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준비된 바이어 그룹 , BAYTREE 이너써클
전화: 416-226-5999
7030 Woodbine Ave. Suite 103 Toronto, ON
행복부동산 -수잔정 Home Standards Brickstone Real
전화: 647-866-7878
180 Steeles Ave W Unit 30, Thornhill, ON
1004열쇠
전화: 416-895-1004
4 Blakeley Rd. Toronto, ON
싸인건설
전화: 416-909-7070
4065 Chesswood Dr. North York, ON
토론토 민박 전문집
전화: 416-802-5560
Steeles & Bathurst ( Yonge) Toronto, ON
홍이표치과
전화: 647-985-0456
9625 Yonge St #4, Richmond Hill, ON Toronto, ON
놀부 - 한식/일식/중식
전화: 416-221-4700
3 Elmhurst Ave, North York, ON
한인 시니어 탁구협회
전화: 647-209-8933
1100 Petrolia Rd Toronto, ON
대형스크린,LED싸인 & 간판 - 대신전광판
전화: 416-909-7070
4065 Chesswood Drive Toronto, ON
한인을 위한 KOREAN JOB BANK
전화: 6476245886
4065 Chesswood Drive Toronto, ON
캐나다 공인 컨설턴트 - 한인크레딧 컨설팅
전화: 416-897-8438
1 High Meadow Place, Unit 2 North York, ON
럭키 여행사
전화: 416-938-8323
4699 keele st.suite 218 toronto Ontario M3J 2N8 toronto, ON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48 전체: 205,795 )
[도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 워치만 니
lhyunsik
2005-12-01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저자 : 워치만 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치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섬기며 따라가야 하는지, 성경을 통한 점검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분이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하시는가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해답을 제공한다. 이 문제들을 다루어 나가는 저자의 방식은 특별하다. 그는 신약을 대표하는 베드로, 바울, 요한 이 세 사람을 택하여 각각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들에게 맡기신 사역의 특성 등을 비교하여 보여 준다. 베드로는 늘상 새로운 시작을 도맡아 기초를 놓았으며, 바울은 건축하고 온전케 하는 일을 담당했다. 연이어 사도 요한은 ‘그물을 보수하는’, 즉 회복의 사역에 전념했다. 이 책은 이러한 세 가지 노선이, 그들 각각의 부르심의 특성을 따라 서로 완벽하게 보완 작용을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주님의 자기 계시가 이 세 사역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탁월하게 논증하고 있다.
본문을 읽어 가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약을 대표하는 세 명의 사도들의 소명(召命)과 사역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 주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랍고 또 우리의 소명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의 저자의 풍성한 체험들이 이 책 곳곳에 녹아 있어, 주님을 섬기며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너무나도 귀중한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어느 장(章)을 열어 보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적인 빛과 계시가 가득하다
1 하나님의 숙련공
하나님의 부르심은 특별한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위임을 받는 것은 항상 개인적이며, 결코 많은 사람에게 임하는 그런 일반적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갈 1:16).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항상 분명한 목표가 있으며, 결코 우연하거나 목적 없이 임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나 나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실 때에, 그분은 우리가 다만 그분을 섬기는 데에 바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개개인이 어떤 확실한 일들을 이루어 그분의 목표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그분의 교회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마 28:19) 일반적인 위임을 주셨지만, 우리 개개인에 대한 그분의 위탁은 언제나 어떤 개인적인 위임을 대표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그분이 정하신 범위 안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의 특별한 면을 가지고 그분의 백성에게 나아가는 것이거나, 혹은 신성한 계획과 관련된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모든 사역은 특별한 하나의 사역이어야 한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이 완전히 똑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므로, 그분이 그들을 예비하시는 방식 또한 똑같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이시다. 그분은 어떤 가르침이나 훈련의 방식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항상 고난의 시험을 더하여 그분의 목적을 이루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역이 아니라, 주어진 시기에 그분의 백성을 섬기도록 특별히 정하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종 자신에게는 이러한 사역이 반드시 그의 개인적인 특별한 일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특별한 체험을 가짐으로써 특별하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며,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목적과 직접 관계되기 때문에 거절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신약 성경으로부터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어느 정도 주의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신약에서 중요하며 명백히 나타난 세 방면의 사역―특별히 시대적으로 공헌을 한 세 명의 인도하는 사도로 대표되는 사역―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사람에게는 물론 공통점이 많이 있지만 성경의 기록 가운데 어떤 부분은 그들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강조하여 말함으로, 그들 각자가 하나님에게서 직접 위임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에서 나는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의 특별한 분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신약 안에서 세 노선의 사상을 밝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각기 분량이 저마다 다른 많은 사도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지만, 특별히 이 세 사람의 독특한 직분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내어지고 설명된 것이다.
우리는 그 세 사람의 사역이 나타내는 바가 서로 다른 것은 다소 시간상의 순서에 따른 것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사도는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서 자신의 새롭고도 때에 맞는 강조점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다. 또한 우리는 결코 그 세 사람을 분리해서 보거나 혹은 그들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각 사도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도리어 서로 보완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 사이의 차이는 그들 사역의 전반적인 면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록상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이 세 사람이 온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노선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의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세 가지의 주요한 역사적인 강조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 안에 많은 서로 다른 사역과 이후의 역사상의 무수한 사역들은 빌립과 바나바, 실라와 아볼로, 디모데와 야고보 등의 사역과 같이 모두 어느 정도 이 세 사람의 특별한 성분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 사람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유익하며, 또한 우리가 이번에 성경을 연구하는 목표이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자’
먼저, 베드로를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마가가 쓴 복음서는 사실상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회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는 베드로 자신이 쓴 서신서에서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몇몇 저자들이 그의 생애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베드로의 특별한 분깃인 그의 사역을 말해 준다. 베드로의 사역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서신은 분명 우리에게 그의 사역이 한 사도의 모든 일을 대표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의 서술 안에서 비교적 두드러진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주님께서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분을 따라오라고 하실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의 특별한 일이 되었으며, 또한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속하게 왕국 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후에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예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 점을 다시 확정하셨다. 비록 베드로는 후에 ‘그분의 양을 치는’ 목양의 직분을 다하도록 부르심받았지만,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교회를 언급하시면서 그에게 주신 첫 말씀은 “내가 천국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마 16:19)였다.
열쇠는 먼저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시작을 가리킨다. 당신이 문에 들어가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열쇠를 사용하여 문을 열어야 한다. 베드로의 직분은 자주 이처럼 어떤 일들의 시작을 가져왔다. 사실 그의 직분은 첫 번째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오는 것이었다. 삼천 명이 그의 말을 받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되었다. 성령께서 고넬료와 그의 집에 임하셨을 때, 가이사랴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말했을 때 그는 유대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으며, 그 후 그가 로마인의 집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을 때 다시 이방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는 이 두 장소에서 단독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주님의 사명이 항상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후에 우리는 바울 역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이방인 가운데서 더 확장된 복음의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지만, 실제로는 베드로가 선구자이다. 역사적 의의로 볼 때, 그가 손에 열쇠를 쥐고 문을 열었다. 그의 일은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일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의 메시지의 부담은 구원에 있다. 이 구원은 구원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왕국을 이끌어 오기 위한 것이며, 또한 높이 올려진 왕이신 예수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방면을 강조하지 않고 시작 단계에 역점을 두게 됨을 피할 길이 없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열쇠이며, 이 열쇠의 기능은 하나님의 왕국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 자신이 부르심받았을 때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부르심받았을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다르며,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심지어 요한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서로 다른 이러한 상황들을 우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부르심받았을 때에 그는 본래 숙련된 일이었던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의 직업은 그의 일생의 사역의 특징을 이루는 일처럼 보인다. 그는 가장 앞장서서 복음을 전한 자였으며, ‘사람을 얻음’으로 인하여 어떤 일을 시작하였다. 그물을 던지면 여러 가지 고기를 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베드로의 일이었다. 우리는 그가 행하고 기록한 광범위한 일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이루어 낸 사역에 대한 성경의 기록의 중점은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는 본래 장막 짓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바울을 살펴보자. 그는 주님의 종이지만 조금 다른 사람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만일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베드로의 개척의 일을 거절하고 그가 얻은 기초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두 사람의 사역 사이에 근본적인 충돌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 사이에 서로 용납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인에게 편지를 썼을 때에, 그와 베드로의 차이는 지역과 민족에 관계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역이 본질상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에 서로 일치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평가하시고 확증하신다(갈 2:7-12).
문제는 바울이 계속하여 더 나아가라는 요구를 받은 날이 온 것이다. 베드로의 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바울의 일은 건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바울에게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맡기셨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것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하늘에 속한 실제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았다. 그의 사명은 그 실제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백성들을 하나로 건축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설명해 보겠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이방인들에게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준 이상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가 매여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거기에는 각종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이상은 복음이 포괄적으로 전파되어야 하며, 모든 피조물을 향해야 함을 표명한다. 이것은 또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이며 앞선 자임을 말해 준다. 그의 직분은 큰 보자기(그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음)에, 여러 가지의 것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그에게 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욥바에서 더욱 새롭게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가능한 한 모든 족속을 다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형제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다른 면이 있는데, 그는 보자기를 잡은 사람이 아니라 장막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상 중에 나타난 보자기는(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손에서는 장막이 된다. 나의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내 말은 보자기는 아직 형태를 갖지 않았으며 아직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울과 같은 장막 짓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베드로와 똑같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늘로부터 그에게 임한 환상에 사로잡혀(고후 12:2-4, 엡 3:2-10), 형태가 없던 보자기에 형태가 있게 하였으며 의미가 있게 하였다. 그는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에게는 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문제일 뿐 아니라 분명한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을 얻는 것이 문제였다. 바울은 결코 하루에 삼천 명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이러한 일을 체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특별한 사역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하늘의 이상을 따라 믿는 사람들을 하나로 건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단지 그분을 믿고 ‘예배당에 다니며’ 거기에 앉아서 잘 짜여진 설교나 듣고 이렇게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며 안주하는 것으로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심지어 소위 그들이 말하는 ‘두 번째의 축복’, ‘거룩함’, ‘해방’ 자체만을 위한 특별한 체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큰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 대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의 갈망이 있으신데, 그것은 바로 하늘로서 온 한 ‘새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와 목적은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로 완전히 조성된 그분의 한 새사람인 ‘그 그리스도’를 얻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하나님의 마음속의 단 한 가지 생각은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얼마나 신성한가! 성경은 여러 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또한 아주 여러 번 단지 ‘그리스도’를 말한다. 당신이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의 개인의 방면을 말할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한 사람들을 포괄하여 말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고전 12:12 참조). 이 얼마나 무한한 은혜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구원받은 아들, 곧 구원받은 많은 개인이 아니라 한 무리의 단체적인 백성을 얻고자 하신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것은 그들이 그분의 아들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한 새사람, 즉 하나의 연합된 집합체로서 그 가운데서 인간의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칭송받을 아들의 하늘에 속한 성질과 생명과 영광을 표현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목표이다. 바울은 특별히 이 비밀을 널리 알려서 그분의 백성들을 그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한 청지기로 하나님께 부르심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베드로의 사역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가 숭고한 지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의 특별한 사역은 베드로의 사역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보다 전진했지만, 이것은 베드로의 사역을 허물어뜨리거나 낮추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베드로 형제 자신도 하나님의 신령한 ‘집’(벧전 2:1-9)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더욱 증가함에 따라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이 다소 그보다 앞섰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가 베드로후서의 끝 부분 몇 구절을 읽어 보면, 거기서 그는 바울에게 주어진 ‘지혜’를 말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의 글을 ‘다른 성경’과 동일한 류(類)로 매듭지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그 자신의 가르침의 보충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말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가장 먼 곳에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는 복음의 초보적인 효과에 만족하지 않고, 복음의 더욱 진일보한 목적에 이르도록 언제나 성도들을 위해 수고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그는 건축자였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분명히 그는 ‘건축자’(고전 3:10)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더 전진하여 그 터 위에 건축하였다. 그는 자신이 만일 다른 터 위에 건축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기초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건축 재료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당신이 어떻게 건축하고 무슨 재료로 건축하는가는 큰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열등한 위조품이나 대용품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사랑 안에서 연락하고 상합하여 주 안의 성전으로 건축되며, 또한 함께 연합하여 그분의 아들의 영광을 표현하고 전시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그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 앞에 둔 목표이다. 그가 일생 동안 많은 일들을 체험하여 얻은 공과들, 오랜 시간의 수고, 광범위한 지역의 여행, 그의 풍성한 많은 저서들은 이 하나의 목표,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은 영광스런 교회가 그분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물을 보수함’
그러나 후에 방해와 좌절이 왔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 일의 원인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 오래지 않아 그는 디모데에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딤후 1:15)고 말하며 로마 제국의 한 속주의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다. 아시아의 이 믿는 이들은 누구인가? 분명 계시록에서 주님이 친히 질문하신 그 사람들일 것이다. 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대표적인 일곱 교회에게 쓰여졌는데, 우리는 그 일곱 교회의 영적인 상황이 바로 이 모든 시대에 나타난 교회의 전형(典型)이라고 믿는다(계 1:11).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첫 신약 시기 안의 모든 교회가 거의 하나님의 표준을 저버렸으며 신성한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요한을 불러들이신다. 신약의 기록을 살펴볼 때, 요한은 줄곧 무대 뒤에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세상을 떠나면서 주님은 그분의 사역 안에서 더 전진된 그릇을 내놓으셨다. 요한에게는 새롭고도 분명한 강조점이 있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필요에 부응하게 되었다.
요한의 사역은 베드로의 사역과 매우 다르다. 요한은 베드로처럼 그렇게 어떤 일을 시작하도록 개별적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위임을 받지 않았다.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주님께서 요한을 사용하신 것은 오직 그가 베드로를 돕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님은 또한 요한에게 교회의 비밀을 밝히는 일을 분명하게 맡기지도 않으셨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기초와 관계가 있다(엡 2:20).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그의 부르심 또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그는 바울을 통하여 주어진 그 계시에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았다. 바울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일들은 최고봉에 도달하였으므로 다시 무언가를 고쳐 넣을 것이 없다. 바울의 관심은 창세 전에 신격이 이루신 신성한 결의(決議)를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었다. 아들 안에서의 이러한 결의는 사람들이 구속받고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계획으로, 하나님은 이미 시대마다 조금씩 계속해서 이것을 나타내셨으며, 마지막으로 특별히 은혜 시대 안에서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높이 올리워지심을 통하여 완전히 그분의 계획을 나타내셨다. 바울의 특별한 부담은 이 계획을 완전히 제시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완전히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은 우리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중심의 일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 안에서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시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위임하신 것을 고치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개조해야 하므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 후에 요한이 더 필요한가? 이 전진된 사역은 어떠한 필요를 위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약 시대 말기에 원수가 하나님의 집에 몰래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구속받은 상속자들을 그분의 길에서 떠나게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상을 본 ‘에베소’의 사람들까지도 실패하고 후퇴하였다. 실로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실패에 있어서 앞장선 교회였다. 당신이 만일 에베소 교회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서신과 두 번째 서신, 즉 바울이 쓴 서신과 주 예수께서 요한을 통하여 쓰신 서신(계 2:1-7)을 비교해 본다면, 당신은 이 사람들이 그런 상태 안에 있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끔찍한 일이 발생되었을 때 요한은 이끌려져 위임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더 전진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신약 성경에서 요한의 사역이 항상 어떤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표한 적도 없으며 (비록 계시록 안에서 그는 이미 있는 일을 궁극적인 완성으로 이끌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것을 진일보하도록 소개하지도 않았다. 복음서와 서신서 혹은 계시록에서 요한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잃어버린 위치에서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요한이 사도로 부르심받을 때의 상황과 잘 부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가 부르심받아 주님을 따를 때에 그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한 그릇’이라고 칭하셨을 때에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그는 이미 장막 짓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요한이 부르심받았을 때에 그는 베드로처럼 배 위에 있지 않았으며 호숫가에 있었다. 성경은 그와 그의 형제가 강가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고 말해 준다. 당신이 어떤 것을 수선하고자 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한다는 뜻이다. 어떤 물건이 이미 상하고 잃어버린 바 되었는데, 당신의 일이 그것을 수리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요한의 특별한 사역이다. 그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의 근원적인 것 안으로 돌아가게 한다.이것은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후에 이 일을 논할 때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아마도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 세 사도의 세상적인 직업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상응시키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이런 세세한 것을 기록한 것이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것들을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는 편리한 근거로 삼을 따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인 그들 각자가 대표하는 위대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염두에 두자.
우리 앞에는 세 사람의 대표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먼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베드로가 있다. 그리고 지혜로운 건축자인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하늘에 속한 이상에 따라 건축한다. 마지막으로 실패와 위협이 있을 때에, 요한은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이 변함없고 하나님은 마음속에서 결코 포기한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거듭 확실히 해 준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마음의 뜻을 이루실 것이며, 그분의 마음의 뜻은 결코 바뀐 적이 없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일의 실제적인 요점은, 서로 보완하고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세 방면의 사역이 교회를 완전케 한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어떤 일들을 시작하는 베드로의 사역이 필요하고, 그 위에 건축을 하는 바울의 사역이 필요하며, 또한 필요한 곳에서 사물을 회복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게 하는 요한의 사역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이러한 세 방면의 사역이 필요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세 번째의 직분, 곧 회복의 직분이 아마 이 마지막 시대에 가장 크게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사역 안에서 이러한 요점들의 실제를 세세히 보아야 한다. 특별히 현재의 상황에 주어진 마지막 직분의 의미를 주의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다음 장(章)부터는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의 순서에 따라, 그들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 각자의 사역의 특성인 개시의 사역과 건축의 사역과 회복의 사역을 보기로 하겠다. 한 면으로 우리는 이것들을 보기를 원하고,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영께서 이것들을 통하여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시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