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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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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성령을 제한하지 말라
lhyunsik
2005-12-10
1. 성령충만 :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 요건(엡 5:18)
- 이준승 목양자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함의 진정한 의미와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는 상반되고, 잘못된 성령 충만의 개념을 가진 자들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충만함을 받으며, 그 충만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함께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I.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의 바른 정의
에베소서 5:18 말씀은 술과 성령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술과 성령 중 어떤 것에 의해 영향, 혹은 통제(지배)를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술이 함유하고 있는 알코올의 지배를 받느냐 성령님의 충만을 통해 성령님의 통제를 받느냐 하는 문제를 대조시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고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이를 지배하는 동기나 원인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5:18에서 술이라는 대조물을 통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술을 마신 사람이 그 술이 함유하고 있는 알코올 성분의 지배를 받듯이 성령 충만함도 성령님의 인격과 성품의 통제 또는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술의 영향력과 지배 하에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되듯이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성령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도 자신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이상하거나 비정상적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 곧 자신의 옛 사람이나 자아, 혹은 구원받기 전에 지녔던 옛 사람의 방식(사고, 행동, 경험)의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바르게 정의하자면, 자신에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하던 어떤 것(옛 사람)이나 육신의 지배를 받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고, 자신에게는 자연스럽지 않는 성령님의 전인적인 통제와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관찰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술 취한 사람은 자신이 평상시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알코올에 의해 지배를 받아 자신이 하지 않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의 이성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알코올에 의해 영향받은 대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진다는 것(성령 충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듯이, 성령 충만은 자신의 감정으로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성경적 의미의 성령 충만함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하던 옛 사람의 행습을 좇아 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창조되어진 새 사람의 영, 곧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7은 구원받았을 분만 아니라 성령충만함을 받는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같이 걷지 말라.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 그들이 감각을 지나쳐 자신들을 색욕에 내어주고 탐욕을 내어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였으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
골로새서 3:9하-10절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아주 명확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옛 사람과 그 이전 행실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동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고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전에 자신의 옛 사람을 좇아 행하던 이전 행습들을 버리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으로서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분의 통제와 지배를 받아 행보(行步; walk)하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에는 구원받기 전에 하던 방식대로 자신에게 늘 자연스럽고 익숙한 습성을 따라 행하지만,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자신 안에 창조된 새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이 말씀 중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구절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KJV에서는 "I AM crucified..."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동태입니다. 이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과거에 바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계속 못박혀 있고 앞으로 계속해서 못박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함축적 의미를 바울 사도는 바로 그 다음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바울 사도의 이러한 고백이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처형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모든 애착(affection)을 하늘에 두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갈라디이아서 5:24-25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이러한 성경의 예들을 통해 볼때, 성경적이 말씀하시는 성령충만함은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재인식하고 자신을 매순간마다 성령님께 내어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성령님을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성령 충만함을 입는 것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엄밀히 말해서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정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입는 것은 기도,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이나 성령님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후 성령 강림과 함께 그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을 받자 마자 그들은 곧바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고린도전서 12:13 말씀에 명시되었듯이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시키는 성령님의 침례이며,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이러한 성령님의 침례를 받게 됩니다. 이 성령님의 침례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영적인 연합 과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아 예수님의 영적인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의 성령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침례를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지 성령님의 충만함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 1:17의 경우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믿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나 이를 위해 기도한 예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는 지에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방법대로 잘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1. 성령님으로 충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상기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적 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의 옛사람을 좇아 늘 행하던 행실이나 습성을 벗어버리고,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제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므로 강압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을 그분께 자발적으로 내어드리는 자를 주관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 곧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령님의 뜻은 성경에 모두 계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뜻은 자신의 저서인 성경 말씀에 결코 위배되는 바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꿈이나 특별한 계시를 통해 성령님을 뜻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거나 주장하는 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법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방법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자신을 뜻을 성경에 다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와같이 기록된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며,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를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경험적인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13절과 요한복음 17: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성령님은 결코 자신이 저서이신 성경 말씀에 결코 상반되거나 위배되지 않게 행하시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옛사람에 따른 정욕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행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드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다는 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인 것이다.
플레루스테(plerousthe) - 현재 명령형. 현재 시제는 시간 개념을 나타내며, "계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행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니 순간 순간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믿음의 행보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과 자신의 옛사람에게 숨쉴 틈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바쁘고, 복잡하고, 유혹거리가 도처에 늘려있는 세대에서는 잠시라도 방심하게 되면 마귀와 죄의 덫에 걸리고 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방심하는 그 순간 십자가에 처형된 채로 죽어 있어야 할 옛 사람이 다시 일어나 활보하게 되고,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마다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을 따라 '걷다' 또는 '행보하다'(walk)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걷는 걸음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발을 땅에서 떼고 앞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한 발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절대적 신뢰와 의뢰를 바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성령 안에서 믿음의 보행(步行)을 한다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보행한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성령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갈라디아서 5:16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25은 이를 더 세부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갈라디아서 5:25에 명시된 "성령 안에서 살라"라는 말씀이 다소 소극적인 명령인데 반해, ?성령 안에서 걸으라?는 말씀은 한층 강도있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걷는다는 것은
이전에 좇아 행하던 옛 사람과 그 애착과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고 성령 안에서 행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매 순간의 행보를 성령님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기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매순간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드리고 실제적인 순종의 삶이 참된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성령 충만하지 못하거나 혹은 성령 충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과실이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성령으로 충만하라, 곧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간과하지 마십시오. 성공적인 그리스도의 삶은 성령님을 의지하여 그분께서 항상 지속적으로 그 자신을 통제 혹은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3. 성령 충만은 명령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에의 순종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마귀에게 틈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유는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고(고후 5:14),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요 14:21, 23).
4. 성령 충만은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진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고조되거나 뭔가 느껴지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으로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려 풍성히 거하게 할 때에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을 다루고 있는 에베소서 5:18-21 말씀과 말씀으로 충만해졌을 때의 나타나는 모습을 다루고 있는 골로새서 3:16-18 말씀을 대비하여 살펴봅시다. 두 대비되는 구절들에서는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와 말씀으로 충만할 때에 정확히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합니다.
둘째, 마음 속에서 은혜로 노래합니다.
셋째,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넷째, 서로 복종합니다.
말씀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결과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결과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우연한 일치란 없습니다. 또한 성경의 한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일 또한 위험합니다. 여기서의 일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자 하신 바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이러한 특징 이외에도 우리는 갈라디아서 5:22-23에서와 같은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에서 볼 수 있는 내적이고도 인격적인 열매와 더불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게 되는 구령의 열매도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자신의 문제 거리에만 집착하지 말고 순간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을 통하여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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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령을 제한하지 말라
- 이준승 목양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시느니라"(엡4:30)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4:16-17).
요즈음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삶은 성령님을 근심으로 인해 슬퍼하시도록 만드는 처사이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각 그리스도인들이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한될 수 있으신지, 그리고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좇아 그분의 생명과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삶이 과연 어떤 삶인지에 관해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새롭게 창조하신 목적이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I.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을 구원하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 이유를 에베소서 2:10과 디도서 2:14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고,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그분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속하사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개개인에 대한 창조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각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신 이유는 오직 그분의 영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신자들에게 계시하시고, 바로 각 신자들이 그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그분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께서 각 신자들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힘으로 그분께서 뜻하시는 바를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살피시느니라...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취하시고자 그들을 찾아가셨다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밝히고 있습니다(행 15:14).
그런데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 많은 신자들이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적이며, 방종적인 삶은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억누르고, 근심시키며, 그분의 모든 역사가 제한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에게 각각 해당하는 목적과 뜻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고 그분의 뜻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각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각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우리는 원래 개와 같은 이방인이었으나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부르시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요 영광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내기를 원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첫 장에서 무려 세 차례나 열거함으로써 우리 신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강하게 피력하고자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친히 우리를 받아 주시는 은혜, 곧 자신(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6).
먼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려고 신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아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또한, 아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려고 신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영(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증이 되사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을 받기까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엡1:14)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고 신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양이 되게 하기 위해 부르셨으나 그들은 실패하였고, 대신 새로운 경륜의 세대, 곧 교회 시대를 여심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의하여 명심해야 할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우리 신자들의 언행과 행실 하나 하나가 그분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각 신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었다가 대신 사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5에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한 어조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잇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 우리는 그 새 생명을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안위 또는 육체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과 뜻에 부합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 일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각 신자들이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더러움이나 죄를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한 영이시므로 죄와 더러움이 있는 곳에서는 역사하실 수 없고, 그분이 하시는 사역에 제한을 받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저서인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일로 어떻게 제한을 받으시는 지를 성경의 곳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성령님이 어떤 일로 어떻게 제한받으시는 것일까요?
II. 성령님이 언제, 어떻게 제한을 받으시는가?
가. 성령의 전을 더럽힘
각 신자들은 주님의 몸을 구성하며, 그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聖殿)이 되는 데, 이 전(殿)이 각 신자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16-17과 6:15-20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인 신자들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시도록 하려면 먼저 그 몸의 각 지체인 신자들은 자신들을 성별함(Santify)으로써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 두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신자의 몸이 거룩하게 보존되기를 원하십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의 보혈로 사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몸의 오용과 악용과 남용으로 인해 성령님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죄와 정욕과 세상의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로 채워져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자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몸을 더럽고 냄새나고 세속적인 것들에 노출시키고 상업화시키고 있습니다. 몸을 세상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거룩히 구별하여 그분께서 거하시는 성전이요,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그릇으로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오락과 만족과 쾌락을 위한 도구로 내어주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몸은 이제 술과 흡연과 약물과 상업적 모델 광고와 춤과 쾌락과 온갖 세상의 잡동사니들이 뒹구는 쓰레기장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외모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외모를 좋게 하여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이나 성적 매력을 어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형 수술이 대단히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취하시지도 않으시고, 외모를 존중하시지도 않으시며, 오직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신자들은 그 몸을 세상과 정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도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롬 6:11-13).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로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우리 몸 안에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6:12-13과 8:13, 그리고 고린도전서 6:13하에서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하여금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제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지 아니하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있는 한 몸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한 지체가 죄와 더러움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더럽혀집니다. 전도서 9:18의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파괴시키느니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신자는 개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임 점을 고려해 본다면, 결코 독립적인 것이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연합된 유기적인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행동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신자는 성령님께서는 죄와 정욕,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거하는 곳에서는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실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하여 자신들을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로서 매순간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구별(성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권고하기를,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 12:1하)
고 했으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라."
나. 성령님을 근심케(슬프게) 함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라"(엡4:30)
성령님께서는 인격이시므로 신자들의 말과 행동이 성령님을 근심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슬프게 한다'는 단어는 'grieve'로서 '근심케 하거나 상심할 정도로 슬프게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의 문맥을 보면 신자들의 말과 행동이 성령님을 근심케 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에베소서 4:25-31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거짓말, 화, 도둑질, 부패한 대화, 원한, 분노, 진노, 소리지르는 것, 비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는 거듭난 신자들에게는 합당하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성령님께 얼마만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릴 적 어머니를 근심케 한 적이 있음을 기억날 것입니다. 사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45절 하반부에서 "사람의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화나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잠언 23:7에서도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한 대로 그 사람도 그러한즉"이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들이 얘기하는 대화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며,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알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나 대화나 행동을 성령님께 큰 슬픔의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잠언 6:16-17 에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와 가증히 여기시는 일곱 가지가 있는 데, 그것은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와 흘리는 손과 사악한 꾀를 꾸미는 마음과 신속히 해악으로 치닫는 발과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에 불화를 뿌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주목해 보면, 도둑질과 거짓말과 속이는 일은 같이 나열된 경우가 많습니다. (레위기 19:11 참고 바람).
반면에 신자들이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곧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에 허위나 위세의 가면을 벗고 진실함과 상냥함과 성실함으로 일에 임하거나 다른 이들을 대하게 됩니다. 결코 자신을 과장하거나 자랑하지 아니하며,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혀의 가능함과 악독함과 그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성경은 곳곳에서 말씀합니다. 특히 야고보서 3:2-12에서는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를 내며, 단물과 쓴물을 함께 내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신자가 한 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한 쪽에서는 비판하고 불평하고, 부패한 말을 입에 올리고, 거짓말로 속인다면, 분명 성령님께서는 대단히 근심하시고 그 신자로 인해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다시 그분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먼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혹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입술은 어떤 대화의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혹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거짓 증거하거나 험담하거나 냉소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다윗 왕은 시편 39편 1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길을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사악한 자가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재갈을 물려 내 입을 지키리라, 하였도다."
우리가 성령을 계속 근심케 한다면, 그 근심은 괴로움(Vexation, 분함과 속상함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변하게 됨을 우리는 이사야 63:10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
이 구절은 성령을 괴롭히는 뿌리는 계속적인 반항 혹은 반역임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런 반역은 불평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훈계와 경고를 위해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사람이 풍성한 빛과 지식과 함께 많은 축복을 받고도 악을 수행하면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성령님께서는 오래참으심을 통해 회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거듭 경고도 해주시지만, 만일 계속해서 이를 무시한다면, 성령을 괴롭게(vexation)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해서는 안되며, 더더욱 그분을 격분하실 만큼 상심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순종해야 합시다.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아들입시다. 우리의 길을 버리고, 성령님의 뜻을 좇으십니다.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립시다.
다. 성령님을 억누름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억누르다'라고 번역된“?quench"라는 단어는 '불에 찬물을 끼얹어 전소시키다', '억누르다', '갈증을 가시게 하다'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나 거역이 그분의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역사가 제한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므로 우리가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기쁨과 감사와 기도의 삶을 잃어버릴 때 성령님의 역사는 제한됩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분을 다시 밖으로 완전히 내몰아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소멸시키거나 없애버린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개역성경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라고 번역했는 데, 이것은 교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결코 소멸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억누르다'라는 표현은 그분의 뜻을 저항하거나 거역할 때 그분이 역사하시는 데 있어서 제한을 당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마치 우리의 숨이 질식되고, 불길이 물에 의해 전소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호소하시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그분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역에 드리기를 원하시거나 선교사로 부르실 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말씀을 통해서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든 우리가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뜻을 거역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반대로 그분이 하라고 명령하실 때에도 거역하거나 타협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성도들이나 사역에서의 성령의 나타나심이 제지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도 제지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호소하는 것을 침묵시키거나 성령님의 감동을 억누르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말씀이나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성령님께 복종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전소시킨다면, 차디찬 재만이 남게 될 것이다.
III. 성령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유명한 음악가이며 작곡가인 멘델스죤에 관한 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멘델스죤이 큰 성당을 방문했었는 데 그곳에는 전 유럽을 통해 가장 귀중한 오르간(organ)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잠깐 동안 그 성당의 반주자의 연주를 듣고 있다가 강단 위쪽에 있는 오르간 쪽으로 올라가서는 그 반주자에게 자기가 한 번 연주해 봐도 좋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반주자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요. 그리고 이 오르간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저명한 음악가인 멘델스죤은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르간을 칠 수 있도록 그 오르간 연주자를 설득시켰습니다. 멘델스죤은 오르간에 앉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그의 발은 밑에 있는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 큰 성당은 그 오르간 연주자가 전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음악소리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의 손을 멘델스죤의 어깨에 올려놓고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멘델스존'이라는 아주 짤막한 한 마디의 대답만 했습니다. 오르간 반주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말했습니다. "나같은 늙은이가 멘델스죤 같은 휼륭한 분을 몰라 보고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생각해 보면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만일 주님의 손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건반 위에 닿도록 우리가 해 준다면, 주님은 우리가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이 천상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권리나 특권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억눌러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게 될 것이고,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할 그분의 생명과 성품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생명은 냄새 나는 육체의 악취만 풍겨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정함과 불법과 거역과 육신의 정욕과 방종으로 인해 결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전을 더럽히고, 그분을 근심케 하고, 그분을 억누르게 하지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 드리고(성령 충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흘리신 보혈을 통해 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고귀한 목적과 뜻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그분의 이름이 드높여지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을 깨끗이 하고 성령님의 뜻을 위하여 선한 도구로 자신을 드림으로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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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 이준승 목양자
성령님에 대한 이단적 견해가 만연한 현대교회에 성경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조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침례나 축도 시에 아버지, 아들 하나님과 나란히 같은 위상에서 언급되어지며(행 5장; 마 24장 - 호칭도 ‘그것’ 등의 사물로 지칭되지 않고 오직 인격적인 대명사, ‘그분’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은사주의’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성령님을 단지 어떤 능력을 주는 ‘영향력’으로 보는 것은 많은 혼란을 야기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신비적인 체험만으로 또는 지식으로의 분별만으로 인도하시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와 그리스도의 탄생, 구속사역, 구원, 부활 등에 역사하셨으며, 이는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에 서로 모순됨 없이 조화롭게 역사 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 위로 받고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조명해 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실까요?
첫째,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 16:13).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은 진리를 알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결코 말씀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환상, 꿈, 응답 등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날 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 계획, 응답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므로(요일 5:6; 고전2:13),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분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인격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십니다(요 14:26).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십니다(요 15:26).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요 16:13-15).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매순간,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까?
셋째,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요 14:26).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실 때, 또 다른 위로자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조, 성육신, 죽으심, 부활 등과 같은 대표적인 사역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책망하시는 사역을 하십니다(요 16장). 즉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생활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여 행하시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의 영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장하십니다(롬 8:16-17). 그리고 우리를 인쳐 주십니다(엡 1:13-14; 고후 1:2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로 약속과 미래의 영광의 보증으로 인쳐 주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치 아니할 때 성령님은 질식당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딛 3:5).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을 자신으로 충만하게 하시며(엡 5:18),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인도하시며 예비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평안케 하시고, 또한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십니다(갈 5:16).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진리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부활하게 하십니다(롬 8:11). 예수님을 살리신 그분께서 우리도 썩지 않을 몸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 충만과 그분께 내어드림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드리는 가운데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맡겨진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순간순간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분을 기쁘게 하기 원하십니다. 먼저 작은 일 가운데 신실하고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은 큰 일도 맡기십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살전 5:19). 성령님을 무시하거나 거역하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엡 4:30; 사 63:9-10).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인도하심 앞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성령님 안에서 걸어가십시오. 성령님으로 충만하십시오. 성령님과의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능력과 숭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