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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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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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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1
미국의 캐나다침략(17)-1812년 전쟁 전후(7)

(지난 호에 이어)

 

스토니 크리크전투(1813년 6월 5일)

나이아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온태리오호수 서쪽 끝에 차지한 조오지요새는 잔 빈센트 영군 준장이 약1,000명의 군대로 수비하고 있었다. 요오크(토론토)를 초토화시킨 디어본은 5월 27일 3,000명의 미군을 이끌고 조오지요새를 공격하여 손쉽게 점령했다.

조오지요새 전투에서 숫자로 밀린 빈센트는 벌링턴 고지로 도피했다. 승리 도취감에 빠진 디어본은 빈센트가 군을 재정비하여 1,600명의 영군을 징집하여 다음 공격작전을 세울 때까지 추격을 게을리하고 군 3,400명을 이끌고 나이아가라 근처 스토니 크리크에 진영을 치고 있었다.

빈센트는 잔 하비 중령이 이끄는 정찰대로부터 미군의 진영이 흐트러져 있고 야간에 보초병도 몇 명 되지 않고 군기가 빠져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빈센트는 야간기습을 단행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6월 5일 11시 30분에 하비가 700명의 영군을 이끌고 미군진영을 접근하게 하였다.

하비는 뇌관을 뺀 장총에 총검을 꽂아 보초병을 하나씩 제거하고 미군진영에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은 미군들이 잠자는 막사에 들어가서 총검으로 항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간 근무하는 미군 식당당번에게 발각되어 깨어난 미군들의 역공을 받아 총포를 쏘는 미군들과 45분간 격렬한 야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동이 트고 거센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하비는 열세의 숫자를 가진 영군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영군을 숲 속으로 후퇴시키고 멀리서 미군의 동태를 살폈다. 영군의 숫자를 파악하지 못한 미군은 재빨리 군을 정비하고 포티 마일 크리크(현재 그림스비)로 후퇴하였다. 결국 속임수로 디어본을 격퇴시킨 빈센트는 스토니 크리크의 미국 진영을 접수하여 전리품을 획득했다.

스토니 크리크 전투로 미군은 63명, 영군은 214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를 내었고 빈센트는 야간전투 중 낙마부상으로 혼자 헤매다가 영군에 구조되었다.

6월 10일 조오지 요새로 퇴각하는 미군은 영군의 추격을 받아 230여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스토니 크리크에 가면 1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스토니 크리크 전투기념비를 볼 수 있다.

 

비버 댐스 전투(1813년 6월 24일)

스토니 크리크에서 영군의 추격을 받고 조오지요새로 퇴각한 디어본은 600여명을 선발하여 영군 격퇴를 위한 기습공격전략을 세웠다. 보슬러 대령이 이끄는 선발대는 6월 22일부터 온태리오주 쿠인스톤에 집결하였다. 그 중 일부 장교들은 제임스 세코드 캐나다 민병대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다.

세코드는 1년 전 쿠인스 고지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가택요양 중이었는데 숙박하던 미군장교들의 작전을 엿들을 수 있었다. 작전계획은 미군이 온태리오주 쏘롤드에 위치한 비버 댐스의 드쿠진영 영군을 24일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영군에 알리기 위해 제임스 세코드의 부인 로라 세코드는 22일 영군진영을 향해 32 KM가 되는 숲속의 험악한 장거리를 걸어 나섰다. 다행히 모학 원주민을 만나 비버 댐스의 드쿠 영국진영까지 도착해 군사기밀을 알릴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제임스 피츠기븐 대위는 모학 원주민 전사 100여명을 숲속에 잠복시키고 자신은 350여명과 함께 지원군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6월 24일 찰스 보슬러 대령은 미군을 인솔하여 비버 댐스의 드쿠 영군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숲속에 잠복하던 모학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반격을 가했으나 피츠기본의 지원군에 포위되었다.

피츠기븐은 숫자적으로 우세한 영 연합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원주민들에게 두피를 벗겨질 것이라는 허위협박을 했다. 실제로 영군은 450명 미군은 600여명이었다. 이 공갈에 넘어간 보슬러는 미군 450여명과 함께 전투도 하지 않고 항복해 버렸다.

영군은 40명, 미군은 75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450여명의 미군이 포로가 되었다. 정보입수에 취약한 디어본은 승전기회를 계속 놓치고 조오지 요새를 수비하다 1813년말 미국으로 퇴각했다.

 

로라 세코드 초콜렛과 산행길

1913년 캔디상을 하는 프랭크 오커너는 로라 세코드의 애국심을 찬양하기 위해 캐나다산 최고의 초콜렛 상품을 개발하여 로라 세코드초콜렛을 선보였다. 아직도 로라 세코드초콜렛과 아이스크림은 국내인들이 선호하고 있다.

2013년 6월 22일 로라 세코드의 애국역사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코드의 6대 후손인 케럴린 메코맥은 부르스트레일의 일부가 되는 길에 로라 세코드트레일을 표시하고 매년 6월 로라 세코드 기념산행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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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1
2021-10-14
미국의 캐나다 침략(16)-1812년 전쟁 전후(6)

 

(지난 호에 이어)

초토화된 요오크(토론토)

쉬프는 캐나다 의병 장교들에게 사후처리를 맡기고 요오크 요새에 영국기를 걸고 후퇴하는 기만술을 써서 파이크의 요새 진입을 주저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후퇴하는 시간을 얻은 쉬프는 영 정규군을 인솔하여 킹스턴으로 향했다.

1813년4월 27일 오후 미군이 퍼붓는 포탄이 영국군이 돌로 건축한 화약고를 터트려 파편에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

쉬프의 후퇴로 미군이 승리했지만 미군은 32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면에 영군은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3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이 후퇴하고 무기력해진 캐나다 요오크 의용군본부는 오타리오주 검찰청장을 맡은 잔 라빈슨 대위에게 캐나다군의 항복문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겼다.

항복문서가 수락되는 시기인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미군은 의사당건물과 정부청사를 비롯하여 정부관저 도서관 등을 불태웠다. 많은 장서를 포함하여 정착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귀중한 인쇄기를 포함하여 집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그 당시 온주 인구는 77,000명으로 퀘벡주 인구의 5분의 1이 조금 안되었다.

쉬프가 후퇴직전 건조 중인 군함을 비롯하여 저장된 군수물자를 태워버렸기 때문에 이에 화가 난 미군 병사들은 5월 8일 나이아가라를 향해 떠날 때까지 막사를 제외하고 모든 건물을 방화로 초토화시켰다.

파이크는 미군의 약탈을 군법으로 처리한다고 전투 전 경고했지만, 그의 전사 후 군 지휘를 맡은 디어본은 약탈을 묵인하였다.

요오크를 떠난 미군은 7월21일 식량보급을 약탈하기 위해 두 번째 요오크를 점령하였고, 1814년 8월 6일 영 해군과의 해전으로 세 번째 요오크를 침공하였다.

요오크를 점령했어도 미군의 잔인성을 목격한 캐나다 정착인들은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아 요오크 전투로 인해 미국은 이득보다 군사적 손실이 더 컸다.

 

멕스 요새 포위작전(1813년 4월28일-5월 9일)

윈체스터가 이끄는 미군이 프렌치 타운 전투에서 영군과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원주민 전사들에게 학살당한 소식을 들은 해리슨 미 서북부 사령관은 1813년 2월 디트로이트 진군을 멈추고 의용군 4,000여명을 동원하여 디트로이트 서남쪽으로 114 KM 떨어진 오하이오주 멕스 요새(현 패리스버그)를 젖은 진흙으로 두껍게 쌓아 올린 호를 파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디트로이트 재탈환을 준비하고 영군과 원주민 전사의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를 감지한 테컴서는 원주민 전사 1,200명과 프락터가 이끄는 1,000여명의 영군과 연합이 되어 4월 28일 멕스 요새를 포위하였다. 프락터는 포문을 열고 수천 발의 포탄을 요새로 날렸지만, 젖은 진흙으로 쌓아 올린 벽에 부딪쳐 요새는 파괴되지 않았고 미군의 인명피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원주민 전사들이 난공불락의 멕스 요새 공격을 포기하고 전장을 떠났다.

일부 미군은 영군의 포병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요새를 빠져 나왔다가 테컴서의 유인으로 요새 밖 숲 속 깊이 들어가 잠복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원주민보다 영군의 포로가 되기를 원했지만 프락터는 포로들이 원주민의 손도끼에 학살당하고 특히 마이에미 요새에서 사살당한 미군의 두피를 벗기는 것을 방관하여 테컴서는 타 원주민의 미군 학살을 중지시키고 프락터를 질책하였다. 둘은 전략적인 의견충돌이 잦아 사이가 벌어졌다.

해리슨을 돕기 위해 켄터키주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 미 의용군이 계속 증강하자 테컴서와 프락터는 5월 8일 멕스 요새 포위를 포기하고 일단 퇴군했다가 7월 재공격을 시도 했지만, 해리슨의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고 60명이 지키는 근처의 스티븐슨 미군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증강되는 미군의 반격에 의해 퇴군을 하여 디트로이트를 통해 캐나다로 돌아갔다.

수비에 성공한 해리슨은 점점 불어나는 미 의용군을 지휘하여 공격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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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미국의 캐나다 침략(15)-1812년 전쟁 전후(5)

 

(지난 호에 이어)

 

프렌치 타운 전투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기 위해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장은 미 북서부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북진을 하였다. 디트로이트요새는 테컴서와 브락 소장 대신 헨리 프락터 소장이 수비하고 있었다.

해리슨과 합동작전을 맡은 제임스 윈체스터 준장은 해리슨 본진 군대와 작전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봉을 앞세워 1812년 1월 18일 디트로이트에서 서남쪽으로 56 KM 떨어진 레이진 강가의 프렌치 타운까지 진격을 하여 교전 끝에 원주민전사를 포함한 영군을 퇴각시켰다.

프렌치타운을 점령했지만 원주민 연합전사들과 프락터 영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1월20일 해리슨은 미군 2개 보병단을 지원하면서 다음 작전을 위해 윈체스터에게 프렌치 타운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된 윈체스터는 수비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해리슨의 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의 프렌치 타운 점령소식을 접한 프락터는 샤니족을 포함한 인디안연합전사 800명과 영국정규군 600명을 통합하여 1월 21일 전투준비를 완료하였다. 테컴서는 와엔다트족의 라운드헤드 추장에게 원주민전투를 맡겼다. 1월22일 동이 트기 전에 원주민 연합전사와 영군은 미군에 기습공격을 하여 무방비상태의 미군은 혼비백산하여 병동에 있던 400명 미군 중 220명이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원한에 찬 라운드헤드 전사들은 사살자의 소지품을 뺏고 두피를 벗겼다.  

윈체스터는 속옷차림으로 미군147명과 함께 라운드헤드의 포로가 되었고 도주하다 잡힌 미군은 원주민 손도끼로 학살당했다. 일부 용감한 켄터키 소총부대는 끝까지 수비를 감행했지만 탄약이 떨어지고 선봉장이 포로가 되어 무조건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프락터는 미군 부상병을 병동에 놔두고 해리슨 본군을 피해 프렌치타운을 떠났다.

1월 23일 라운드헤드는 남은 부상병이 가득찬 병동에 불을 지르고 포로를 모두 학살하였다. 이 참극은 미시간주 최대 참극으로 켄터키 정착인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은 ‘레이진강을 상기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도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해리슨은 디트로이트 탈환작전을 중단했다.

 

요오크(현 토론토)침공

181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소수의 군대로 브락 장군이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온타리오와 이리 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의 소형 전투함들이 필요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킹스턴과 요크항에 조선창을 세우고 전투함을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아이삭 찬시를 해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뉴욕주 새키츠항구에 조선소를 세우고 소형 전투함들을 건조하였다.

1813년 1월 국방부장관직에 새로 취임한 잔 암스트롱 주니어는 온타리오 호수의 군사적 장악을 강조하고, 4월 1일 미 정규군 7천명을 새키츠항구에 배치하여 찬시로 하여금 킹스턴을 장악하게 하였다.

찬시는 소수의 영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킹스턴을 장악했다. 암스트롱은 킹스턴 에서 후퇴한 영군의 재탈환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헨리 디어본 소장을 미 북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킹스턴을 영구히 장악하게 하였다.

찬시와 디어본은 킹스턴에 이미 6천명의 영국 정규군이 상주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실제로 정규군은 600명밖에 안 된다고 보고하는 킹스턴에서 탈출한 미 병사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킹스턴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은 시간이 걸리고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반면에 브록 장군 사망 후 허술한 요오크 항구를 쉽게 점령하여 쾌거를 올리는 것이 계속 패배를 하는 미군의 사기를 올리고 정치적으로도 민주공화당의 입지와 체면을 세우는데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후에 요오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24일 출격한 미군은 26일 요오크가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형 전투함대에 1700여명의 보병을 지휘하는 제뷸란 파이크 준장이 선봉대가 되어 요오크를 접근하고 디어본 사령관은 매디슨 함상에서 관측지휘를 하고 있었다.

4월 27일 미 해군 소형 전투함대의 산탄포격 엄호를 받고 벤자민 포사이트 소령이 이끄는 300여명의 소총부대는 요오크 서쪽 하이파크 지역에 첫 번째로 상륙하였다.

전사한 브락 장군의 후임자 라저 헤일 쉬프 소장의 명령을 받은 300여명의 영 정규군과 300여명의 캐나다민병대 및 50명의 원주민 전사들은 현재CNE지역인 요오크 요새로 계속 상륙하는 미군의 숫자가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 계속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어 요오크 동부 돈밸리를 흐르는 리버 목교를 불태우고 강 동쪽으로 후퇴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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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미국의 캐나다 침략(14)-1812년 전쟁 전후(4)

 

(지난 호에 이어)

 1812년 미-영간의 전쟁에 미국에게 땅을 뺏기는 테컴서샤니족을 비롯한 원주민 연합이 영국군과 연합군이 되었다. 한편 이로코와원주민 연합의 일부는 미국과 연합이 되었다. 플로리다를 차지한 멕시코도 미국과 우호적인 크리원주민 연합에서 이탈한 레드 스틱스족을 앞세워 미국의 플로리다서부를 지키기 위하여 영국과 연합군이 되었다.

자유를 찾아 캐나다에 이주한 흑인들은 캐나다 영국군이 되어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지역적으로 1812전쟁은 5대호를 중심으로 차지한 캐나다와 미 서부와 대서양연변과 플로리다 서부와 뉴오얼린스로 나누어진다.

1812년 6월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 6월 11일 취임한 리버풀영주 라버트 밴크 젠킨슨 영국수상은 6월 23일 양국간의 분쟁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영국의회에 상정했다. 그 당시 미국과 대륙간 소식전달은 3주가 걸렸다. 따라서 미국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양국통치자들이 재고할 수 있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을 통솔하는 장군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캐나다 침공(1812년 7월 12일–10월 13일)

영국의 선박건조에 필요한 목재와 식량 등을 생산하는 캐나다를 접수하기 위해 미국은 5대 호수를 차지하는 온타리오주와 퀘벡주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1812년 7월 12일 매디슨의 특명을 받은 윌리엄 헐 준장은 의병대 7천명을 이끌고 디트로이트를 거처 현재 윈저로 알려진 샌드위치를 통해 현 온타리오주인 상위캐나다를 침공하였다.

영국은 나폴레온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캐나다 온타리오주에는 영국 정규군 1600명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한 헐은 ‘캐나다는 영국의 탄압에 굴복하지 말고 미국에 병합하라. 원주민과 연합하는 영국군은 죽음을 각오하라’를 외쳤다.

그러나 현실은 영국군을 공격할 대포도 없었고 보급과 통신이 원만치 않아 일단 디트로이트로 후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대를 이끄는 헐은 미 독립전쟁을 통해 참전경험을 가졌지만 겁이 많았다.

반면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담력이 센 아이삭 브록 중장은 영국 정규군을 보완하는 캐나다의병대를 소집하고 8월초 엠허스트에서 샤니족의 테컴서와 만나 테컴서가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고 연합을 맺었다. 8월 7일 미군의 보급을 맡던 밴 혼이 이끄는 200명의 미군은 원한에 찬 샤니족의 테컴서 공격으로 반 이상이 학살당했다.

8월 15일 헐은 시카고 요새를 지키는 미군을 포트웨인으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148명의 미군과 가족들 중 86명은 포와타미족의 전사들에게 무참한 학살을 당했다. 브록은 영국의 정예병이 미군을 퇴치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여 캐나다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온타리오 남서에 위치한 앰허스트 요새에 진지를 옮기고 테컴서 전사들과 연합해 디트로이트를 공격하였다.

겁에 질린 헐은 영국군과 테컴서 군의 숫자가 미군보다 압도적이고 테컴서의 샤니족은 미군을 대량학살 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8월 16일 브록에게 항복하였다. 사실 헐의 군대는 1,300여명 정도되는 브록과 테컴서군대의 2배에 가까웠다. 치욕적인 패배로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후에 헐은 미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매디슨에 의해 사면을 받았다.

동년 10월13일 스티븐 밴 렌슬레어 소장은 의병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3,550명의 미군을 이끌고 루이스턴에 집결하여 나이아가라 강을 건너 캐나다 쿠인스턴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브록은 1,300명의 영 연합군을 지휘하였다. 렌슬레어는 큰 배 대신 작은 배로 도강작전을 하여 쿠인스턴 고지를 점차적으로 차지하는 중 위기를 느낀 브록은 고지탈환을 위한 공격을 하다 총탄에 쓰러졌다.

치열해진 전투는 테컴서가 이끄는 전사들의 게릴라전으로 미군은 혼비백산이 되어 갈팡질팡 하던 중 도강한 미군 500명은 항복을 하였다. 이 전투는 쿠인스턴하이츠전투로 알려졌고 43세의 나이로 전사한 브록의 동상을 쿠인스턴에서 볼수있다.

캐나다는 브록을 캐나다인으로 추대하고 디트로이트를 공격한 그의 업적과 함께 캐나다의 방위력을 역사에서 찬양하고 있다. 일부는 테컴서도 캐나다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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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미국의 캐나다 침략(13)-1812년 전쟁 전후(3)

 

(지난 호에 이어)

 

땅이 먼저다

미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계속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을 위한 토지팽창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신세계에서 개간능력만 있으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토지를 소유 못한 백인남성은 여성과 원주민 및 흑인과 함께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세습은 누구든지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민주자본주의를 일으켜 미국은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강대국이 되었다.

1812년 이전에 영토팽창을 주장하는 미 서남부의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제퍼슨의 루이지에너 지역 매입 이후 미국 남단은 멕시코만으로 북부는 캐나다국경으로 남북이 막혀 토지소유의욕을 서부개척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개척은 땅 내주기를 원치 않는 원주민들의 심한 반발로 인해 투쟁으로 이어져야 했다. 인디에너주를 비롯하여 미 중서부의 원주민은 캐나다를 통해 영국의 무기 및 군수품을 보급받아 그들의 땅을 빼앗는 미국 정착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포터 상원을 비롯한 남부 및 서부지역의 민주공화당 상원들은 캐나다를 접수하여 국토를 넓히고 영국을 미주에서 축출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1803년부터 나폴레온 전쟁으로 캐나다에 소수 군대만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퍼슨은 5대 호수를 차지하는 상위캐나다는 미군이 진격하면 저항 없이 미국의 한 주가 될 것이라 믿었다.

국민들의 힘을 받은 미 상하원 다수결로 매디슨은 1812년 6월 18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제임스 먼로 미 국무부장관은 캐나다침공은 영국을 축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프랑스 인디언전쟁과 미 독립전쟁을 거처 세 번째 캐나다 침공을 개시했다.

미국으로서는 세계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과의 전쟁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캐나다 침공 외에는 별수가 없었다

 

땅을 잃는 슬픔

1492년 컬럼버스가 미 신대륙을 발견한 당시 북미주에 약 7백만 명의 원주민이 거주했다고 제임스 윌슨 역사학자는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각 지역에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정착인들을 접하면서 천연두와 유럽의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인구가 30% 이상 감소했다. 그들은 정착인들에게 거주할 땅을 내어주며 교역을 했다. 그리고 이해관계로 백인들간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1754년부터 1763년까지 프랑스 인디언전쟁에서 이로코아원주민연합은 영국을 위해 싸웠고, 와바나키원주민연합은 프랑스편이 되어 들러리 전쟁을 치러야 했다. 1776년부터 1783년까지 미 독립전쟁 중에는 캐나다와 미국 13주 지역 근처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들로 갈라져 오넌데가를 포함한 9개의 부족은 영국편을, 오나이더를 포함한 12개의 부족은 미국편을 들어 전투에 가담했다.

전쟁이 끝나면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땅 욕심에 휘말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주로 위스키와 총기로 바꾸어야 했다. 가격으로 따지면 1에이커당 2센트도 안되어 이를 반대하면 총으로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미 서부개척인들과 곳곳에서 총격전이 발생하다가 점점 잔인한 대량학살로 변질되어갔다.

학살이 끝나면 결국 땅을 강탈당하는 슬픔을 지켜본 추장들은 피눈물 나는 투쟁을 감행해야 했다. 이에 불타는 혜성으로 알려진 샤니부족의 테컴서(1768-1813) 추장은 독립전쟁이 끝난 후 와바쉬인디언연합을 대표하여 수많은 백인 거주지를 공격하였다.

그는 1795년 미국에게 오하이오 북서부지역을 내주는 그린빌조약을 반대했고 인디언예언자로 알려진 그의 동생 텐스크와타(1775-1836)와 함께 1805년 오하이오주 그린빌에 정착하여 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텐스크와타의 영향으로 많은 부족들의 의용군이 모여들어 인디언 총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1811년 7월 테컴서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인디에너 주지사와 토지소유권에 대한 담판을 위해 두 번째 인디에너주 빈센스에 갔다가 협약대신 전투로 대응하게 되었다.

테컴서연합군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리슨은 1811년 11월7일 테컴서가 부재하는 동안 프로펫 부락을 공격하여 폐허를 만들었다. 다음날 폐허를 목격한 테컴서는 비통에 빠져 땅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지속적인 테컴서전쟁을 결심했다.

그가 세우려는 인디언 자치국을 유럽에 알리기 위해 테컴서는 캐나다를 통치 하는 영국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세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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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6
미국의 캐나다 침략(12)-1812년 전쟁 전후(2)

 

(지난 호에 이어)

 

1812년 전쟁

메디슨 4대 대통령(1809-1817)은 1812년 6월 18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캐나다북침을 시작하여 1814년 1 2월24일 겐트조약을 맺을 때까지 영국과 2년 6개월간 1812년 전쟁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1812년 6월24일 나폴레온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여 동년 12월14일 러시아군에 대참패를 하고 1815년 6월18일 워털루전투를 마지막으로 그의 몰락을 자초했다.

나폴레온의 러시아 침공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대륙무역제재 동참을 러시아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침략전은 1812년 나폴레온 전쟁이라 알려졌고 톨스토이는 1869년 이 전쟁을 묘사하는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였다. 이 장편소설은 전세계의 명작소설이 되었다.

1880년 차이코프스키는 이 전쟁을 테마로 1812년 서곡을 작곡하여 이 서곡은 전세계인들의 명곡이 되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러시아국민은 알렉샌더 1세 통치와 러시아제국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렸다.

따라서 1812년 전쟁은 나폴레온의 러시아 침략전쟁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두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지역에서 같은 해 같은 달에 일어나게 되어 영국은 미국의 선전포고를 받은 지 6일만에 나폴레온 러시아 침공소식을 받았다.

 

1812년 전쟁 발발의 이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해군으로 무자비하게 지속적으로 프랑스행 미국 상선을 나포했기 때문이었다. 제이조약 이후 미국은 70%의 목화와 50%의 생산품을 영국에 수출했다. 영국의회는 미국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을 키우게 되어 영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언론사 판단에 동의했다.

가파른 무역성장으로 인해 선원이 필요했고 이를 채우기 위해 미국은 영국의 해군 탈영병들을 우대 고용하였다. 7만 여명의 미 상선근무자의 약 30%가 영해군 탈영병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온 전쟁으로 인해 해군증강이 필요한 영국은 미국 상선을 나포하여 도망 병들을 체포하게 되었고, 수년간 15,000명 가량의 미국태생 선원도 체포하여 강제로 영해군병으로 복무하게 만들어 미 국민의 울분을 일으켰다.

후에 미 해군도 영국함대를 나포하여 미 선원들을 미국에 귀환시켰다. 영국은 미국 대서양연안까지 침투해 미국 상선을 나포를 자행했고 두 차례에 걸쳐 미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 

영국의  미불무역통제를 피해 미국은 제3중립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프랑스와 교역을 하였다. 이를 알아챈 영국은 영국 외에 유럽으로 향하는 모든 미국 상선을 나포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온은 전성기에 영국으로 향하는 미국 상선을 공격하여 1804년부터 1807년까지 두 강대국으로부터 731척의 미국 상선이 포 공격을 받던지 나포 당했다.

메디슨은 한때 프랑스와도 전쟁을 해야 된다고 믿었다. 제퍼슨과 메디슨을 거처 미국은 1807년 6년간 유럽대륙과 모든 무역을 차단했지만 미국의 심한 경제침체 외에는 국가적 이득이 없었다. 유럽과 무역을 하기위해 미불전쟁은 불가피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너 지역을 매입한 미국은 원주민들과 토지매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미국 각처에서 원주민들과 토지소유분쟁을 하게 되었다. 이를 감지한 영국은 캐나다와 스페인의 플로리다와 뉴오얼린스를 통해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밀매하여 인디언들이 미국의 개척자와 토지분쟁으로 인한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미국의 성공적인 개척을 목격한 유럽강국들에게 미 신대륙은 탐스러운 먹이 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서부로 개척을 하여 경제와 군사력을 키우지 않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재침락을 당할수 밖에 없기때문에 신이 내려준 서부개척은 미 국민의 숙명이라는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영국의 무기밀수를 방지하는 전쟁을 감행해야 하는 근간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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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미국의 캐나다 침략(11)-1812년 전쟁 전후(1)

 

캐나다 역사(1777-1811)

프랑스 루이 15세는 7년전쟁의 패배로 맺은 영국과의 겐트 조약에서 프랑스가 캐나다를 영국에 양보하는 대신 캐리비안해에 위치한 구아두루프 열도를 차지했다. 이 열도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캐나다 모피무역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선견작가인 볼테어도 캐나다는 눈과 추위의 지역일 뿐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7년전쟁의 북미전쟁 부분을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린다. 노바스코샤주에서 쫓겨난 프랑스계 아카디언들은 프랑스로 귀국하던지 퀘벡 타지역이나 뉴 브런스윅지역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투쟁할 수 있는 반영국 프랑스계 정착자들도 대부분 프랑스로 돌아갔다.

1775년 미국의 캐나다 침략을 통해 미국과 합세하여 영군을 몰아내고 미국의 14번째 주가 되는 것을 거부한 대다수의 퀘벡주민들과 아카디언들은 영국지배에 만족했다.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게 되고 캐나다와 미국의 영토가 명확하게 표기되면서 미국의 영국 왕당파들은 대부분 영국으로 역이주했고 40,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왕당파는 캐나다 동북지역의 세인트 잔 강으로 모여들어 1784년 뉴브런스윅 주를 형성했다.

이중 3,500여명은 자유를 찾은 미국 흑인노예들이었다. 온타리오주 동부나 토론토지역으로 이주한 왕당파는 약 20,000명으로 추산된다.

1791년 캐나다는 언어구사로 지역이 나뉘어지고 불어권 퀘벡지역을 하위 캐나다( LOWER CANADA ) 영어권 온타리오 지역을 상위 캐나다( UPPER CANADA )로 분리했다.

캐나다는 세금을 낮추고 정착자들에게 200에이커의 농토를 부여하여 미국을 포함한 유럽인들의 캐나다 이민을 장려했다. 1811년말 상위 캐나다 인구는 11만 하위 캐나다 인구는 30만이 넘게 되었다.

 

평화조약으로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

워싱턴 초대 대통령(1789-1797)은 미국이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영국은 어느 때고 미국을 침략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임전태세를 갖추는 것이 평화유지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임전태세는 단합된 국민의 애국심과 군인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평화는 조약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국력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프랑스가 미국의 동맹국이 되어 미국 독립을 가능하게 했지만 워싱턴은 미국의 국방력이 영국을 견제할 수 있을 때까지 영국과 유대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영불간의 분쟁에 중립을 지키고 1795년 영국과 제이조약을 맺어 미불간의 무역협정을 파기하라는 영국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5대호와 샴플레인에 세운 영국의 요새철퇴를 요구했다. 워싱턴은 제이조약으로 영국의 침략을 피해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외교정책을 세웠다.

워싱턴의 정책을 이어받은 아담스2대 대통령(1789-1801)은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강력한 해군을 키웠다.

 

침략을 부르는 민주공화당 정책

연방정부의 축소화, 농업장려, 중앙은행 반대를 당 원칙으로 하는 제퍼슨3대 대통령(1801-1809)의 민주공화당은 연방정부의 국채를 줄이기 위해 국방예산 삭감으로 강력한 미 해군을 거의 와해시켰다. 영국은 이틈을 타고 계속 미국상선을 나포하여 영국함대에서 불법으로 도주하여 미 상선에서 일하는 전 영국 해군뿐 아니라 미국선원들도 납치하여 강제로 영해군에 근무하게 만들었다.

친불정책을 추구하는 제퍼슨은 영해군의 미상선 나포를 방지하기 위해 영불 양국가와 무역제재를 감행했으나 심각한 미국 경제침체를 야기하여 무역제재를 풀어야 했고 영국의 행패를 감수해야 했다.

제퍼슨의 정책은 워싱턴의 부국강병 정책을 역행하는 것이 되어 영국이 마음대로 해상침략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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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2
미국의 캐나다 침략(10)-미 독립전쟁 전후(10)

 

(지난 호에 이어)

1777년 10월7일 비머스 하이트전투에서 후퇴한 버고인 영군은 400여명의 군사를 잃은 반면 2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영군을 퇴치시킨 미군은 사기충천한 의용군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결과적으로 전투할 수 있는 4,000여명의 영군은 15,000명 이상의 미군에게 완전 포위당했고 군 식량과 보급품 단절로 절망상태에 빠졌다.

 

버고인 영군의 항복(1777년 10월17일)

프리맨전투와 비머스 하이츠전투를 제1, 제2의 새라토가전투라고 알려졌고 통틀어 새라토가전투라 부른다. 이 전투에서 영군은 440여명의 전사자와 약600명의 부상자를 냈고, 미군은 90여명의 전사자와 400여명이 부상자를 냈다.

버고인은 10월 13일 참모회의를 열고 치욕적인 항복을 결정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영군을 영국에 귀국시키면 그들은 북미전장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항복조건을 걸었지만 게이츠는 영군을 보스턴 포로수용소로 옮긴 후에 영국으로 보내겠다는 조건으로 10월17일 항복선언식을 거행했다.

항복선언식에서 패장인 버고인은 그의 검을 게이츠에게 넘기려 했지만 게이츠는 버고인의 명예를 고려해서 수검을 사양했다.

미 연방상원은 워싱턴과 합의하에 게이츠의 새라토가전투의 항복조건을 번복하고, 미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6,222명의 버고인 패전군을 보스턴 수용소에 감금했다.

 

새라토가전투 승리의 여파

새라토가 전승소식은 영국뿐 아니라 전 유럽에 퍼져 조오지 3세와 영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영제국의 프라이드가 땅에 떨어진 것은 물론 7년 전쟁의 패배로 원한을 품고 있던 루이 16세와 프랑스국민은 자국의 승리처럼 통쾌함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비밀리에 미 독립군에게 무기 및 자금으로만 도와왔던 루이16세를 설득하여 1778년 2월 6일 프랑스가 미국 독립인정은 물론 교역과 군사동맹을 맺게 하였다.

그리고 곧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힘입은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미불동맹에 가담하여 1781년 10월19일 워싱턴 연합총사령관이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 영국 총사령관을 항복시켜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결국 미국의 캐나다 침략과정이 가져온 승리라 할 수 있다.

 

애국심과 명예욕과 금전욕

게이츠는 새라토가 전승소식을 워싱턴 총사령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상원에 보고하여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켰다. 또한 칸웨이 커밸 장성과 함께 상원으로 하여금 워싱턴을 밀어내고 자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모의하다가 워싱턴에게 발각되었다.

워싱턴은 게이츠가 총사령관이 되면 사임을 하겠다고 응수하여 결국 상원은 사표를 수락하지 않고 게이츠를 남부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새라토가 전투에서 승리의 찬사를 혼자 받은 게이츠는 군사 4,000여명을 거느리고 1780년 8월16일 사우스 케럴라이나 켐든전투를 지휘했으나 찰스 콘월리스 중장이 이끄는 2100여명의 영군에게 섬멸 당했다.

항상 후방에서 전투지휘를 하던 게이츠는 전방이 흐트러지자 빠른 말을 타고 97km의 장거리를 단시간에 단신으로 뺑소니쳤다. 그는 워싱턴이 미 독립을 위하여 휘하의 명장들을 게이츠군에 보내 새라토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의 애국심에 의한 용병술을 이해 못했던 것이었다.

이후 게이츠는 모든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다행히 군법에 처리되지 않고 워싱턴 휘하에서 비전투담당직을 맡았다.

한편 용맹을 떨치던 아놀드는 5개월 이상 다리를 치료하고 상원으로부터 계급승진을 받았다.

아놀드는 워싱턴의 명령으로 영 해군의 침투를 막을 수 있는 웨스트 포인트 요새 구축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돈이 필요한 아놀드는 영군과 내통하여 웨스포인트를 영국에 내주는 대가로 20,000 파운드를 요구하다가 1780년 9월 21일 워싱턴군에 발각되어 아놀드는 영국으로 도주하였고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다.

재치 있는 조각가가 새라토가 전쟁터에 참전장성들의 동상을 세웠지만 아놀드동상 대신 그의 장화만 조각했다. 반역자였지만 그의 전공은 인정해주는 뜻이다.

워싱턴의 애국심은 후세에도 교훈이 되어 군인은 충성심을 키우고 군 통수권자는 물론 미국민은 군인을 존중한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를 비롯한 미 항공사는 미 공항에서 정복을 입은 미군들에게 일등석과 같은 탑승수위를 공항내 방송으로 알린다. 이 방송을 듣는 미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방위하는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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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6
미국의 캐나다 침략(9)-미 독립전쟁 전후(9)

 

(지난 호에 이어)

1777년 9월 19일 영군이 프리맨농장의 전장을 점거했어도600여명의 영군희생자 보고는 버고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미군의 희생자는 300여명이었다. 뉴욕시에 본부를 둔 헨리 클린턴 영국군이 10월초 버고인군과 합세하기 위해 9월22일 출정한다는 내용의 12일자 편지를 받은 버고인은 21일 공격명령을 보류하고 10월초까지 큰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벌려 했으나 모건 장총부대의 계속적인 저격은 영국장교들의 악몽이 되었다.

또한 린컨 소장과 브라운 대령은 티콘도로가 요새의 영국군 후미를 공격하여 29일 포위를 당한 버고인은 식량과 보급이 완전히 끊겨 진퇴양란에 빠졌다. 요원한 헨리 클린턴 구원병 소식을 기다릴 수 없어 버고인은 10월 3일 참모회를 열고 총공격작전을 세웠다.

헨리 클린턴 구원병은 10월 6일 새라토가 남쪽에 133 km 떨어진 클레먼트에 도착했으나 민병들의 공격을 받으며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이츠와 아놀드 분쟁

게이츠 사령관이 상원에 올린 프리드맨농장전투보고서에 아놀드의 혁혁한 전공을 빠트려 아놀드와 그의 부관들의 분개심을 일으켰다. 작전 능력이 서로 다른 아놀드와 게이츠는 언쟁에서 큰소리치는 분쟁으로 변했다.

전투 중 후방에 서 명령만 내리는 게이츠는 언제나 전방에서 용맹을 떨치는 아놀드를 린컨 소장과 교체했다. 화가난 아놀드는 워싱턴군으로 재영입하기를 원하여 아놀드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비머스 하이츠전투

10월7일 오전 10시경 전투력 있는 5,000여명의 영국군은 밀물처럼 늘어나는 13,000여명의 미군병력에 비해 반도 안되었지만 버고인은 헨리 클린턴 구원병을 포기하고 미군 좌측을 향해 정찰대를 보내며 프레이저 준장의 선발군을 영군 우측에 독일용병군을 중앙에 영국정규병군과 포병대를 영군좌측에 포진하여 비머스 하이츠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1km 정도 행군을 한 버고인이 미군의 동태를 파악할 때 게이츠는 린컨 소장을 미군우측에 러니드준장을 중앙에 자신은 본부진영에서 미군좌측을 맡아 푸어 준장의 군을 앞세우고 모건저격대를 왼쪽 숲 속 깊숙이 배치하였다.

게이츠는 총 8,000여명의 미 연합정규군과 의병군이 영군의 접근을 기다리게 하였다. 오후 2시경 영군의 총성이 울리며 미군좌측을 공격했지만 고지 위에서 역공격하는 푸어군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애클랜드 소령이 이끄는 영 보병대가 육박전으로 다가올 때 푸어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영 보병대는 애클랜드와 함께 사살당하거나 흩어져야 했다. 영군선발대를 이끌던 프레이저는 모건군의 저격으로 쓰러지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버고인은 모건 저격대로부터 총격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4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버고인은 영군의 보루 북쪽진영으로 후퇴했다. 미군은 약 200명의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아놀드가 수비를 우선으로 하는 게이츠의 군대를 이끌고 브라이어맨 독일 용병과 캐나다의용군이 수비하는 2개의 보루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영군을 쓰러트렸다.

아놀드의 용맹으로 미군은 브라이어맨이 수비하는 첫 번째 보루를 탈취했고 아놀드군에 합류한 모건의 저격대는 원거리에서 브라이어맨을 쓰러트렸다.

게이츠와 결별하고 워싱턴군으로 전근하기로 한 아놀드가 전장을 떠나지 않고 되돌아와 게이츠의 허락없이 용맹을 떨쳤지만 총격을 받은 말과 함께 쓰러지며 말 밑에 깔려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들것에 실려갔다.

보루를 점령당한 독일용병들이 재집결하여 공격을 시도 했지만 날이 어두워져 다음날로 미루어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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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9
미국의 캐나다 침략(8)-미 독립전쟁 전후(8)

 

(지난 호에 이어)

베닝턴 전투에서 미군에 패한 버고인은 하우 총사령관의 영군이 알바니아 대신 필라델피아로 향했고 1777년 8월 29일 센 러제이 소장이 이끄는 온타리오주 지원군이 스텐윅스에서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제인 메크리에 학살로 인해 미 정착인들로부터 민심을 잃은 것은 물론 분노에 찬 의병들이 미 독립군에 노도와 같이 계속 몰려들었고 전의를 잃은 인디언 전사들이 속속 영군을 떠났을 뿐 아니라 군 양식 현지조달을 받지 못해 퀘벡에서부터 험난한 강이나 도로를 통한 수송수단에 의지하려 했으나 각처 민병들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초조해진 버고인은 부관들과 참모회의를 열었다. 라이더설 독일용병 중장은 티콘도리가 요새로 영군의 작전상 후퇴를 제안했으나 버고인은 후퇴하지 않는 명예를 중요시하여7200명의 군을 이끌고 남침을 고집했다.

 

워싱턴 용병책

버고인 영군의 남침을 심각하게 판단한 워싱턴 총사령관은 8월 19일 스카일러 중장과 교체되어 부임한 게이츠의 북부방위군 지원을 위해 데니얼 모건 대령의 정밀타격대에 이어 공격적인 아놀드 소장과 링컨 소장 퍼트넘 소장들이 이끄는 군대를 파병하였다.

워싱턴은 계속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었지만 영군을 피해 펜실바니아 서부로 진지를 옮긴후 게이츠의 북부방위군을 위해 주력부대를 파병하는 용단을 내렸다. 모건이 지휘하는 500명의 정밀타격대는 보통소총의 80야드 사거리에 비해 300야드의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할 수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나 숲에서 접근하는 적을 저격할 수 있었다.

 

비머스 하이츠 고지

워싱턴의 지원을 받은 게이츠는 9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게이츠는 카지에스코 폴랜드계 공병장교의 지휘로 1주일에 걸쳐 세라토가에서 남서쪽으로 16km 떨어진 비머스 히이츠 고지에 방어요새를 구축하였다.

세라토가는 알바니아에서 북동쪽으로 60 km 떨어져있고 영군은 세라토가를 지나 서쪽의 산으로 덮여있는 숲과 동쪽의 헛슨강 사이의 비머스 하이츠 협곡을 지나야만 알바니아로 갈 수 있었다.

 

프리맨 농장전투(1777년 9월 19일)

버고인 영군은 미군의 위치를 파악하며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진군을 하여 9월 18일 헛슨강을 건너 선두는 세라토가 북쪽 6.4km까지 도착했다. 양 군의 정찰대가 접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의 좌측을 지휘하는 아놀드는 총공격으로 돌진하려고 했으나 선 수비 후 공격 전술을 주장하는 게이츠 총사령관의 저지를 받게 되어 둘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19일 오전 10시 버고인의 영군이 세 갈래로 진군하여 비머스하이츠 북쪽 근교의 프리맨 농장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놀드는 게이츠를 설득하여 영군의 우측 군을 공격하는 전투임무를 맡고 모겐의 저격군을 앞세우고 숲에서 진군하는 영군의 장교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선두의 영국 장교들을 거의 다 쓰러트렸다.

영군의 우측군대가 도착하지 않아 모겐은 숲에서 나와 선두로 오는 영군의 중앙군대를 향해 평지로 돌진하였으나 영군의 중앙 군과 좌측 군의 포격을 받고 뒤늦게 도착한 우측 영군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숲으로 쫓기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게이츠는 두 개의 연대와 민병을 파병하여 모겐저격대를 지원하였다. 오후 1시에 재 집결한 양군은 육박전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진후퇴를 반복하였다. 모겐저격대는 숲에서 재정비하여 영군장교들과 포병을 계속 쓰러트렸다.

영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아놀드는 게이츠로부터 2개 사단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영군의 총공격에 미군이 밀리게 되었다. 다행히 미군이 약세에 몰릴 때 저녁이 되어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우세한 영군은 600명, 수세에 몰렸던 미군은 300명이 희생당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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