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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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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프란시스 쉐퍼의 「진정한 영적생활」
lhyunsik
2007-08-31
<책> 프란시스 쉐퍼의(진정한 영적생활)
프란시스 쉐퍼의 (진정한 영적생활)을 읽고
* ( )의 숫자는 책의 페이지를 가리킨다.
** 본 글에서 참고한(진정한 영적 생활)(True Spirituality)은 생명의 말씀사(권혁봉 옮김) 역간이다.
1. 들어가며
2. 진정한 영적 생활은 내면의 진정한 변화에서부터 시작
3. 진정한 영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교제가 오늘 현재 매일 평생 삶의 열매”로
4. 진정한 영적 생활은 믿음으로 자유하며 사는 삶
5. 쉐퍼의 (진정한 영적 생활)과 기독교 윤리
6. 맺으며 : 쉐퍼의(진정한 영적 생활)이 나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1. 들어가며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찬양 예배, 부흥등의 이름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달구려고 한다. 뜨겁게 찬송하고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진정한 영적 생활로 여기며, 반대로 성경을 공부하고 배운대로 삶의 현장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면 활기가 없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열광주의적 신앙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열광주의적 신앙이 갖는 문제를 이웃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신앙에게 부담을 주는 것 외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열광주의적 신앙은 교회 안에서는 무엇이 영적 생활인가에 대해 정체성의 혼돈을 일으키며, 영적 엘리트주의화되고 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욕구는 갈수록 커지고 이른바 그러한 성장은 잘 일어나지 않는 오늘의 교회 상황에서는 영적 생활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처럼 혼탁해지는 상황에서는 영적 생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적 생활은 교회 안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기독교의 영적 생활은 이런 것이다’라고 교정해 주고 선전해야 하는 것이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적 생활은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쉐퍼의 (진정한 영적생활)(생명의 말씀사, 2000)을 통해서 영적 생활을 이해하려고 한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개념을 묶어 보고 기독교 윤리적인 측면에서 평가 또는 수용하려고 한다.
2. 진정한 영적 생활은 내면의 진정한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영적생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39).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생활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갖는 기본 개념에서부터 지혜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 다른 신앙인들의 영적 생활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데 있다(15). 영적 생활은 은총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영적 생활의 출발-과정-결과-검증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적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39).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을 가졌다고 진정한 영적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서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영적 생활은 현실의 열매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므로 이런 내면의 상태는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현실의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진정한 영적(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외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을 소중하게 다루시므로 진정한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은 내면의 상태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내면의 계명을 아홉가지 계명의 내적 기준(바퀴의 축)으로 삼은 것처럼(21), 영적 생활을 평가할 때 항상 내면과 연결해야만 한다. 예컨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것들을 사랑하여 중독되면 진정한 영적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되 하나님께서 질투하실 만큼 사랑해서는 안 된다(28-30). 이러한 영적 상태는 모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게 될 내면의 소리를 귀를 기울여야만 진정한 영적 생활을 출발할 수 있고 변질되지 않는다.
진정한 영적 생활이 그리스도의 삶이라면, 그 생활은 십자가의 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제1계명처럼 다른 피조물이나 사상, 또는 자기 만족의 길을 떠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50).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기 뜻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영단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51), 진정한 영적 생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매일 지지 않으면 안 된다(52). 다시 말해서 자기의 뜻을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되 한 번이 아니라 매일 그렇게 사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적 생활이다.
한 번의 뜨거운 열정보다 매일의 삶에 나타난 점진적 생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역사적’사건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도 역사적 사건이다(6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현재의 역사 속에서 지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67). 지금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칭의는 영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점진적 생활은 매순간순간의 일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매순간순간을 믿음으로 현재의 생활 안으로 발을 딛고 살아야만(76) 삶이 진정한 영적 생활이 될 수 있다.
3. 진정한 영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교제가 ‘오늘 현재’ ‘매일’ ‘평생’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신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신비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무엇인가? 동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자기 포기에서 오는 영적인 체험인가? 이원론적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과 육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영의 신비로운 체험이 영적 생활인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역사적’ 사실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현재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실재다. 실존주의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인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이, 현재 인간에게 주는 종교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잘못되었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며 반드시 역사적 실재이신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은 역사적 실재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같이 있으며, 또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속에 살아 계신다. 우리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지금 죽은 내 안에서 영적 생활의 열매를 맺고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열매가 맺힌다.(87-90) 그리스도가 실제로 맺어주시는 열매를 우리는 기독교 신비의 증거로 보아야만 한다. 왜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내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신비인가? 초자연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스도께서 자연부분에 있는 나와 교제하시고 나를 통해서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것은 신비가 된다.(102-104) 이런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오늘 현재 느끼게 해서 하시는 분은 성령님시이다(99). 기독교가 이처럼 신비함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초자연적인 부분과 자연적인 부분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오늘의 삶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삶이 중요하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만나 맺은 영적 생활의 열매는 현실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 정상적이면서도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에서 열매를 맺어야만 그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이 된다(115). 초자연적이 세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자연의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전시자가 되어야 한다(116).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한다. 단순히 도덕적 열매를 나타내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생활의 열매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117).
오늘의 열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구원과 관계하여 다시 살펴 보자. 성경에서는 구원이 칭의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인다. 칭의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다. 미래에는 ‘영화’(glorification)가 있다. 미래에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육체의 부활과 영원 세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구원의 현재적인 면은 성화(sanctification)로 대변된다. 오늘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118).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죽는 순간까지 성화는 계속된다(120). 이처럼 구원에 있어서 과거-현재-미래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미래 영화롭게 될 감격이 오늘의 삶에서, 과거 구원받은 감격이 오늘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구원의 의미라 하겠다(124).
4. 진정한 영적 생활은 ‘믿음으로’ 자유하며 사는 삶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면 나는 수동적으로 되는 것인가? 진정한 영적 생활이 그리스도의 삶이며 자기 부인의 삶이라고 해서 수동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130).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능동적-수동적인 삶”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마리아는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약속을 들었다. 들었으니 수동적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믿음 안에서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일임했다는 뜻에서 그녀는 능동적이었다(138). 그리스도인의 생활, 진정한 영적 생활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반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삶이다. 매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인격적인 교통을 가짐으로 성령님의 대행 사역으로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140).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보지 못하나 믿는 것, 그것이 신비가 된다. 하와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진정한 영적 생활은 매순간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믿음의 삶은 내면의 자유를 불러 일으킨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내면의 자유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삶이 곧 진정한 영적 생활이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완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147). 완전주의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으로써 영적 생활이 아니다. 승리를 해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여 결코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현재 교제함으로써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을 때 징계하시는데, 징계는 하나님의 반응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153). 하나님이 진정 존재하시며 나는 또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가 범죄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인격과 반대되는 일을 저질렀을 때, 인격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슬퍼해야 함이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변화는 의식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며 현재의 삶에서 일어난다. ‘제2의 축복’과 같이 삶과 동떨어진 변화는 삶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라고 할 수 없다(158). 의식적인 영역에서 인격적 만남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속죄해 주심에 대해서 오늘 감사해야 한다. 내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때(161) 나의 양심은 마침내 평안에 이르게 된다(162). 이런 삶이 영적 삶이다. 역사적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여, 그를 믿음으로 언제든지 그리스도께 나가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162).
사상의 세계에서 자유하는 것도 진정한 영적 생활이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영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한다. 그 다음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처럼 세상으로 나간다. 살아나서 세상으로 나가므로 이제 우리의 삶은 외적인 생활이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은 성령님을 통해 변화된 상태가 외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을 믿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을 믿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신앙의 열매는 외적으로 드러난다(183). 이러한 변화가 외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에서 어떤 사상과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내면에서 사상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복음 전파는 사상이다. 그것은 불타는 사상으로서 사람들에게 번진다. 복음 전파가 외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에서 사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이처럼 진정한 영적 생활은 언제나 내부, 곧 사상의 세계에서 시작한다(187). 그러면 내면에서 사상과의 싸움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께 나가 나의 형편을 바라보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내면의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의 내면은 나의 생각을 바꾸시고 내면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203).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변화된다.
내면의 죄와 사상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유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다면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나타난 삶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현재’ 만나주시듯이, 변화된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도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232).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은 가정에서부터 일어난다. 부부관계에 사랑과 의사소통이 없다면, 그 다음 단계인 부모 자녀 사이의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정 생활은 세상을 향해 인격의 상호작용의 실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개인과 가정에 이어서 이제 교회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자. 교회는 치유된 공동체의, 세상을 향한 전시다. 교회를 바라볼 때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관계의 전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을 격려하되 죄의 속박에서부터의 현재적 삶 안에서의 자유와 죄의 속박의 결과에서부터의 현재적 삶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치유하며 또 같은 인간, 특히 같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부터의 분리의 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치유토록 격려해야 마땅하다(253).
5. 쉐퍼의 (진정한 영적 생활)과 기독교 윤리
앞에서 살펴 본 쉐퍼의 (진정한 영적 생활)을 기독교 윤리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쉐퍼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한 영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만남이 내면에서 일어나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므로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부활한 사람들이므로 자기의 뜻을 죽이고 현재 삶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한 삶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삶은 한 번의 뜨거운 열정보다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매일 삶에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교제가 있어야 한다. 신비적 교제란 야단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사는 것이다. 믿을 때 나를 통해서 성령께서 열매를 맺으신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뜻이 자연적인 나를 통해서 열매로 맺히는 것은 기독교 신비다. 이런 신비는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하고 사상의 세계에서 자유를 누림으로써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내면의 변화가 교회 안에서, 세상 속에서, 가정 안에서 삶으로 연결될 때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전시된다. 쉐퍼가 제시한 「진정한 영적 생활」은 기독교 윤리의 좋은 틀이 된다.
한 순간의 뜨거운 열정을 강조하면 종교적 욕구는 총족될지 모르나, 기독교 진리를 현재 꾸준히 실천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삶에 전시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순간의 뜨거움에 만족해서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시할 수 없다. 내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만남, 뜨거운 만남이 있었다면 삶의 열매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드러난 기독교인의 행실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삶의 행동이 전도의 귀중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면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독교인의 윤리는 그리스도를 전시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가 우리 내면에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사회 구원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쉐퍼의 견해처럼 과거의 칭의나 미래의 영화만을 강조하지 말고 오늘의 성화도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칭의를 경험하였고 미래에 영화롭게 변화될 것을 희망하면서 오늘 현재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성화되어 갈 때 그 삶에서 기독교 윤리가 나온다. 현재 점진적으로 맺히는 열매가 없이는 기독교 윤리가 설 수 없다. 그러한 열매는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자기 사랑이나 도덕적 의무에서 나오는 윤리는 기독교 윤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으로서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 윤리의 모범을 나타낼 수 있다.
현실의 열매로 나타자기 위해서는 내면에서부터 싸움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특히 현대에는 철학적 인간론에 기초한 윤리 사상이 보편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어떤 절대적인 윤리 기준을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1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도덕법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법처럼 되는 시대다. 이런 시대 사조는 무지불식간에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이러한 사상과 내면에서부터 철저하게 싸울 때에 성령님의 자유하게 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죄에 대해서 율법주의나 완전주의와 맞서 싸울 때, 성령께서 승리를 주신다. 이 싸움의 결과는 우리의 내면을 자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하므로 윤리적 삶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인격 대 인격으로 오셔서 사상에서부터 자유하게 하시면, 우리의 경험은 가정과 교회, 세상으로 확대된다. 한 사람이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사상의 변화를 경험한 한 것은 한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 사실이 기독교 윤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한 사람의 진정한 변화,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개인을 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윤리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진정한 기독교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진정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여러 가지로 살펴본 바 있는 대로 진정한 영적 생활에 성실하면 된다.
6. 맺으며 : 쉐퍼의(진정한 영적 생활)이 나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서두의 문제제기에서 밝힌 것처럼 영광주의적인 신앙은 사회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의 열광적인 체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뜨거움만 강조되기도 한다. 열광주의적인 신앙은 신비로움을 경험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앙을 벗어나 우상숭배나 혼합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이제까지 살펴 본 것처럼 진정한 영적 생활은 그렇게 야단스러운 것도 아니며, 현재의 세계와 구별하여 살려는 이원론적인 윤리도 아니다. 단순하고 현재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현재의 삶’와 ‘말씀을 통한 만남’을 소홀히 다루게 만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고 만져보고 신앙 고백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30)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믿고 박해를 극복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이 말씀처럼, 그리고 쉐퍼의 견해처럼 진정한 기독교의 신비는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로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서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윤리적 행동으로 응답한다. 우리의 윤리적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시 반응하신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진행 중인데, 초월하신 하나님과 자연속에 거하는 인간이 서로 반응해 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이 윤리적 삶으로 드러나고 그 삶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초청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대단히 단순하며 상식적이다. 이웃 사랑과 직결된다. 나의 영적 생활도 쉐퍼의 견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면의 변화는 반드시 현실의 윤리적 삶으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겠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를 사상과 완전주의에서부터 자유하게 하실 것이다. 나의 삶에서 윤리로 나타날 것이다. 내면에서부터 일어난 진정한 변화가 삶의 윤리로 나타날 때 나는 신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기독교의 신비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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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나의 책들을 쓰게 되었는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지난 수년 동안 내 아내 이디스와 나는 광범위한 문서 기획을 실행해 왔습니다. 현재는 19권의 책이 라브리(L'Abri)사역의 결과로 출판되었습니다. 내가 왜 책을 쓰게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십대 후반 시절을 회상해 봐야 합니다.
그 당시 나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띤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 이 곳은 아무런 대답도 제시해줄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닭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 교회를 떠났고 불가지론자가 되었습니다.
대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그 당시 내가 구할 수 있었던 모든 철학책을 가지고 희랍 시대의 철학에서 부터 공부를 하기시작했습니다. 오비디우스(Ovide : 로마의 시인, BC43- AD17?)의 책을 읽으면서 밤을 새우던 때, "더욱 신중하고 정직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 읽고 있는 이 자료들외에, 성경도 읽어야 할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오비디우스의 책과 성경을 조금씩 읽어 나갔습니다. 오비디우스의 책은 다 읽지 못했으나, 성경은 그날 이후 몇 독이나 했는지 모를 만큼 많이 읽었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철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철학에는 대답은 없고 무수한 문제들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대답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또한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대략 6개월만에 성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로 기독교인이 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정확히 언제 회심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나는 성경에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40년이 넘게 성경을 연구해 왔으며, 성경을 기록된 데로 읽었을 때, 성경은 모든 지적(知的)인 질문과 모든 삶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는 것을 해가 더할수록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책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회심하기 까지 엄청난 갈등을 경험했다는 것과, 회심 이후에도 정직하게 공부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나는 마치 내가 비기독교인인 것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에 접근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후 나는 사역 중에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내가 책을 쓰게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위기는 이미 미국에서 10년동안 목회자로서, 그리고 유럽에서 5년동안 선교사로서 사역한 후에 다가왔는데, 그 위기는 약 15년 동안의 사역 기간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녔던 한 가지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 생각이란, "도대체 왜 정통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간에는 그렇게도 실재성이 부족하단 말인가?" "기독교인이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보여 주지 못할까?"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나로 하여금 "내제 개인적인 삶에 영적인 실재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수년간 성경을 연구해 왔고, 기독교 사역에 헌신해 왔으며, 복음주의 사회에서 더욱 유명해지고 있었으나, 영적 생활의 실재성은 내가 막 회심했던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략 두달동안 나는 스위스의 산길을 걸으면서 기도하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가 내릴 때는 산장 위쪽의 건초 창고안을 거닐면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 수록, 나는 옛날의 불가지론자였던 상태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나는 매우 정직하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기독교 세계에서 보았던 비실재성, 수많은 기독교인들과의 관계에서 보았던 추잡함, 20세기 사람들에게 기독교에대해 아무말도 할 수 없다 무력감-이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내가 과연 옳았던가?"라고 묻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의심의 안개는 걷혀지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불가지론자에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던 그 처음의 결심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하나의 요소를 간과해 왔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2천 년전에 역사의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은 과거 뿐만 아니라 내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현재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종교적 영역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맡기고, 그 분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할 경우, 풍성한 열매를 맺게된다는 주님의 약속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닭았습니다. 이 사실은 나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만일 내게 이러한 위기가 없었던들, 나는 결코 <진정한 영적생활(True Spirituality)>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내가 그 당시 겪은 개인적인 갈등을 해결하면서 배운 사실들을 기초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1955년에 나와 아내 이디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스위스 위에모(Huemoz)마을에서 시작한 라브리 사역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디스와 나는 오직 한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것은 전도사역도 아니었고,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을 위한 사역도 아니었으며,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사역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 세대가운데에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라브리 사역의 전부이며 우리가 사역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이 시기에 친구들 중에는 "몇 안되는 사람들을 놓고 사역은 무슨 사역이냐?"라고 하면서 나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당시는 희생의 시기였으며,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라브리에서 나는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였는데, 많은 대화를 통해 20세기 사상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점차로, 세계 곳곳으로부터 교수, 학생들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라브리가 20세기의 문제들에 대해 개방적으로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소라고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성경적인 대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나의 지식은 두 가지 요소를 근거로 해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1) 40여년에 걸친 힘겨운 연구 작업과 (2) 20세기 사람들을 그들이 말한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나는 책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라브리를 방문하게 되자, 누군가가 저희에게 녹음기를 보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녹음 사역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답장을 써 보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스미스 대학(Smith Collage)의 여학생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똑똑했으나 불가지론자 아니면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토론 중에 라브리 간사 중에 한 명이 꽃을 가지고 장난하고 있길래, 나는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소형 녹음 마이크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학생들은 토론이 끝나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간사가 녹음한 강의 테이프의 복사본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라브리 테이프 사역의 뜻하지 않은 출발이 되었습니다. 현재 나는 대략 1300-140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녹음했으며, 그 외에도 다른 라브리 간사들에 의해 많은 테이프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는 캠브리지 대학, 옥스포드 대학, 런던 대학, 맨체스터 대학 등으로부터 강의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도 언제나 청중들의 질문들을 듣고 대답하며 자유롭게 토론하였지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현대 사상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배울 수 있었고, 또한 어떻게 해야 20세기 사람들에게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계속되는 강의를 통해 하나의 메세지, 즉 "20세기 사람들에게 역사적 기독교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나는 이 주제를 가지고 하버드, MIT, 휘튼등 여러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휘튼 대학은 나의 강의 내용을 소책자 형식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소책자는 나의 첫번째 출판물이었습니다. 나는 이 일이 있는 후, 출판이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글을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해서 영국의 한 출판업자에게 가져갔습니다. 이 책은 두 부류를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즉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써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고, 기독교인들에게는 20세기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출판업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위한 책인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출판해 주었고, 감사하게도 이 책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양쪽 그룹에 의해 읽혀졌습니다. 그때가 1968년이었습니다.
아마도 책의 두께가 앏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성에서의 도피>가 소개서이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는 전자를 발전 시킨 책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즉,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 먼저 쓰여졌습니다. 거기서 나는 용어를 결정하고 주제를 잡는 등 기초적인 작업들을 했습니다. 그 책에서 우리는 라브리 공동체에서 실천한 균형잡힌 기독교에 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즉 기독교의 지적인 측면과 동시에, 기독교는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로 표현된 명제적인 계시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시므로, 그 진리를 따라 살 때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성에서의 도피>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철학적 영역에서 이 원리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현대 문화가 어떤 면에서 중세 후기의 오염된 뿌리로부터 성장해 왔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 두책이 출판된 이후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을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5년이 넘는 연구 작업을 한 후에서야 비로소 출판 하게되었습니다. 이 세권의 책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책들이 없었다면 나의 다른 책들에서 시도한 다양한 적용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질문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인식론이 틀렸다면, 모든 것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식론은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다 '말씀하시는'을 덧붙여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 지어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무한하시고 인격적 하나님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전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이미 출판되었거나 앞으로 출판될 다른 모든 책들은 이 세권의 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권의 책은 뼈대이고, 나머지 책들은 세권의 책들을 근거로 해서 붙여진 살입니다. 나는 이 책들을 통해서 통일된 기독교적 체계를 다양한 분야에 적용시키고자 했습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는 두 가지 특별한 문제를 다루는 부록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중산층 교회의 문제'와 기독교 사역과 복음 전도에 있어서의 '진리의 실천'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들은 그 뒤에 출판된 다른 책들을 통하여 더욱 자세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개혁과 부흥(Death in the City)>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기반으로부터 돌아선, 즉 자기 문화의 기반이 되었던 기독교적 세계관을 버린 미국과 북부 유럽 문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이어서 출판된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는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한 것으로, 역시 같은 체계 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말의 교회(The Church at the End of the 20th Century)>는 사회학과 교회학 등의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소책자로도 출판된,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과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 the Christian)>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세 번째 부록에서 다룬 주제- 우리는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해야하는 동시에, 수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하나됨을 이루어야한다-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인식론, 교회학, 생태학, 사회학 등에 적용되진 또 하나의 무미 건조한 스콜라철학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실로 이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다만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다섯 권의 책이 기독교적 균형을 제공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히 <개혁과 부흥>의 마지막 장인 '우주와 두 개의 의자'는 중요합니다. 이디스의 책인 <라브리(L'Abri)>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의 다른 책들은 진정한 통일과 균형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책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삶이 라브리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를 소개해 줍니다. <진정한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데, 이 책은 "어떻게 하나님과 자기자신과, 그리고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활에 대해 체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Everybody Can Know)>와 <쉐퍼의 명설교(No Little People)>도 비록 후에 쓰여진 것이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디스는 <생활 속에 숨은 예술(Hidden Art)>에서 이러한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창조성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에 적용시켰습니다.
이때, 우리는 균형있는 사역을 해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이디스와 나의 책들은 기독교의 지적인 부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실제적인 부분들도 동일하게 강조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방향을 바꾸어, 이전의 책들을 통해 잠깐 소개가 되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바라는 만큼 깊히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에서는, 창세기 1장 부터 11장 까지의 내용을 가지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서 잠시 다루었던 문제인, 성경의 시공간적 역사의 실재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초점을 맞추어었습니다. 이 책 안에 있는 두 개의 긴 각주는 복음적인 전도 방법에서 벗어나고 있는 현대 복음주의의 위험성에 관한 것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자다시 자유와 존엄으로(Back to Freedom and Dignity)>에서는 <20세기말의 교회>에서 다루었던 주제들과, 순전히 기계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인간을 설명하려는, 왜곡된 유전학, 심리학, 생리학의 최근 경향들을 고찰했습니다. <초영성주의에 맞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The New Super-Spirituality)>에서는 최근에 유행하는 부정적인 경향, 즉 내용은 없고 단지 초 이성적인 용어들로 기독교인의 삶을 규정하려는 경향들에 대해서 비판하였습니다.. <예술과 성경(Art and Bible)>에서 나는 예술의 세계를 무시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반박하려고 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의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선조들이 만든 몇몇 예술 작품들과 그 작업들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할 옳바른 태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열한 가지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기초 성경 공부(Basic Bible Studies)>는 라브리에 찾아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수년 동안 가르치면서 만든 성경 공부 교재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디스와 나의 공저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는 모든 연령층이 소리내어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누가복음 교제입니다. 이것은 온 가족을 위한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저희가 이제껏 연구한 내용들이 다음 세대에 전달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책들은 <쉐퍼의 명설교(No Little People)>, 그리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독교 (Two Contents, Two Realities)>입니다. 전자는 라브리에서 예배 시간에 설교했던 것과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설교했던 것들을 편집한 것입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독교>는 현재 전세계의 복음주의 교회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한 것입니다. 즉, 진정한 복음주의는, 성경적인 교리, 그 교리의 실천,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 진정한 영성,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아름다운 교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들의 목록을 되돌아볼 때마다, 우리는 이 책들이 사람들에게 과연 영향을 주었을까?라는 생각을해 봅니다. 그러나, 스위스에 있는 나의 집에 갑자기 방문한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통해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여행을 통해 만나는 세계 각 곳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책들을 여전히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책들을 계속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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