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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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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클리닉]사랑은 선택인가? 순종인가?
lhyunsik
2006-05-05
[가정클리닉]사랑은 선택인가? 순종인가?
추부길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 일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온통 ‘사랑’천지이다. 유행가의 노래들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사랑 노래일색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지금 사랑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반면 그렇게 사랑 타령이 많다는 것은 홍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사랑을 외쳐 대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갈급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내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입만 열면 사랑, 사랑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 마음에는 사랑의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어느 정도 넘쳐나면 행복해 하지만 비어있으면 그것 때문에 갈급함이 생겨나고, 그래서 그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 마음에 그릇에 채워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많은 부부들의 결국의 문제가 바로 사랑의 마음이 텅텅 비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쉽게 답을 주고 있다.
미국 코넬대의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녀간에 생겨나는 애정의 관계는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계 37개 문회집단의 5,0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이다. 그 말은 곧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사랑의 에너지는 길어야 30개월밖에 되지를 않고,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랑의 에너지는 소멸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한마디로 눈에 뵈는게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눈에 뭔가가 씌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곧 사랑의 감정이라는 홍수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고 이 세상에는 그저 둘만 존재하는 듯, 그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허니문의 기간이요, 깨가 쏟아지는 기간이리라.
문제는 그 기간이 결코 평생동안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길어야 1년 반에서 2년 반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깨를 털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깨를 털다보면 계속 그 깨가 쏟아질 것 같은데 두세번 털다보면 쭉정이만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혼 초의 그 뜨겁던 사랑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점점 약해져 가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랑의 그릇에 사랑의 에너지가 비어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눈에 씌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단계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꿈이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마음이 가득할 때는 모든 것이 다 덮어지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만 그 사랑의 두께가 엷어지면서 점점 상대방의 좋은 점들 보다는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그 단점들마저도 사랑스러웠고 그것이 또한 매력의 포인트이기도 했는데 날이 갈수록 자신의 이목을 끌었던 바로 그 점들이 꼴 보기 싫은 존재로 변해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그렇게 변해가는 지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그릇이 비어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당연히 상대방이 문제라고만 믿어 버린다. 그래서 그때부터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잔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하고 서로를 지적하는 손길이나 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저 사람의 뭐가 좋아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 싸움 현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과 함께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을 보면 그 답이 보인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기서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곧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들이 갖는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와야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 사랑을 독점하려 하고 사랑을 요구하며 또 갈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갖는 사랑의 에너지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요구하고 원하는 사랑을 채워줄만한 능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원초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넘칠 때에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 하나가 곧 사랑의 표현이고 또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말이나 행동은 그대로인데 그것이 사랑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은 사랑의 그릇에 사랑을 채워 넣으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분노가 나고 그것이 부부간에 갈등으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인간적인 행동에 대해 그래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사람으로부터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왜 사람에게서 그것을 채우려하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의 수혈이 필요한데 그 수혈의 대상으로 사람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으로 표적을 옮기라는 것이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경고도 빠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사랑 방법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저 사랑하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도 무슨 조건이나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드릴 수 있다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사람은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텅텅 비게 되면 가만있지를 못한다. 그 그릇이 비게 되면 살아가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채움받기를 원하지만 도저히 그 사람이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세상의 그 무엇들로부터 채워 보려 한다.
명예로, 권세로, 술로, 여자로.... 별 시도를 다해 보지만 결국에 느끼는 것은 ‘헛되고 헛되니 모두가 헛되도다’는 탄식밖에 남지를 않는다. 그래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와서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외치게 된다.
그 외침이 바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맞대응을 한다. “왜 나한테 화내고 그래? 내가 뭘 잘못한거야!” 그렇게 맞대응을 하는 순간, 상대방의 그 마음의 그릇마저도 깨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은 상대방이 지금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를 안다. 곧 “아, 지금 저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텅텅 비어 있구나! 지금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하는 갓이구나!”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달려가서 꼭 끌어 안아주면서 “당신, 지금 사랑이 고프구나! 그래.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퍼 부어줄께!”라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니 도대체 그런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얼굴만 쳐다보면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만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역시 성경이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곧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사실이다. 다름아니라 사랑은 먼저 행동하는 것이다. 곧 내 마음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더라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결단으로 자신 안에 넘쳐나는 미움과 분노를 죽이고 그저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라도 일단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말대로 행동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먼저 순종하고 나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상대방을 진짜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서 부부간에는 다시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사랑하는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때 결단하는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그 기도마저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을 먼저 하면 그 행동에 감정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 상담학에서 말하는 행동요법(Behavior Therapy)이다.
잊지 말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앙적 결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의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일방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추부길/웰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