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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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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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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30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2)-윌리엄 헨리 해리슨(2)

 

▲해리슨과 테컴서의 악연의 만남

 

테컴서 전쟁(Tecumseh’s War 1810-1813)

1768년 오하이오주 칠코트에서 태어난 테컴서는 1774년 미 정착인들과의 전투에 참가한 부친의 전사를 목격하고 샤니원주민 전투병력에 가담하여 불루재킷추장을 따라 1793년 폴른 팀버 전투에 가담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불루재킷추장은 1794년 그린빌조약을 맺어 오하이오주의 대부분을 양보하였고, 테컴서에게 추장자리를 넘겼다.

이 조약에 증인으로 서명한 해리슨이 1801년 인디애너주 빈센스에 정착한지 4년째 되는 1805년 오하이오주에서 쫓겨난 테컴서 샤니추장은 인디애너주에 이주하여 빈센스에서 북동쪽으로 242km 떨어진 곳에 프로펫타운을 세웠다.

테컴서는 텐스크와타와와 함께 각지에 퍼져있는 원주민 부락을 찾아 다니며 원주민 연합을 통해 백인들의 영토확장을 저지하고 원주민 자치국가 설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테컴서 남동생 텐스크와타와는 신령의 힘을 받아 자신이 예언자가 되었고, 자기를 따르는 원주민은 신령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백인들을 무찌를 수 있으니 테컴서추장을 따르라는 설교를 하여 이에 동조하는 원주민 전사가 현저하게 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테컴서는 전투태세를 갖춘 400명의 전사와 함께 북서부지역의 원주민토지를 차지한 빈센스의 해리슨을 찾아왔다. 놀란 미군들은 그들을 그라우스랜드 해리슨 저택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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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 만난 자리에서 테컴서는 원주민추장과 개별적으로 거래된 미국의 토지양도계약은 무효로 하고 원주민 연합과 재검토하지 않으면 원주민의 총공세를 각오하라고 얼음장을 놓고 만약의 경우 해리슨을 살해하라고 전사들에게 암시를 주었다.

1809년 웨인요새 조약으로 12만 평방 km의 토지를 원주민으로부터 매입한 해리슨은 침착하게 테컴서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겠다며 손도끼와 장총을 장전한 테컴세 전사들을 향해 칼을 빼어 들고 미군들에게 방어태세를 명령하여 양편은 전투 일보직전에 들어갔다.

다행히 해리슨과 친분이 두터운 위너맥 추장이 평화적으로 만났으니 일단 평화적으로 일단락 짖자고 하여 테컴서는 해리슨에게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않을 경우 원주민은 영국군과 합세하여 총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마지막 경고를 주고 떠났다.

이후 테컴서전쟁이 시작되었고 해리슨과 테컴서간의 악연이 시작 되었다.

 

티퍼커누 전투(Battle of Tippercanoe, 1811)

해리슨은 테컴서의 경고에 대비하여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서부군 지휘관 임무를 부여 받고 테컴서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했으나 테컴서는 응하지 않았다. 독자적으로는 미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테컴서는 원주민 결속을 위한 캠페인 여행으로 프로펫타운을 떠나야 했다. 떠나기 직전 동생에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미군을 공격하지 말고 수비만 하라고 당부하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13년간 정치활동을 했던 해리슨은 테컴서가 부재 중이라는 소식을 받았다. 해리슨은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2011년 11월 6일 인디애너주 민병 700명을 포함한 미군 1090명을 지휘하여 프로펫타운 근교 티퍼커누에 진을 치고 다음날 텐스크와타와를 만나 무력시위로 테컴서와 평화협상을 유도할 계획이었다.

해리슨 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한 텐스크와타와는 형의 지시를 무시하고 용맹스런 전사들을 동원하여 11월 7일 새벽 4시 30분 해리슨 참수작전으로 미군을 와해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완전 무장한 상태로 수비작전을 준비한 해리슨 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다.

미군의 수비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을 내린 텐스크와타와 전사들은 자신을 지켜준다는 예언자의 설교가 허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의를 잃고 프로펫타운까지 버리고 도주했다.

11월 8일 프로펫타운이 텅 비었다는 소식을 접한 해리슨은 군을 풀어 원주민 군량과 텐트를 모두 불태워 프로펫타운을 초토화시켰다. 여행에서 돌아온 테컴서는 동생 때문에 초토화된 프로펫타운 재 건설에 들어갔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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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3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1)-윌리엄 헨리 해리슨(1)

 


영어이름: William Henry Harrison

출생: 1773년 2월 9일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

사망: 1841년 4월 4일(68세) 워싱턴 DC

부인: 애너 심스

부친: 벤자민 해리슨 4세, 56명의 미 독립선언서 서명인 중 한 명

손자: 벤자민 해리슨 미 25대 대통령

특성: 1812년 전쟁 영웅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9대, 1841년 3월 4일-4월 4일(31일간 재임)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8/44

소속정당: 위그당(Whig Party)

업적: 오하이오 협곡 서쪽으로 북서부지역 개척

인용구: 우리 인간은 시간 따라 변한다.

 

성장과 교육, 결혼(1773-1795)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1773년 2월 9일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 해리슨 농장에서 부친 벤자민 해리슨과 모친 엘리자베스 사이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1776년 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버지니아주 주지사를 역임했다.

 

윌리엄은 14세까지 가정교육을 마치고 햄프든 시드니 교회대학 3년 과정을 끝내고 1791년 부친 사망 후 펜실베니아 대학교 의과에 입학했으나 군인이 되기 위해 의학 공부를 접어두고 18세 나이로 소위에 임관했다.

 

1793년 웨인 준장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폴른 팀버 전투에 참전, 연락장교로 활약했고, 웨인 준장의 승리로 원주민으로부터 오하이오주 2/3를 양도받는 그린빌 조약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동년 모친 사망으로 받은 3000에이커 농장 유산은 동생에게 매도하고 계속 군복무를 하여 1797년 대위로 승진했다.

 

1795년 22세의 해리슨은 두 살 아래인 애나 심스를 만나 열애를 하게 되었고 결혼을 원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시 대령으로 군복무를 마친 애나의 부친 잔 심스 법관은 해리슨의 직업으로는 자기 딸을 부양할 수 없다고 딸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해리슨과 애나는 애나 부친이 출장을 간 사이 도망을 쳐 1795년 11월 25일 결혼식을 올리고 해리슨이 근무하는 워싱턴 요새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다. 장인에게 들통이 난 해리슨은 결국 결혼 승인을 받고 장인은 사위의 출세를 위해 도와주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5번째로 태어난 잔 스캇은 미 정치인으로 활약하였고, 23대 미 대통령이 된 벤자민 해리슨을 낳게 되어 미 역사상 유일하게 조부와 손자가 대통령이 된 기록을 갖게 되었다.

 

정계입문과 영토확장, 대학설립(1798-1809)

잔 애덤스 2대 대통령은 해리슨 장인의 요청으로 1798년 7월 해리슨이 북서부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는 북서부지역을 개척하여 경쟁력이 좋은 토지가격을 제공하게 되어 이주자가 증가하여 미 상원을 선출할 수 있는 인구증가를 일으켰고 1799년 26세의 나이에 상원에 당선되어 미 상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1800년 그는 북서부 지역을 오하이오, 미시간, 미네소타, 일리노이, 인디애나, 위스칸슨 지역으로 나누었다.

 

1801년 해리슨은 인디아나주 빈센스에 자리를 잡고 1809년까지 주지사로 임명되어 한때 루이지애나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1801년에 그는 빈센스 대학교(University of Vincennes)를 설립했고, 1805년에는 빈센스 근교에 26개의 방을 가진 호화주택을 건축하여 정객들을 맞이하였다. 그라우스랜드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최초의 벽돌건물로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해리슨은 북서부 지역을 매입하는 직책을 맡고 원주민과 협상하여 임기 중 총 5,100만 에이커(20만6389 평방 Km)의 토지를 매입하여 연방정부에 반입하였다.

 

200에이커당 1센트도 안 되는 가치에 해당하는 술이나 총, 탄약 등을 원주민 추장들에게 뇌물로 주고 토지를 양도 받았다.

 

참고로 1803년 토마스 제퍼슨이 프랑스 나폴레옹으로부터 그 당시 미국의 영토만큼 되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1에이커당 2.1센트에 거래한 것은 토지등기를 구입한 것이 아니라 원주민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거나 약탈할 수 있는 식민지정책 권리를 구입한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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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0)-마튼 밴 뷰런(3)

 

 

 캐나다와 국경분쟁(1837-1842)

 1837년 윌리엄 리온 멕켄지 온타리오 주의원은 캐나다를 공화체제화 하는 모의를 벌였다가 긴급 출동한 영군에 의해 만가메리 태번 전투에서 패하여 미국 나이아가라로 피신하였다. 그는 버팔로에서 미국 민병을 일으켜 온타리오주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는 케럴린 증기선을 구하여 군수물자 및 군 수송에 사용하려 했으나 이 기미를 알고 미국 영해를 침입한 영 해군에 의해 침몰 당했다. 이 사건으로 미 국민의 희생자를 목격한 뉴욕주민들은 영해군 선박을 불태워 보복을 감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밴 뷰런은 영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윈필드 스캇 소장을 분쟁지역으로 파견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지시했다. 그리고 1838년 1월초 밴 뷰런은 상원의 결정에 따라 미국은 캐나다 내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공표하고 호전적인 뉴욕주 민병을 진압시켰다.

 

 1838년 12월 29일 캐나다 뉴 브런스윅 벌목 꾼들이 미국 메인주와 접하는 영토분쟁 지역에 침입, 벌목을 하여 메인주 벌목 꾼들과 분쟁을 하게 되었다. 영국 군대가 몰려들면서 메인주 민병대가 맞서 전쟁 촉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839년 미 상원은 5만 명의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1천만 달러의 예산을 편성했다.

 

 밴 뷰런은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 주재 영국대사를 직접 만나 전쟁보다 외교적인 합의를 추구하며 스캇 장군을 분쟁지역에 파견하여 전투 없는 대치를 유지하게 했다.

 

 1842년 8월 9일 이 분쟁은 잔 테일러 미 10대 대통령 재임시 웹스터-애쉬버트 조약으로 외교적인 합의가 체결되어 메인주 접경을 포함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책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40년 대선

 밴 뷰런은 민주당과 잭슨의 지지를 받고 재선에 출마했지만 1837년 경제공황이 회복되지 않았고 노예제도, 원주민 축출 문제 등이 걸려있을 뿐 아니라 캐나다와 영토분쟁으로 야기된 영국과의 교착상태가 해결되지 않아 미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반면 위그당이 지지한 윌리엄 해리슨 대선후보는 1812년 전쟁영웅으로 잘 알려진 정치인으로 민주당의 경제실책이 잭슨과 밴 뷰런의 중앙은행 폐쇄로 인한 실책이라고 유세를 펼쳐 나갔다.

 

 1840년 12월 2일 개표 결과 밴 뷰런은 60개 선거인단 표를 받아 234개의 표를 받은 해리슨에게 대패하였다. 80% 이상이 참여한 선거에서 뷰런은 1,130, 033표 해리슨은 1,275,612표를 받았다.

 

 대통령 퇴임과 은퇴(1841-1862)

 1841년 3월 4일 퇴임한 밴 뷰런은 정치에 관심을 놓지 않고 정부 정책을 분석하여 민주당을 도와주었다. 그를 지지하는 민주당 일부는 밴 뷰런을 1844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하려 했지만 다수 표를 얻지 못해 포기했다.

 

 1846년 멕시코 전쟁 발발 2년 후 미국이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를 합병했을 때 밴 뷰런은 반 노예주의와 노예해방을 제창하여 민주당은 물론 정계를 놀라게 하였다.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민주당과 위그당 당원들은 밴 뷰런과 자유당(Liberty Party)을 창당하고 뷰런을 1848년 대선후보로 지명하였지만 뷰런은 선거인단 표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제 3당으로 10.1 %의 지지를 받았다.

 

 밴 뷰런은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교체되는 정부의 정책을 계속 도와주었다. 1854년 3월 20일 위그당의 에이브러햄 링컨 상원을 포함하여 창당된 공화당의 링컨이 1860년 대선에 당선되었을 때 미 남부는 노예해방운동에 반대하여 미 연방에서 탈퇴를 진행하고 있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밴 뷰런은 링컨을 지지하였다.

 

 사망(1862)

 1861년 겨울 폐렴으로 몸져누웠던 밴 뷰런은 1862년 7월 24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킨더후크 교회장지에 누운 부인 해너 곁에 안장되었다. 그는 대통령 퇴임 후 8대의 대통령을 거처 링컨 16대 대통령 재임시까지 생존하여 정책을 도와준 기록을 갖고 있다.

 

 민주당을 유산으로(1828-현재)

 워싱턴 초대 대통령 재임시 워싱턴 내각은 해밀턴 연방당과 제퍼슨 민주공화당으로 나누어졌다. 연방당은 내부분열과 1812년 전쟁반대로 인기를 잃고 182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민주공화당은 제퍼슨 정책을 고수하는 민주당과 해밀턴 일부 정책을 따르는 위그당(Whig Party)으로 분열되었다.

 

 밴 뷰런이 밀어준 잭슨은 1828년 민주당 창당 이후 첫 번째 미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클레이를 중심으로 1833년 창당된 위그당은 1854년 공화당으로 개명하여 창당대회를 가졌다. 1860년 링컨이 첫 번째 공화당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 공화당에 이르고 있다.

 

 위 테이블 중심에 원으로 쌓인 민주당 로고 외에 당나귀는 잭슨을 조롱하는 민주공화당원들이 잭슨을 멍텅구리(A Jackass)로 부를 때 잭슨은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당나귀로 표현하고 민주당 마스코트로 사용하는데 만족한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민주당원들은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당나귀에 비유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4년 이후 만화가 토마스 내스트는 사자탈을 쓴 민주당 당나귀를 만나는 코끼리를 공화당으로 표현하여 현재 양대 정당을 표현하게 되었다.

 

 밴 뷰런은 미국이 양대 정당으로 나누어져야 정치적 효율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민주당을 정치적 유산으로 남기는데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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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9)-마튼 밴 뷰런(2)

 

 

1836년 대선

8년간 공격적인 잭슨 대통령의 제1인자로 정치활동을 한 약삭빠른 밴 뷰런은 잭슨의 마음을 사로잡아 민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민주공화당의 분열로 파생된 위그당은 후보경선 통합이 되지 않아 대니얼 웹스터, 휴 러슨 와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 윌리 P 맹검 4명의 후보가 대선에 뛰어들었다.

 

밴 뷰런은 잭슨의 정책을 따라 연방은행 폐쇄, 노예해방반대, 원주민 축출의 선거유세를 강화하여 1836년 12월 7일 선거인단 170개의 표를 얻고 50.8 %의 지지율로 미합중국 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 역사상 처음으로 비 영국계 대통령이 되어 네덜란드계 미 정착자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다.

 

대통령 임직(1837년 3월 4일-1841년 3월 4일)

밴 뷰런은 부통령에 당선된 리처드 멘토어 잔슨과 조을 라버츠 포인세트 국방장관을 제외하고 잭슨 정부의 내각을 인수받은 대로 지켜 나갔다. 밴 뷰런은 정기적인 각료회의를 통해 부서 장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리고 그들은 잭슨의 영향력을 받았다. 재혼을 하지 않은 밴 뷰런은 큰며느리 얀젤리카 싱글턴이 백악관 영접을 맡게 하였다.

 

1837년 경제공황(1837-1840)

밴 뷰런의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지 2달 후 미국의 은행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1837년 경제공황이 미합중국을 휩쓸었다.

 

1819년 경제공황(1819-1821)과 1837년 경제공황의 공통점은 폭풍 전 조용한 바닷물결 같은 경제호황으로 인해 시중에 종이돈이 넘쳐흘러 서부개척으로 인한 토지구매가 투기사업으로 변신하고 유럽을 향한 수출품목이 발목을 잡히면서 경제가 침체되는 경제주기를 맞은 것이다.

 

1819년 공황은 경제호황으로 융자를 쉽게 내준 시중 은행들이 제2차로 세워진 중앙은행이 융자에 족쇄를 조이고 융자금을 환수하려 하자 돈이 흐르지 않게 되었고 은행이 발행한 신용장에 불과한 종이돈을 믿지 못하는 시민들은 은행으로 달려가(Bank Run) 종이돈을 금이나 은으로 바꾸려 하자 금은이 바닥이 난 시중은행들이 문을 닫게 되었지만 경제가 풀리면서 중앙은행이 종이돈을 풀어 2년 후 경제반등이 가능했다.

 

1819년 공황으로 토지를 잃은 백인들은 선거권까지 없어진 빈민이 되어 중앙은행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원래 중앙은행을 폄훼했던 잭슨은 상원을 통해 이들이 선거권을 갖게 하면서 중앙은행 폐쇄를 선거공약 중 하나로 걸고 그와 동조하는 밴 뷰런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반면에 1837년 공황은 잭슨이 중앙은행을 폐쇄했기 때문에 뉴욕시 대형은행을 포함한 각주에 산재한 시중은행들이 한 순간에 Bank Run으로 대부분 문을 닫게 되었고 3년 후 유럽의 경제반등으로 경제회복을 할 기회가 있었으나 돈을 풀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어 돈이 돌지 않아 1850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로 인한 금광채광으로 붐이 날 때까지 장기간 경제침체를 맞게 되었다. 미 역사상 1837년 공황은 1929년 세계 대공황 다음가는 경제침체로 기록되고 있다.

 

중앙은행 환원의 압박을 받은 밴 뷰런은 1841년 미합중국의 재무성을 독립기관으로 만들고 필요한 종이돈을 시중 대형은행들이 발행하게 하였으나 시중 은행들이 필요한 돈을 융자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역할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밴 뷰런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정책은 없었다.

 

20% 실업률로 굶주린 시민과 파산한 농장이나 상공업 자영업자들은 약탈자로 변했다. 특히 서부와 남부지역이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공황 중에 태어난 유아들은 영양실조로 성장 후 평균키가 공황 전후 시민보다 5 cm 작았다.

 

1837년 공황으로 걸인이 된 백인 유권자들은 잭슨을 원망하게 되었고, 밴 뷰런은 1840년 대선에 참패를 하게 되었다. 잭슨을 도와 중앙은행을 없앤 자업자득이었다.

 

참고로 중앙은행의 절대적인 필요성은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제안되어 워싱턴정부가 채택하였고 미합중국이 금융으로 세계패권 국이 될 수 있는 반석을 만들었다.

 

잭슨에 의해 없어진 중앙은행은 1917년이 돼서야 연방준비은행으로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미 달러의 기축통화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1917년 연준 부총재를 지낸 폴 와버그는 1917년 연준인 국가의 중앙은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은행을 위한 은행에 의한 은행의 중앙은행’.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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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9
한민족의 염원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한국기업체

 한국은 세계시장을 주름잡아 현재 10대 경제 대국이 되어 한국 브랜드로 세계 한인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음악 연예계도 한국이 세계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한국음식도 세계음식이 될 것으로 예견된다.

 

 삼성과 한국전력은 2010년 1월 당시 온주 자유당정부와 협약 하에 70억 달러 투자규모로 풍력발전사업을 일으켜 온주에 1만6,000개의 일자리를 창출 하는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LG와 네덜란드의 스텔란티스는 2022년 3월 50억 달러 이상 투자규모로 덕 포드 온주 보수당 정부와 전기자동차 배터리공장을 세워 온주에 2,5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한국 상품만 아니라 직업창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온주의 모자이크 정치인

 온주 특히 광역토론토(GTA)는 이민자들이 다수 민족이 되어 40% 되는 백인들보다 정치력이 커지고 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방정부 보수당 특히 스티븐 하퍼 전 연방수상의 반 유색인종 이민정책은 GTA 유색이민자들이 트뤼도 자유당을 더욱 선호하게 만들어 자유당 표밭을 강화했다.

 

 온주 주민들은 연방 자유당이 온주에 더 많은 재정적인 도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온주 자유당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온주 자유당의 화력발전소, 하이드로원(HYDRO ONE) 등의 실책으로 주민들은 2018년 총선에서 덕 포드 보수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었다. 무대포로 알려진 덕 포드는 사태판단 능력이 탁월하여 임기 초에 트뤼도 연방 자유당과 갈등을 보이다가 2022년 선거가 가까워지자 자유당 성향의 표심을 얻기 위해 트뤼도와 사이를 좋게 지내 무난히 다수당이 될 것이라는 여론조사를 유지하고 있다.

 

 킹 메이커

 길거리에 즐비한 선거 유세판을 보면 토론토 GTA 후보자들의 이름들은 유색인종의 민족을 대표하는 모자이크 화판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민족의 이름은 2개가 된다.

 

 한인이 극소수인 스카보로 북부의 조성준 장관은 원래 잘 알려져 이번 6월 2일 총선에 무난한 재선을 기대하고 있다.

 

 2018년 초선으로 덕 포드 주수상의 인정을 받고, 3년 만에 교통부 부장관에 임명된 능력 있는 조성훈 후보의 윌로우데일 선거 지역에는 총 11만8,805명의 거주자 중 한인들이 10.3% 가량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선거에 참여한 한인들은 8,000여명의 유권자 중 2,200명이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40%의 지지율로 35%의 필리핀계 자유당 후보보다 앞서지만 한인 거주자들이 90% 이상 조성훈 후보를 지지하면 조 후보는 무난히 재선될 것으로 볼 수 있다.

 

 윌로우데일 한인들 개개인이 킹 메이커의 자긍심을 갖고 조성훈 후보를 지지하여 장관을 거쳐 훗날 당수가 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캐나다 거주 한민족은 물론 세계 한민족의 염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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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8)-마튼 밴 뷰런(1)

 

 

 

 

영어이름: Martin Van Buren

출생: 1782년 12월 5일 뉴욕주 킨더훅

사망: 1882년 7월 24일 (78세) 뉴욕주 킨더훅

특성: 교활한 성격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8대, 1837년 3월4일-1841년 3월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24/44

소속정당: 민주당

업적: 미합중국 정계에 두개의 정당체제 수립

인용구: 일을 못한다는 변명보다 성취하는 것이 더 쉽다.

 

 

 성장 및 결혼(1782-1819)

 마튼 밴 뷰런은 1782년 12월 5일 뉴욕주 킨더훅에서 네덜란드계 부친 에브레험 밴 뷰런과 마리아 호스 밴 알렌 사이에서 3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마튼은 킨더훅에서 교육을 받고 워싱턴 세미너리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중 마튼은 부친이 경영하는 숙박업을 도우며 여러 민족의 언어 및 풍습을 익히게 되었고 해밀턴과 버를 비롯한 미 정계의 거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 뉴욕시의 밴 네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수를 받고 1803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마튼은 1807년 뉴욕주 캐스킬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사귀었던 사촌인 해나 호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정계 입문과 부인 사망(1812-1819)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둔 마튼은 1812년 민주공화당 후보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뉴욕주 검찰총장을 맡았다. 1816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재선되어 상원직과 검찰총장직을 겸임했다.

 

 4명의 자식을 키우던 해나는 1819년 2월 5일 35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37세의 마튼은 평생 재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중견 정치인(1821-1828)

 밴 뷰런은 1821년 2월 뉴욕대표 미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워싱턴에 도착했다. 1812년 전쟁 이후 이 시기를 독립된 미합중국의 평화시대라고 불렸다. 정치 판단능력이 재빠르게 탁월하여 상원 재무위원장과 법무위원장을 맡았다. 반대하는 정객들은 그를 작은 마술사(Little Magician) 또는 교활한 여우(Sly Fox)라고 불렀다.

 

 밴 뷰런은 1824년 대선에서 제퍼슨과 회동하여 민주공화당 크라포드 대선 후보를 지지했지만 잔 쿠인지가 하원의 표결로 당선되었다. 밴 뷰런은 잔 쿠인지보다 더 많은 지지율로 낙선된 잭슨의 불만에 부채질을 하여 잔 쿠인지 정책을 무조건 반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의 교활성은 잭슨의 약점을 보완하여 잭슨의 신임을 얻게 만들었다.

 

 밴 뷰런은 미국연방 정계는 지연과 지역을 초월하여 두 개의 정당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에 연방당이 없어지며 민주공화당이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밴 뷰런은 공격적인 잭슨을 지원하여 1828년 대선에서 잭슨이 압승하게 만들었고 잭슨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2022년 5월 10일 세계최대 부호가 된 일론 머스크는 440억 달러에 트위터를 매입하게 되면 트럼프가 트위터를 메가폰으로 재사용할 수 있게 허용한다는 약삭빠른 성명을 했다. 트럼프가 트위터를 이용한 거짓선전으로 미 국민의 표심을 얻어 2024년 대선에 당선되면 투자한 돈의 10배 이상 뽑겠다는 교활한 사업가정신이라 할 수 있다. 머스크가 현대판 제2의 밴 뷰런이 될지는 미 국민이 만드는 운명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 볼 수 있다.


 

 국무장관과 영국주재 미 대사

 밴 뷰런은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1829년 1월 1일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한 달 후 잭슨은 밴 뷰런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의했다. 밴 뷰런은 그의 각본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주지사직을 맡은 지 43일 만에 사임하고 잭슨 정부의 국무장관직을 수락했다.

 

 국무장관 재임 중 2년간 밴 뷰런은 프랑스로부터 나폴레온 전쟁 중 나포된 미 상선들의 대가로 500만 달러를 보상받고 영국의 서인도제도와 무역협정 그리고 오스만제국 및 러시아제국과 무역협정을 맺었다. 또한 캐나다 뉴브런스윅과 미국 메인주의 국경을 확실하게 표기하였다.

 

 잭슨은 1831년 8월 밴 뷰런을 주 영국 미 대사로 임명하여 9월 런던에 도착한 밴 뷰런은 영국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1832년 2월 미 상원은 캘훈 부통령의 정치적 압력으로 밴 뷰런의 대사직을 기각하였다. 이로 인해 화가 난 잭슨은 1832년 대선을 위한 민주당 정당대회에서 캘훈 대신 밴 뷰런을 러닝메이트로 선정하여 12월 대선에서 압승하게 되었고 밴 뷰런은 부통령이 되었다.

 

 밴 부런은 연방은행 폐지를 포함한 잭슨의 반 해밀턴 정책을 지지하여 미국 최대의 경제공황을 초래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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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5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7)-앤드류 잭슨(4)

 


 

 연방법 무효화 운동 저지(1832)


 1828년 잔 쿠인지에 의해 통과된 관세법은 남부 목화농장주들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초래하였다.
 

 1832년 7월 높은 관세로 남부의 원성이 높아지자 잭슨은 관세법 통과로 이득을 보는 북부 생산공장주들과 합의하여 관세를 45%에서 27%로 내렸다. 그러나 11월 캐롤라이나주는 연방관세법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이에 맞서 잭슨은 미 해군을 찰스턴 항구에 정박하게 하고 연방법 무효와 연방탈퇴 운동권자들을 교수형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2월 말 잔 캘훈은 임기만료 3달을 남기고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캐롤라이나주를 대표하는 상원직을 맡았다. 잭슨은 반대하는 주에 연방군사력을 동원하는 법을 상정했다.

 

 1833년 3월 2일 캘훈은 클레이와 함께 잭슨과 관세를 재조정하여 1842년까지 20%로 내리는 합의점을 찾고, 잭슨은 주에 연방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를 관망한 에이브러햄 링컨 상원의원은 후에 연방군을 동원하여 흑인노예 해방운동을 할 수 있었다.

 

 미 연방은행 폐지와 재선(1832)


 1832년 7월 니콜라스 비들 미국 연방은행 총재는 1816년 매디슨 재임시 설립한 제2 미 연방은행의 연장 법안을 상원에 상정하여 통과시켰으나 잭슨의 거부권으로 무산되어 1832년 대선의 쟁점이 되었다. 비들은 자금을 풀어 연장을 주장하는 클레이를 지원하였다.

 

 이에 맞서 잭슨은 연방은행은 극소수의 부호들을 위한 도구라는 유세를 통해 중하층의 표를 공략하였다. 12월 5일 대선 결과에서 잭슨은 219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54%의 지지율로 클레이 후보를 가볍게 밀어냈다.

 

 1833년 잭슨은 미 연방은행에서 연방정부의 보증금을 유출하여 주 은행계좌에 예치하기 시작했다. 1835년 1월 1일 잭슨은 경기호황으로 올린 세입과 유출 금액으로 국채를 완전 탕감할 수 있었다.

 

 1835년 1월 30일 의사당 밖에서 잭슨은 리처드 로렌스의 암살 총격에서 무사했다. 연방은행의 폐지로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아 실업자가 되어 암살 시도를 했다고 로렌스는 진술했다.

 

 1836년 경기 호황은 부동산 투기를 초래했고 땅값이 오르자 잭슨은 연방소유의 토지구입은 금화나 은화로 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주 은행들은 금화나 은화를 찾는 예금주들의 뱅크 런으로 문을 닫아야 했고, 미 역사상 1929년 세계공황 다음 가는 1837년 경제공황을 초래했다.

 

 백악관 내조


 잭슨은 원주민 양자 2명과 조카를 양자로 삼고 8명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잭슨은 백악관 입성하기 전 부인을 잃은 후 재혼을 하지 않고 부인의 조카인 에밀리 도날슨과 세라 요크 잭슨에게 백악관 영접을 맡겼다.

 

 은퇴와 사망(1837-1845)


 1837년 은퇴한 잭슨은 고향으로 돌아와 허미티지 농장관리를 맡았다. 가슴에 박힌 총알 합병증으로 몸이 쇠약해졌으나 1837년 경제공황의 책임을 묻는 국민들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도 미국의 정계는 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 재임시 미시간주와 알캔서스주를 영입했으나 텍사스를 주에 영입하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1845년 6월 8일 쇠약하여 침대에 누운 잭슨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친척 친지들에게 “나 때문에 우느냐, 울지 말고 착하게 살아 후에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마지막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허미티지 가족묘지에 누운 부인 레이철 옆에 안장되었다.

 

 트럼프는 21세기의 잭슨이 될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잭슨을 논란이 많은 대통령으로 대우하고 있다. 원주민을 축출하고 흑인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연방은행을 폐지한 잭슨의 초상화를 세계공황 직전인 1928년 이후 20달러 지폐 앞면에 올린 것이 가장 큰 논란이었다.

 

 현재 조폐공사는 노예출신 여성 헤리엣 터브맨(1822-1913) 노예해방운동가의 초상화를 20달러 지폐 앞면에 올리고 잭슨을 뒷면에 보낼 계획이다.

 

 트럼프가 잭슨의 허미티지 묘지를 방문한 후 스티브 베넌으로 하여금 잭슨의 초상화를 트럼프 집무실 벽에 걸게 한 것으로 짐작하는 많은 언론인들과 역사학자들이 ‘트럼프는 21세기의 잭슨이 될 수 없다’고 한결같이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두 사람의 공격적인 성격은 비슷할 수 있어도 잭슨은 국가와 국민을 위했던 반면 트럼프는 자신을 위해서 기본이 다르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민주적으로 치러진 2020년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2021년 1월 6일 미 의회를 점령하라는 암시 내지 실행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의 독선을 따랐다. 즉 미국식 민주주의가 공화당의원들에 의해 퇴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국이 잭슨과 트럼프를 부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백인들의 생존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백인들은 17세기 이후 북미주에 정착하여 원주민을 축출하고 흑인노예를 부리며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더 잘살기 위한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받아야 하는데 백인들보다 유색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언젠가 백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면 그들은 원주민이 축출당했듯이 조상이 착취한 땅을 유색인들에게 넘겨주어 권력 및 소유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만을 위한 거짓선동으로 미 서부와 남부의 저교육 저소득층 백인들의 지지표를 얻었다. 이 지역에서는 트럼프를 따라가야만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한 공화당의원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든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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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세계 속의 미 합중국 대통령(6)-앤드류 잭슨(3)

 

눈물의 길(Trail of Tears, 1830-1842))

총 길이: 약 8,120 KM

강제 추방된 원주민 수: 100,000명 추산

사망자 수: 15,000명 추산

 

플로리다 침공(1816년-1819년)

뉴오얼린스 전투 승리 후 잭슨은 허미티지 농장으로 돌아와 농장을 관리하며 미 남부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1816년 미국과 플로리다 국경의 세미놀 원주민 전사들은 미 정착민 농장에서 도주한 흑인 노예들과 함께 조오지아주 미 정착민들을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잭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이끌고 세미놀 전사들을 일시에 격퇴시켰다.

 

1818년 스페인의 플로리다로 도피한 세미놀 전사들은 플로리다에서 자유가 보장된 흑인 노예들과 연합하여 계속 미 정착민들을 공격하여 먼로 대통령의 하명을 받은 잭슨은 플로리다 서쪽은 물론 플로리다까지 침공하여 세미놀 전사들을 궤멸시키고 원주민 소탕을 이유로 플로리다지역의 스페인 영토를 점령하여 먼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1819년 미 상원은 스페인과 전면 전쟁을 우려하여 잭슨의 플로리다 점령을 비난하였고 먼로는 잔 쿠인지 애덤스 국무장관의 외교능력을 이용하여 플로리다 서쪽과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부터 500만달러에 구입하였다.

 

1824년 대선 패배(1824년)

1822년 7월 22일 테너시주 지명으로 대선후보에 오른 잭슨은 중앙은행 폐지, 정부의 부정부패 척결, 수입 면세 감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백인의 선거권 부여 등의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전쟁영웅으로 특히 남서부에서 인기가 높았다.

 

1824년 12월 1일 선거 결과 41.4%의 지지율로 99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잭슨은 선거인단의 과반수인 131표를 얻지 못해 하원의 표결로 들어갔으나 30.9%의 지지율로 84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잔 쿠인지가 경쟁자 클레이의 표심을 얻어 잔 쿠인지에게 패배 당했다.

 

1828년 대선 압승(1828년)

1825년 대선 후보자로 지명을 받은 잭슨은 4년 전 선거공약 중 보통사람들의 민주화된 선거제도를 강력히 주장했다. 유세기간중 양 선거진영은 역사상 최악의 후보자 개인 인신공격으로 응수했다.

 

1828년 12월 2일 선거결과는 55.5%의 지지율로 178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잭슨이 44%의 지지율로 83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잔 쿠인지를 제치고 대선에 압승했다

 

12월 22일 대선 압승 후 대통령 취임식 10주 전 사랑하는 부인 레이철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원인은 잔 쿠인지 선거진영에서 레이철이 2중 결혼한 간통으로 인신공격을 당한 심리적 충격이었다.

 

12월 24일 레이철 시신을 허미티지 장지에 안장시켰고 잭슨은 다음과 같은 인용구를 남겼다

 

“만약 내가 천국에서 나의 부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천국은 나의 천국이 아니다.”

 

 

대통령 재임(1829-1837년)

 

취임식 및 내각정책(1829)

1829년 2월 11일 부인 사망의 슬픔을 않고 워싱턴에 도착한 62세의 잭슨은 마튼 밴뷰렌 국무장관, 잔 이튼 국방장관, 새뮤엘 잉햄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편성하고 재임 중인 애덤스 대통령과 만남을 피했다.

 

3월 4일 취임식에는 애덤스가 불참했다. 잭슨은 일반인들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혼란스러운 파티를 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잭슨은 내각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내각의 잦은 경질을 시도했지만 후에 효율성 저하로 포기했다. 지연관계로 인한 내각편성을 방지했고 전 정권 내각과 고위관리인들의 부정부패를 수사하고 관련된 각료들을 경질했다

 

원주민 제거 정책과 눈물의 길(1830년-1842)

17세기 초 북미에 도착한 백인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소생한 후 시간이 지나며 인구가 늘고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원주민들의 땅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원주민들의 땅을 매입하고 원주민들과 동화정책을 강조했다. 그러나 계약법보다 방아쇠가 앞서 양측은 투쟁으로 이어갔다. 잭슨은 평생 동안 원주민 축출을 고안하고 대통령 임기 중 법안을 강행했다.

 

1830년 5월 26일 잭슨을 지지하는 상원의원들은 원주민 축출법을 통과시키고 잭슨은 구두로 내각들에게 원주민 땅을 매입하고 그들에게 미시시피 서쪽 영토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잭슨의 암시를 받은 내각들은 원주민 추장들에게 적은 돈으로 뇌물을 주고 원주민들의 땅을 차지하는 계약을 받아냈다.

 

영문도 모르는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던 땅에서 쫓겨나가야 했다. 저항을 하면 총질과 방화로 해결하기 때문에 1830년 겨울 미저리주의 토착원주민 1832년 미저리주 치카소원주민과 조오지아주 크리크원주민과 플로리다주 세미놀원주민 1835년 조오지아주 체로키원주민이 축출당했고, 일부 세미놀 전사들은 1835년부터 1842년까지 백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1842년까지 12년간 10만 명 이상의 원주민이 유타주로 축출당했고 동사나 아사나 질병으로 15,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들은 하루에 10마일을 이동했고 그들이 걸어간 길의 총 길이는 8120 KM나 되었다.

 

현재도 이 길들을 찾을 수 있다. 백인들에게 쫓겨가며 흘린 슬픈 눈물을 표현하여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7년 미 의회는 이 길을 미국 역사의 길이라고 명명하고 원주민 희생자들의 위령을 기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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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1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5)-앤드류 잭슨(2)

 

 

뉴 오얼린스 전투(1815년 1월 8일)


 

제 2 미 독립전쟁 영웅(1812-1815)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잭슨은 자비를 들여 2500여명의 민병대를 소집하였으나 매디슨 대통령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
 

1813년 1월 2천여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영군과 원주민 연합군대와 전투를 계획했으나 매디슨은 잭슨을 인정하지 않아 민병대를 해체 시켜야 했다. 동년 8월 계속 영군에게 패배를 당하던 매디슨은 영군과 합세하여 미 정착인을 학살시킨 레드 스틱스 원주민을 잭슨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2014년 1월 25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플로리다 서쪽의 레드 스틱스 원주민 전사를 궤멸시키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6월 8일 매디슨은 잭슨을 준장으로 인정하고 10일 후 미 육군소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매디슨의 인가를 받고 레드 스틱스 원주민들로부터 9만3000 평방 킬로미터의 토지를 착취하여 미 정부에 기증하였다.


11월 잭슨은 계속 스페인과 영국을 돕는 원주민을 공격하며 스페인이 소유하는 플로리다 서쪽을 침략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잭슨은 대서양과 미시시피강을 잇는 뉴 오얼린스를 점령하기 위해 영군이 대거 출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 오얼린스 전투(1815년 1월 8일)

1814년 8월 미영 양국은 겐트 평화조약을 협정 진행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영국의 헨리 베서스트 국방장관은 나폴레온 전쟁과 대륙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에드워드 퍼켄햄 소장에게 비밀리에 미 남부 뉴 오얼린스를 공격 탈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800년 스페인은 나폴레온의 압력으로 루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하게 된 후 1803년 나폴레온이 미국에게 1500만달러에 매도한 계약을 무효로 하고 루이지애너 지역을 점령하여 스페인과 반분하자는 의도였다.


12월 1일 뉴 오얼린스에 도착한 잭슨은 뉴 오얼린스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 정규군, 지역 의용병, 민병대, 착토우 원주민전사, 프랑스 해적단을 합친 5,700여명의 군사를 일으켜 총지휘를 맡았다.


12월 23일 오전에 8,000여명의 영 정예군이 미시시피강에 도착하여 서쪽 강둑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잭슨은 군함 2척과 육군을 동원하여 영군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미군을 오합지졸로 본 퍼켄햄 소장을 놀래게 했고 영군의 총공격을 지연시켰다. 


12월 24일 미영 양국이 겐트 평화조약에 서명하였지만 이 소식이 도착하지 않아 두 장군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12월 25일 잭슨은 함포사격으로 24시간 영국진영을 교란시켰다. 퍼켄햄은 9척의 영군함대로 미 해군 캐롤리나함을 격침시켰으나 루이지애나함은 프랑스 해적단에 의해 구조되었다. 잭슨은 두 척의 함대에 장착되었던 포를 미군진영에 옮겼다.


12월 28일부터 3일전 기습공격으로 시간을 얻은 잭슨은 3일안에 뉴 오얼린스에서 동남쪽으로 8 KM 떨어진 샬메트지역에 서쪽으로는 미시시피 강둑으로 영군을 수비하고 강둑에서 동쪽 늪 지역까지 1 KM 넘는 뉴 오얼린스 입구를 진흙과 나무로 엮은 높은 토담을 쌓아 올려 수비벽을 만들고 영군을 기다렸다.


이 수비벽은 잭슨 라인으로 알려졌고 젖은 진흙은 떨어지는 포탄을 박히게 만들어 가공할 만한 영군의 포병력을 무력화하는 방어준비를 하였다.


1815년 1월 1일 퍼켄햄의 포병대는 아침식사 중이던 잭슨의 지휘소건물을 파괴했으나 살아남은 잭슨은 즉각 반격명령을 내렸다. 영군의 가공할 만한 포탄은 토담에 박히는 반면에 미군의 32인치, 24인치 박격포탄은 광야에 노출된 영군 대포 15문을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퍼켄햄은 작전상 후퇴명령을 내렸다.


1월 8일 퍼켄햄은 영군 우측 진격에 4천명의 군사를 이끄는 깁스 소장을 선봉장, 램버트 소장을 예비 선봉장으로 미군 왼쪽진영을 공격하여 미군의 포를 포획한 후 포문을 미군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건 준장은 미군수비대의 간격을 넓혀 영 육군과 해병은 쉽게 진격하여 미군의 포부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잭슨의 명령으로 미 포병대는 포에 대못을 박아 영군이 노획한 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램버트는 깁스소장과 손튼준장이 부상 당한 후 광야에 노출된 동부 영군이 미군공격에 밀리자 영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새벽 어둠을 타고 미군 왼쪽 진영을 공격하던 영군은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광야에 노출된 영 포병대가 미군의 포격에 박살이 났다. 인해전술로 미군의 보루 몇 개를 점령했으나 포병지원이 없고 미군의 산탄 포격에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킨 소장도 부상을 입었다.


미군의 맹렬한 공격과 산탄 포는 퍼켄햄을 낙마 시켰고 부상을 입은 퍼켄햄은 말을 갈아타고 지휘를 하다 계속 퍼붓는 산탄 포에 장렬한 전사를 했다. 이 전투는 30분 전투로 알려졌고 미 전투역사에 길이 보존되고 있다.


램버트는 영군의 퇴각명령을 내리고 후퇴를 단행했다. 이 전투로 영군은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을 포함 291명의 전사자를 내어 총 2087명의 희생자를 초래했고 미군은 13명의 전사자를 포함 총 71명의 희생자를 내어 영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월 19일 해군함대로 돌아온 램버트는 참모회의를 열고 작전계획을 세웠으나 잭슨의 용맹과 치밀한 작전에 속수무책이었다.


2월 12일 미영 간에 겐트 평화조약이 실효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군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영 서인도제도로 항해하여 뉴 오얼린스 전투를 종식했다.


세계최강의 영군이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미군의 거의 2배 되는 노련한 군사를 이끌고 이 전투에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남의 소문만 듣고 적을 우습게 본 퍼켄햄 장군의 경적필패로 인한 실수라 할 수 있다. 남의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퍼트리는 사람은 실패를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이다.


반면에 신념과 사실판단에 능숙한 잭슨은 미 역사에 워싱턴 다음가는 제 2 미 독립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샬메트 전투장은 뉴 오얼린스의 관광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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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4)-앤드류 잭슨(1)

                   

영어이름: Andrew Jackson

출생: 1767년 3월 5일, 캐럴리나주 왁사 정착지

사망: 1945년 6월 8일, 테너시주 네쉬빌

특성: 투쟁적인 성격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7대, 1829년 3월 4일 – 1837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7/44

소속정당: 민주공화당에서 민주당 창당

업적: 1812년 미영전쟁 당시 뉴 오얼린스 전투 승리, 주정부의 탈퇴 제압

인용구: 칼은 피에 젖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성장과 교육, 결혼(1767-1794)

앤드류 잭슨은 영국에서 이주한 부친 앤드류 잭슨과 모친 엘리자베스 허친슨 사이에서 1764년 3월 5일 부친이 벌목사고로 사고사를 당한 지 3주 후에 유복자로 캐럴리나 지역 왁사 아일랜드 정착지에서 태어났다. 모친 슬하에서 4살 위 휴와 3살 위 라버트 형과 지역목회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앤드류는 성질이 급하고 싸움 좋아하는 골목대장 노릇을 즐겨 했다.

1779년 큰형 휴가 스토느 전투에서 사망하고, 1780년 영국군에 의한 왁사 지역 미 정착인들의 학살을 목격한 앤드류는 모친의 지시에 따라 둘째 형과 독립 민병대의 훈련을 받고 전령으로 활약하다 1781년 영군에 포로가 되었다.

수감 중 영군 소령이 자기의 장화를 닦으라고 할 때 두 형제는 못하겠다고 대들었다가 소령의 내리치는 칼에 형은 쓰러지고 앤드류는 왼손으로 막다가 왼손과 왼쪽 두개골모피에 깊은 상처를 갖게 되었다.

둘은 수감 중 천연두에 감염되었다. 곧 모친에 의해 석방되어 64KM의 거리를 한 마리 말에 형만 태우고 모친과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형이 사망하고 앤드류를 치료한 모친은 독립군 간호를 하다 11월 콜레라로 사망했다. 이후 앤드류는 왼손으로 왼쪽 두개골모피를 어루만질 때마다 영군을 증오하게 되었다.

14세에 고아가 된 앤드류는 독립전쟁이 끝나고 삼촌의 부양으로 왁스 지역 학교에 등록했지만 일을 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삼촌은 앤드류를 노스 캐럴리나주 샐리스버리로 보내 앤드류는 멕케이 변호사 밑에서 법률을 배웠고 2년 후 변호사자격증을 획득하여 테너시주 지역검사로 일하게 되었다.

1788년 잭슨은 네쉬빌로 이주하여 하숙집에서 레이철 더날슨을 만나게 되어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1794년 결혼식을 올렸다. 레이철은 전 남편과 이혼수속을 끝내고 재혼을 했지만 법적 수속이 지연되어 법원의 이혼승인은 결혼한 후 실효가 되어 불법적인 이중결혼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정치를 포기한 농장주(1795-1806)

잭슨은 1794년 이후 원주민토지를 착취하는 투기를 시작하여 큰 손실을 초래했다. 그는 1796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테너시주 대표 연방하원으로 당선되어 워싱턴내각의 연방당 정책을 반대하였고, 1897년 연방상원에 당선되었으나 잔 애덤스 정책에 실망하고 정치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어 상원직을 사임하고 테너시로 돌아와 연봉 600달러를 받는 주대법관직을 맡았다.

1804년 잭슨은 테너시주 민병대 소장출마로 당선되었고 경쟁자 잔 세비어와 다툼 끝에 총격 결투로 다다랐다가 도착시간이 맞지 않아 결렬되었다. 같은 해 잭슨은 1050 에이커 농지와 9명의 흑인노예를 구입하여 목화를 재배했다.

그는 농장이름을 허미티지로 부르고 농장사업을 활성화하여 1820년엔 150명의 노예를 부렸고 평생 500명 이상의 노예를 채찍질로 생산을 올린 악명 높은 농장주로 알려졌다.

1806년 경마 가축사업을 벌이던 잭슨은 찰스 디킨슨과 사업경쟁을 벌이다 의견충돌을 하게 되었고 디킨슨이 잭슨은 이중 결혼한 레이철과 결혼했다고 비난하여 잭슨은 총격 결투를 신청하였다. 총에 능숙한 디킨슨의 타겟을 피하기 위해 잭슨은 어깨가 넓은 외투를 입고 결투장에 나갔다.

디킨슨이 재빠르게 잭슨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심장에서 1 인치 떨어진 잭슨의 가슴에 박혔다. 잭슨은 서서 기다리는 디킨슨 복부를 향해 총격을 가하여 디킨슨은 이틀 후 사망했다.

잭슨은 이 결투로 살인자의 낙인이 찍혔고 가슴에 박힌 총알은 평생 나이가 들면서 합병증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싸움을 좋아하는 잭슨은 평생 100회 이상의 총격 결투를 한 총잡이로 알려졌다. 그 당시 대부분의 결투는 서로 공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거나 경상이나 중상을 입히는 것으로 종결 지었다.

잭슨은 명예회복을 위해 알렉산더 해밀턴을 총격 결투에서 살해한 에런 버와 제임스 윌킨슨이 뉴 오얼린스 중심으로 미국의 루이지애나를 차지하는 반란 모의를 제퍼슨 대통령에게 알려 버를 체포하게 하였다. 결국 버는 무죄로 석방되었고 잭슨은 허미티지 농장사업을 계속 번창시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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