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38:24-26
제목: 타말의 약조물
2007.03.11. 오전설교 의정부 성경침례교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었습니다(엡 2:1). 한마디로 말해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비록 아이들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은 잠시 보이다가 살라지는 안개처럼, 죽음을 위해 잠시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갓난아기들과 자라나는 어린아기들의 해맑고, 순수한 웃음과 그들의 얼굴빛에 속고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거짓말쟁이입니다. 단지 그 어린 아이들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맑고 순수해 보일뿐입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돌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가르치거나, 살인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죄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 거부하고, 양심을 통해 두드리는 성령님의 음성에 경청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감옥의 창살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롬 3:23)
죄가 우리 인간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어떤 얼빠진 학자들처럼,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 지옥의 형벌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어떤 상태나 행위에 따라서 죄인 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왜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조상의 죄로 인해,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불합리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롬 5:15-19 찾아 읽을 것.
어떤 사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값없는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 영생을 받게 되고,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신 값없는 선물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선물이 없는 사람은, 불길 가운데서 영원히 고통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타말이란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의 족보에 오른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왕의 족보에 오른 네 명의 여인(다말, 라합, 룻, 마리아) 중에 한 명이 바로 타말입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말이란 여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사실 왕의 족보에 오를만한 자격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고귀한 이름을 붙여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38장은 살펴볼 것입니다. 타말이란 여인을 통해, 죄인들이 지녀야할 분명한 자세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다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엘과 오난과 셀라였습니다(창 38:3-5).
그리고 장남 엘이 성장하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얻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타말입니다(창 38:6). 여기까지는 어느 가정이나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다의 악한 아들 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유다의 장남 엘은 악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창 38:7). 아들은 잃은 부모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남을 잃은 유다는, 며느리를 돌아 볼 줄 알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대로 엘의 아우 오난의 아내가 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독특한 성경적인 전통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씨, 아브라함의 자손을 보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규칙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우셔서 신명기에 다시 한번 명령으로 주시게 됩니다.
신 25:5-6 [형제들이 동거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죽고 자식이 없으면,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혼인하지 말 것이요,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서, 그가 그녀를 아내로 삼아, 그녀에게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이행할 것이니라. 그녀가 낳은 첫태생으로 죽은 자기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하여,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지니라.]
이러한 규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려는 멍청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오해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형의 씨를 위해 순종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난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창 38:9-10).
저는 창세기 시대에 살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주 하나님을 조금만 불쾌하게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죽음을 맞보는 시대에 제가 살았다면, 아마도 저는 몇 천 번은 더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이 시대와 이 땅에 살도록 하신,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에 대해서 항상 감사해야 하고, 나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아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녀들로 키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부모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유다는, 엘과 오난을 그렇게 키우지 못했고, 결국 두 아들을 잃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제 유다는 하나님의 성경적 전통에 의해서, 막내아들에게 타말을 아내로 주어야 했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타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셀라에게 타말을 아내로 주지 않은 진짜 이유는, 셀라마저 죽을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창 38:11).
이것은, 유다가 셀라도 죄와 연관이 있거나,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아들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자, 유대인이란, 민족의 대표 이름으로 불리는 영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 농사만큼은 실패했던 것입니다.
아론도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사무엘도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자식 농사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라 해도, 자식만큼은 마음대로 안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의 가슴아파하는 성도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타말은 친정에서 시아버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셀라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어 위로를 받아야 함에도,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타말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타말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다릴 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말은 야곱처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창세기 38:12-14
결국, 타말은 시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씨(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결코 타말의 방법은,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임수,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목적이 선하다면, 수단은 악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암흑시대에 종교재판소와 마녀사냥에 의해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만행이 지금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잘못 인식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악역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롬 6:15 [그런즉 어떻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타말은 시아버지를 속이면서, 약조물을 요구합니다(창 38:17,18). 이미 타말에게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창 38:19-23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육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일들도 치밀한 계획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육신적인 일들에 대해, 오히려 더욱 치밀하고, 자세한 계획들을 세우도록 도울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계획된 일들과 자신의 욕심으로 준비되는 일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마귀의 일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타말의 임신이 시아버지에게 알려집니다. 유다는 자신이 타말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타말의 음행에 대해서 격노하게 됩니다(창 38:24).
유다는 하나님의 원칙대로, 음행한 여인에 대해서 화형을 지시하게 됩니다.
타말의 죽음은, 시아버지의 진노 앞에서 당연히 실행되어야 할 법칙이었습니다.
타말에게 약조물이 없었다면, 타말은 불 가운데서 죽음을 맞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말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약조물입니다. 그 유다의 약조물은 타말의 약조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약조물”이란 단어는, ‘pledge’은 “맹세, 서약, 담보(물), 저당(물)”의 뜻이 있습니다.
만일 타말에게 유다의 약조물이 없었다면, 타말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타말이 이 부분만큼은 지혜로웠던 것입니다. 그녀가 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유다의 약조물을 얻어낸 것만큼은 지혜로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리석고 우둔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만큼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저주이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만큼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인해 죽음 앞에 섰을 때,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타말의 약조물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말에게는 유다의 약조물이 있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타말은 자신의 태중의 아이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타말의 태중에는 비록 시아버지이지만, 그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타말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태중의 아이를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할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말은 악한 열매로 드러날 아이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태중의 아이가 유다의 아이라는 증거를 댈 수 없다면, 타말은 음행에 거짓말이라는 죄를 더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죽음과 지옥의 위협 중에서, 자신의 악한 열매를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세상이라는 악함 속에서 갖게 된, 수많은 악한 열매들을 단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이고 선하다고 여기는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 64:6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
인간의 선함과 종교적인 모든 것들은 악한 열매들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받아드려지지 않습니다. 죄인은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절대로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타말이, 유다에게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핑계로 살려달라고 했다면, 과연 유다가 타말을 살려주었겠습니까?
“그녀를 불사르라” 이 말은 태중의 아이도 함께 죽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타말을 살려 준 것은, 타말의 태중에 자신의 아이들(창 38:27)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타말에게 준 약조물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고, 그 악한 열매가 자신의 씨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살려준 것입니다.
만일 타말이 자신이 받은 약조물이 아닌, 태중의 아이들에 대해서만 외쳤다면, 오히려 거짓말을 했다고, 더욱 더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타말은 유다에게서 받은 약조물을 의지했습니다.
유다의 인장과 팔찌와 지팡이, 이것은 유다의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창 38:18), 바로 그 약조물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타말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유다의 약조물이었습니다.
죄인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보혈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로부터 피 뿌림을 받았고, 그 보혈의 근거로써, 지옥의 불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말의 약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내는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유월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쪽 문기둥과 윗 기둥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아야만 했던 놋뱀, 라합이 창문에 매달았던 주홍색실, 등과 더불어 타말의 약조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예표라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죄인으로 발견되고, 죽음의 문턱에 설 때, 우리가 의지하고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주님의 보혈이 나의 죄를 제거한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골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개역성서 및 모든 변개된 성서들 ‘그의 보혈을 통하여’ 삭제)
지금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약조물인, 주님의 피를 의지 않고, 주 하나님께 나아가려 합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열성과 선한 행실로 주님 앞에 등장하려고 하며, 주님의 징계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약조물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주님의 심판과 징게를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과 열매나 선한 행실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 이끌어 죽음을 모면하게 하는 근거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우리의 열정이나 열매나 행실은, 이끌림 받은 후에 그것에 대해 평가받는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어 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결론
타말은 비록 육신적인 방법으로, 유다를 속였지만, 죽음을 모면하는 유일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약조물이었습니다. 그 약조물이 근거가 되어 타말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모면하는 유일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것이 죄인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지옥의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약조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땅에서 나약하고 부족하고 육신적일 때가 수두룩하지만, 주님의 징계를 모면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을 근거로, 존귀하시고 준엄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죄인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약조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타말이 죽음을 모면했던 것처럼, 확신한 구원의 약조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의 확실한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