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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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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서류를 접수하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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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서류 접수 내가 왜 이민을 생각했고 이런 어려운 상황을 접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의 계기가 있었었다. 몇 년전부터 남편은 국제와 시대에 영어는 필수라는 생각에서 아이들에게 영어공부를 좀더 시켜보고져 외국인을 일주일에 3번 우리집에와서 개인지도를 시키기로 했었다. 그중에섣 2년정도 가르쳐준 선생님이 케나다인이였는데 선생이 정말로 점잖았을뿐 아니라 학식도 풍부하였고 흔히 외국인에서 느끼는 에티켓의 무례함등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을정도로 예의바른 모범 선생님이여서 시간만 있으면 함께 농장에도 같이가서 일도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가르치기도 했어 상당한 정이 듬뿍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바탕으로 케나다를 생각하게 되었고 흔히 여행자가 타국을 갔을 때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대표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들 잘알고 있지 않는가. 이렇듯 케네디언 선생님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모든것들을 실지 아주 좋게 해석을 했던것이다. 또 한가지 다른 이유로는 남편은40중반까지 실지 영어라는 어떤 책자든간에 손에 놓은적이 없을 정도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어니 영어권 어디에 가든지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을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도 또한 일조를 하였다고 본다. 물론 아이들도 아빠 덕분에 영어라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회화를 할때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게 잘 따른것도 한몫 했다고 봄이 옳다고 생각된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중순경에 우리둘은 서울행 새마을호에 몸을 싣고 처음 가보는 무교동이라는곳을 찾아 이민 에이전트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미 전화를 통해서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하고선 에이전트 대표와 계약문제와 또 상세한 이민 정보를 위해서 찾아 갔던 것이다. 이주공사 사무실에서 모든 계약서류에 도장을 찍는순간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머리속이 횡하니 비어 버린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혹시라는 생각이 여태까지는 아무 생각없이 진행을 시켰는데 왜 갑자기 머리속이 빈 것을 인식할 만큼의 뭔가가 짖누르는 압박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남편은 정말 가기 싫어했는데 내가 우겨가며 일이 이까지 진행되도록 만들었고 행여나 도중에 잘못되거나 이민생활에서 낙오자라도 된다면 하는 마음의 부담감이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지 계약서류에 도장을 찍기까지 준비할 서류는 얼마나 많았고 까다로웠으며 직장을가진 나로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몰래몰래 서류를 꾸민다는 것을 아마 실지 해본사람들만이 그 고통을 알아주지 않을까. 직장 몰래 남편몰래 주위를 신경쓰가면서 만든 많은 서류들 한번은 등기부등본을 떼기 위해서 동사무소를 들렀다 시간에 쫒기어 급히 서둘러다 보니 계단을 잘못 밟아 굴러 떨어지기도해 두무릎의 상처가 3주정도 뒤에나 아물었지만 지금도 그상처는 그때일을 말해주듯 흔적이 가시지를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더욱 성장한다면 내가 생각했던, 또 추진했던 이 모든 것을 알아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는 알수있지만 단 몇초의 앞도 내다 볼수 없지 않는가. 모든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서류를 제출한지 약 20일이 경과후에 이주공사로부터1년이내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텨뷰를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이틀후 그 서류를 접수하고 몇번이나 그내용에 대해 모르는 것은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기도 했다. 그제서야 이민에대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때를 맞춰 온 메스컴에서는 해외이주공사의 사기사건에 관한 보도가 연일 이따라 방영이되고 있어 친척들 모두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다시 한번더 확인하라느니 포기하라느니 나의 뇌리를 더욱 복잡게 만들고 있었다. 원래 나의 성격은 우선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그사람의 성격을 잘 파악할수 있기 때문에 일단 믿게되면 의심을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리고 이평생을 살면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고 살아왔다. 야튼 이런저런 연유로 집의 전화기는 항상 비지라인이였지만 걱정스레 걸려온 모든 전화를 진정시켜 놓았다. 실지 그런 방송의 문제가 나를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의 학교문제와 가자고는 우겼지만 이민후의 생활을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천가지 만가지 걱정이 나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날을 거쳐서 이민에 대한 경험이 있는사람이나 이주공사 및 학원을 통해서 그들에게 상담도하고 정보도 얻으면서 최종적인 결정의 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한결같은 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이들은 이민을 가게되면 본지의 교육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과목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고 우선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갖기 이전에 가능한한 영어를 생활화하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라는 것이였다. 우리는 아이들을 자퇴 시키기로 결정하고 영어만을 전문으로하는 ESL학원에다 아이들을 Full time으로 공부하도록 등록을 시켰다. 나 자신역시 영어에 손을 놓은지가 언 20년이 지나고 보니 대학시절에 배워둔 영어는 실지 단어조차 기억도 안될뿐더러 아예 외국인이 오면 How are you? 말까지 힘들정도로 영어라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어니 이게 더욱 큰문제가 아닐가 생각해서 나자신을 위해서 직장일을 마치고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영어학원을 이민지에서 행여 동직업을 구하지 못할경우를 대비해서 요리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정말 40대 중반을 넘어서 책을 잡고 새로 공부한다는 자체가 실지 어렵지 않을 수가 없다. 뇌에는 온갖 세상사의 모든것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책을보고 집어넣고나면 어느센가 나가버리고 없을 정도로 저장이 되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면서도 멀리서 외국인 선생님들만 보아도 주눅부터 들었고 행여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날까봐 걱정을 해 요리조리 피하고 다니기가 일수였지만 그래도 결석한번 없이 꼬박꼬박 학원을 다녔었다. 그러던 몇 개월후 이주공사 대표로부터 내가살고있는 지역으로 이민 설명회를 온다기에 우리는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 참석해보기로 하였고 막 IMF의 막바지에 왔었기에 이민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사실 내가 살고있는 대구라는 도시는 이러한 면에서 지독히도 보수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여러 이주공사에서도 이지역 공략을 미루는 그런 경향이 있는 지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민 설명회에 모인 것을 보면 이민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많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설명회가 끝난후 이주공사 관계 직원들과 식사를 하는 도중에 이주공사 직원의 이야기 왈 “ 아이들의 나이가 있으니 먼저 유학을 보내고 이민수속이 끝나 영주권을 받으면 이민자로 학교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라는 것이다. 현제 큰아이의 나이로 보나 하루가 실지 급한 나로 봐서는 정말 좋은 제안이였고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보충설명으로 케나다는 무비자 국가이고 여행비자로 6개월을 체류할수 있으니 그동안에 우리가 제출한 서류를 시발점으로 볼 때 6개월 이내에 영주권까지 받을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지 우리는 이민에 대한 많은 정보도 접하지 않았었고 그저 에이전트 대학동기의 친구이니 만큼 우리를 속이고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100%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그들이 하는대로 믿고 따르기로만 했던것이다. 이에대해 동의를 하고 1999년 3월경에 케나다로 간다는 확정을 했다. 이렇한 결정을 하게된 가장 큰 동기는 큰아이가 20살, 작은아이는 18살이여서 하루빨리 그곳생활에 적응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였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딸아이 둘만 낯선땅에 떼어놓기가 실지 겁이났고 또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자아실현을 위해 유학을 온 학생들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한 동행하여 함께 거주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생활관습이나 문화를 앞으로 살아가야할 궁리등을 하기 위해서 동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던것이다. 앞으로 일어나야할 모든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에 하늘에 맡기로 했다. 3월쯤 출국하겠다는 결정을 하고난후 1999년 1월1일 모든 친척들을 먼나라로 이민갈 우리들을 위한 배려로 영덕에 해돋이를 가자는 제안이였고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맘과 계획을 하늘에 빌고 한국적인 정에 대해 더욱더 다지는 계기를 맞이 하기로 했다. 나는 바다 한복판에서 붉게 달아오르는 해돋이의 광경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그속에 나의 걱정되는 모든 부분을 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