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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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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4장 십자가와 왕관(면류관)
lhyunsik
2007-08-2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4장
십자가와 왕관(면류관)
Philip E. Howald, Jr.
십자가를 짊이 상급임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박해했을 때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 "일본은 일부러 노력하려고 했을지라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더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악의 사태가 우리에게 최고로 유익한 상황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도들이 일곱배나 더 뜨거워진 풀무불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박해받는 것 그리고 야수에게 원형 경기장에서 물려 뜯기는 것, 총살당하는 것, 화형을 당하는 것 그리고 온갖 고문에 시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보좌로 올라가는 계단인 것이다. 교회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보헤미아 출신의 한 귀족이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도끼로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 예수회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신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아니요,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소. 이제 나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이에 대해 그 예수회 신부는 "그런 약속은 사도에게 주어진 것이지 당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오"라고 반박했다. 그렇지만 이 신실한 성도는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그 다음 구절을 잊으신 모양이구려,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니라'."
고난으로 부름을 받음
우리는 죄인으로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성도가 된 우리는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에게도 역시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그의 속죄의 역사에 있어 그 누구와 아무런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은" 여러 순교자들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신 최초요, 최고의 본이 되셨던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진" 셈이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순교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자신의 고통과 영광을 연관지으셨다. 골고다와 영광은 구세주의 생각 안에 하나였다. 골고다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 십자가는 분명히 보상을 가져온다. 영광에 앞서서 십자가는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는 의가 있는 동시에 의의 면류관이 있고 생명이 있는 동시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왕국의 자녀가 되는 것과 왕국에서 보상을 받고 면류관을 쓰는 것은 다르다. 면류관은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들의 몫이다. 십자가로의 부르심이 면류관으로의 부르심이란 사실은 확고부동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있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의 "저주받으신" 왕께서는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우리를 사로 잡으셔서 우리를 자신의 병거바퀴에다 붙들어 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가장 나약한 순간에 그리고 모든 것을 잃으시는 그 순간에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교만과 허황된 자아를 멸하시고 왕으로서 통치하신다. 높이달리신 그곳에서 우리의 왕께서 다스리신다. "유다지파의 사자"이신 그분께서는 "보좌의 한가운데 서 계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다윗이 노래부른 그 진리
여기에서 깊이 성취된다네
"온 땅에 주께서 왕이시라 말하라"
보라! 왕께서 십자가에서 다스리시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모순"으로 인해 -물론 겉보기에 그러한 것이지만-매우 당혹스러워 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왕이신 메시아와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는 메시아가 동시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메시아와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 즉 두 분의 메시아가 있는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풀리게 된다.
십자가의 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는 다만 속죄를 위한 것뿐 아니라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말고 그 누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실 자격이 있단 말인가? 머리와 지체는 하나이어야 한다.우리는 십자가의 교리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의 인내를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구원받는 것을 금하시고 아울러 십자가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금하신다. 제자는 그의 주님보다 나을 수 없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남겨두신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
피어슨(Pearson) 주교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본질상 이 세상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기독교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1.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를 정죄한다.
2. 기독교는 육신과는 맞지 않는 명령들을 요구한다.
즉 원수들을 사 랑하고 십자가를 지라.
3. 기독교는 믿기지 않는 약속들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서는 성취될수 없고 달성할 수 없는 것들로
부활의 기적에 근거하는 약속들이 그것이다.
4. 기독교가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박해"를 받을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근거 있는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이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성공하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제시되었다. 십자가위에서 기독교신앙과 생활의 모든 원칙이 분명히 보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그를 따르는 우리들이 지고 갈 십자가)에서 "해아래의 삶"이 제공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를 포기하고 "잠시동안" 고통 당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A.D.100년경에 살았던 한 이교도 루시안(Samosata 출신의 Lucian)은 이렇게 말했다 :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위인을 아직도 경배한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산다고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많은 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십자가로 인해, 기독교가 이방종교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두려운 반응들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근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참기 어려운 고통과 고문과 죽음속에서도 무모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성도들은 완전히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에 타락한 이 사회의 관습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 가증스러운 "제 삼류 인종"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굴욕과 하늘나라의 의복으로 옷을 입었고 이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영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교도들에게는 십자가의 교리가 보이지 않고 신비스러운 능력을 지닌 것으로 전염병이나 열병처럼 보였다. 일단순진한 사람이 이 십자가에 사로잡히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교리였다.
순교는 면류관의 길
당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께서는 그분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려졌었다. 그들은 면류관에 대해 너무도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십자가를 꼭 붙들었다. 그들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삶을 향한 길이요 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어째서 죽음을 그처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너무도 죽음을 무시하는 것 아니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한 고행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생명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빌2:5)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셨다. 이 한가지에 그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보상과 관련하여 이렇게 기본원칙을 요약하셨다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원칙을 실천해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높은 영광의 보좌에서 즉 신격의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분은 생명을 버리고 죽음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그 죽음 또한 평범한 죽음이 아닌 범죄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최고로 낮추신 그분은 높임을 받으시되 "최고의지위"에 오르셨다. 그분이 낮추어지신 데 비례해서 그분은 최고로 높임을 받으셨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칙을 마음속에 새기고 앞으로의 모든 생활을 이 보상의 원칙에 근거해서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심어놓지 않은 것을 어떻게 거둘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과연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될 것인가? 이 중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게으르고 무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란다. 보상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결코 책망하지 않으셨다. "가장 좋은 은사(선물)를 열심히 사모하라."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택하여 목표로 삼아야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견뎌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네. 그분의 최고의 선물을 받지 못할 자들은 그 다음이라네." 이 고백에 있어 처음 두 구절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으나 후반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저것 골라잡는" 자들은 실은 거부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낮춤은 결코 강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원해서 택해야 한다. 우리는 최고의 것을 택해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택할 때에만 우리에게 면류관이 보장된다. 바로 이 때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합당하게 고백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십자가 밑에 있는 그곳 이외의 것을 이 세상에서 사모한다면 그때 나는 갈보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천한 출생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마구간에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은 크리스마스 시즌에나 갖게되는 감상적인 이야기나 아닌지? 마귀는 이 놀라운 신비를 철저히 가려버렸다. 잠깐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잉태하시기 전에 자신의 어머니와, 출생지와 그의 거주지를 선택하였던 유일한 인간이셨다. 그분은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셨다. 즉 그분은 인간의 교만의 뿌리에 하나님의 도끼를 놓으시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탄생에는 그분이 후일 가르치실 내용이 전부 집약되어있다.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한단계 한단계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을 비우셨다"(Monle). 욥은 타의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셨다. 그분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타적인 "밀알"로서 땅에 떨어져서 죽으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낮추심을 어떻게 바꾸셔서 그분을 높이셨는지를 보자. 그분은 저 낮고 낮은 곳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려 올리셨으니" 이는 그분의 이름과, 명성과, 지위와 통치를 가장 최고의 위치로 높이셨던 것이다. 이 높임은 그분의 영원한 영광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자신을 낮추신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으로,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던 그 생명을 가장 높은 하늘을 채웠던 그 생명에다 더하신 셈이다. 이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드높이셨고 그분 안에서 많은 면류관으로 관을 씌우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영광은 그분의 높으심은 물론 그분의 깊으심에 의해서도 측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깊이가 높이를 증대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의 영광에 대해 Gracey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인간성은 드높여지니 영원한 보좌의 오른쪽까지 놓여지리라. 그러나 그 영광스럽고 장엄한 보좌에서도 참된 인간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 보좌는
영원부터 그분의 것이었네!
그런데 새로운 영광이 이마에 쓰여졌으니
모든 무릎이 그분께 무릎을 꿇는다네!
-F.M.Pitt-
공동 상속자
성경에 따르면 그분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했다. 자, 독자 여러분 잘 들어보시오. 당신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오만 ) 왕되신 그분과 피를 나눈 의형제요. 우리는 한 가족이란 말이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인 것이오. 그분께서는 당신과 나에게"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소.
영원하신 아버지의 자녀요
영원하신 아들의 신부이며
성령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며,
이리하여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되었네:
천사들보다 뛰어난 기쁨을 받고서
그분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니
그분의 사랑하시는 분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나의 마음의 원하는 바를 허락하고
모든 것을 내것으로 하였네
악한 권세들에 의해 두려워하나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영광의 주님과 함께 걸으리
신성한 궁전을 지나간다네
왕궁 안에서 왕비가 되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내것이 되었네
이 세상이여, 그래도
내가 자네를 시기할 것 같은가, 어디 말 해보게나?
-Ter Steegen-
고난을 받던 캠브리지의 시므온이 강제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던 구레네 사람 시므온에 관한 구절을 성경에서 읽은 후에 즉시로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얹으소서" 라고 기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받고있던 박해를 승리의 면류관으로 이마에 묶은 것이었다.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허락하기를, 나도 이겨서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과 같게 하리라"(계3:21). 요셉은 주님께서 언급하고 계신 승리자였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드높이기 위해 마련하신 길은 그를 낮추시는 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요셉은 거짓 음모와 이로 인한 투옥을 통해 낮추어졌다. 그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난을 받았다. 그는 오직 "의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것이다. 그는 13년이란 기간동안 모욕과 비방과 의심과 음모를 겪었고 시험과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그를 통치자로 만들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나로 나의 고난의 땅에서 다산하게 하셨다." 고 고백을 하였다. 우리는 파라오와 함께 앉아서 그를 팔아치운 형제들을 용서하고 먹이고 돌보고 있는 요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한없는 이타적인 태도가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그 생각"을 갖기를 배운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의의 면류관이 부여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5).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기 직전 하워드(Howard)장군은 특수사단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때까지는 셔먼(Sherman)장군이 사령관으로 있었다. 워싱톤에서 군대의 인사조치를 조정하고 있던 사령관은 하워드 장군을 불렀다. 그는 하워드에게 다른 장군의 친구들이 그 사람을 그 부대의 책임자로 임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하워드는 "그러나 그것은 나의 명령 하에 있는 것이고 내가 그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데요" 라고말했다. 이에 셔먼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 "물론이요, 당신이 죠지아주와 캐롤라이나주에서 부하들을 지휘하셨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나 하워드장군,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니 실망도 잘 참아낼 수 있지 않소." " 당신께서 그와 같은 이유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신다면 답변은 하나뿐입니다. 그 사람을 지휘관으로 삼으시지요." 이에 대해 셔먼 장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좋소, 그 사람이 가 자리를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당신은 9시에 나에게 보고를 하게 될 것이며 전군의 책임자로 내곁에 앉게 될 것이요." 바로 이와 같은 일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아래서 자신을 낮춘 성도들에게도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우리를 높이신다고 약속하셨다. 자신을 낮추는 모든 일, 자아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조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모든 결단-그것이자기부인이든, 굴욕이든, 고통이든, 분리이든, 슬픔이든, 고난이든, 비방이든, 모욕이든 간에-이 모든 것들이 실상은 아래로 우리를 이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있어, 각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 주리라"(계22:12). 그분의 오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당신의 왕국이 임하소서"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십자가를 만들 만큼의 나무이면 충분합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내려오소서! 상처받으신 성전이시여 면류관을 쓰소서! 상처 입은 손이시여 홀을 붙드소서! 상처 입은 발이시여 왕좌의 발판은 밟으소서! 이는 왕국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감찰하실 그 시간을 기대하며 십자가에 못박혀 태어난 자들이여, 이는 메달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기 위함임을 잊지 맙시다.
네게는 상처자국이 없는가?
발과 옆구리와 손에 숨겨진 흉터가?
나는 네가 그 땅에서 높임 받는 것을 보노라.
나는 사람들이 너의 빛나는 별을 보고
만세 부르는 소리를 듣노라,
네게는 흉터가 없는가?
네게는 상처가 없는가?
그러나 나는 활로 상처를 입었고, 지쳤으며
죽기 위해 나무에 매달렸도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짐승들에 의해 찢겨서 기절했도다.
그런데 네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가?
상처도 없고 흉터도 없는가?
그러나 종은 주인처럼 되야 하고
나를 따르는 발은 창에 찔린 발들이라.
그러나 네 것들은 온전하니, 상처도 흉터도 없는 자가
어찌 나를 끝까지 따르겠는가?
-Amy Carmich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