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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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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어떻게 동역자와 장로가 되며 그 책임을 이행하는가
lhyunsik
2005-12-01
[도서] 어떻게 동역자와 장로가 되며 그 책임을 이행하는가
저자 : 위트니스 리
1. 장로의 의의
장로란 무엇인가?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로서… 단지 나이가 들고 당신보다 연령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당신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는 사람이다. 가령 동생이 형을 「큰형」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그가 나와 똑같고 동일한 생명을 가졌지만, 나이가 나보다 좀 많고 나보다 좀 나은 어떤 면이 있다는 것이다. … 교회 가운데서 장로는 반드시 그의 일생에서 젊은 형제자매들보다 더 많은 것을 버렸고 포기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웟치만 니 전집 3집 15권, 240-241쪽)
장로에게는 감독의 책임이 있으며, 형제자매들 뒤에서 그들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로가 될 수 없다. … 장로와 젊은 형제는 하나의 사탕수수로서, 젊은 형제 자매들은 사탕수수의 윗부분이고 장로들은 사탕수수의 밑부분으로 그 맛이 훨씬 좋다. 그러나 이 말은 나는 사탕수수이고 당신은 나와 생명조차 다른 보리짚이라는 말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2. 장로의 일
< 감독 >
장로가 하는 일은 바로 감독하는 것이다. 원문에서 「감독」은 오버사이트(oversight)로서, 높은 데 처하면서 아래를 지켜본다는 뜻이다. 당신은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고 있는 일을 지켜보며, 그들은 당신의 눈을 속일 수 없고, 일단 그들이 움직이면 당신은 즉시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거나 말썽부리거나 죄를 짓거나 할 때, 당신은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성실하지 않거나 재물을 탐내고 사랑할 때, 당신은 그것도 안다. 그러나 장로는 다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 그들이 통과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 즉시 그들을 바로잡아 주며 도와야 한다.
< 대신하지 않고 이끌어주는 것임 >
또한 교회 가운데에서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봉사하며 각 지체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장로는 감독의 일을 하는 것이지 그들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들이 하도록 감독하되, 자신이 분주하게 일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분주하게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좋은 감독자는 어떤 일을 시작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많은 형제자매들이 함께 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감독이지 대신 일하는 사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형제자매들 「대신」 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
3.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감독자는 반드시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만일 백 명의 형제자매들이 일하고 있는 곳에서 당신이 감독해야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할 일이 없는 형제자매들은 없는지,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당신은 포도원의 주인과 같이 문 앞에서 어떤 사람도 게으르지 않을 정도로 일하게 해야 한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봉사할 것이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들 자신도 놀고 서있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보게 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복음이 대대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
4. 어떻게 장로를 세우시는가 ?
하나님은 어떻게 장로를 세우시는가? 한 모임 가운데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그들의 성장이 더 나타나고, 다른 사람보다 더 간증이 있고 또 장로의 일을 사모하는, 몇몇 장로다운 형제들이 있다면, 사도는 그들을 장로로 세워 형제들을 다스리게 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러한 예이다. 초기에는 에베소에 구원받은 제자들만 있었고 아직 장로가 세워지지 않았었다 사도가 두번째로 에베소에 간 후에, 우리는 거기에 장로가 있게 되었음을 본다 바울이 첫번째로 안디옥에 가서 복음 전했을 때에는 다만 사람들을 구원시켰다. 후에 그는 각 도시에 장로를 세웠다(행 14:23). 아직 정식 모임으로 세워질 수 없는 모임에 있는 이들의 발은 연약하고 사람의 부축을 필요로 한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장로로서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도는 장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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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어떻게 동역자와 장로가 되는가(1)
I. 그리스도를 알되(빌 3:10)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함
A.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
B.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소유하심
C. 인성 안에서 그분은 죽음을 통하여 법리적인 구속을 성취하셨음
D.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부활 안에서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고 계심
II.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신성하고도 비밀한 세 단계의 충만한 사역에 의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려야 함(그리스도를 얻기 위해―빌 3:8)
A. 첫번째 단계, 즉 사람으로서의 출생으로부터 죽음까지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에 있어서
1.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심
2.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을 연결하고 연합시키심
3.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속성들을 표현하심
a.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생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을 표현하심
b. 주로 그분의 풍성한 속성들, 즉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표현하심
c. 사람들이 매혹되고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1) 육신 안에서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살지 않으심
2)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사심에 의해
4. 만유를 포함한 법적 구속을 성취하심
a. 옛창조의 모든 것들을 종결하심
b.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죄 안에 타락된 만유를 구속하심―히 2:9, 골 1:20
c. 그분의 신성한 요소로 새 사람을 창조하심(잉태하심)―엡 2:15
d. 그분의 인성의 껍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심―요 12:24
e. 그분의 유기적인 기초를 놓으시고 그분의 포함의 단계에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절차를 세우심
기도 : 주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들의 종들이 되도록 당신의 회복 안에 두심을 감사드립니다. 동역자와 장로들인 우리 모두는 당신의 집안의 종들입니다. 주여, 당신만이, 주권적인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경배하고 섬기며 당신을 전파하고 백성들에게 분배합니다. 당신의 권익을 위해 당신을 섬기고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는, 당신의 권속의 종들이 되기 원합니다. 오 주여, 이 여섯 집회에서 다시 우리에게 분명한 말씀을 말씀하소서. 당신이 전에 말씀하지 않았던 것과 우리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어떤 것을 말씀하소서. 우리는 전에 많은 것들을 들었지만 그것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 영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스러운 시작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여,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고, 우리는 다만 엎드려 당신 앞에 경배를 드리며, 당신이 우리에게 좋은 시작을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오 주여, 우리는 또한 당신의 대적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반면에 그는 우리를 방해합니다. 주여, 우리는 참으로 악한 자를 미워합니다. 우리는 당신 앞에 그를 저주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육신 안에서 죽음을 통하여 그를 멸하셨음을 당신 앞에 선포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 가운데서 당신의 대적, 사탄, 악한 자를 당신이 멸하시길 기도합니다. 주여, 당신의 자녀들을 해방하소서, 당신의 풍성한 은혜를 해방하소서, 우리가 당신의 풍성하고 넘치는 공급을 받도록 당신 자신을 해방하소서, 아멘.
이 특별 집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동역자와 장로가 되며, 어떻게 장로와 동역자의 책임을 이행하는가를 보기 원한다. 이 메시지의 중심 부담은 다음에 오는 문장들로 표현되어 질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서 세 단계로 수행되어짐.
(2) 첫번째 단계인 성육신의 단계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이끌고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며, 그분의 법적인 구속을 성취함.
(3) 두번째 단계인 포함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시고, 생명 주는 영이 되시고 그분의 몸을 위해서 믿는이들을 거듭나게 하심.
(4) 세번째 단계인 강화의 단계에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강화하고 이기는 자들을 산출하며 새 예루살렘을 완결함.
이 집회는 유기적으로 대만에서 온 형제들에 의해 시작된 특별한 집회이다. 내가 수년 동안 대만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대만 형제들은 내가 이 집회에서 중국어로 전하기를 거듭 요구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주의 회복 안에서 국적의 차이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집회를 동의하기 않았다. 비록 우리에게 여전히 바벨에서부터 물려받은 언어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국적의 차이를 갖지 않음으로 주의 말씀을 지킨다. 주님의 몸 안에는 어떤 나라나 종족을 위한 여지가 없고 그분이 만유이시다. 새 사람 안에는 다만 우리의 주만 계시고. 그분은 모든 지체이시며, 내용으로서 모든 지체 안에 계신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국적의 차이도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육체 안에 있기 때문에, 언어는 커다한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중국어로 메시지를 해방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국적의 차이가 없기를 기도한다.
지위를 취하지 않고 노예로서 섬김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솔직한 말을 하기 원한다. 수년 동안의 나의 관찰에 따르면 동역자들과 장로들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과도하게 그들의 지위를 동역자와 장로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상 동역자와 장로로서 우리는 지위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따라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며 그분과 같은 동일한 종류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류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경륜에 따르면 이 땅 위에 그분의 피조되고 구속된 인류에게서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얻고 그분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한 새 예루살렘을 갖기 원하신다. 그 과정 가운데 많은 양의 일과 봉사가 있다. 그래서 동역자와 장로가 필요하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첫번째 무리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삼 년 반 동안 주님의 옆에서 그분을 따랐다. 결국, 주님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끄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죽으러 가셨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가는 도중에 그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지 논쟁하고 있었다(막 9:34, 눅 22:24). 그것은 참으로 추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삼 년 반 동안이나 주님을 따랐다. 그들은 그분 옆에 있었고 그분으로부터 수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그분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며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실 것을 거듭 말씀하셨다(마 16:21, 17:22―23, 20:17―19).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들은 그분이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 「부활」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말이었다.
그들은 주님이 죽으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하심을 들었고, 그들은 또한 예루살렘에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옆에서 누가 그들 가운데 가장 큰가에 대해서 싸우고 있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육신 안에서 주님의 사촌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언니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에게 주 예수님을 방문하실 것을 부탁하였고, 그녀는 주님께 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구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이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두 형제들에 관해서 분개했다(마 20:20―24). 그들의 가족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가져온 것은 참으로 추한 일이다.
그런 다음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절)고 말씀하셨다. 「종」은 여기에서 고용된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값을 주고 산 노예를 말한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종은 인간의 권리가 없다.
동역자들과 장로들로서 우리는 그러한 노예들이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고 말했다.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이들이 사도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믿는이들은 그들을 그렇게 높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들은 믿는이들의 노예들이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우리 자신을 동역자와 장로들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종들로 여겨야 한다.
나의 가장 큰 부담은 이것이다. 나는 주님이 여러분에게 사랑 안에 있는 나의 교통을 통하여 당신에게 긍휼을 주사,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되는 것은 노예들이라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알고 깨닫기를 바란다. 이 문제에 관해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을 세우셨다. 그분은 주님과 선생이셨지만 그분은 자신을 비우셨고, 그분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허리를 동이셨고, 노예로서 그들을 섬기셨다(요 13:3―5). 주님은 또한 우리가 그분이 하신 것처럼 하도록 명하셨다(12―17절). 동역자와 장로들인 우리 형제들은 잘못을 했으며 우리 모두는 회개해야 한다. 나는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이것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자신을 다른 이들 위에 있는 위치로 간주하고,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싫어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종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먼저, 우리는 어떻게 동역자와 장로가 되는가에 관한 교통을 하기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배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구원받자 마자 동역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가 거듭나자마자 장로가 되는 사람은 없다. 동역자와 장로가 되는 것은 배움을 요구한다.
I. 그리스도를 앎
장로와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에 관해 말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주로 네 가지 항목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아는가에 관하여 여러분과 교통하고 싶다.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이 항목들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 항목들을 다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관한 풍성은 측량할 수 없으나(엡 3:8), 그것들 가운데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다음의 네 가지 항목이 있다.
A.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심
먼저,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시라는 것을 거듭거듭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다.
B. 그분은 신성과 인성 둘 다를 소유하심
두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신성과 인성 둘 다를 소유하셨음을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해서 우리는 철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C. 인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법리적인 구속을 성취하심
세번째로, 우리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법리적인 구속을 성취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신성 안에 있는 그분의 존재가 별개의 일임을 분명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분이 그분의 육신 안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더 깊은 방식은 그리스도가 그분의 인성 안에서 구속을 성취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충분히 깊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재적인 의미를 보기 위해 신성한 진리의 깊은 부분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D.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고 계심
네번째로, 우리는 또한 신성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고 계심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분의 구원과 다르다는 것을 더 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 5장 10절 상반절은, 우리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구속을 말한다. 로마서 5장 10절 하반절은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구원을 말한다. 유기적인 구원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부활 안에서 수행되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빛이며 새로운 언어이다. 그분의 신성과 부활 안에서 그분은 믿는이들 안에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고 계신다. 법리적인 구속은 성취되었지만 유기적인 구원은 수행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네 항목들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가 동역자이든 장로이든 우리가 목양하고 사람을 가르칠 때, 우리는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말할 수 있다.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이 네 가지 항목에서 특별하게 그리스도를 알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이 네 가지 항목들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당신이 이미 이것들을 알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말해야 될지 어떻게 중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이것은 실행을 요구한다. 대만 교회들은 현재 네 가지것들―기도하기, 연구하기, 암송하기, 말하기―을 실행하고 있다. 이것은 옳은 방법이다. 모든 동역자와 장로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 네 가지 항목들을 기도로 읽고, 깊게 연구하며, 그것들을 외워서 암송하고,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요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그것들을 철저히 말함으로써 다루어야 한다.
II.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그분의 신성하고도 비밀한 세 단계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림(그리스도를 얻기 위해―빌 3:8)
동역자와 장로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또한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그분의 신성하고도 비밀한 세 단계의 그리스도(그리스도를 얻기 위해―빌 3:8)를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동역자와 장로가 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두번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그것은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지식을 갖고 그런 다음 체험과 누림을 갖는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했다. 「갖는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얻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2―14절). 경기에서 이기는 것은 쉽지 않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을 요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므로 그리스도를 얻을 필요가 있다.
A. 첫번째 단계, 즉 사람으로서의 출생으로부터 죽음까지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은 세 가지의 신성하고 비밀한 단계 안에 있다. 첫번째 단계, 곧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는 그분의 사람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분의 인성의 전 과정을 포함하여 그분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그분의 출생과 그분의 인생을 거치심과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를 형성한다.
1.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심
그분의 사역 안에서 첫번째 단계인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요점이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 여러분은 그분의 성육신 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당신은 그분이,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새 언어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 인간은 유한하다.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그분의 성육신 가운데, 그리스도는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한 분은 무한하시며 또 다른 하나는 유한한다. 어떻게 이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것이 수행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출생을 기념하는 소위 크리스마스라는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의 비밀스런 방면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많은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이 깊고 심오한 중요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에 관해서 아주 염려하며 두려워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들에서 어떤 것도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들은 그것들을 흔해 빠진 것, 곧 비그리스도인 조차도 이미 들었던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새 문화 안에서 본 것들을 말할 새 언어를 사용하여, 그분의 충만한 사역 안에 있는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흥분하며 당신에게 듣는 것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옛문화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새 문화 안에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2.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을 연결하고 연합시키심
그분의 충만한 사역 가운데서 첫번째 단계인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 안에서, 그리스도는 또한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과 연결되고 연합되셨다. 삼일 하나님은 비밀스러우시다. 그리고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우리가 간단히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연합시켰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쉽다. 그러나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새 문화의 새 언어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을 연결시키고 연합시켰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삼일 하나님에 관해서,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시고, 그 영은 안에 들어오심이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 관해서 보면, 영은 가장 깊은 부분에 있고, 혼은 가운데 있으며, 몸은 바깥에 있다. 이것은 분명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지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체험과 누림을 갖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을 갖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말할 것이 없을 것이고 할 말이 궁하게 되고 공허한 말이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지만, 우리가 말한 것은 얕고 단순하며 진부한 것일 것이다.
몇몇의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이런 높은 진리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는 믿는이들은 그들의 현재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분명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체험하고, 얻은 후에서야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새 언어에 따라, 우리가 얻은 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새 문화를 말할 새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서 들을 것이고, 우리가 말한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될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현재 주님의 움직이심 안에서 뒤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연합되는 것이다. 우리는 연결되는 것이 무엇이며 연합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조각의 나무가 서로 이어질 때 이것은 연결이다. 두 개의 물건이 가루로 빻아져 서로 섞일 때 그것들은 연합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결에 관해서는 말하기 쉽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세부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3.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속성들을 표현하심
그분의 풍성한 사역 가운데 있는 그분의 성육신의 첫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또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하여 그분의 풍성한 미덕들로 넘치는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이 향기롭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비그리스도인들도 사복음서를 읽을 때 그 책들 안에 기록된 그 예수님이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그분의 미덕이 향기롭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그분이 그분의 풍성한 속성들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을 그분의 인성 가운데에서 표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덕들은 우리의 어떠함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쉽게 화를 내고, 나서서 말하기를 좋아하며, 말에 부주의하고, 책임감 없이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것은 사람의 미덕들이다. 다른 면으로 주의 깊게 행동하고, 합당하게 말하며, 목적 있게 어떤 일을 하며, 무책임하거나 주의 깊지 않게 행동하지 않는 것 또한 사람의 미덕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의 미덕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의 미덕들은 그분이 위대하시고 넘치는 분이시기 때문에 풍성하시다. 그분은 사랑과 빛과 거룩이시며 의이시다. 이 풍성한 미덕들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주 예수님에 의해서 표현되어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향기로운 미덕들이 되었다.
사복음서에 있는 기록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므로 그분은 아이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13―15). 주님의 길은 제자들의 길과 달랐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리석고, 약하며 천하고 세상의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셨다(고전 1:27―28). 모든 세대에 걸쳐 그분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과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해서, 그분은 작은 아이들과 같이 약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르셨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풍성하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속성들, 즉 그분의 특성들 안에서 풍성하시다. 이 땅에서 인성 안에 계셨던 주님에 의해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속성들은 다만 몇 가지만이 살아 나타내어졌고, 그분의 인성 안에서 표현된 미덕들로 사람들에게 보여졌으나, 이 미덕들은 아주 향기롭고 달콤했다. 그분의 인생 안에서 그리스도는 주로 그분의 풍성한 속성들, 즉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들 안에 계신 넘치는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게다가 그분의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분이 매혹시키고 사람을 사로잡는 향기로운 속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마태복음 4장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주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걸으실 때 그분은 고기를 낚거나 그물을 깁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보셨다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다. 즉시 그들은 그분을 따랐고 그들의 그물 깁는 것을 포기했으며, 그분의 배를 버려 두고 그들의 아버지를 떠났다(18―22절). 오늘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그분이,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는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그때 주 예수님이 참으로 그분의 용모, 그리고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그분의 목소리에 향기로운 능력을 나타내셨음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것은 마법에 걸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우리에게, 『누가 너를 사로잡았어? 깨어나!』라고 말한다. 일단 우리가 주님에게 매혹되면 우리는 영원히 매혹된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여로 설명될 수 있다. 남자는 여자에 의해 매료되고 여자는 남자에 의해 매혹되고 사로잡힌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달콤함과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향기를 가지셨음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그때 주님과 함께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분에 의해 매혹된 「어리석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자주 주님에 의해 책망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할 정도까지 주님께 매혹되었다. 주님의 빈번한 책망이 그를 멀리 떠나도록 만들지 못했다. 오늘날 나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에게 강한 말을 하지 못한다. 만일 나의 책망이 강하다면 나는 그들이 그것을 받지 못하고 떠날까 두렵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굴이 두꺼웠다. 그는 여러 번 주님에 의해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분을 따랐다. 그가 주님을 배신한 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베드로는 그분께 대답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1―33).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하셨다(눅 22:31―34). 베드로는 이 말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말하였다. 후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 앉아 있는 동안 한 비자가 그에게 와서 질문했다. 그녀의 질문으로 인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다. 그때 주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는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바깥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눅 22:54―62).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 주님은 그를 잊어버리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 한 천사가 몇 명의 여인들에게,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막 16:7)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님이 개인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요 20:17)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셨고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언급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은 베드로를 사로잡으셨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람들을 매혹하고 사로잡는 몇 가지 향기로운 미덕들을 소유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을 따르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삼 년 반 동안 주님만을 돌보며 단순하게 그분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귀부인들이 있었다(눅 8:1―3). 가끔 주님은 다른 영역, 곧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가운데 있는 어떤 말씀을 하셨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영역 안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이 거듭났을 때 그들은 주님이 전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하였다(요 16:13, 2:22참조).
그리스도는 그분이 육신 안에서 그분의 인생을 사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살므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사로잡는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표현하셨다. 그분이 육체 안에 계셨지만, 그분은 그분의 육체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람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사셨다. 오늘날 하나님―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떤 생명에 의해 살고 있는가?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모두는 육체 안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체에서 나와 부활 안으로 들어가 부활 안에, 즉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삶은 물질적인 우리의 몸 안에 사는 생명을 의지한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옛 「나」의 생명이 아닌 새로운 「나」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러한 세부 항목들을 다룰 수 없고 지나가야 한다. 주님이 나를 덮으시길 바란다. 내가 수년 동안 이것들을 연구한 후에 나는 그것들을 글로 쓰도록 주님께 인도받았다. 당신은 사실상 이러한 것들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4.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구속을 성취하심
그분의 완전한 사역 가운데 있는 첫번째인 그분의 성육신의 첫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네 가지 위대한 것들을 성취하셨다. 첫번째로, 그분은 무한한 하나님은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일 하나님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과 연결시키고 연합시키셨다. 세번째로, 그분은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을 통하여 그분의 풍성한 속성 가운데 풍성한 하나님을 표현하셨다. 결국 네번째로, 그분은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구속을 성취하셨다. 처음 두 가지 것들은 그분의 출생과 관계되고, 세번째는 그분의 인성과 관계되며, 네번째 것은 그분의 죽음과 관계된다. 그분이 그분의 인생을 통과하신 후에 그분은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죽으러 가셨다.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구속은 다섯 가지 방면이 속하여 있다. 먼저, 그분은 옛장조의 모든 것들을 끝내셨다. 두번째로,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죄로 타락된 만유를 구속하셨다(히 2:9, 골 1:20).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분의 끝냄 이후에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죄로 타락된 만물을 다시 구속하셨다. 세번째로, 그분은 그분의 신성한 요소로 새 사람을 창조(잉태)하셨다. 에베소서 2장 15절은, 십자가에서 그분이 유대의 믿는이들과 이방의 믿는이들을 그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 창조는 잉태였다. 어떤 잉태는 요소를 요구한다. 요소가 없이 잉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 안에서 새 사람을 창조(잉태)하셨으며, 그분이 그 새 사람의 잉태를 위한 바로 그 요소이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요소인 그분 자신 안에서 두 민족을 한 새 사람으로 잉태하셨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계시는 동시에 그분은 새 사람을 창조하고 계셨다.
네번째로, 그리스도가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구속을 성취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인성의 껍질로부터 그분의 신성의 생명을 해방하셨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주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심을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것의 껍질은 깨질 수 없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은 해방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생명을 가지셨지만, 그것은 그분의 인성의 껍질 안에 감취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겪으심으로 그분의 인성의 껍질이 깨어져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그분의 인성의 껍질로부터 해방할 필요가 있었다.
다섯번째,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법적인 죽음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또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기초를 놓으셨고, 그분의 포함의 단계에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한 절차를 세우셨다. 그리스도의 법적인 구속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의 기초이다. 그분의 충만한 사역 가운데 있는 그분의 두번째 단계인 그분의 포함의 단계 안에서 그리스도는 절차가 필요했고, 그분의 법적인 구속은 그분의 포함의 단계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한 절차이다.
그 중요한 요점들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들을 말하고 체험하는 것을 배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중요한 요점들에 관해서 우리는 철저하고 통찰력 있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배울 필요가 있고, 많은 노력을 가지고 그것들을 연구하기 위해 시간을 드릴 필요가 있다. 내가 전에 이러한 중요한 요점들 중에 몇 가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여러분 또한 그것들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것들 안에 들어가고, 그것들을 말하며, 그것들 전부가 당신의 체험이 되게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