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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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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
lhyunsik
2007-12-01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
방효일형제
출처: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성경 - 고린도전서 10:5~15
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그리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쓰러졌느니라.
6 이제 이런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탐한 것같이 우리가 악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7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는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는 뛰놀더라,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
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나의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를 피하라.
15 내가 지혜로운 자들에게 말하듯 말하노니 너희는 내가 말하는 바를 판단하라.
오늘 나누는 이 본문 말씀은 몇 년 전에 “내 안에 있는 이집트”라는 제목으로 나누었던 말씀인데 그때에 저의 믿음의 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오늘 나누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로 더욱 이끄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오랜 기간의 어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만 해놓으시고 모든 일을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게신 그리스도의 생명 성장하는 것을 관심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자라야 하는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라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데에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겉 사람 곧 옛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 성장 장해 요인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열매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이 싹이 돋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씨를 둘러 싸고 있는 껍질이 생명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꼭 해결해야 하는 우리 옛 사람, 곧 육체의 근본적은 문제인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신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믿음의 여정을 가시는데 큰 어려움이 없이 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읽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의 훈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 출애굽 여정에 있었던 광야 40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배움을 갖게 해주는 훈계의 말씀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는 과정에는 각자 하나님의 마련하신 특별한 환경가운데서 다루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육체의 천연적인 성분을 깨뜨리시고 그리스도의 성분으로 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의 권세에서는 어느 한 순간에 구원을 받도록 하셨지만 내 안에 있는 육체를 제거하시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해서 유월절 하루 밤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집트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는 넉넉잡아 40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40일이면 갈 수 있는 그 길이 왜 40년이 걸렸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 5절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그리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계속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랐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또한 조그만 어려움이 생기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수 백 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면 그들은 모두 40일도 안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안에 세상,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오랜 기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각자 안에 처리되지 않은 세상을 보는 것은 영적 성장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겪었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본보기를 통해 우리를 살피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탈출의 계기가 된 유월절 사건을 영적으로 가지고 와서 우리의 구원에 적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구원받으면 세상 곧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우리 마음에 있는 이집트가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육체에 속한 또 하나의 세상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5~17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내 안에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몸이 죽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부활하게 될 때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거나 붙잡지 않아야 하는 치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 세상에 대해서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이집트 곧 세상을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이 제거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따를 때 그분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주의 만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세우셨고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행하도록 주의 만찬을 제정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은 사람은 침례에 순종하며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질서에 따라야 하며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0장과 11장에서 주의 만찬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당시에 너무나 무질서함 가운데 육신적으로 행하는 고린도교회의 그릇된 주의 만찬을 바로잡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린도전서 10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과정 속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6절과 11절에서는 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 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에서도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과정 가운데에서 담겨 있는 가르침 몇 가지를 한번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방 나라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면서 살았고 그 괴로움이 극에 달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으며 이집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이었지만 파라오 왕의 아들로 지냈던 모세를 약 40~80세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모세를 쓰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왔던 모세는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집트(Egypt)'는 '검다(black)'는 뜻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어둡고 더러운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세상의 신인 마귀의 속박에서 살고 있는 비참한 죄의 노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거주한지 430년의 끝 날 밤에 어린양의 피에 의한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출 12장).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아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시어 그들의 험난한 광야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늘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십니다.
한 편 완악하게 된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았습니다. 파라오의 군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와 모세에 대해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네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원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나누어 마른 땅이 되도록 하셔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나게 하셨고 이집트의 병사들은 모두 바다에 수장시키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구름 기둥과 홍해의 물 속에서 모세에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술이라는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 일 동안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라에서는 물이 써서 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그 쓴 물에 던져 달게 하여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나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하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쓰디쓴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엘림과 시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는 굶주림에 지쳐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아침에는 하늘에서 빵을 비처럼 내려 "만나"라는 음식을 주셨고 밤에는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셨습니다(출 16장). 만나는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 6:35, 48-51).
그리고 르비딤이라는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요 7:37-38). 이렇게 보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례를 받았고 영적 음식을 먹고 또한 영적 음료도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맛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마실 물, 정말로 필요한 의, 식, 주 문제를 모두 해결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돌보시며 이끄셨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모두 광야에서 죽어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그 본보기를 알려주시며 우리 모두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의 순간을 기억해 보신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감격하지 않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하고 진리에 이르는 지식을 접하고 영적인 것들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정상적으로 가고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자라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잘 못되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불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나아간다면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40년의 여정 가운데 있었던 일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몇 가지 본보기를 통해서 훈계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있는 이 네 가지의 본보기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7절을 보면 "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는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는 뛰놀더라, 함과 같으니라."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금으로 주조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대신한 신으로 공표하고 번제 헌물, 화평 헌물을 드린 후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는 엄청난 악한 일이 벌어졌습니다(출 32).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경배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하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요즘 세상은 돈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좋은 집이나 자동차를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은혜를 누리기 보다는 잡지나 TV에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이처럼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주님보다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들을 추구하고 기쁨을 더 얻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섬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순간 그것이 결국 우상이 되어버려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잘 안되기 시작하면서 사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음행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약 4:4).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귀는 세상에 있는 가짜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속는 사람은 가짜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속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눈을 돌리면 넘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약 4:8).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만족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다른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얻은 만큼 마음에서 세상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얼마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컵에 물을 담으면 담을 수록 공기는 빠져나가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8절을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발라암의 계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고 우상에 절한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그 결과 바알브올에게 가담하였던 남자 모두 24,000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하루에만도 23,000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사랑하면 이미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부부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는 성적인 교제인 음란한 행위를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성적인 교제를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성(性)을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침상을 더럽히는 음란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성적으로 순결한 삶이 없이는 영적인 거룩한 삶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귀는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성적인 교제를 잘 못 이해하도록 가치관의 혼란을 갖게 만들어 음행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은 성(性)을 상품화할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불륜을 소재로 한 잡지나 TV드라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처럼 세뇌하고 현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흐름에 대해 깨어있지 않으면 음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하지 않는다면 죄의 유혹이 언제 넘어뜨릴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 내어주다가는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음란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내어주어야 합니다(고전 6:20).
우리가 만일 몸을 함부로 다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9절을 보면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1장 5,6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여 말하되,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거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혼이 이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 하매 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다가 질려버렸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실제로 먹었던 만나에 대해 “영적 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섭취해야 하는 생명의 말씀을 나타냅니다(출16:35; 수 5:11).
요한복음 6장 31~35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만나를 가볍고 하찮게 여기는 않은 태도는 결국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기고 시험하고 모독하는 합당하지 않은 행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있을 때는 어떠한 말씀이든지 달고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말씀을 좀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서 푸석푸석한 빵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1,500년 전에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시험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날마다 공급하여 주시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푸석푸석한 빵(light bread)”이라고 하며 하찮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육체를 위해 먹을 음식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살면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말씀에 대한 태도는 곧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며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10절을 보면 "또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불평하다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하였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민수기 14장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1절부터 5절 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온 회중이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어찌하여 주가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가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서로 이르되, 우리가 대장 한 명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매 그 때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집회 앞에서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라."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모르고 감사가 없이 불평을 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거대한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왜 침몰했는지 아십니까? 보통 알려진 바로는 빙산에 부딪혀서 그렇다고 하는데 요즘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선체를 탐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작은 6개의 틈 때문이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불평은 선체의 갈라진 틈과 같습니다. 그 틈으로 마귀는 우리를 낙담시키고 실족하게 하여 결국 믿음에 있어서 파선하게 만들어 깊은 물 속에 잠기게 하려고 공격하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 대해 신실하셔서 부족함이 없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원함에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갚지 않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지 않으면 세상의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속에는 그들이 종으로 살았던 이집트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하는 것 보다 죄의 종으로 살았던 세상이 좋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여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나안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믿음의 눈을 멀게 만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불평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어려움과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을 붙드는 길로 이끄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믿음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에서 파선하고 다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칼렙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4장 9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말한 것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하다가 많은 시련이 닥쳐오면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처리되지 않은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황과 불로 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합니다(창 19:26; 눅 17:32).
예수님께서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딤후 4:10).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사랑하는 한 언제든지 우리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험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불평은 감사함이 없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곧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실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늘의 이상을 본 사람은 그 길을 향하여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네 가지 훈계는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돕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그릇되게 행하는 주의 만찬을 염려하면서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일을 본보기로 삼아 언급해주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행할 때에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무리들이 한 빵과 한 몸의 교제가운데 있음을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에서는 주의만찬을 합당치 않게 행하므로 해서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죽었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도 예수님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었던 분열과 다툼, 온갖 육신적인 더러운 행위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교만한 마음들은 그 당시 극도록 타락한 그리스의 문화로부터 온전히 성별하지 못한 육신적인 행위의 결과들이었습니다. 또한 마귀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 가운데거짓 사도들, 거짓 형제들과 거짓교사, 선지자들을 보내어 교회를 어지럽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육체로부터 나오는 죄에 대한 참된 인식과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주님의 일에만 관심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만약에 어떤 남편이나 아내가 지금의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어떻게 부부가 참된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여전히 마음에는 세상, 이집트를 품고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면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집트, 곧 세상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만 기쁨과 만족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그분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려고 수고하노라.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우리의 육체는 세상이 주는 단순한 기쁨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누릴 기쁨과 상속 유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섰을 때 주님의 기쁨과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약속하신 상속 유업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며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버리려고 해도 그리스도를 통한 만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것을 맛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이집트, 세상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성분과 하늘, 가나안의 복된 소망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40년의 여정을 통해 가르치시는 훈계를 잘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낳은 결과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아간다면 40일에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게 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주님은 계속 말씀해주실 때에 불순종하며 악한 일들을 열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면 이기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모두 눈을 가만히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 같이 풍성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에 더욱 소망을 두시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