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변호사 정찬수 법률사무소
전화: +82 2-536-1144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Toronto, ON
럭키조경 & 나무자르기
전화: 647-564-8383
4699 Keele St. Unit 218 Toronto, ON
캐나다 공인 컨설턴트 - 한인크레딧 컨설팅
전화: 416-897-8438
1 High Meadow Place, Unit 2 North York, ON
대형스크린,LED싸인 & 간판 - 대신전광판
전화: 416-909-7070
4065 Chesswood Drive Toronto, ON
스마트 디지탈 프린팅 - 인쇄 및 디자인
전화: 416-909-7070
4065 chesswood dr. Toronto, ON
최고의 POS시스템 - 스마트 디지탈 POS
전화: 416-909-7070
4065 CHESSWOOD DR. NORTH YORK Toronto, ON
토론토 기쁨이 충만한 교회
전화: 416-663-9191
1100 Petrolia Rd Toronto, ON
한인을 위한 KOREAN JOB BANK
전화: 6476245886
4065 Chesswood Drive Toronto, ON
토론토 민박 전문집
전화: 416-802-5560
Steeles & Bathurst ( Yonge) Toronto, ON
홍이표치과
전화: 647-985-0456
9625 Yonge St #4, Richmond Hill, ON Toronto, ON
행복부동산 -수잔정 Home Standards Brickstone Real
전화: 647-866-7878
180 Steeles Ave W Unit 30, Thornhill, ON
놀부 - 한식/일식/중식
전화: 416-221-4700
3 Elmhurst Ave, North York, ON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6 전체: 205,783 )
인스턴트 크리스천<에이든 토저/은성>
lhyunsik
2005-11-28
출처 :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인스턴트 크리스천<에이든 토저/은성>
1. 하나님을 가까이함 중에서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하려면, 먼저 그의 내면에서 조명(照明)의 사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선행적(先行的) 이끄심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는 전혀 우리의 공로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충동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며, 그 충동의 완성은 우리가 열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데 있다.
하나님은 크시고, 인간은 작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중생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는 순간, 우리의 전 존재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음을 의식하고, 그 즐거운 인식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탄생이며,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이제부터 영광스러운 추구, 무한히 풍성하신 신성(Godhead)을 알려는 행복한 탐색이 시작된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출발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착점이 어딘지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엄위하시고 신비하신 삼위 하나님의 깊음 안에는 한계도, 종착점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 사는 우리가 행해야 할 탐색을 우리 교사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강력한 동경을 권장한다. 우리가 지금 이처럼 비천한 처지에 놓인 것은 그것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경직되고 굳어진 것은 거룩한 갈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 만족은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원수이다. 철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 우리는 종교적 복합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이 우리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에 프로그램, 방법, 조직, 그리고 시간과 관심을 사로잡지만 결코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신경 쓰이는 활동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모든 종교적인 형식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를 발견하겠다는 결심이 서야하며, 그 다음에 단순성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항상 그렇듯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접근을 단순화해야 한다.
2. 말씀하시는 하나님 중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상을 지원해준다. 하나님은 과거에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자신의 음성으로 세상을 채우신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속적인 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사고 방식은 예배자의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것이다. 우리는 경탄하기보다는 설명하려 한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여전히 세상에서 울려 퍼지며 탐색한다. 세상의 질서와 생명은 그 음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너무나 바빠서, 혹은 너무나 고집이 세어서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들으려 하기만 하면 하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것이다. 이 시대는 "들으라"는 권면에 열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시대가 아니다.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사람들은 소음과 물량주의와 활동과 소란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고 생각한다.
고요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홀로 있는 것이 좋다. 우리 앞에 성경을 펼쳐 놓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 후에, 만일 우리에게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책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과거에 말했던 책이 아니라 지금도 말하고 있는 책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할 때 종교적인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계속 알기를 원한다면, 즉시 성경이 당신에게 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성경을 펼치라. 성경이 당신 마음대로 밀쳐 낼 수도 있는 사물이라는 관념을 버리라. 그것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음성이요, 말씀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3. 온유함과 안식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세상에 기이하고 신기하게 임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방문이다. 주님읜 훌륭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의 정수이다. 주님은 하나의 의견을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의견들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한번도 추측하신 적이 없었다. 주님은 확실히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은 솔로몬의 말처럼 지혜의 소리나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를 요약한 것도 아니다. 주님은 자신의 충만한 신성 안에서 말씀하셨으므로 그의 말씀은 곧 진리이다. 주님은 "복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지니신 유일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윗 세상으로부터 오신 복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행한 것보다 더 강력한 행위의 지원을 받았다. 그 말씀은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지혜이다.
인위성이라는 저주는 우리가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온유함에 굴복하는 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우리는 자신의 실제의 모습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우리의 관심 밖에 놓일 것이다. 우리가 죄를 떠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두각을 나타내려는 악한 소원만이 우리로 하여금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게 보이고픈 욕망을 갖게 만든다.
세속적인 사람은 교만과 핑계라는 짐을 지고 고생한다.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없으면 우리는 이 짐을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이 주시는 쉼은 온유한 쉼이요, 우리가 가식을 버리고 자신의 참 모습을 받아들일 때에 임하는 복된 안도감이다. 그 일을 하려면 처음에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4. 깊은 밤에 드리는 기도 중에서
나는 신앙 부흥에 관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서 "신앙 부흥은 밤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반드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지극히 참된 것을 지적하는 격언들 중의 하나이다.
신앙 부흥이 한 밤중에 이루어진다는 사상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다. 신앙 부흥(혹은 다른 신령한 은사들이나 은혜)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임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지며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소망하는 만큼은 못되지만 원하는 만큼은 충만하게 된다.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은 이것을 확실히 하시는 말씀이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육체적인 감각으로서, 이것이 심각한 단계에 이르면 실절적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갈망이 고통이 되는 순간에 갑자기,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이 충족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은 너무나 냉담하며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마족하고 있기 때문에 복되신 성령이 밀고 들어가 만족스럽게 채워줄 갈망의 공간이 없다.
이따금 종교적 현장에서 어떤 사람의 충족되지 못한 영적인 동경들이 크게 증대되어 다른 온갖 관심들을 강요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한 사람은 매주일, 그리고 매년 자기 교회에서 기도하는 냉랭한 형제들의 습관적이고 안일한 기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동경에 도취되기 때문에, 종종 그의 친구들은 그를 성가신 존재로 여기게 된다. 당황한 그의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마치 눈을 뜨기 위해 소리치다가 제자들에게서 책망을 받은 소경처럼, 더욱 더 크게 소리친다. 그는 자신의 기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했거나 무엇인가 그의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늦게까지 기도한다. 그의 기도 시간은 그의 심령 상태가 결정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밤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산앙 부흥이 한밤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6. 올바른 자가 되려면 올바르게 생각해야 한다 중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로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생각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거나 장차 되어질 모습이다.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과 겸손과 존경의 성장에 유익한 도덕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생각은 감정을 자극하여,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생각할 무엇에 대해 생각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물론 환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기가 약한 어려울 수도 있다. 그가 가치있는 대상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도 거칠고 덧없는 생각들이 마치 여름 밤에 치는 번개처럼 그의 정신을 농락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해롭다기보다는 귀찮은 것이며, 결국 이것이나 저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받아들여 통제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신령한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오랫 동안 날마다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생각들을 훈련한다면 신령한 것들에 생각을 집중하기가 쉬워진다. 정신적인 기도를 오랫 동안 실천하는 것(즉 일하거나 여행을 하면서도 내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거룩한 생각이라는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중략 -------------------------------------------
12.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곳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의 가장 고귀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이다. 종교적 행동이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교회의 일부분이 되어야만 한다. 교회 안에 중심을 두지 않으며 교회에서 나오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각기 종교의 어느 한 면에 기초를 두고서 활동하고 있는 성경학교, 종교 서적 보급회, 기독교 실업인회, 신학교 및 많은 모임들은 경건하고 담대하게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밖에 있으면 전혀 영적인 의미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거처이며, 그렇기 떄문에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기관이다. 교회는 가정, 국가, 학교 등과 병존하는 하나의 선한 기관이 아니라, 모든 기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신적 기원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의미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고 물으며, 기독교회가 크게 분열되어 있어 참 교회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분별할 수 없다고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우리는 회의자의 은밀한 미소 때문에 크게 상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의 허물들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만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두움과 불신앙의 세상 어디에서든 교회가 자신을 타나내는 곳에서 교회의 가치를 인정한다.
자기의 구원을 그리스도께 의뢰하며 신령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세상이나 육과는 전혀 교제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을 성령께서 모아 들이는 곳에서 교회가 발견된다. 교회의 지체들은 필요에 따라 지구의 표면에 흩어져 있으며, 거리나 환경에 의해 분리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참 교회의 지체 속에는 귀소 본능, 그리고 목자와 우리를 원하는 양의 동경이 있다. 소수의 참 기독교인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함께 모여 기도나 예배를 위한 정규적인 집회를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집회에서 성경 해설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관점에 따른 형식으로 떡을 떼며, 버림받은 세상에 가능한 한 널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세포들이며, 각 세포는 참 교회, 보다 큰 교회에 속한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세포 속에서, 세포를 통해서 지상 사역을 하신다. 지역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멸시하는 자이다. 우리는 항상 교회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13. 필요하지만 위험한 조직 중에서
나는 사고 방식이 그리스도 중심이요 교회 지향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독교에 관련시킨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기독교 공동체가 과도하게 조직화되는 경향으로 인해 걱정해왔으며, 지금도 걱정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조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했다. 그러나 사실을 그와 정반대이다.
교회의 고동치는 심장은 생명-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교회 내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현존과 함께 교회를 신적인 것, 하나의 신비, 하나의 기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본질과 형태와 질서가 없다면, 이 신적 생명은 거처를 소유하지 못하며, 그 공동체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신약성경에는 조직에 대한 언급이 많다. 바울의 목회서신들과 고린도전후서는 이 위대한 사도가 조직자였음을 드러내준다. 그는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고 떠난 것이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장로들을 임명하며 그곳에 결여되어 있는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의도였음을 상기시켰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그 섬에 살고 있는 다양한 신자들의 집단들에게 질서를 부과하는 전권을 디도에게 맡겼음을 의미한다. 질서는 오직 조직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조직의 목적, 그리고 그것이 과도해질 때에 수반되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몇 가지 잘못을 범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조직을 갖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에 따른 결과는 혼란과 무질서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돕거나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또 생명을 조직으로 대신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살았따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규정과 규칙들에 매료되어 터무니없이 그것들을 증가시키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 내에서 자발성이 시들고 생명이 폐쇄된다.
나는 이 잘못들 중에서 주로 후자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많은 교회 집단들이 지나친 조직 때문에 멸망했다. 물론 조직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멸망한 집단들도 있다. 현명한 교회의 지도자라면 이 양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혈압이 너무 높아도 죽지만 너무 낮아도 사망한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이 그의 생명을 앗아가는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어떻게 해서 죽든지, 죽는다는 결과는 동일하다. 교회 조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 극단을 피하며 그 사이에서 성경적인 균형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14. 분할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중에서
언제 연합하며, 언제 분할할 것인가?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변하려면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림짐작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연합은 모두 선한 것이며 분열은 모두 나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혀 노력함이 없이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역사가 제공하는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이 살아갈 표준이 되는 심오한 영적 규례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만일 선한 사람들은 모두 연합에 찬성하며 악한 사람들은 모두 분열에 찬성한다면, 또는 그 반대가 된다면, 모든 일을 판정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는 만일 하나님께서는 연합하시며 마귀는 항상 분열한다면, 이 혼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길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태는 그렇지 못하다.
나눌 것을 나누며, 연합할 것을 연합하는 것이 지혜이다.
최초로 구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사을 창조하실 때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이 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자연계에서 행하시는 모든 조처들의 방향을 설정했다.
현재 인간 세상에는 뚜렷한 윤곽들이 거의 없다. 인류는 타락했으며, 죄는 혼돈을 가져왔다. 밀이 가라지와 함께 자라고, 양과 염소가 공존하며, 의인들의 농장과 불의한 사람들의 농장이 나란히 있으며, 술집 옆에 선교센터가 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교회는 결코 이런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연합이란 것은 타협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살 만큼 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 진리에 충실함, 선한 양심의 보존 등이 광산에서 캐낸 금강석이나 오빌의 금보다 더 귀한 보석이다.
15. 지도자의 책임 중에서
좋지 않은 영적 지도력을 유바라는 데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그 중 몇가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1. 두려움
섬기는 자들에게도 사랑받고 칭찬받고픈 강력한 소원이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대중의 불만을 유발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팔짱을 끼고 앉아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미소를 보내고픈 유혹을 받는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함정을 가져온다"고 성령은 말씀하시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목회 사역에 가장 잘 적용되는 말이다.
2. 경제적인 곤경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많은 목회자들은 충분한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흔히 목사들의 가정은 대가족인 경우가 많다. 이 두 가지 요인들을 합하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환난과 시험을 가져다 줄 상황이 된다. 강단에 선 사람이 독립하려 할 때, 회중들이 그것을 막으려고 교회로 들어가는 돈줄을 제거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 야망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못하는 목회자는 자신을 위한 처소를 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군중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교계에서 출세하는 방법이다. 그는 성도들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인도한다.
4. 지적인 자만심
불행하게도 종교계에는 지식층이라는 무리가 있는데, 그것은 거창하게 개인주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노예적인 순응주의자들이다. 강단에 선 젊은 지식인은 자신이 진부하고 평범한 것을 말한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가다듬은 옥스포드 액센트로 이야기한다.
5. 참된 영적 체험의 부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본 곳까지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은 많으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인도하는 일에 실패하는 원인을 설명해준다. 즉 그들은 성도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6. 준비의 부족
교회에는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에 적합치 않은 종교적 아마추어들로 법석거리고 있으며, 그 결과 성도들은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엉뚱한 길로 이끌려가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경건한 지도에 대한 상급은 매우 크며 지도자의 책임은 무척 크므로 아무도 그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17. 절제 있는 용기 중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결코 경시해서는 안될 사람이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닮은 자제심과 인내심, 그리고 거의 완전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은혜가 없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는지는 회심하기 전의 그에 대한 간략한 묘사에서 나타난다. 그는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일에 가담한 후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기독교인들을 사냥하러 나섰다. 그는 회심한 후에도 어떤 문제에 관해 강력한 의문을 느낄 때에는 즉석에서 간략하게 판단을 했다. 마가가 일을 그만두고 돌아간 후 그가 즉각적으로 마가를 배격했던 일은 자신이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방법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고난을 받고 인내하시는 구세주와 더욱 친밀하게 되면서 바울의 결점이 치료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말년은 사랑의 감미로움, 그리고 자제와 박애의 향기를 지닌 것이었다. 우리 모두도 그처럼 되기를 기원한다.
성경에 겁장이의 병폐가 치료되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겁장이 영혼"은 담대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때로 그 예외적인 본보기로 베드로가 인용되는데, 그에 대한 기록에는 오순절 전 후에 그가 소심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주는 사실이 없다. 한두 번 경계선에 접근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폭발적인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담대함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오늘날 교회에는 용감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두려움은 마치 옛 저주처럼 교회 위에 드리워 있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 직업에 대한 두려움, 인기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서로서로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유령들이다. 그런데 많은 지도자들은 우스꽝스러운 담대함으로 안전하고 기대되는 일들을 되풀이함으로써 담대하다는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소심한 용기는 치료책이 아니다. 솔직하게 직언하는 습관을 배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을 귀찮게 만들며 많은 손해를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조용한 용기인 듯하다. 그것은 매순간 내재하시는 성령에게서 힘을 끌어오며 자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한 용기는 인내하며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용기를 부어 주시기를 바란다.
---------- 중략 -------------------------------------------
23. 신학의 대용품은 없다 중에서
비록 무해한 듯이 보이는 것이라도 나로 하여금 성경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은 모조리 나의 원수이다. 나의 관심을 하나님과 영원한 것에 관한 묵상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모조리 내 영혼에게 해를 끼친다. 만일 삶에 대한 근심이 내 마음에서 성서를 밀쳐낸다면, 나는 지극히 적은 것을 잃는 데 그칠 수 있는 곳에서 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만일 내가 성경 대신에 다른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미혹되고 유린되어 영원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삶의 비밀은 신학적이며, 하늘나라의 열쇠도 역시 신학적이다. 우리는 어렵게 배워서 쉽게 망각하며 많은 혼란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강단에서 그것을 전파하며, 찬송으로 그것을 노래하며,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기독교 신자들을 만날 때에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 중략 -------------------------------------------
36. 단순(Simplicity)과 고독(Solitude)을 기르자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생활을 단순화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상에서 말할 수 없이 귀한 보물들을 잃게 된다.
현대 문명은 지극히 복잡하기 때문에 경건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문명은 소동들을 증가시킴으로써 우리를 지치게 하며, 우리의 고독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를 쓰러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 속에서 새 힘을 얻고 다시 세상에 나아갈 수 있다.
문명 세상이 사람들을 파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고독과 정적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현 시대와 너무나 동화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소음이나 주연 때문에 약간 성가심을 느낄지는 모르나,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조처를 내릴 만큼 귀찮아하지는 않는다.
날마다 세상을 떠나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라. 침실이라도 좋다(나는 한동안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보일러실로 들어가곤 했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당신을 뒤덮을 때까지 그 은밀한 곳에 머물라.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을 신중하게 조정하여 귀에 들리지 않게 하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하고서 당신의 밀실에서 나오라. 당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려 하지 말라.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며,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상관하지 말라.
당신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 간추린 형태의 의견─관계 없는 단편적인 사실들, 빈틈 없는 이야기들, 재치있는 속담들을 피하라. 매순간 내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이렇게 얼마 동안 하다 보면, 당신은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다. 공정함과 어린 아이와 같은 정직과 겸손을 실천하라. 성실하게 기도하라. 필요 없는 독서를 줄이라. 그러나 당신의 내면 생활에 중요한 책들은 많이 읽으라. 당신의 정신을 산만한 상태로 오랫동안 버려두지 말라. 방황하는 생각들을 불러 들이라.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라. 영적 정신 집중을 연습하라.
위에서 말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묵상함을 통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조건으로 한다.
---------- 중략 -------------------------------------------
40. 사람들은 왜 성경을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며, 그 말씀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들의 의미를 감추신다. 설교자는 진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비유들은 현대의 "예화"들과는 완전히 반대가 된다. 현대의 예화는 뜻을 밝히기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비유들은 모호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때때로 제자들은 이해하고 원수들은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말씀하셨다(마 13:10-17).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빛을 주었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구름과 암흑이 되었듯이, 주님의 말씀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비추어 주지만, 오만한 불신자는 도덕적으로 어두운 밤 속에 버려두신다. 말씀의 능력은 그 말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보존되어 있다. 주님의 비밀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함께 있다. 회개치 않는 심령이 발견하는 성경은 살이나 생명이나 호흡이 없이 단순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골격에 불과하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도 세익스피어의 저서를 읽을 수 있으며, 플라톤의 말을 한 마디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의 저서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믿음과 순종은 물론이요 회개와 겸손도 필요하다.
자연계의 일에서는 증거가 믿음보다 선행(先行)한다.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신앙이 이해보다 선행한다. 자연인이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구원의 믿음은 증거에서 끌어낸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 영의 일,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확신의 주입이다.
구원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반응하며, 자신의 전인격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자연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올바르게 믿는 것은 죽었던 나사로가 그리슷도의 명령을 받고 무덤에서 걸어나온 것 만큼이나 큰 기적이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책이므로 초자연적인 도움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41. 믿음에 대한 교리적인 오해 중에서
믿음의 교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계획 안에서 중심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에게 말씀을 건네시므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참 계시가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익은 믿음이라는 문을 통과하여 각 사람에게 임한다. 죄사함, 정결케함, 중생, 성령, 기도에 대한 응답 등은 모두 믿음에게 주어지며,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믿음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은 보편적인 복음주의 교리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교리이다.
믿음은 우리가 소망을 갖는 데에 필요하며, 또 우리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관련된 것은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배우지 못하는 일이나 오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그치지 말고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아직도 걱정을 하고 있다. 특별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교사들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 즉 믿음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신령한 열매가 부족한 것.
2.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외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그다지 없는 것.
6. 나는 신앙을 순종의 대체품, 현실 도피, 열심히 생각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처, 연약한 성품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도의 활기, 본성적인 낙천주의, 감정적인 전률 등을 칭하기 위해 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들도 보았다.
7.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불신앙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화했지만 그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먼저 신앙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앙이란 우리가 참이라고 알고 있는 하나의 진술을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성에 기초를 둔 믿음도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증거를 요구하며, 자체 안에 도덕적이거나 영적 본질의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며,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시는 분의 도덕적인 완전 이외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그 말씀이 우리의 오관 중 어느 것이나 논리적 결론에 어긋나더라도, 신자는 계속 그 말씀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되시며, 인간이 거짓말장이다."라는 것은 참 신앙을 지닌 사람의 말이다. 하늘나라는 그러한 믿음을 시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증거들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품에서 쉼을 찾기 때문이다.
근래 어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계시를 뒷받침할 증거를 자연계에서 찾는다.
이러한 형제들은 자신이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 자신의 근본적인 불신앙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성경이 알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다.
신앙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간의 감각이나 그것들이 제공하는 자료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신앙은 기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신뢰하게 하기 위해 주시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행동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믿는 사람은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안에 참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심령에게만 믿음을 주신다. 참 회개가 있는 곳에는 순종이 있다. 왜냐하면 회개는 과거의 실수와 죄에 대한 애통일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46. 영적 독서에 대한 고찰 중에서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의 큰 문제는 독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요, 또 하나의 문제는 독서하는 법을 배운 후에 읽을 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쇄물에 압도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기에서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읽지 말하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약 1세기 전에 에머슨은 말하기를, 인간이 태어나는 날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70년 동안 계속 읽을 수 있다 해도, 70년의 세월이 끝날 때에 그가 읽은 분량은 대영박물관의 작은 벽감을 채울 분량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을 짧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는 출판된 책들의 1% 이상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책은 정보를 주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자극을 주어 스스로 정보를 얻게 하는 책이다.
사상들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신은 사실들을 저장하는 저장소가 아니라 보는 눈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학자가 아니라 선견자가 될 것이다. 학자와 선견자의 차이점은 학자는 그저 보는데 그치지만, 선견자는 꿰뚫어 본다는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막대한 차이이다.
진정한 의식을 가지고서 읽은 것은 영혼 안에 들어오므로, 가장 훌륭한 것만을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선택할 자료들이 충분해야만 그리스도인들이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독서 습관을 잘 훈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달하거나, 최소한 통달하려고 노력하면서 시간시간, 하루하루, 매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죠지 뮬러가 말한 바와 같이 "묵상을 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경 다음으로 귀중한 것은 좋은 찬송가집이다. 젊은 청년이 왓츠(Watts)와 웨슬레의 찬송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일년을 보낸다면, 그는 훌륭한 신학자가 될 것이다. 그 다음에 청교도들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책들을 읽는다면,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놀라운 결과를 얻을 것이다.
47. 성도는 혼자 걸어야 한다 중에서
위대한 성도들은 대체로 고독한 사람들이었다. 고독은 성도가 거룩함을 얻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하는 대가인 듯하다.
경건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에녹이 그 시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노아도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홍수 이전에 살았떤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는데, 모든 증거는 그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동안에도 고독하게 살았음을 나타내준다.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와 롯은 물론이요 많은 종들과 목자들이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 및 그것에 대한 사도의 논평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그의 영혼이 별을 닮았으며 따로 거하였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모세도 역시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라오의 궁에 있을 때에 홀로 먼길을 산책하곤 했다. 이렇게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산책하던 중 이집트인과 히브리인이 싸우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동족을 구하려 했다. 그 결과로 이집트를 떠나게 된 모세는 사막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선지자들은 서로 크게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독의 실천이었다.
가장 계시적인 것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묘사했던 분께서 고독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이다. 그의 깊은 고독은 많은 무리 속에서도 제거되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비록 무수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을지라도, 그의 십자가는 오로지 그만의 것이며, 그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준다. 아무도 십자가를 진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마 26:56).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산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라고 권면하며, 자신의 몫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구세주께서 사람들 앞에서 찬미를 받으시는 것을 보기를 원할 뿐 자신이 영광 받는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의 기쁨은 주님은 존귀하게 되고 자신은 무시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가 최고의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종종 시끄러운 종교적 이야기가 한창 진행중일 때에 잠잠하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둔하고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평하며, 따라서 그를 피하게 되므로 그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 커진다.
그는 군중들 속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내적 고독 속에서 배운다. 즉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선을 소유한다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