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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yoo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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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2)
donyoo

 

1852년 대선(1852)

1848년 고향으로 돌아온 피어스는 변호사 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뉴 햄프셔 민주당 당원들은 피어스를 1852년 민주당 대선후보에 추천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계속적인 추천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조용히 등록했다.

 

민주당은 노예문제로 후보자들의 지지자들이 분열되어 더글라스, 케스, 마시, 뷰캐넌, 휴스턴, 벤튼 같은 기라성 후보들이 경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0년간 부인의 요구로 정계를 떠났던 피어스는 서부 노예주 팽창과 도망자 노예법 실행을 강조하여 시선을 끌었다.

 

6월 3일 첫 번째 경선에서 288표 중 케스가 116 뷰케넌이 93표로 리드했지만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해 계속 34번이나 경선을 치르면서 지명자를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8번째 경선에서 펜실바니아주 출신 뷰캐넌이 다른 소수 후보자를 몰아 한 표도 얻지 못한 피어슨을 지지하게 되어 피어스는 몰표를 받게 되었고 승승장구로 49번째 경선에서 282개의 지지표를 받고 윌리엄 킹을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대선 후보에 지명되었다.

 

얼떨결에 다크호스로 대선후보에 오른 피어스의 소식은 고향에 있는 제인에게 알려졌고, 제인은 남편의 약속 배반에 충격을 받아 약한 몸으로 혼절하였다.

 

위그당은 스캇 장군과 그레함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했지만 심한 당내 분열로 위그당을 지지했던 투표자들의 계속적인 이탈이 시작되었다.

이를 좌시한 피어스는 민주당 지지표를 단합하기 위해 일체 유세를 하지 않고 말로 무덤을 파는 스캇의 공격적인 유세를 관찰하였다.

 

1882년 11월 2일 선거결과에서 피어스는 296개의 선거인단 중 254개의 표를 받고 300만명의 투표자 중 50.9%의 지지를 받아 미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멕시코전쟁터에서 피어스의 상관이었던 스캇은 42개의 선거인단표를 받고 44.1%의 지지율로 패배하였다. 

 

피어스 가족의 비극(1853)

대통령에 당선된 피어스는 부인 제인과 11살 아들 벤자민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거주하는 제인의 형부인 잔 에이킨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1853년 1월 6일 기차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콩코드에 도착하면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워싱턴 DC로 이사를 할 예정이었다.

 

1시15분 기차가 시속 40Km의 속도로 앤도버에서 5Km 지점을 지날 때 철도에 놓여있는 돌에 부딪쳐 꽁꽁 얼어붙은 차축이 충격을 받고 쪼개지면서 피어스 가족이 탄 승객 칸이 탈선을 하여 20피트 거리의 비탈진 강둑으로 성냥갑 같이 뒹굴러 떨어졌다.

 

아들 벤자민은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객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벤자민은 기차가 구르는 충격으로 떨어진 각목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피어스는 달려가 목뼈가 부러지고 목살이 피범벅이 된 아들을 붙잡고 울부짖는 부인과 함께 하늘이 깜깜하게 내려앉는 충격을 감수해야 했다. 승객 60명 중 많은 부상자 외에 사망자는 벤자민 1명뿐이었다.

 

벤자민 시신은 에이킨스 집으로 후송되어 12명의 학급친구들이 달려와 운구를 들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콩코드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제인은 영특하고 착한 아들의 오싹한 마지막 광경이 악몽으로 떠올라 비통에 허덕이며 장례식과 안장식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하다가 현실에 부딪치면 남편의 대통령 당선으로 신이 벌을 내렸다고, 위로 해주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정신이 나면서 제인은 아들에게 엄마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올렸다. 이로 인해 열차사고에서 소생한 피어스 부부는 몇 년 사이로 사망한 두 아들을 포함하여 아들 3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통함을 우울증으로 평생 간직해야 했다.

 

피어스는 제인과 함께 아들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면서 노예해방 반대, 노예주 증가, 노예가 도망가다 잡혀 린치는 물론 살아서 맹견에게 갈기갈기 찢어 죽게도 하는 도망자 노예법을 시행하여 역사학자들은 피어스를 미 대통령 44명중 40번째 순위로 그의 업적을 평가한다.

소생한 승객들은 철도회사를 고소했지만 제인은 집단고소에 불참했다.

 

대통령 취임식(1853)

1853년 3월 4일 14대 대통령 취임식에 비극을 맞은 피어스 신임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사상 초유로 2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피어스는 법전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잔 쿠인지 애덤스 이후 2번째로 성경대신 법전서를 선택했다. 그는 원문 없이 기억으로 취임연설을 하며 미국의 남북통합으로 국내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미국의 이득을 위한 국제관계를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중에게 ‘국민 여러분은 약점투성이인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강점으로 저의 임무를 완수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끝을 맺어 위문 온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제인은 선서식은 물론 향후 2년간 모든 백악관 행사에 불참했고, 백악관에서 은둔생활로 자신의 비통함을 달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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