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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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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성공적인 결말을 위한 처신 ( 임동선 목사 )
lhyunsik
2005-12-09
임동선 목사
딤전6:3-21 성공적인 결말을 위한 처신
성공적인 결말을 위한 처신(딤전6:3-21)
들어가는 말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배 사역자로서 후배인 디모데에게 사역자로서 꼭 필요한 몇가지 것들을 충고합니다. 이 충고들은 다 디모데를 사랑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디모데가 이 충고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굳게 거한다면 그의 사역은 성공적인 결말을 맺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한 교회의 목양자이며 주님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사역자에게 이 특별한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오늘 여러분 앞에 소개하는 이유는 적어도 주님의 교회에서 사역자가 이런 자세가 될 때, 목회의 결말이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사역자가 일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돕는 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교회가 소수의 몇몇 목사님들의 힘으로 움직여지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는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들의 참된 헌신과 수고로 움직여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교회에 대한 책임은 목양자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을 함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동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모두 명령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언가를 피하라고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가야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네 번째는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종적인 순간까지 디모데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인시키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피하라, 추구하라. 싸우라, 지키라의 순서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피하라(딤전6:11)
1)피하라는 의미
가장 먼저 디모데에게 주는 충고의 명령은 "피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달아나라" 혹은 "도망쳐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목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려고 한다면 목사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들 가운데 거하라...."(딤전4:16a).
목양자를 포함해서 주님의 일을 맡아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라고 시작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거짓 목사들은 달아날 줄 몰랐습니다. 거짓 사역자들은 도망칠 줄 몰랐습니다. 거짓 일꾼들은 피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피할 줄 알았습니다. 달아날 줄 알았습니다. 도망칠 줄 알았습니다.
어느 때 도망친다는 말은 비겁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많은 방해를 받았으며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 "내가 이르기를 어찌 나 같은 자가 도망하리요?"(느6:11)라고 말하면서 비겁하게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도망친다는 말은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요셉은 함께 눕자고 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손에 자기 옷을 버려 두고 도망쳤다고 했습니다(창39:12). 죄악의 자리를 피해 달아났던 것입니다. 범죄할 수 있는 순간을 피해 도망친 것입니다.
사울이 시기심으로 인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쳤습니다(삼상19:10). 그러나 그것을 결코 "비겁한 행동이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거기 그대로 있다가 죽는 것보다 피하는 쪽이 훨씬 지혜로웠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싸워 그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2)거짓 교사들과 그 가르침을 피하라
그러면 디모데가 피해야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거짓 교사들의 죄들로부터 분리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다른 식으로 가르치고 온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이 생기며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3-5).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5)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게 주는 말이었습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함께 눕는 것을 싫어해서 달았났던 것처럼 거짓 교사들과 함께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달아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온전한 말씀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 인해 생기는 것들은 온갖 악한 영향력이었습니다. 교만, 논쟁, 말다툼, 시기, 다툼, 욕설, 악한 추측, 마음의 부패, 비진리, 비뚤어진 언쟁...그 열매가 그들이 얼마나 바르지 않은지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르지 않은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개인적인 편견이나 육신적인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백인이 흑인을 아무 분명한 이유도 없이 싫어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편견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떤 선비들이 명나라는 무조건 큰 나라로 생각하고 섬기려고 했던 것도 편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편견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편견이나 육신적인 생각에 젖지 않습니다. 성경의 강한 확신을 통해서만 가르치고 성경과 일치 않는 어설픈 교리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교회나 책이나 모임으로부터 달아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 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3)세상(특히 물질)을 따라가는 것으로부터 피하라
또 하나님의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도 달아납니다. 공수래 공수거라는 것을 압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압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음으로 인해 족하게 여길 줄 압니다.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것이 시험과 올무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다가 오히려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굳게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자리나 기회를 피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재물을 따라가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재물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열매맺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욕심을 자극하는 것들로부터 피해 달아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6장 이것들 앞에 제시된 9-10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돈을 탐내는 것" 등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2.추구하라(딤전6:11)
두 번째로 제시된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추구할 것이 좀 많습니다. 여섯 가지 정도나 됩니다.
1)의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사람이 행해야 하는 마땅한 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아 보이고 칭찬듣는 선행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불의로 판명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보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행동들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 위선이나 가증한 것으로 판단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생명으로 행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주님은 영광받으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이 그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겨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아무 이름으로도 그분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입은 옷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복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라는 것입니다(딛2:12).
2)경건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경건을 말합니다.
"오직 너는 속되고 헛된 말장난을 피하라. 그것들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나아가느니라."(딤후2:16)
여기서 "피하다"라는 말은 "싫어하다." "꺼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 중에 나타나는 헛된 말장난, 속된 이야기들은 경건에 절대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건치 아니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무엇이라 말합니까?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6:20)
디모데에게 속되고 헛된 말장난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경건한 생활에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속되고 헛된 말장난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하는 어떤 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킬 수 있는 거짓 교리들에 관한 말입니다. 후매네오와 빌레도가 이런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하여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가르침, 하늘의 왕국은 너희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도 타락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가르침, 침례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 은혜로만 구원된다고 하면서 어떤 행위적인 요소들을 자꾸만 가미하려는 것들...이런 것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우리의 믿음들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3)믿음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실함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모습 중에 하나로서 개역성경에 "충성"이라고 소개된 것은 사실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 주님을 향한 신실함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다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시험에 빠져서 헤맬 때에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습니까?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의심하였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라는 소리를 주께로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순간 다시 바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늘 주님을 향해서 바라는 마음,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즐겁고 유쾌한 순간에도 그분을 잊지 않습니다. 그 자신을 건지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늘 동일한 마음을 품는 사람은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4)사랑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 같은 희생의 사랑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니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주님의 일꾼들이 반드시 추구해야만 할 덕목이었습니다.
5)인내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쉽지 않은 상황들이 많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의 목회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도 이 길을 가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단 한번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마치 외줄을 타듯이 그런 모습으로 지나온 시간들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으며 더 이상 주님의 교회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6)온유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목양자는 폭군이 될 것입니다. 독재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온유는 신사적인 것을 말합니다. 품위 있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격한 태도를 보이면 실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양들이 이리인 줄 알고 놀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온유함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그릇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그들을 바로 권면하고 지도할 수 있습니까? 온유한 영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라."(딛3:2)
3.싸우라(딤전6:12)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화평이 덕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롬12:18). 그런데 싸우라니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봅시다. 그의 말년 고백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딤후4:7)
바울은 이 싸움에서 이기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는 어떤 내용들을 믿지 못하도록 훼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화나 이야기, 책들을 주의 깊에 보시고 자녀들에게 보여줄 때도 바르게 이해시켜주십시오. 왜냐하면 성경과 다르게 왜곡시켜서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지거나 써진 것들도요...
또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아주 유식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철학과 사상의 교육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그 철학 사상의 일종으로 생각게 한다든지, 오히려 다른 미신의 일종으로 전락시키는 교사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많은 재물을 탐하는 마음들, 이 세상의 염려들, 쾌락들, 아주 많은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방해로부터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염려를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재물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쾌락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의 싸움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한가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딤전6:12, 19).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생명과 앞으로 오는 때를 바라보고 가는 것만이 이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와 많은 적들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그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을 지켜보시는 것에 대해 알았습니다. 조금도 그가 믿는 바에 대해 굴하지 않고 성경대로 당당하게 대적들 앞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과학을 따라가고, 사상을 따라가고, 물질을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믿음에 관하여 잘못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싸움에서 넘어지고 패잔병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엉망이 되었으며 주께로부터 버림받아 보상을 받게 될 기회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알 것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왕관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을 위해서 의의 왕관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음을 지킨 모든 자들은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왕관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왕이며 주라는 사실 앞에 모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시라고...그러므로 어떤 세상 임금 앞에서도 무릎꿇지 말고 앞으로 오는 왕을 기다리라고....앞으로 오는 때(the time to come)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통해 오는 때입니다. 그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할 것도 없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간다면 바울의 최후 고백처럼 의의 왕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4.지키라(딤전6:20)
끝으로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를 신뢰함으로 디모데에게 맡겼던 일들입니다. 그것들을 지켜줄 것에 대해 바울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복음을 바울에게 맡겼습니다(딤전1:11). 바울은 다시 그것을 디모데에게 맡겼습니다.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디모데는 그것을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딤후2:2). 그리고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라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복음을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를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헛되고 속된 말장난이 유행한다 하더라도, 과학과 기타 여러 가지 반론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맡은 것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말며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결론
한마디로 바울은 디모데의 사역이 성공적인 결말 맺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를 향해 충고하는 바울의 심정은 주님의 일꾼된 우리들을 향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공하는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가 많아지고 덩치가 커지고 좋은 위치를 점하는 그런 교회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앞에 반듯한 교회와 사역자들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교리와 이세상 재물의 염려를 피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의와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경건과 그리스도만 바라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희생적 사랑, 그리고 어떤 경우에라도 인내하며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옳게 인도해줄 것을 추구하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또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바랬고 주님께로 받은 것, 바울에게로부터 전해받은 것, 곧 복음을 사수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충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한가지 사실만 기억합시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역, 생애가 주님만날 때,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나길 바라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