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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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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목적이 이끄는삶 - Albert James Dager
lhyunsik
2006-04-21
‘목적이 이끄는삶 프로그램 -교회 내에서 급증하는 현상
알버트 제임스 대거(Albert James Dager)
박노찬 역
세미나를 통해서 유포된 두 권의 베스트셀러의 가르침을 전 세계 수많은 교회들이 앞 다투어 수용하고 있다. 기독교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책들의 제목은「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과「목적이 이끄는 교회」(The Purpose-Driven Church)로, 저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 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 in Lake Forest)의 목사 릭 워렌(Rick Warren)이다.
워렌의 첫 번째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 설교 내용이나 목회자의 사명을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The Purpose-Driven Church : Growth Without Compromising Your Message & Mission)는 교회 목사들이나 리더들에게 교회 성장을 위한 지침서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 책은 1995년 초판 발행 이후 백만 부 이상 팔렸으며, 워렌이 새들백 교회의 설립 목사로서 20년 이상 지내면서 발전시킨 교회성장의 방법론을 교회 지도자들과 목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 그의 두 번째 책「목적이 이끄는 삶: 도대체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The Purpose- Driven Life : What On Earth Am I Here For?)는 교파를 초월해서 기독교 내 수많은 교회들의 후원 아래 소그룹 조직화에 관한 교육 안내서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 가을 출간된 이래 12개 언어로 7백만 부 이상 팔려나간 이 책에서 워렌은 40일간의 영적 여행을 설정한다. 이 여행을 통해서 워렌은 각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보다 성숙해져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도전한다. 워렌의 메시지인즉, 각 사람의 인생에는 목적이 있는데 각 사람이 그 목적을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워렌 글과 말에는 열정이 담겨 있다. 자신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것을 열심히 행하려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는 말은 겸손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한다. 사람들은 워렌의 사역을 비즈니스 감각과 영적 열심의 혼합이라고 평가해 왔다. 이제 심지어 ‘목적이 이끄는’ (purposed driven)이라는 말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1991년에 약속 이행자들(Promise Keepers)이 처음 등장한 이후로 워렌은 모든 기독교 종파 교회들 사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어떻게 크리스천의 삶을 성숙하게 만들 것인가와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워렌의 메시지는 지난 20년간 그가 개최한 ‘목적이 이끄는 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전 세계 수많은 교회의 목사들에 의해서 실천되었다. 여러 나라의 교회들과 60여개 교파가 워렌의 세미나 테이프를 주문했고, 전 세계적으로 25만 명의 사역자들이 워렌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리는 워렌의 진의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은 아마 워렌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어쨌든, 워렌의 사업이야말로 우리가 보아온 교회 성장에 관한 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업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운동을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비유하기까지 하고 있다. 미조리주 락 부룩(Rock Brook) 교회의 켈리 월터(Kelly Walter)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우리가 마틴 루터 시대에 살면서 매일 루터를 만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월터 목사는 지난 10년간 매 해 새들백 교회를 방문했다.
워렌은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종교개혁은 ‘교회가 무엇을 믿는가’를 명확하게 했다. 즉 우리의 메시지와 교리를 분명히 한 것이다. 현재의 종교개혁은 ‘교회가 무엇을 행하는가’를 명확히 할 것이다. 즉 이 땅에서 우리의 존재목적과 활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드러나게 할 것이다.”
모든 교회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워렌의 노력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로스 오소스의 근본주의 성경교회의 데니스 코스텔라 목사는, 힘겨워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목적이 이끄는’ 이라 불리는 이 전략 프로그램에 목숨을 걸고 있는듯하다고 말한다. 코스텔라 목사의 말이다. “보다 많은 소형교회 목사들이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실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실함에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을 세워놓고 ‘어디 네 사역 실적 통계표 한 번 보자꾸나.’ 라고 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워렌의 스타일의 특징은 느슨하고 격이 없다. 그는 심지어 주일 오전 예배에 카키색 바지와 하와이풍 셔츠를 입고 등장하곤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워렌이 목사라는 사실을 모르기도 한다. 이러한 평범한 모습의 워렌을 보면서 사람들은 워렌 같은 사람이 그의 삶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워렌은 연간 예산 1,900만 달러와 회원수 17,000여 명인 교회를 감독하고 있으면서도, 텔레비전 전도자들처럼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데는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개개의 목사들을 준비시켜서 각자의 교회와 공동체 성장을 위한 워렌의 프로그램을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워렌의 글에 많은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체로서의 교회 뿐 아니라 크리스천 개개인을 병들게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워렌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자신의 논제에 대해서 많이 연구한 사람이고 대충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점들에 대한 처방을 제시할 때 그의 말은 무게가 있고 단호하다. 그는 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종종 상투적인 말들을 재치 있게 사용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는 “겸손이란 당신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덜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워렌의 책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논제들을 발견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가 되기 원한다면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는지를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워렌의 두 권의 베스트셀러「목적이 이끄는 삶」과「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DRIVEN LIFE
워렌은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물론 가끔은 불신자들에게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이 책의 독자가 신앙의 초보자이며 걸음마를 막 배우는 단계에서 첫 발을 내딛어야 할 아기라고 가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크리스천이 다같이 40일간의 영적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렌이 말하는 이러한 여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신자들에게는 대부분 불필요한 것들이다.
워렌은 이렇게 말한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신 그 목적을 알고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갖게 되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어떤 결정도 간단히 내릴 수 있게 되며, 삶에 만족하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영생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번역 출간한 「목적이 이끄는 삶」p. 14, ※이하 인용문 출처는 한글 번역판임 - 역자 註)
이 여정의 끝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사실 신자들은 이런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것들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다. 뭔가를 아는 것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40일 여행의 구성은 하루에 한 과를 읽고 각 과의 끝 부분에 있는 실습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습의 내용은 1) 생각할 점, 2) 기억할 성경구절, 3) 고려해 볼 문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요소들은 특정한 과의 가르침들과 연관되어 있다.
변화된 삶
(Transformed Lives)
워렌은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삶이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며 사람들이 그 책과 서로 상호작용할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도 사람들이 변화(transform)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 내용을 읽기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읽은 내용을 생각해볼 시간을 갖지 않는다. 배운 것들을 적용해보지 않고 다음 부분으로 서둘러서 넘어가려 한다. (p. 15)
이러한 이유로 워렌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그저 읽지만 말고 책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 책이 우리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다음번 진리로’ 급히 넘어간다(rushing)는 표현을 생각해 볼 때, 사실 진리란 인간의 글에서 우리가 항상 그리로 급하게 달려드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말씀 이외의 어떤 것도 사람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transform)시키지는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견실한 신자들이 쓴 탁월한 책들이 많이 있어왔고, 많은 책들이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위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많은 책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고무시켰다. 많은 책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느 정도 바꾸어(change)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들 중 그 어느 것도 누군가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transform)시키지는 못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삶은 변화(transform)될 수 있다.
보통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이 성경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그 글의 실제 가치보다 큰 신뢰를 독자들로부터 확보하려 하곤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은 그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도구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저자가 자신의 글에서 오직 성경에게만 합당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데 있어서 사람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워렌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려면 지금부터 40일을 헌신하도록 서약하라고 요청한다.
성경은 40일을 하나님이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간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 노아의 삶은 40일 동안 내린 비로 변화(transform)되었다.
· 모세는 시내 산에서 보낸 40일 동안 변화(transform)되었다.
· 정탐꾼들은 약속의 땅을 40일 동안 바라보면서 변화(transform)되었다.
· 다윗은 골리앗의 40일 간의 도전으로 변화(transform)되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고 40일 동안 그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경험하고 변화(transform)되었다.
· 니느웨 온 도시는 하나님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신 40일 동안 변화(transform)되었다.
· 예수님은 40일 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능력을 받으셨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40일을 함께 지내면서 변화(transform)되었다.
앞으로의 40일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transform) 것이다. (pp. 14~15)
40일이라는 기간이 성경의 몇 군데에서 특별한 기간이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항상 40일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여러 특정한 성경의 사건이 40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책을 하루에 한 과씩 40과를 읽게 되면 독자들의 삶이 그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될(will transform)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상당히 뻔뻔한 주장이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러한 공식대로 따라서 한 사람들은 모두 그 삶이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책을 읽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매일 뉴스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워렌이 이렇게 말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앞으로 40일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시는데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독자가 그 책에 있는 성경적인 부분들은 마음에 취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무시해버린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의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성경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기초해 있고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잘못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워렌이 단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불완전한 조언들을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책을 전혀 사용하실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는 있겠지만, 저자가 성경 말씀을 잘못되게 사용한 죄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흔히 로마서 8장 28절을 인용하면서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추악한 악이라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주권적인 능력을 그리 자주 사용하지는 않으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맹세하기
(Taking The Oath)
워렌은 독자들에게 40일간의 여행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마음속에 견고히 하기 위해서 워렌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짝을 정하라고 권한다. 도대체 사람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속박시키려 하는 이러한 종교인들은 누구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시지만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특정한 맹세가 성경이 금하시는 것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종교적 운동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그 추종자들에게 문서적 서약이나 구두로 그들이 정한 어떤 것에 동의하도록 부추기는(때론 강요하는) 어떤 언약(covenant)이나 맹세(oath)를 하게 한다.
표면상 이러한 맹세들은 그 운동이나 집단에 속한 사람 각자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해서 행동을 하게 되면 이미 영적 성장에 있어서 한 걸음 퇴보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돈을 융자받거나 결혼할 때 등 매사에 합의를 거치고는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 거스르지 않는 합법적인 계약들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종교적 언약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사람들의 혼을 종교적 속박 상태로 몰고 간다.
아마도 우리는 워렌의 책에서 맹세에 관한 이 부분을 그저 무시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지 못한 채 열정이 앞서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됐든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의 손에 우리의 영적 성장을 맡기라고 권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미심쩍은 성경 번역본들
(Questionable Bible Versions)
워렌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으려면 여러 성경 번역본들과 의역본들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두 가지 이유로 다양한 번역 성경을 사용했다. 첫째,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다 해도 모든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성경은 본래 11,280개의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평균 6,000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항상 여러 번역 성경을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둘째,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보통 잘 알려진 성경 구절들이 갖는 영향력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번역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구절들을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구절이 책에서 인용되면 대강 훑고 넘어가고 그 완전한 의미를 놓친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여러 다른 번역 성경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새롭게(in new, fresh ways)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굵은체로 강조된 부분은 워렌 자신에 의한 것임.)
성경 역본들을 비교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특별히 접속사의 경우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 연구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저 아무 번역본이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니며 특히 의역본의 경우는 더욱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 역본들은 진리를 가려버린다. 어떤 연구를 아무리 진지하게 했더라도 의역본을 일차 자료로 사용해가지고는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현재 많은 영어성경 번역본들이 있지만 바른 번역본은 ‘단어 대 단어’ 번역 방식으로 번역된 성경역본이다. 그런데 워렌은 자신의 책에서 이러한 바른 성경역본 대신 ‘사상 대 사상’ 혹은 ‘내용 동등 번역’(dynamic equivalency) 방식으로 번역된 성경역본이나 의역본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 인용된 성경역본은 총 15개이며, 이들로부터 760구절 이상의 성경구절이 인용되었다.(워렌 자신이 주장하듯이 ‘약 천여 개’가 아니다.) 이 중 570여개의 성경구절이 NLT, NIV, Msg, TEV, LB등 5개 역본에서 인용되었다. 그 다음 총 151개의 구절을 인용한 역본들은NCV, CEV, GWT 등 3개 역본이다. 나머지 구절들은 KJV, Ph, NASB, NRSV, Amp, JB, NJB등 7개 역본들에서 취했다. 마지막 두 역본들은 현대 로마 카톨릭 역본들이다.
NLT - The New Living Testament
Msg - The Message
LB - The Living Bible
CEV -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KJV - The King James Version
NASB -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mp - The Amplified Bible
NJB - The New Jerusalem Bible
NIV -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TEV - Today's English Version
NCV - The New Century Version
GWT - God's Word Translation
Ph - Philips
NRSV - The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JB - The Jerusalem Bible
워렌이 현대 역본들에서 발췌한 많은 구절들은 신뢰할 만한 문자적 번역본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의미가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워렌은 현대 역본들이나 의역본들을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낫다고 믿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p. 297 에서 워렌은 설교자들에게 킹제임스 성경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더 새로운 역본들로 성경을 보라. 훌륭한 번역본들과 의역본들이 수두룩한데 400년 전 영어로 되어 있는 복음을 읽으면서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면 불필요한 문화적 장벽이 생긴다. 제임스 왕이 새로운 번역본에 권위를 부여한 이유는 그 시대에 필요한 현대역본을 원했기 때문임을 기억하라. 나는 “만약 제임스 왕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NIV를 봤을 것이다!”라는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사실 그럴 것이다. 문체의 명료함이 시적 운율보다 더 중요하다.(킹제임스 성경은 시적 운율은 좋지만 문체의 명료함이 다른 현대역본만 못하다는 의미 - 역자 註)
킹제임스 성경도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단어의 의미가 바뀐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시가 아닌 것처럼 킹제임스 성경 역시 그저 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한갓 시로 바라보는 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워렌은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백성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성경을 소유하게 되기를 제임스 왕이 원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왕이 사용하는 언어’(King's English)로 된 성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비록 제임스 왕이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도록 한 동기 중 하나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영국 교회를 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성경은 당시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신뢰할만한 필사본들을 근거로 한 정직한 번역본이었다.
거의 모든 현대어 역본들은 [웨스트콧과 호르트의 헬라어 본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본문은 바른 계열을 따르는 원본 헬라어 필사본들이 아닌 특정한 헬라어 필사본 몇 개를 조합해서 만든 것이다. 웨스트콧과 호르트가 재구성한 헬라어 성경 본문은 많은 부분에서 부정확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록 웨스트콧과 호르트의 헬라어 성경 본문 중에서 바르게 되어있는 구절조차도 많은 현대 역본들은 헬라어에서 영어 등의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들’이나 ‘의역자들’의 신학적 입장에 맞게 그 의미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이후에 우리는 이러한 현대 역본들이 본문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그 의미를 통째로 바꾸어버린 경우를 몇 군데 살펴보게 될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시적 운율을 선호할 것이냐 문체의 명료함을 선호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대 역본들이 ‘문체의 명료함’을 핑계로 바른 진리의 말씀을 훼손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워렌이 바른 성경역본대신 다른 현대역본들이나 의역본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킹제임스 성경의 바른 번역이 교회 성장을 위한 ‘구도자 친화적’(seeker- friendly) 모델에 항상 잘 들어맞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It All Starts with God)
이 땅에서의 인간의 존재와 인생의 목적에 관해서 워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그의 책「목적이 이끄는 삶」의 첫 장을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p. 21)
(“It's not about you.” → “문제는 우리가 아니다.” 즉, 인생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중심에 우리 자신을 놓으면 안 된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께 문제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임. 워렌의 이러한 선언은 필자가 워렌의 글을 비판하는 가장 큰 근거가 되는 선언이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 - 역자 註)
사실 나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라고 믿는다.
삶의 목적이란 우리 개인의 성취감, 마음의 평안과 행복감 이상의 것이며,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모든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목적에 의해서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p. 21)
워렌이 제대로 말했듯이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삶의 목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거나 자아실현을 추구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목적에 관한 진리의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비록 그것이 기독교 서적이라 하더라도 자조적인(self-help)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뉴에이지 실행자들이나 통속적 심리학의 노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성공하는 것과 삶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하는 조언들은 종종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된다. 자신이 한 말을 확증하려 할 때 신뢰할 수 없는 성경역본들을 사용하게 되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메시지역(The Message) 인용에서 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메시지역 롬8:26) (p.23)
이것을 킹제임스 성경 본문과 비교하면 이렇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메시지역(The Message)은 죄에 대해서 말씀하는 이 성경구절을 그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된 구절로 바꾸어 놓았다.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의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변개했다. 영적인 죽음 역시 ‘막다른 골목’(dead end)으로 바꾸어, 마치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저주 받아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삶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버린다. 워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문자적 번역본 대신 메시지역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강화시키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용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5절의 메시지역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를 돕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기희생이야 말로 그 길, 곧 나의 길이며 네 자신을 발견하고 네 진정한 자아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메시지역 마16:25)
이 구절을 킹제임스 성경과 비교해 보자.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찾을 것임이라.(마16:25)
왜곡된 번역본들
(Perverted Versions)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우리는 왜곡된 성경역본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영생을 찾도록 말씀하셨지 그분 안에서 우리 진정한 자아를 찾도록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돕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이기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스스로를 돕는 것’은 삶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과 관련된 것인 반면 이기심은 삶에서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덧붙여서, ‘자아를 찾는 것’은 심리학적 용어로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워렌은 위에서 이러한 심리학적 노력을 반대한다고 주장했었다.
워렌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방법이 추리와 계시라고 말한다. 추리는 세상의 지혜 곧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추측’이며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p. 24) 이 말에는 이견이 없다. 불행한 것은, 워렌이 정확한 번역본만이 전달할 수 있는 참된 의미를 그렇지 못한 번역본들과 의역본들로부터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볼 때 그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장한 세상의 지혜인 것이다.
워렌은 ‘대중 심리학’이나 ‘성공을 위한 동기나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면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도록 이끌어간다. 그가 이 부분에서 인용하는 메시지역(The Message)을 보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어떤 소망을 갖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눈여겨보셨고 만물과 만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삶을 이미 계획해놓으셨다.(메시지역 엡1:11) (p. 25)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을 문맥을 고려해서 10절부터 12절까지 살펴보면 이렇다.
이것은 때가 찬 경륜 안에서 모든 것 곧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분 안에서 다 같이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또한 그분 안에서 모든 일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상속을 얻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12)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그건 워렌이 배척한다고 하던 ‘대중 심리학’ 용어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우리가 영원한 보상의 상속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누군지를 알아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워렌은 그의 탁월한 말솜씨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설득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지 못함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 자신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제시하면서 바른 진리를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 번역에 있어서 ‘단어 대 단어’로 번역된 최상의 역본을 무시한 채 ‘내용동등 번역’(의미 대 의미)의 입장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 번역에 있어서 ‘단어 대 단어’ 번역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들은 모두 ‘번역자’의 틀릴 수 있는 ‘사상’에 불과할 뿐이다. 오염된 인간의 이성을 마치 ‘성경번역본’이나 ‘의역본’인양 속이면서 독자들에게 그것들을 내미는 것은 저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단순히 그 역본들을 이용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은 우연이 아니다
(You Are Not an Accident)
제 2장에서 워렌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자들이고 자녀들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하는 이 말은 새신자들에게는 고사하고 불신자들에게나 필요한 말이다.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워렌은 마치 신자들에게 하듯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사실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구절이다. 다음은 워렌이 인용하는 새세기역(The New Century Version)의 이사야서 46장 3~4절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았고 출생 시부터 내가 너희를 돌보았나니 너희가 늙을 때에도 내가 그리하리라. 너희가 백발이 될지라도 내가 너희를 돌보리라. 내가 너희를 지었나니 내가 돌보리라. (새세기역 사46:3~4) (p. 32) (한글 번역서에서는 개역성경 구절을 그대로 사용했음. - 역자 註)
이 구절이 어떤 개인에게 한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구절이라는 사실은 제쳐 놓더라도, 이 구절은 격려의 말이 아니라 꾸중의 말씀이다. 문맥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도록 만든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추방당했던 땅으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신자들이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성경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죽어갔다. 아마도 워렌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신자들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더 적합할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사실 불신자들에게는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 적이 없다. 바로 그 다음에 워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를 만든 이유가 있으며,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p. 33)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워렌이 교회 내에 있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 내에 불신자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믿고 있다.
위와 같이 말한 다음 워렌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서 12장 3절의 의역본인 메시지역(The Message)을 인용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p. 33) (원문 : The only accurate way to understand ourselves is by what God is and by what he does for us. →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하고 정확한 방법은 하나님이 무엇이신지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메시지역 롬12:3) - 역자 註)
이것은 원래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 (롬12:3)
워렌의 책 제 1장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이것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It's not about you.)라고 한 말을 기억하라. 즉, 문제의 중심에 우리 자신을 놓으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로마서 12:3의 정확한 번역본 대신 메시지역(The Message)을 인용함으로써 워렌은 초점을 하나님이 아니라 다분히 우리 자신으로 돌려놓는다.(“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라는 인용구를 보라.) 바른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워렌이 사용하는 성경들은 계속해서 ‘사람’을 그 중심에 놓는다. 그의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문제점이 계속 발견된다.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이끄는가?
(What Drives Your Life?)
워렌은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힘, 즉 죄책감, 원한, 분노, 물질, 인정받으려는 욕구 등에 대해서 검증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목적이 이끄는 삶의 유익과 대조시킨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그는 이상한 말을 한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과 관련해서 ‘죄’(sin)를 ‘죄책감’(guilt)으로 대치한다.
죄의식(guilt)에 의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은 기억에 의해 조작된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성공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하려고 한다.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죄의식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하나님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창4:1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목적 없이 헤매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p. 36)
우리는 여기서 대중 심리학이 적용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자백해야 할 죄가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백할 마음을 갖도록 조언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워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불필요하게 죄책감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기 전에 먼저 죄의식이 있어야 한다. 죄책감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고 우리가 죄를 지은 상대방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죄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토록 중요한 요소를 어째서 언급하지 않는가?
둘째로, 가인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되도록 만든 것은 죄의식(guilt)이 아니라 죄(sin)였다. ‘죄’라는 합당한 단어를 ‘죄의식’이라는 단어로 대치시키게 되면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오류는 워렌이 시편 32편 1절 말씀을 정확한 번역본 대신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에서 인용하면서 더욱 악화된다.
죄의식을 용서받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 자신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 전과(record)를 사해주신 이들이 갖는 안도감이여.(리빙바이블 시32:1) (p. 36) (한글 번역본의 이 부분은 한글개역성경 본문으로 대체되어 있음. - 역자 註)
리빙 바이블이 ‘죄의식’(guilt)으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페사(pesha)로 반항, 죄, 위반, 범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자기 범죄를 용서받고 자기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죄’를 ‘죄의식’으로 바꾸어 놓은 의역본을 읽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죄’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이런 식의 대중 심리학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죄’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워렌의 글의 모든 부분이 실제적으로는 ‘우리에 관한 것’들, 즉 심리학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인생의 목적에 관한 문제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논고에서도 같은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간다. 두려움이란 매우 충격적인 경험, 비현실적인 기대 그리고 엄격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고, 유전적 요인으로 생길 수도 있다. 그 원인에 상관없이 두려움에 이끌려서 사는 사람들은 종종 좋은 기회들을 놓친다. 이는 그들이 모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안전한 방향으로, 위험을 피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가둬놓는 감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감옥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p. 37)
‘유전적 요인’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입증되지 않은 심리학 이론은 될 수 있을지언정 마치 하나님께 영감 받은 듯이 주장하는 책에서는 언급할 말이 아니다.(워렌은 자신의 글이 사람들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킬(transform)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기억하라.)
이런 식의 이론들이야말로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죄와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외적 요인들에서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부채질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또 한번 워렌의 글이 그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워렌은 자신의 논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메시지역(The Message)에서 요한일서 4장 18절을 인용하는가?
잘 갖춰진 사랑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합니다. 두려움은 손해를 끼치기에 두려워하는 삶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란 사랑 안에서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메시지역 요일4:18) (p.37) (한글 번역본의 이 부분은 한글개역성경 본문으로 대체되어 있음. - 역자 註)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메시지역(The Message)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멀리 지나쳐갔다.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한 사람’을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삶’으로 바꾸어놓았다. ‘각 사람’의 의미를 빼 버리고 그 자리에 그 사람의 ‘불완전한 삶’을 집어넣었다.
물질에 이끌려 사는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워렌이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문제의 방향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 잘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없다면 삶에는 어떤 목적도 있을 수 없고,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면 삶의 중요함이나 소망도 없다. (p. 40)
하지만 이러한 언급에 이어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정확한 의역본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도 또다시 성경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에 관련된 구절인 예레미야 29장 11절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것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구절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계획을 내가 아나니 … 내게 너희를 위한 좋은 계획이 있나니, 너희를 해치려는 계획이 아니니라. 내가 네게 소망과 좋은 미래를 주리라. (p. 40) (한글 번역본의 이 부분은 한글개역성경 본문으로 대체되어 있음. - 역자 註)
이 구절의 킹제임스 성경을 보자.
이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렘29:11)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이러한 격려의 말씀은 바벨론에서 거할 집을 짓고 오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시는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Made to Last Forever)
워렌은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 땅’ 에서 영원히 살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지만 워렌은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히브리서 13장 14절을 리빙 바이블로부터 인용하는 부분을 보자.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집을 기대하고 있다.(리빙 바이블 히13:14) (p. 52)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했다.
이는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시가 없고 오직 우리가 앞으로 올 도시를 찾기 때문이니(히13:14)
많은 사람들은 무심코 성도들이 ‘하늘’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교회 목사님들에게서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의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교리들에서도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말로 어떤 것을 예비해 두셨는지에 대한 실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이 땅에서 그분을 위해 살겠노라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천국이란 먼 훗날에 오게 되는 무슨 그림의 떡처럼 모호한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이후에 ‘새 땅’이 영원히 설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늘이 아니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계21장)
이렇듯 많은 오류가 있지만 그래도 제 4장은 워렌의 책에서 다른 장들 보다는 나은 장 중 하나이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필자가 워렌 철학에서 좋은 점은 빼놓고 문제점들만을 너무 많이 부각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워렌의 글 중에도 진리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책에 담겨져 있는 진리의 측면보다는 그 책이 담고 있는 수많은 오류들을 언급하는 것이 보다 시급하다. 왜냐하면 온갖 오류투성이인 글들을 참아가며 읽지 않더라도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워렌의 책들 보다는 훨씬 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책들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글의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예리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서 간교한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Roman Catholic Mysticism)
나는 오늘날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많은 현대의 성경교사들이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자들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워렌은 독자들에게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냄새가 풍기는 명상이나 묵상을 하도록 고무시킨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고전이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다. 이는 17세기에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에 의해 쓰여졌는데 그는 프랑스 수도원의 조리사였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은 가장 일상적이고 작은 일도 예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바꿀 줄 알았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하던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먹는 것이든, 목욕하는 것이든, 일을 하는 것이든, 쉬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든 상관이 없다. (p. 119) (강조된 부분은 워렌 자신에 의한 것임.)
이 내용은 ‘하나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소주제에 포함되어 있다.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친구’를 갖고 계실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분의 임재를 연습함으로써’ 그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 카톨릭 수도승들의 밀교적 명상과 은둔생활은 진실한 크리스천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속임수다. 그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경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성이란 것이 인간이 반드시 내적으로 뭔가를 감각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신자들의 삶은 그런 것과 관계가 없다.
신자는 삶 가운데서 짓는 죄의 문제와 삶 가운데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사시면서 그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왕좌에서 불러 내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할 수 없다. 우리가 나름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앞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임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주제넘은 설정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의미하는 바다.
이러한 이론은 뉴에이지 식 기독교다. 사실 워렌은 다른 곳에서 뉴에이지 식 기독교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에 감염된 워렌은 분별력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워렌은 자신을 따르고 신뢰하는 어리숙하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에게 이러한 흐리멍텅한 분별력을 옮겨 심어주고 있다. 워렌이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자는 로렌스 형제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습관이다. 마치 음악가들이 쉽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음계를 매일 연습하듯이 우리도 하루 일과 중 각기 다른 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노력해서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상기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나도록 만드는 물건들을 주변에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작은 쪽지에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다!’라고 써놓을 수 도 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시간의 기도'를 갖기 위해 시간마다 종을 쳤다. (pp. 120~121)
워렌 같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로마 카톨릭 수도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때 독자들은 로마 카톨릭도 신뢰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이나 수도승들의 인격 자체를 모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행하는 것들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범사례로 듦으로써 불경건한 영성으로부터 분리되도록 다짐해야 할 신자들의 마음에서 경계의 벽을 허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더 나가서 워렌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나 핸리 노웬(Henri Nouwen)같은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인다. 노웬은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에 심리학을 혼합한 사람으로 나중에 카톨릭 사제가 된 사람이다. 이런 식의 신비주의는 뉴에이지 기독교와 잘 맞아떨어진다. 뉴에이지 기독교에서는 소위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으로 취급한다.
진실한 신자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 생각 속에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떠오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중에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선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성령님께서 그분이 우리에게 알리기 원하는 것들을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신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연습하는 사람들은 비록 구원은 받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참된 신자가 아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인정받기 위해서 뭔가에 도취되는 경험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다. 스스로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를 권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뉴에이지 운동에 한 발짝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뉴에이지 운동 역시 위에 언급한 사람들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을 호평하고 추천한다.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운영하는 르노베(Renovar?)라는 단체가 그 중 하나이다. (「Media Spotlight」의 특별 기고 ‘Renovar? : Taking Leave of One's Senses를 볼 것.)
범신론의 그늘
(Shades Of Pantheism)
워렌의 글에서 독자들을 교란시키는 요소 중 하나가 에베소서 4장 6절을 새세기역(The New Century Version)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다.(새세기역 엡4:6) (p. 119)
이것은 사탄의 노골적인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in everything) 계시지 않는다. 그러한 사상은 범신론(돌이나 나무 등 모든 것이 신이라는 사상)이다. 혹자는 워렌 정도의 지성과 교육을 겸비한 사람이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워렌이 자신의 책 다른 부분에서 범신론은 배격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도대체 왜 이토록 중요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새세기역과 같은 번역본을 선택한 것일까? 이 구절은 원래 이런 말씀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above all)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시고(through all) 또 너희 모두 안에(in you all) 계시느니라.(엡4:6)
참으로 하나님은 성령님의 인격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신자들의 몸 안에 거주하신다.(고전6:19) 하지만 그분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곳곳에, 즉 ‘모든 물체 내부에’ 계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오류 하나만으로도 워렌이 쓴 이 책을 내던지고 사람들이 워렌의 가르침을 멀리하도록 경고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초보적인 진리에 관한 워렌의 가르침도 신뢰할만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면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제시하려는 훨씬 수준 높은 문제들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나쁜 것에 의해서 무가치하게 되는 좋은 것들
(The Good Nullified By The Bad)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워렌이 하나님의 말씀에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는 일면이 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그는 뭔가 형편없는 추측도 상당히 심오하게 제공하고 있다. 다음의 경우는 ‘하나님과 친구 되기’에 관한 것이다.
친구들은 비밀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우리와 나누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비밀을 말씀하셨다. 다니엘, 바울, 제자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설교 테이프를 들을 때 그냥 흘려보내지 말라. 그 진리를 머리 속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습관을 기르라. 읽고 들은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넘기는 이 삶의 비밀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그들과만 자신의 비밀들을 나누실 것이다.” (pp. 122~123) (한글 번역본의 마지막 성경인용 부분은 한글개역성경 본문으로 대체되어 있음. - 역자 註)
이 구절은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의 시편 25편 14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주의 은밀한 일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함께하나니 그분께서 자신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리빙 바이블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은 비밀들이란 것이 뭐가 있는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것을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에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대언(prophecy)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와 테이프들을 더 많이 묵상할수록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분명하게 진술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비밀들’을 홀로 터득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워렌의 글을 보면 설교와 테이프들에도 성경과 동일한 영적 기름 부으심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듯하다. 최소한 그런 인상을 준다. 위험한 것은, 새신자들은 설교나 테이프를 통해서 듣는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설교나 테이프 중에서 내가 들은 내용 중 어떤 것들은 잊어버리는 것이 더 나은 것들도 있다. 비록 내가 직접 쓴 글이나 직접 한 말 중에도 잊혀 졌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해
(All For the Church)
초대형 교회의 목사인 워렌의 경우 뭔가를 볼 때 이미 확립된 종교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 모델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교회와 그 교회 목사들의 지지자가 되고 소위 ‘비판’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촉구한다.(p. 222) 워렌은 신자들이 자기 교회에서 행해지고 가르쳐지는 것들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이따금씩 가질 수 있는 정당한 관심조차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독자들이 진리나 혹은 드러난 거짓을 성경으로 검증하도록 독자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에 관심을 맞추라”고 부추긴다. (p. 216)
워렌은 우리가 각기 다른 인격, 배경, 인종, 취향 등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독자들에게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거나 ‘말씀을 받을 때 과연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찾아 본 고귀한 베레아 사람들’처럼 되라고(행17:11) 격려하지는 않는다. 독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이끄는 것을 꾀하는 책이라면 이러한 경고의 말씀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경고의 말씀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에 ‘연합’ 만이 교회 내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도만 비칠 뿐이다. 하긴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을 용인하고 추켜세우는데 열성적이며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즘(교회일치연합운동)의 선봉에 선 사람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워렌이 성도들의 연합을 너무나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새들백 교회의 모든 멤버들은 교회의 하나 됨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서약서에 의무적으로(mandatory, 한글 번역서에는 없음 - 역자 註) 서명을 했다고 한다.(p. 223) 이것은 사실 교회 내에서 적법하게 이루어지는 투표를 방해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이것은 ‘교리’보다 ‘연합’을 우위에 두는 것이며, 목사가 하는 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처사이다. 사람들이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회중 앞에서 뭔가 잘못 행해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들추어낸다면 자신들이 한 서약을 파기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 됨의 서약을 한 사람은 교회 내에서 명백히 잘못된 것을 발견했더라도 그것을 들추어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
사실 교회 내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을 때는 서로 분열되는 쪽으로 가지 연합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성경적인 ‘연합’은 서로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건전한 교리’에 바탕으로 두어야만 한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롬16:17~18)
건전한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비겁함이다. 하지만 들어보라. 워렌은 누군가가 어떤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일 거라고 주장한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의 태도, 특히 교만함에 대해 검토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있을 때는 가장 지루하게 가르치는 교사를 통해서도 가르침을 주신다. (p. 249)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실제로 중요한 어떤 것이 가르쳐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무것도 습득하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날 강단에서, 신뢰할만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견실하게 설교하는 시간에 비해서 농담이나 일화 소개, 개인 의견, 혹은 본론과 무관한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에 할애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성도들이 시계를 보면서 한번 재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도 강단에서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질 것이다.
제 26과 ‘시험을 통해 성장하기’에서 워렌은 시험(temptation, 유혹)의 문제를 다루는 좋은 충고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 가운데 심각한 오류가 있다.
세 번째 단계는 거짓(deception, 속임)이다. 사탄은 진실을 말할 능력이 없으며, ‘거짓의 아비’라 불린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던지 그 말은 진리가 아니거나 반만 진실이다. 사탄은 자신의 거짓말로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들을 대체하게 한다. (p. 268) (강조된 부분은 워렌에 의한 것임)
워렌이 틀렸다. 사탄은 진리를 꽤 잘 말할 수 있다. 거짓이나 반쪽짜리 진리를 덧붙이지 않고도 말이다. 최소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엉성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에는 속임수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사탄은 사람들을 속여서 ‘종교 기관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럴듯하게 ‘정통’(orthodox) 행세를 할 수 있다. 최상의 속임수는 최대의 진리를 끌어 담아 자신을 포장한다. 사탄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incapable)는 표현은 아무래도 형편없는 접근방식이다. 워렌은 오히려 사탄이 사람들을 거짓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진리를 말하는데 아주 능숙하다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심리학의 사용
(Psychological overtones)
워렌은 글을 쓰면서 심리학을 상당히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의 교회는 다양한 죄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알코올 중독자 자주 치료협회 모델에 기초한 다양한 단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사실 이곳에서 알코올 중독 문제는 죄로 취급되기 보다는 그저 치료가 필요한 일종의 중독으로 취급된다.) 그들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회복 축제’(Celebrate Recovery)(p. 279)라 부르는데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에 퍼져나갔다.
그의 저서들 여러 군데에서 심리학적 모델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삼손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문제점은 ‘상호 의존적’이라고 한다거나, 기드온에 대해서는 ‘낮은 자존감과 심한 불안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등이다. 워렌은 또한 ‘네 종류의 기질’ 이라는 허구적 이론을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성격 유형을 사용하시고 있는 많은 증거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다혈질형이었고, 바울은 담즐질형이었으며, 예레미야는 우울질형이었다. 우리가 열두 제자의 성격 차이를 본다면 왜 그들이 서로 갈등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 320) (강조된 부분은 워렌에 의한 것임)
사람의 네 가지 기질 이론은 고대 신화와 점성술의 열 두 궁좌에 바탕을 둔 신비종교 행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심리학 사전」(The Encyclopedia of Psychology)의 설명을 보자.
하늘이 그 모양을 바꾸어가는 일정한 규칙에 관한 연구는 처음에는 특정 집단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의 전조를 알아내기 위해서 이루어졌는데, 개인의 특성과 생년월일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적 설명은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에 매우 발달했다. 인간의 개성에 관한 천문학적 관점의 핵심은 황도 12궁에 대응되는 12개 유형 체계이다. 이들 12개 유형은 그 안에 3가지 양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희랍 철학자 엠페더클즈(Empedocles)가 말하는 물질의 네 가지 기본요소의 표현으로, 3개의 공기 방식(signs)과 3개의 땅 방식과 3개의 불 방식과 3개의 물 방식이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유형학은 2000년 이상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R. W. Coan, "Personality Types," Encyclopedia of Psychology, Vol. 3., p.24)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Media Spotlight」의 Four Temperaments: As trology & Personality Testing, and Psychology: Science or Religion을 볼 것.)
워렌의 심리학적 편향은 그의 책 전반에 널려있다. 이것들은 그저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는 또한 문법적으로 명백하게 중성인 곳들에서 여성 명사를 사용하곤 한다. 남녀 평등론자의 주장을 부추기는 이러한 행위는 남성중심관을 허무는 것으로 성경의 모범과 상치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워렌이 그토록 관대하게 여러 권의 ‘중성적’(gender-neutral) 성경역본을 사용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남성형 대명사들(he, his, him)을 ‘사람’(person)이나 기타 중성적 용어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 남자로부터 여자가 나왔다는 질서의 문제를 무시하려는 행위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에 워렌이 묵묵히 따라가는 것은 부끄러운 노릇이다.
워렌이 여성의 권위를 드높이는 정도에 비해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해서는 마땅한 존경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키는 영어 대명사들을 대문자가 아닌(He, His, Him) 소문자로(he, his, him) 쓴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역사를 통한 기독교적 전통과 정면 대치되는 것이다. 워렌이 인용하는 현대성경 역본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을 의미하는 대명사를 소문자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영문법에서 대문자가 도입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킹제임스 성경을 출판하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수정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워렌이 대체로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문제의 초점을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그가 취하는 입장을 보면 그가 믿는 것이 인간 본연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던 그 순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목격자로 그 자리에 계셨고 우리의 출생에 미소 짓고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기를 원하셨으며 우리가 태어난 것을 매우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이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면 우리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토록 중요하고 그분이 영원히 함께하실 만큼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신다면 우리가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질 수 있을까? (pp. 83~84) (강조된 부분은 워렌에 의한 것임)
우리는 워렌의 첫 번째 입장, 즉 ‘문제의 초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워렌이 하는 말의 상당부분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에 접근하는 워렌의 방식은 진리를 입증하는데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그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계획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식이다.
상황 vs. 성경
(Circumstances vs. The Bible)
워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같이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성경보다도 우리의 상황을 더 많이 이용하신다고 말한다. (p. 233)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먼저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황을 통해서 뭘 원하시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삶 가운데 닥치는 동일한 상황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동일한 영향을 끼친다.(마5:45)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뜻에 자신들의 삶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경험보다 뒤에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기를 정말로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워렌의 믿음과 맞아 떨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과 더 깊은 우정을 쌓는 첫 단계는 완벽한 솔직함이다. 우리의 잘못과 느낌에 대해서 솔직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벽함(to be perfect)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정직함을 원하신다. (pp. 125~126)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하시더냐?”고 사탄이 이브에게 물었었다.(창3:1)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더냐? 이 문제에 관해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perfect)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perfect).(마5:48)
‘완전하라’(perfect)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에서 온 말인데, 「바인의 신약성경 용어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은 이렇게 설명한다.
1. 텔레이오스(teleios)^5049^ '끝에 다다름‘을 의미함. (telos), '종결된’, ‘전적으로 완전한’. 사용 대상은 (1) 사람에 대해서. (a) 처음에는 물리적 성장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윤리적 의미로 ‘다 자란’, ‘성숙한’의 의미로 사용됨.(고전2:6, 14:20)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때 하나님과 우리 모두와 관련해서 쓰인 단어는 ‘텔레이오스’이다.
물론 ‘완전하라’(perfect)는 말과 우리가 ‘완전해졌다’(perfected)는 말은 다르다. 우리가 죄 없는 몸으로 부활하기 전까지 우리는 완전하게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 우리 관계가 완전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다.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완전함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주고 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하는 것을 받아 서로 꼭 맞게 결합되고 들어차서 각 부분의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주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같이 걷지 말라.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 그들이 감각을 지나쳐 자기를 색욕에 내어 주고 탐욕을 내어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였으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니라. 화를 내도 범죄하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을 한 자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오히려 노동을 하여 궁핍한 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할지니라.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진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4:11~32)
우리가 이렇게 행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할 것이다. 이것은 과연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만약 불가능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절대로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적인 정의에 맞추어 완전해지도록 분투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워렌은 우리가 완전해지는 것을 아예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정직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정직함’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 가운데 속았다고 느꼈거나, 실망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숨기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고백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성숙하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가 외모, 배경, 응답받지 못한 기도, 과거의 상처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바꿨을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분노를 품고 있을 것이다. (pp. 127~128)
워렌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고 그분께서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개념만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성숙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불완전함과 우리의 죄에 대한 핑계거리만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성경말씀과 대치되는 것이다.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지으신 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겠느냐?(롬9:20)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항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릭 워렌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릭 워렌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되는 것은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유익이 거의 없는 워렌의 글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비성경적인 조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바르지 못한 요소들을 못보도록 그 눈을 가려주시면서 바른 요소들을 잘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신의 영적 삶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로 쓴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시험하라.(요일4:1)
왔다가 사라지는 운동들
(Movements Come And Go)
어찌되었건 새들백 현상(Saddleback phenomenon)은 무엇인가 다른 운동이 일어나서 그 자리를 차지할 때 까지는 그 영향력을 계속 증가시켜 갈 것이다. 교회 내에서 주기적으로 새로운 현상들이 일어나서는 기독교계 내에 존재하는 듯이 보여 지는 막연한 불안감에 대한 치료책을 약속하곤 한다. 우리는 약속 이행자들(Promise Keepers)과 캔사스 예언자들(Kansas City Prophets),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 브라운스빌 부흥(The Brownsville Revival), 빈야드 운동(the Vineyard Movement), 은사주의 부흥(charismatic revival), 르노베(Renovar?), 등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났다가 소멸되는 것을 보아왔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다고 약속했었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능에 대한 다양한 계시를 통해서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실 때 우리는 뒤쳐질 것임이 분명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은밀한 형태로 접근했다. 어떤 이들은 좀 더 사색적인 면에 호소했고 어떤 이들은 좀 더 감정적인 면에 호소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빛을 잃고 다른 운동이 그 자리를 대치할 때 기독교 언론매체의 첫 페이지에서 사라져갔다. 요즘에는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철학이 최신 유행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는 아니다. 다른 모든 운동들처럼 이것도 사람의 역사이고 성경과 인간의 지혜를 혼합한, 혹은 성경을 그럴듯하게 모방한 것으로, 인간의 자아에 어필하는 변종 기독교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매우 영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 있고, 누군가가 워렌이 사용하는 성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는 그것이 매우 성경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며, 아주 경건하게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워렌이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많은 세상적 개념을 끌어다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워렌의 시스템을 가져다가 사용하고 있는 일부 목사들조차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필하는 점은 워렌의 글이 성직자가 이끄는 종교 체제를 떠받쳐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계 내에 있는 이러한 모든 운동들을 특징짓는 깊은 속임수이다. 이러한 창녀들의 어미가 바로 로마 카톨릭이다. 그 창녀의 딸들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다시 한번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계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과 함께하는 연합을 추구하는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의 철학이 릭 워렌의 철학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러니 워렌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극찬하는 사람들 모두가 철저하게 에큐메니컬하다는 사실 또한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워렌은 자신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이 사람들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킬(transform)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한 사람들에게 일 이년 후에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고 볼 일이다. 혹 어느 정도의 성장이나 퇴보가 있다 해도 그것이 성경 공부와 기도와 교제와 자기 절제를 통한 통상적인 결과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검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transformed)될지 기다리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것에 대한 검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도 그의 책은 계속해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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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고 / 김진석
릭 워렌은 캘리포니아 주 레이크포레스트 시의 새들백교회의 유명한 목사이다. 그는 “목적이 이끄는 삶” 운동의 주역이며, 수천 명의 목사들과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그의 책과 “목적이 이끄는 교회 성장” 세미나 등으로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제 그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Driven Life>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최신 베스트셀러이다. 또한 2002년 9월에 출간된 후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책을 구입했으며, 수만 개에 달하는 교회들이 이 책이나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활용하여 이른바 “목적의 사십일”이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40개의 장들로 구성된 이 책의 목적은 40일 동안에 인생의 다섯 개의 목적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릭 워렌은 그의 책에서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과 우리가 풍성히 맺는 열매들이 영원히 남을 것임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또한 믿는 이의 삶에서 겸손과 섬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유혹의 실상과 그것을 이기는 영적인 승리를 얻는 방법도 설명하고 있다. 이책에는 이러한 여러 긍정적인 면모가 있지만, 우리는 작가 워렌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영적인 여행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오류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밝혀내고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과 “목적의 사십일” 운동은 그 시작부터 교회통합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워렌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같은 팀에 소속돼 있습니다...목적의 사십일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고, 이는 그 어떤 개인, 교회, 교단보다 훨씬 더 중대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함께 동역하여 ‘우리 세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겨야 합니
다’(행 13:36). 저는 당신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 운동에서 놓치는 것이 없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당신과 동반자로 이 인생의 여행을 함께 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의 목적이 교회통합이라는 것을 전제로두고 있는 것이다. 시작부터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워렌은 다음과 같은 오류들을 그의 책
속에 담아 놓았다.
엉성한 성경 해석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 무오한 지침을 주기 때문에 “영적인 여행”을 떠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릭 워렌은그의 책에서 약 1,200구절의 성경말씀을 인용하였고, 그것이 성경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그러나 워렌은 특정 본문들을 곡해, 오용했고, 자신의 생각들과
신조들을 미리 전제로 내세운 후, 마치 성경이 그의 들러리인 양 성경 구절을 예로 들어 그것을 증명하려 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여러 종의 의역성경들과 번역본들을 인용하지만 참된 성경 본문의 참뜻은 도출해 내지 못했다.
다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특정 성경 본문들을 곡해하고 오용하는 부분들 가운데 일부이다.
“목적을 가지고 삶에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 멋진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신세기역본> 렘 29:11)”(원서 p.31, 번역서 p.40). 워렌은 이 본문을 여러 번 인용하지만, 사실 이 구
절은 성도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 본문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견뎌 내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맡기신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악한 사람을 향해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너는 그대로 그에게 경고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악한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물을 것이다.’(<쉬운성경> 겔 3:18)”(원서 p.283, 번역서 p.370). 워렌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떠맡기시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의 그런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그는 심지어 여호와증인들의 <신세기역본> 에스겔 3:18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에스겔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하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고,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지 않을 시에는 그들의 멸망에 대한 책임이 에스겔이 있게 되리라는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죄를 알고 죄의 결과와 지옥의 심판을 알고 있는 이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주 잘못된 일이지만,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것이나, 복음에 올바로 반응해야 하는 책임은 믿지 않는 죄
인에게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까지는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고 말씀하셨다”(원서 p.283, 번역서 p.373). 워렌은 이 구절을 <신세기역본>의 마태복음 24:14에서 인용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의 주장처럼 교회의 휴거를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일어나야 할 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교회의 휴거 이후 닥칠 7년 대환란 때 있을 일을 말한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하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왕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왕국 복음(천국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오셔서 그분의 천년왕국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영적인 성숙함을 측정하시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의 인간 관계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너의 직업, 예금 계좌 그리고 취미에 대해 이야기 해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보실 것이다(마 25:34-46).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
은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원서 p.126, 번역서 p.169). <신개역표준역본, NRSV>의 마태복음 25:40을 인용한 이 본문은 민족들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일어날 일이며, 이 일이 있은 후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
게 될 것이다. 이 본문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대환란 기간에 믿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게 될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워렌은 고린도후서 5:18을 인용하면서 ‘인간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 했지만, 사실 그 구절은 인간끼리 화해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화해의 직분”을 맡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해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워렌은 초대형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로서 말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경우에 있어서 워렌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먼저 형성해 놓고, 그 후 그의 사상을 지지할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 하는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자신의 생각을 성경으로 뒷받침하려 하니 당연히 말씀을 곡해하고 오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다른 유익한 내용들
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유익한 것들에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은 그것들에 위와 같은 오류가 곁들여져 있어 독자들이 잘못된 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워렌은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교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교리에 대해서는 위의 경우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신학적으로 부실한 목사인지 분명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릭 워렌은 심리학자?
<목적이 이끄는 삶> 전체에 걸쳐, 워렌은 심리학적 논리로 성경을 설명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심리학적 주장들을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닌다...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은 기억에 의해 결국 삶 전체를 허비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성공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하려고 한다”
(원서 pp.27,28, 번역서 p.36).
“자신의 책 <거룩한 길, Sacred Pathways>에서 게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9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고, 감각주의자들은 그들의 감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청각뿐 아니라 시각,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사용하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린다. 전통주의자들은 의식, 성찬식,
상징 그리고 변하지 않는 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금욕주의자들은 고독과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호한다. 행동주의자들은 악과 맞서고 불의와 싸우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박애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 열성적인 사
람들은 찬양을 통해서, 묵상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지식인들은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원서 p.103, 번역서 pp.138, 139).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성격 유형을 사용하시고 있는 많은 증거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다혈질형이었고, 바울은 담즙질형이었으며, 예레미야는 우울질형이었다. 우리가 열두 제자의 성격 차이를 본다면 왜 그들이 서로 갈등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사역에 있어서 ‘좋고’ ‘나쁜’ 성격이란 있을 수 없고 교회의 균형과 맛을 내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성격이 필요하다”(원서 p.245, 번역서 p.320).
“우리가 현재의 모습(SHAPE)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시도할 때는 동그란 구멍에 네모난 못을 억지로 박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힘들기는 하고 한정된 결과만을 보게 될 것이다. 시간과 재능, 에너지의 낭비인 것이다. 우리의 삶을 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재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즐기고, 그것을 최대한 발전시켜야 한다”(원서 p.249, 번역서 pp.325,326).
위와 같이 워렌은 심리학적인 원리들과 이론을 조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의적인 이해를 도출해 냈다. 인본주의적인 심리학적 원리들에 대한 이해를 성경 본문들로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성경보다도 심리학이 우선이다. 성경으로 심리학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으로 성경을 판단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 방법은전혀 건전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행에 아무런 길잡이가 될 수 없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어야 하며, 워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심리학의 들러리로 세우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고 / 한승용
그릇된 안내자들그리스도인이 영적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신앙 여정을 인도해 줄 이를 택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는데 길을 모르는 사람을 안내자로 삼으면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돈도 힘도 바닥나는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길을 잘
아는 사람을 따라가면 여행이 즐겁고 힘도 돈도 절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워렌은 <목적을 이끄는 삶>의 독자들을 이끌 영적 안내자들을 선정하는 데 있어 큰잘못을 범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안내자가 될 수 없는 이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본을 따르라고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이다. 진리와 무관한 ‘유명한’ 이들을 이용해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려 했던 것인데, 그가 영적 안내자로 내세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C. S. 루이스 - 루이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그는 성경을 믿지 않고, 잘못된 구원관을 가진 거짓 교사였다.
로렌스 -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자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일에 대해 저술했고, 더 고상한 형태의 기도를 주창했다.
마더 테레사 - 작고한 카톨릭 수녀로서, 구원받지 않은 죄인으로 임종의 순간까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타인에 대한 섬김과 희생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거라는 착각으로 인생을 허비했다.
빌리 그래함 - 한때 세계를 누비던 부흥사였지만, 로마 카톨릭의 사주를 받고 그들과 손잡은 배교자이다. 모든 종파와 이단과 카톨릭을 포용하여 기독교 내에 거짓 교리를 들여오고, 성도를 오도하는 데 있어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앨더스 헉슬리 - 의식의 확장을 위해 메스칼린이라는 흥분제 사용을 지지하는 연구물을 출판한 영국 작가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 20세기 자유주의신학을 선도했던 인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로 잘 알려져 있다.
마담 구봉 - 17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카톨릭 신비주의자
아나이스 닌 ? 20세기 에로 문학의 선두에 섰던 여성우월주의 작가
윌리엄 제임스 - 절대 진리란 없음을 주장하여 미국의 종교 자유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한 인물로, 19세기 종교 철학 및 심리학자이자, 실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를 옹호했다.
헨리 나우웬 - 로마 카톨릭의 사제요, 또한 교회통합론자, 교육가 그리고 심리학자였다.
로마 카톨릭에 심리학을 도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보다시피, 워렌이 제공한 안내자들은 세상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행에는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해를 주고,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는 죄인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행에 안내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이 말씀을 사랑하는 구원받은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걷는 길의 빛으로 삼아 우리를 안내하는 신실한 목사와 교사들을 통해 올바른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워렌처럼 세상적인 관점으로 찌들은 이들을 안내자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길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이니라』(잠 14:12).
결론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나오자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 국내의 유명한 목사들도 한 마디씩 거들어 판매량에 영향력을 주었다. 책을 소개하는 이들은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 도움을 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독자가 그 책을 통해 우리를 만드신 하
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어,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고,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며,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영원을 준비하게 된다고 릭 워렌의 말을 빌어 광고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그런 효과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워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종종 성경을 곡해하고, 신뢰할수 없는, 인본주의적 심리학적 원칙들을 성경의 진리와 결합시키고,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거룩함과 성경적 성별을 사랑과 연합보다 못하게 여기고, 믿음의 원수와
같은 죄인들을 영적 여행에의 긍정적 기여자들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책에 몇 가지 유익하고 성경적인 내용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영적 여행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는 책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들을 봐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주님을 위해 장차 귀하게 쓰임 받
을 크리스찬 학생들은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목적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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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의 근원
<바이블파워>는 ‘북 리더’ 코너에서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그것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성토한 바 있다. 저자 릭 워렌은 그의 저서를 바탕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캠페인을 펼치고 있으며, 그의 교회와 여러 교회의 성공 사례를 들면서 그 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한국 교회는 이미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버렸고, 이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프로그램을 실시해 교인들을 잘못된 목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들은 참된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 주님이 원치 않는 다른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릭 워렌의 저서가 비성경적이고 배교를 조장한다는 사실은 본지의 ‘북 리더’ 코너에서 검토해 보기 바란다. ‘뉴스의 현장’에서는 그가 펼치는 40일 캠페인의 중독성에 대해 밝히고, 그에 대한 ‘해독’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중독이란 ‘생체가 음식이나 내용(內用)·외용(外用) 약물의 독성에 치여서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연탄가스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등 이름만 들어도 ‘중독’은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현실요법’이라는 정신치료 심리요법의 창시자인 윌리엄 글라써(William Glasser)의 “긍정적 중독”이다. 그의 이 이론은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과 같은 부정적 중독이 중독에 걸린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회에도 악으로써 기능하는 것에 반해, 달리기나 명상으로 대표되는 긍정적 중독은 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함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바람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윌리엄 글라써는 긍정적 중독 상태에 이르기 위한 여섯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중독에 이를 수 있는 활동은 스스로 선택하고 매일 1시간 정도 투자할 수 있으며 경쟁적이지 않은 일이어야 하고, 둘째,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며 잘하기 위해서 많은 정신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은 일이어야 하며, 셋째,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야 하고, 넷째, 활동이 본인에게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일이어야 하며, 다섯째, 본인이 향상될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나아진 정도를 느끼고 알 수 있는 일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 활동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는 이 긍정적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곧잘 눈에 띈다. 특히 조깅과 명상의 경우가 그러한데, 조깅광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태풍이 부나 정해진 코스를 안 뛰고는 못 배기고, 단전호흡, 뇌호흡에 빠진 이들은 하루라도 짬을 내어 수행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긍정적 중독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부정적 중독과는 달리 개인과 주변에 생산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긍정적 중독은 단기간에 익숙해지고 빠르고 강렬한 쾌락을 주는 부정적 중독과는 반대로, 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특징이 있어 긍정적 중독에 빠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 빠지게 되면 ‘성가신 불안, 죄책감, 불편한 감정’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긍정적 중독이며, 이것이 바로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덫’이다. 긍정적 중독도 중독이며, 그것은 부정적 중독의 부정적 이미지를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캠페인은 바로 이 ‘긍정적 중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누리신문> 574호(2005년 12월 18일)에 보면, ‘온누리 회복축제’에 주강사로 참여한 아치볼드 하트(Archibald Hart)의 ‘크리스천의 긍정적인 중독’에 관한 “충격적인” 강연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기사를 인용해 보면, 그는 강연 도중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라.’(빌립보서 4장 8~9절)[이상 '한글개역성경'] 이러한 말씀이 기초가 될 때 긍정적 행동양식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님은 제 제자인데, 저에게서 긍정적 중독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갔습니다. 릭 워렌이 발표한 기가 막힌 것이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원칙은 우리가 좋고 유익한 것을 40일 동안 계속 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양식을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9절 말씀입니다. “본받고 행하라” 이것이 긍정적 중독에 대한 모든 내용입니다. 릭 워렌의 원칙을 따라해 보기 바랍니다. 장담하건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고자 하는 판단과 마음이 움직여질 것입니다. 긍정적 중독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습관입니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바로 ‘긍정적 중독’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스승 아치볼트 하트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주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라 윌리엄 글라써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을 교회 활동에 적용시킨 결과물일 뿐이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각종 심리학 이론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심리학적 기법을 도용해서 사역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위에서 오는 지혜’가 아니면 절대로 주님을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주님과 관계없는 사역은 ‘심리학자의 지혜’를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운영해 갈 수 있다. 주님은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시고 또 기쁘게 드리는 자를 사랑하시는데도,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 중독된 이들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의무적으로, 안 하면 불편하고 답답하니까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주시해야 하며, 교회 내로 들어온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이론과 활동들을 간파해 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가져온 현실적인 폐해는 무엇인가? 그가 가진 무엇이 한국 교회를 또 다시 영적 암흑시대로 ‘이끌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뤄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