 깍자고 까지 여유를 부리게 되었다. 이렇듯 많은 짐을 가지고 갈때는 이들을 이용 하는게 도움이 된다. 심사대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 짐꾼들의 생리를 잘알고 있고 비행기 한번 내리는데 이들이 소화해 낼수 있는 짐이나 사람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한다. 야튼 일사천리로 입국심사 및 짐을챙겨 공항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이야기를 잠시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면 나를 마중나온 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년전 어느날 이곳 케나다에 오기 몇 개월전이였다. 남편이 직장에 근무할 당시 잘알고 있는 직장동료 한사람이 어떤 한분을 모시고 와서 이분은 00이라는 회사의 엔지니어 이신데 이분도 김선생님댁과 마친가지로 케나다로 이민을 갈 계획으로 곧 가시게 된다고 하신다. 이분은 이민비자를 받아 놓으시고 잔여 일처리 때문에 한국에 잔류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남편에게 인사를 시켜 주셨다고 한다. 이때 남편은 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한 사람인데 케나다로 먼저 가시면 절 좀 도와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 현제의 상황과 우리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었다. 헤어 질 때 서로 연락하자는 전자우편 주소만을 교환한 체 이런 정보 이외에는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케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기 하루 전 까지도 이분과의 소식은 닿지 않고 있었었다. 나중에 안 내용 이었지만 이분들과 우리는 캐나다 땅을 밟은 기간이 2개월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분들이 짐을 부치고 찾을 때까지 우리가 짐을 싸지 않았고 우리가 짐을 꾸릴 때 그들은 이곳에 정착해서 한창 셋 업을 하고 굉장히 바쁜 시기였다. 실지 우리의 계획은 캐나다 땅에 도착해서 호텔에서 몇일 을 묵으면서 지리적 조건이나 환경을 더듬어 집도 랜트 하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실지 하늘은 서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4월14일 출국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삼촌댁에 하루를 거하면서 그곳에 있는 컴퓨터로 이멜을 접했을 때 이는 실로 구세주보다 더한 빅뉴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첫 이 메일을 우리에게 발송했단다.오늘 인터넷을 연결하였고 그 동안 짐 찾고 국가에 등록하고 등등으로 무지 바쁘게 보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도착하시여 전화를 하면 언제든지 공항 픽업을 가겠다는 내용 이여서 실지 이보다 반가운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게 새로워 보이는 공항 입구에서 공중 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했을 때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고 남편은 나에게 이야기 했다. 실지 나는 그분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단지 남편을 통해서 상황을 들었을 뿐이다. 그분의 얘기로는 약 20분 정도가 소요되니 기다려달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이민 사회에서 귀동냥을 한 우스운 이야기라면 이야기랄까 야 튼 이민 와서 첫 직업은 공항에 픽업 나오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현재 남편의 직업은 엔지니어 계통이 아니지만 재미있는 얘기이다. 정확하게 20분 후에 그분이 나타났다. 지금은 우리는 부르기 편하게 조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그를 만나고 남편으로부터 소개를 받는 동시에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을 가졌다. 얼마나 기뻐 했는지 울 먹 거리고 싶은 그 기분을 추스린다고 꽤 나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도와 주겠다는 분이 계시니 이보다 더한 반가움이 또 어디 있을까. 차로 짐을 옯겼을 때 그곳에는 조선생님의 선배 된다는 캐나다에서 정착하신지가 10여년이 훌 넘는다는 한 분이 운전대를 잡고 계셨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했다. 조선 생님이 이곳에 이민을 왔을 때 이분이 공항 픽업을 하셨다고 들었다.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어 미시사가 시라는 공업도시이자 캐나다에서의 신도시인 조선생님의 첫 보금자리인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직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캐나다의 첫날밤이다. 조선생님은 아파트를 렌트 하셨는데 방 2개에 거실과 부엌이 달린 아파트를 렌트 하셨다. 사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상황과 계획을 설명한 뒤에 남편은 조선생님과 2번째 만남이지만 나는 조선생님이나 사모님도 초면이다. 그들의 따뜻한 배려로 거실이 좀 추울거라고 아직도 이민 짐을 다 풀지도 않으셨던 전기장판을 꺼내 오시면서 거실에 자리를 깔아 주셨다. 이럴때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도 잊어 버린 체 멍하니 앉아 있다고 우리는 염 체 불구하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천만가지의 생각과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의 비자 상황이나 등등이 걱정이 되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시 잠들었다 싶으면 물론 시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럭저럭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보니 새벽 1시30분이다. 한국시간으로 환산해보면 한국은 지금 오후2-3시 즘일 것이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더 말짱하게 돌아온 것 같고 한국에서 잠시 오수를 즐긴 그런 기분 같았다. 그래도 내 곁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은 잠을 너무나도 잘자고 있었다. 평소에 한국 있을 때 그는 잠잔다는 말을 하고 침실에 들어오면 어떤 경우든 10까지 세기 이전에 벌써 꿈나라로 향하는 것이 그의 습성이다. 이렇게 시차가 있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 하고 내심 부러움이 들었다. 나는 남편이 깰까 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거실 곁에 있는 조그마한 밖으로 통하는 베란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달빛사이로 어슴프레 보이는 민가들 그리고 결코 산에 가서야 들여 마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 가로등 사이로 난 오솔길들이 아무도 걷지 않는 한 공원을 밝히고 있었다. 난 일본이외에는 외국이라고는 여행한적이 없었고 늘 영화에서만 그 환경들을 보아오곤 했다. 지금 보이는 한밤중의 공원의 가로등 밑의 저 장면은 언젠가 본 느낌이 드는 그런 영화 속의 한 장면인 것 같았다. 4월중순경에 이제 막 활개를 키고 있는 파 아란 잔디며 나무의 새싹들이 아직 몽우리를 다 펴 저 못한 체 가로등 사이로 나의 눈망울로 들어온다. 나는 이 밤중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생시인지를 도저히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공상의 세계,아니면 사진을 잘못 찍은 풍경화 처럼………. 한참 생각에 젖어 있자니 바로 나의 등뒤에는 남편이 와있었다. 아무래도 당신도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다가 보니 이제 아침은 밝아왔다. 조 선생님 댁은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또 본인들은 ESL학교(이민자들을 위한 영어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들의 아침은 우유와 빵 이였다. 남편은 한국 있을 때 아침에 우유와 빵을 먹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고마운 분들의 성의이고 보면 어떻게 거절할 자리가 따로 있지.. 맛있게 한 접시 수북한 식사를 해결했다. 두 분이 학교를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집에 둘만이 있게 되었고 이분들이 학교수업을 파하고 나서야 둘러 볼 수 있는 곳을 갈 수가 있었다. 이곳은 자동차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고 자동차 없이는 어디든 갈 수 없는 실로 광활한 땅을 바탕으로 집도 한국에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집과 집 사이의 갭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고층이라곤 아파트가 유일할 정도로 고층 빌딩을 토론토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지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남편이 아침식사가 좀 부족하다면서 이민 가방 속에서 라면을 꺼내 들고 왔다. 중참 정도로 생각하고 한 개를 혼자서 다 거덜 내었다. 이후에 우리는 조 선생님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 올 때 까지 잠시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디에다 정할까 싶어 거리로 나왔다. 광 할한 대지며 맑은 하늘 한국에서는 마셔보지도 못한 상큼한 공기며 그야말로 동화책 속에서나 봄 직 했던 오막 조막한 집들과 잘 정렬되고 정돈된 집들과 한결같이 집 앞과 뒤는 파 아란 잔디로 둘러 쌓여 있어 처음에 생각했던 그대로의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길이 가는대로 걸어가긴 했는데 갑자기 겁이 덜컹 나면서 옛날 할머니가 해주시던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의전부의 스토리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 내용 중에서 고래장이 흥한 시절에 부모를 버리려고 산길을 가는데 부모가 밤에 자식이 되돌아갈 길을 염려하여 지나가는 길목에선 나무 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나 역시 길을 잃어 버리면 어쩌나 싶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 오라는 것이다. 누군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에 한말이 기억 났다. 캐나다는 땅이 너무나 광할 여 한집 건너 다음 집을 가려면 차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래서 서울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과 입 다툼을 하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 질 않았던가. 조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 주변에는 고층아파트, 타운하우스, 개인주택 등이 붙어 있는 그런 조그마한 요즈음의 한국의 소 읍 정도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이 주변에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그런대로 괜찮은 장소구나 생각이 되었다. 오늘은 대충 이정도로 보고 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두 분은 학교를 파하고 집에 와 계셨다. 우리가 짐을 부친 수화물 회사에 전화를 내어보니 이미 짐이 도착해 있었고 7일이 경과하고 나면 하루에 보관료가 20불씩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우선 렌트하는 것이 급선무구나 생각하고 내일은 어 떡게 해서든지 구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것이 현재의 당면한 급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구의 반대편에 와있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는 아직 중천에 떠있는데도 눈이 저절로 감겨서 나도 모르게 밤잠을 청하고 있었다. 몇 달 전 미리 와서 일찍 이곳 문화생활에 접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우리보다 잘 알고 있는 선배이기에 우리는 조 선생님이 제의하는 데로 Big Mall에도 가보고 이곳 저곳 지리를 안내 해주시면서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나중에 설명을 했지만 이렇게 돌아 다니고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야지 저녁에 잠도 잘 오고 또 시차 적응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집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제법 큰 Grocery Store가 있어서 나중에 이곳에 살면 자주 이용할 곳이라고 가보자고 해서 갔다. 정말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의 어느 점포를 연상 시켰다. 다소 값이 모두가 한국에서 수입해온 수입품이기에 다소 비싸긴 했지만 급할 데 한국 음식을 장만하고 할 때 이용을 하면 참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미국이나 유럽엘 가면 늘 상 빵과 우유와 커피가 주식이니 그것만을 먹는다는 그런 누군가의 말이 얼른 생각이 났다. 이런 일로 우리는 캐나다 애서의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보내는 그야말로 시작의 시점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