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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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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워치만 니
lhyunsik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 1.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주관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큰 어려움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 주관적이면 사역을 잘해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관적이라는 것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이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의견만을 고수한다. 바로 이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인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바뀌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붙잡고서 계속 이 의견을 고수해 나가는 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이유를 표명하기도 전에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도,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후에도, 다른 사람이 이유를 밝힌 후에도 그의 이러한 선입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자아가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아가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히 강경한 주관이 있으며, 이 주관은 버리기가 쉽지 않고 고침받기가 쉽지 않다. Ⅱ 주관적인 것이 낳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주관적인 것이 주는 손실은 무엇인가? 만일 한 형제나 자매가 주관적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말조차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것으로부터 주관적이지 않게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오직 당신의 내면이 비워져 있어야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갈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 사람이라면, 당신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된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어려움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사역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어려움이다.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이 너무 많고, 당신이 깨뜨릴 수 없는 의견과 사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말만을 계속하게 되며, 자신의 사정으로만 꽉 차 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와서 그의 무거운 짐과 그의 사정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려 할 때에, 당신은 반나절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아주 오랜 시간을 듣고 있어도 파악해 내지 못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어려움이다. Ⅲ 주관적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확신과 분명함이 있어서 모든 것이 다 분명하며,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규정이 있어서 어떤 것도 다 그렇게 규정하며 그의 내면에는 어떠한 의견이 있어서 무엇에나 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그에게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배우게 하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역하러 나오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당신이 어떤 일을 조금 배우게 하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처럼 어려워서 그에게 억지로 넣어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의견으로 가득 차 있고, 주장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록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때에 그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는 것은 그에게 약을 먹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다. 만일 사람이 밥을 먹는 것조차도 넣어 주어야 한다면, 그가 일생 동안 밥을 얼마나 먹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어떤 형제를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형제여,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 한다면 일생 동안 얼마나 배울 수 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과 손실은 바로 배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당신이 그로 하여금 배우도록 할 때에는 항상 싸우는 것같이 하여 그를 쳐서 엎드러뜨려야 그가 조금 배우게 된다. 그러나 다음번에도 이와같이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요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다른이들의 충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주관적이지 말아야 한다. 형제 자매여, 우리가 손에 넣은 도움은 각 방면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달에 한 가지를 배우고, 육 개월에 한 가지를 배우고, 심지어 일년에 한 가지를 배운다면 당신은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갈수록 배우기가 더 어려우며 갈수록 더 주관적이 되어 간다. 이 주관적인 것은 실제로 너무도 큰 어려움이다. 주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길에서 마땅히 견고하고 정직하며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만일 그 자신의 의견과 견해와 그가 규정한 것이 그렇게 견고하여 요동하지 않는다면, 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적으며 일생에 있어서 그리 큰 쓸모가 없다. 우리는 한면으로 주님 앞에서 견고하여 요동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 한면에서는 주관적이어도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배우기가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지 주관적이지 않은지를 알고 싶다면, 단지 당신이 어떤 것을 배우는 데 있어서 빠른지 느린지, 그것을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영에 속한 일에 있어서 항상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많이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기만 하면 된다. 배우는 데 있어서의 방해물은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당신에게 영향을 주어서 당신으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게 한다. 영적인 일에서 진보하는 데에는 하나의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여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리고, 우리의 사상이 하나님께 열려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연다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을 활짝 여는 것은 주관적이지 않은 것보다 더 깊어야 한다. 그러나 첫단계는 언제나 주관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주관적이면 하나님께로의 문이 닫혀 버린다.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강경하지 않고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쉽게 인상을 받지 못한다.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인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채찍과 지팡이를 사용하셔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쇠망치를 사용하여 그들을 치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눈이 움직이면 즉시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과 노새 같아서 굴레나 채찍 없이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배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그와 다투시며 그를 막다른 길로 인도하시고 큰 장애를 만나게 하셔도, 그는 여전히 다투기를 고집하여서 하나님 앞에 그가 마땅히 배워야만 할 공과를 단번에 복종하여 배울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드럽지 않고 온순하지 않으며 아주 강팍하고 강경하다. 그들이 사역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생동안 배운 공과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공급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어려움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손실이다. Ⅳ 주관적인 사람에게 있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만질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줄도 모른다. 주관적인 사람은 모두 북극과 남극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답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부드러움이 요구되며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자 즉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조금도 주관적이지 않다.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발람의 마음이 재물의 이익에 기울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반드시 가야 한다는 주관적인 관점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차례, 두 차례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까지 기도하였다. 사람이 일단 자신의 규정을 정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 위로 걸어 가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에서 많은 때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즉시 출발할 필요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당신이 모든 길을 예비하여 가고자 하였는데 주님이 즉시 멈추라고 하시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주의 영이 당신이 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즉시 정지할 수 있는가? 주관적인 사람은 정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결코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배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면 즉시 갈 수 있고 「멈추라」하시면 즉시 멈출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 두 마디가 아주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데도 가기가 쉽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는데도 멈추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어려움이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얼마나 힘을 소모해야 자신들을 밀어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면 또다시 그들을 멈추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배움이 있는 사람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아주 부드러워서 하나님이 움직이라 하시면 움직이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말라 하시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중한 채찍이 있어야만 비로소 움직인다. 그가 한 번 움직인 후에는 일평생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으며, 그는 언제나 줄곧 이렇게 계속하기만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다시 엄한 손으로 그를 치셔서 그로 하여금 멈추게 하실 수 있다. 그의 주관적인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도 어렵게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것은 그가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만일 주관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거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들을 얻을 생각도 없었고 이스마엘로 만족해 했었는데, 당신이 내게 아들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나와 사라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고서 어떻게 또 이삭을 드려 번제물로 삼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형제 자매여! 만일 주관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은 도전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무슨 이유든 만들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굳게 믿었다. 그가 자기 아들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빼내어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아들 대신 제물로 바칠 수양 한 마리를 예비하셨다(창 22:10, 13). 만일 아브라함이 주관적이었다면, 그는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고서 이번에는 저렇게 하라고 하시니 그 뜻을 참으로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제단에 올라가기가 어려운데 일단 제단에 올라가서는 또한 거기서 내려오기가 어렵다. 제단에 올라가는 데에도 몇 년을 소비해야 했지만 일단 올라가서는 도무지 고집부리며 내려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주관적인 사람은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멈추라고 명령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국 마지못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그 순종은 여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한 것이다. 당신이 그를 데리고 오려고 해도 그는 돌아올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철회하도록 하려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로 하여금 다시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한 가지 매우 특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만일 당신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두어서 하나님의 뜻은 바꾸면서 당신의 뜻은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길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어려움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를 온순한 말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야생마는 탈 수가 없으며, 야생마를 훈련시키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렵다. 야생마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에 껑충 뛰어 올라타고는 말이 뛰고 발악하게 하여 아주 지칠 정도로 달리게 할 때에야 비로소 말을 잡을 방법이 있게 된다. 말 등에 탄 사람의 유일한 방법은 말 등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몇 십 리든 몇 백 리든 계속 달리게 하여 말이 이 주인에게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말은 말을 잘 듣게 된다. 이러한 기수는 말들이 아주 정확하게 달리게 될 정도로 야생마를 훈련 시킬 수 있다. 가장 작은 원 한가운데에 기둥을 꼽아 놓고 끈으로 말을 기둥에 매어 두면, 말이 조금만 한쪽으로 치우쳐 달리거나 조금만 잡아 당겨도 끈은 끊어진다. 말이 조금만 달려 나가도 그 끈은 똑바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들은 꼭 알맞게 달릴 줄 알며, 원을 따라서 몇 백 바퀴도 돌 수 있는데 그 반경은 아주 길다. 이 정도까지 달릴 수 있으면 문제가 없다. 이후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 말들이 작은 굴을 지나도록 해야 하며 또 큰 굴을 통과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말은 언제나 당신을 감히 거스르지 않게 된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우리 야생마들을 확실하게 훈련시키시는 것은 아주 큰 일이다. 주님은 마치 야생마를 훈련시키듯이 큰 힘을 들여서 우리로 그분께 순복하게 하신다. 훈련을 받은 야생마의 실패는 바로 그의 주관적인 것에 기인한다. 잘 훈련된 말은 위에 탄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얼마를 달려야 할 지를 알고 달린다. 시편 32편 8절과 9절은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의미 심장하다. 우리는 말이나 노새 같아서는 안 된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도 어느 단계까지는 훈련될 수 있어서 주님 뜻대로 움직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도를 받을 때에 응당 길들인 말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말이 그렇게 훈련 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말이나 노새를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말이나 노새는 주인이 그의 몸 위에서 최소한 한 번 때리거나 혹은 움직이거나 고삐를 잡아 멎게 해야만 주인의 뜻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무지한 노새와 말은 이것을 할 수가 없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눈으로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원문 참조). 주님의 눈이 한 번 움직이자 마자 그는 즉시 그 뜻을 알았다. 주의 손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주의 눈이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그는 즉시 그 뜻을 안다. 우리는 특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눈을 주의해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여기에서 조금도 유용함이 없다. 형제 자매여, 결코 사람 됨됨이의 문제나 사람의 성격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의 인격이 주관적이라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객관적이 될 수 없다. 만일 당신의 일생이 모두 다 주관적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훈련된 말처럼 될 수 있다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로서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면 우리는 즉시 거기로 갈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안다면, 우리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주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안다면 우리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자신의 의견이나 견해나 주관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주의 영을 기다리게 하여 언제든지 주님이 움직이라고 명하실 때 움직이고, 멈추라고 명하실 때 멈추게 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때에 주님이 당신에게 멈추라고 요구하시지만 당신은 멈출 수가 없고 멈출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내면이 자아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때에도 반드시 자기 자아를 바깥에 두어야 하며, 주님이 가라 명하시면 가고 멈추라 명하시면 멈추어야 한다. 이 때 우리의 자아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아를 내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멈추라고 명하셔도 멈출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에 즉시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을 때에 즉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큰 어려움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몸에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문제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의 어떠함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얘기해 준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코 이런 일은 없다. 오직 옳은 사람만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사람 됨됨이가 옳지 않으면 방법이 옳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당신이 어떤 류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아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 방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만일 사람이 옳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관하여 모든 것을 배웠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 자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사람,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눈을 한 번 움직이시기만 해도 즉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순종하여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멈추어질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종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환경 아래서도 능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이다. 외적으로 아무리 심한 요구가 있고 아무리 심한 말을 듣더라도 그는 상관치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를 방해하는 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쉽게 변화되고, 하나님에 의해 쉽게 멈춰지며, 하나님에 의해 쉽게 인도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오직 이렇게 될 때만이 사람들을 그분의 길로 이끌 수 있다. Ⅴ 주관적인 것에 관해서 우리가 좀더 말해 두어야 할 점은, 오직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서 주관적이지 않게 된 사람만이 주님에 의해 이끌려 다른 사람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관적인 사람에게 결코 다른 사람을 다루는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게 할 수도 없다. 만일 주관적인 사람을 사역 가운데 놓아두고 그로 형제 자매들을 인도하게 한다면, 결과적으로 주님의 뜻은 아주 일부분이 되고 그 자신의 생각이 매우 많이 첨가될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게 만들려고 한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하나님에 의해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게 하려는 의도가 없기까지 이끌리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쓸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고 파쇄되어서 결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말만을 듣기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생활이나 견해를 간섭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간섭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어떤 일이든지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정도까지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어야만이 하나님께 쓰임받아 하나님의 권위를 표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의 몸에 있는데도 오히려 그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또 이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여 하나님 백성 가운데의 대인이 되려 하거나 또는 선생이 되려 하거나 아버지가 되려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 20:25-26)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주장과 요구가 없고 사사로이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분께 파쇄되지 않은 사람을 사용하실 수 없으며 그런 사람을 신뢰하실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양무리를 그의 손에 맡기신다면, 그는 양들을 모으기는 커녕 도리어 흩어지게 하기 쉽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양무리를 맡길 수 없으며 그들 손 안에 놓아두실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 뜻대로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방법이 없다. 바울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 자신이 독신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동정의 몸을 지키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지만 종래 결혼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우리의 형제 바울이 얼마나 제한을 받았는가를 보라. 만일 바울이 주관적인 사람이고 그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모든 형제 자매가 독신으로 동정을 지켜야 하고 모든 사람이 결혼하지 말아야 하며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쉽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지켰으며 또한 그가 지킨 것의 가치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 외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육신의 고난을 면하기를 원하였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강하였지만 한면에서는 아주 부드러웠다. 어떤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비록 바울은 독신자였지만 그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말하였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러한 위치에 서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은 결코 당신 개인의 그러한 감정으로 인하여 하나의 진리를 지나치게 큰 위치로 밀어 놓아서는 안 되며, 또한 당신 개인의 느낌에 따라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서도 안 된다. 당신의 느낌이 하나님의 진리를 좌우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이끌어 주님을 따르게 하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완전히 파쇄되어야 하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이다.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그렇게 강한데도 하나님이 만일 그분의 사역을 당신에게 맡기신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당신이 멋대로 일하고 당신 마음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 않기를 배워야만 하며 결코 우리의 주관적인 것으로 어떤 사람이나 일을 간섭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간섭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놓여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염검을 사용하여 사람이 먹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셨다. 만일 창세기 3장의 화염검이 창세기 2장 안에 있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키게 하셨더라면 사람은 영원히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쉽게 이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먹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뜻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언제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에 복종하기를 원해서는 안 되며, 당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다른 사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담이 있어 형제 자매들에게 말하였는데, 그들이 만일 당신의 말을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말을 철회할 수 있다. 절대로 당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배역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신다. 만일 사람이 당신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억지로 당신 말을 듣도록 요구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능을 발견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우리의 기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듯이 우리 역시 어떤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주관적일 수 없으며 결코 어떤 사람에게든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당신의 책임은 더욱더 커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번 잘못 말하면 당신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당신이 기뻐하며 일이 끝났다고 여길 것이 아니다. 이 책임은 너무도 막중하며 이것은 너무도 큰 일이라는 것을 당신은 명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데 오히려 당신의 길이 바르지 않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분명치 않다면 그것은 정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따라가는 소경만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두 소경이 모두 구덩이에 빠져 버리게 된다(눅 6:39). 좇아가는 사람만 넘어지고 인도하는 당신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여기지 말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두 소경 모두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쉽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배우는 사람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많은 사람의 교사가 되어서 그들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결과적으로 두 사람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나의 말을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백 이십 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칠팔십 퍼센트만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엄중한 말을 쉽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지 못하며 자신만만해 할수록 우리는 굳게 설 수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지 말라.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어느 정도까지 인도해야 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주관적인 것의 위험성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은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되기를 좋아하며,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빛이 아니며 당신의 뜻이 다른 사람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끌어 당신 앞서 가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억압하여서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억압하여서 하나님께 마지못해 순종하게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 자매가 기꺼이 당신과 함께 걷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형제 자매가 자기의 길을 선택할 때에는 그들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라.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우리와 함께 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가게 해야 하며 또한 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억지로 다른 사람을 강요하여 자신의 말을 듣고 따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결코 이렇게 할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으며 그 자신도 어떤 좋은 배움이 없다. 하나님도 사역에 있어서 결코 그를 신뢰하실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해 놓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가 없다. 오직 부드러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모른다. 주관적이지 않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기의 의견과 자기 자신의 길만 있으며 자기의 뜻과 자기의 교리만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역이 놓여진다면, 교회는 즉시 분열 될 것이다. 교회가 나뉘고 갈라지는 것은 모두 사람의 주관적인 것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개인의 일만을 할 수 있을 뿐 교회의 일은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개인의 봉사만을 알 수 있을 뿐 무엇이 몸의 봉사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권위가 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순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인도하도록 그들을 권위로 세우실 수 없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일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젊은 형제가 함께 사역하러 나갈 때에 당신은 언제나 그를 한번 시험해 보아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가 되려 하고, 또한 동시에 다른 사람의 머리도 되고자 하며, 항상 그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은 충성스럽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떤 상태가 있는데 그것은 그에게 충성이 있고 결코 다른 사람을 강요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견고함을 얻지만, 다른 면으로는 결코 주관적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개개인 모두에게 하나님께 순복하거나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사역을 할 때 우리는 그 길을 사람 앞에 놓고 각자가 길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선택은 각 사람의 일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선택하지 않기를 배우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Ⅵ 주관적인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주관적인 것은 일종의 성격과 습관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 파쇄되는 공과를 배웠다면, 당신은 즉시 일상 생활의 크고 작은 많은 일들 속에서도 주관적인 것이 파쇄된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서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의견을 내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젊은 사람이 주님을 섬기러 나올 때, 당신은 단지 몇 명의 형제를 그와 함께 두기만 해도 즉시 그가 주관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에는 당신이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즉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음식은 좋아하고, 어떤 음식은 싫어하며, 어떤 옷은 입기 좋아하고 어떤 옷은 입기 싫어하며, 어떤 타입의 매트리스가 잠자기에 좋고 또 그렇지 않은지를 아주 부산하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계속 주장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단지 두 자매를 한 방에 같이 유숙시켜 보라. 그러면 어떤 자매가 주관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만일 두 자매가 똑같이 주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한 자매만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함께 지낼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똑같이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금 이후로 우리가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역에 어려움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사정이 생길 때에 우리는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억지로 우리의 의견을 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귀중한 의견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이것이 주관적인 사람의 감정이다. 충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많은 말을 여전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남의 일에 상관하기 좋아하기 때문이거나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만도 아니며 또한 온종일 부닥친 일마다 말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 일에 있어서 반드시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만일 일에 부딪힐 때마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즉시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든 사람의 선생으로 세우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그가 주관적인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사람의 주관적인 성격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역을 해나갈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충성된 사람은 다만 말해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다. 충성된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말하기를 좋아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충성된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지 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괴로워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사람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주관적인 사람은 말하는데 욕심이 있어서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느낀다. 그는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즉시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신은 보았는가, 주관적인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그가 말하기를 좋아하고 의견 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뜻이 많은 사람의 멍에가 되는데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에 순종케 하려고만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몹시 괴로워한다. 형제 자매여! 주관적인 사람과 충성된 사람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충성된 사람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많은 때에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신은 무엇이 충성이고 무엇이 주관적인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만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주관하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는 많은 일에서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 일을,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저 일을 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첫째가는 방법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며 자신의 길이 가장 정확한 길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한다. 형제 자매여,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주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오직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고 당신의 주관적인 것을 처리받았을 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큰 사람 만이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을 참아낼 수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다른 사람이 그와 다른 것을 참아 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만일 기질이 똑같은 두 사람이 한 방 안에 놓여지게 되면 그 방에는 평강이 없다.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의견이 있어서 그 방은 다툼으로 가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게 되고 거기에는 어려움만이 있게 된다. 때로 주관적인 사람은 모든 일들을 그의 손 안에 넣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 일은 저렇게 해야 된다는 규정이 그 속에 즉시 생기게 된다. 주관적인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기를 좋아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며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어려움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알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주관적인 사람에게 그분의 일을 위임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 또한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가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 깊지 않은 것을 보아 왔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성격은 가르침을 받으려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 성격은 더이상 무엇을 배울 수가 없으며 또한 유용하지도 못하다. 주관적인 사람은 일을 간섭하고 주장을 내세우길 좋아한다. 사람이 주관적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는 더이상 어떠한 것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그에게 어떠한 것을 위탁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는 이미 그의 모든 힘을 그의 주관적인 부분에 다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힘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은 그 자신의 포도원을 동시에 지킬 수 없다. 형제 자매여! 우리에게는 주관적으로 행할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많은 사역과 책임과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질구레하고 중요치 않은 일들에 간섭할 틈이 없다. 우리는 힘과 시간을 들여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버려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포기한 사람만이 다른 많은 형제 자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러 갈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주관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규정해 놓으신 사역을 저버리는 사람이며 자기의 일을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의 일만을 간섭하는 사람이다. 만일 사역자가 자기의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만 간섭한다면, 그의 일은 반드시 형편없어 질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주관적인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잘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분의 사역을 위탁하실 수 없으며, 설령 그에게 위탁하신다 하더라도 그는 해낼 수 없다. 주관적인 사람을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주관적인 성질은 이미 양성(養成)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주관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 생활과 다른 사람의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주관적이다. 사실, 주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그는 무슨 일이나 다 참견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의 의견이 있고 견해가 있으며 그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일에서의 아주 큰 고충이며 방해물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간구해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유순하고 강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 자매 앞에서도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강팍하지 않게 하소서.』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증거할 때 그의 말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형제들은 바울을 대할 때 그가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증거에 대하여 결코 느슨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무게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그는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그리 엄하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분별하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은 사역에 있어서는 엄하고 강해야 하지만 당신 자신은 결코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어떤 사람은 시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이는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빌 1:15-18). 당신은 바울의 생애의 균형된 면을 보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와 한 길을 갈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른 길을 갈지라도 그들이 형제 자매이므로 마음속에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간증에 있어서 충성스러워야 하며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조금도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충성된 자는 주관적이지 않는 반면에, 주관적인 사람은 반드시 충성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해 온 것을 요약해 보면, 주관적인 사람은 바로 파쇄되지 않은 자아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파쇄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있어서나 당신 자신의 일에 있어서 당신이 어떠한 주관적인 것도 가지지 못하도록 다스려 주시길 주님께 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쳐서 다스리셔야만 당신은 비로소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주관적이게 된다. 사람이 엄하든 엄하지 않든 거기에는 항상 의견이 있고 방법이 있으며 항상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더이상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한 차례의 심한 다룸을 받아서 온전히 파쇄되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당신은 어떤 일을 당하든 간증에 있어서는 충성스러울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것은 그들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 당신은 매번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많은 사람의 스승이 되려 해서도 안 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정해 주거나 다른 사람이 할 일을 간섭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의 사역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는 마땅히 강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드럽고 유순하며 주관적이지 않기를 배워야만 한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한국복음서원] -------------------------------------------------------------- 2. 『진리의 절대성』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항상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에서 구원받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이 진리에 절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형제 자매들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며, 사람이나 일의 영향을 받고 또한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면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는 것을 면하기 어려우며, 사역자가 사람이나 환경이나 혹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진리를 희생시키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구는, 진리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결코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희생할 수 있으나 진리는 결코 희생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감정은 희생시킬 수 있지만 진리는 희생시킬 수 없다. 사역하는 많은 형제들의 어려움은 그들의 친구들 가운데에서 발생하며 그들이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 또한 많은 책임 형제들의 곤란이 그들의 가정에서 발생한다. 그들은 가정이나 친구 혹은 친속들로 인하여 진리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의 형제이든 나의 친척이든 나와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진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사역자의 아들이 침례받을 의사를 표했다고 하자. 만일 이 사역자가 이 일을 진리에 관계된 일로 보고 참으로 진리를 고수(固守)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의 아들이 침례받는 일을 책임 형제의 손에 맡겨 자신의 아들이 침례받기에 합당한가의 여부를 그가 결정하도록 일임시켜야 한다. 많은 때에 어려움은, 사역하는 형제가 그의 아들이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항상 침례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는 부자(父子) 관계를 이 진리 안으로 가져옴으로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면, 그는 많은 일에 있어서 교회가 하는 진리의 안배를 따를 것이며 그 개인의 관계를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어느 곳에서 교리상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숙하게 왕래하던 몇몇의 형제를 좇아 나갔고, 다른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분이 두터운 형제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좇아 나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 어느 쪽도 진리에 전적으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며, 그들이 나간 것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사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입을 다물고 진리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진리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 사적인 감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친형제나 친자매 역시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영적인 일에서 인간 관계가 개입되면,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하게 된다. 인간 관계가 영적인 일에 개입되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감소되고 그렇게 되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규정하시고 명령하신 많은 것들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말씀들이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할 수 없음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종이 그가 할 수 없고 지킬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우리의 표준과 조화(調和)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낮출 수는 없다.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없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칠 수는 없다. 이것이 진리의 절대성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초월하고 당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당신의 인간 관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표준을 적용시킬 때에는 상당히 완화시켜 적용하려 하고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만 그 표준을 지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진리의 절대성을 지켜서 적용해야 한다. 그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진리를 적용시킨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낮추는 것이 된다. 이것은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우리의 친척이라고 해서 진리에 대한 그의 절대성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 교회에는 이러한 분열이 있었다. 어떤 한 형제가, 『나는 본래 당신들과 나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의 일을 당신들이 내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오늘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나누어져야 할 것이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오지 않아도 나누어질 것이고, 만일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오지 않아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라면 그는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왔는가의 여부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누어지는 여부를 통보가 왔는가에 근거를 둔다면, 이것은 사람을 진리 위에 두는 것이다. 어떤 지방의 한 형제는 따로 떡을 떼고 주님의 상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집회 가운데 어떤 형제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가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당신이 떠나는 것이 옳다면, 당신은 좀더 일찍 나가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약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면, 한 형제가 당신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떠날 수는 없다. 이것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라면, 당신으로 머물게 하고 나 또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당신이 나에게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나는 따로 떡을 떼서는 안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보았는가? 이러한 자아의 뿌리가 뽑혀야만이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당신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서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진리보다도 더욱 크고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쁘거나 기쁘지 않거나,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어야 하며, 가장 큰 고통을 느낄지라도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나쁘게 대하고 경시하여도, 우리를 한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사람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진리에 견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감정을 좇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실제로 너무도 담대해져서 항상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 자신을 좇아가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을 보아야 하며, 이 안에 자신의 감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할 때, 「나」라는 존재는 진리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진리 속에 조금만 개입시켜도 즉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한 형제가 밖에서 많은 말을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뒤 매우 좋다고 표했지만, 그는 그러한 말들이 별로 일리가 없다고 느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어떤 진리도 만져 보지 못했으며 교회 가운데 몇몇 형제를 접촉했을 뿐이었다. 그는 행실에 있어서도 상당히 산만하였다. 교회 안의 한 형제가 그의 영적 상태를 알고서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형제여, 당신의 요즈음의 행실은 너무나 산만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많은 예를 들면서 진실로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서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며 이 모임은 마땅히 반대당해야 한다고 비방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았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었다면, 어떤 사람이 그를 책망한다 하여도 그는 여전히 그러한 훈계를 받아들이며 교회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감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며, 인간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에 절대적이라면,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의 관계나 개인의 체험 혹은 개인의 환경은 진리 속에 있지 않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예전에 많은 사람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한 형제가 교회의 간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 길이 옳은 것은 이 형제가 가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면 이 형제가 간다고 해도 길이 올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길의 옳고 틀림은 이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형제가 훗날 실족할지라도 그가 택한 이 길은 옳은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은 오직 이 형제만을 바라볼 뿐이어서 이 형제가 옳다고 생각되면 그가 가는 길 또한 옳은 것이며, 이 형제가 옳지 않다면 그가 택한 길 또한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이렇다면 그들은 진리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보는 것인가? 이것은 사람이 결코 무책임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간증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켜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면에서 볼 때, 이 길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 근거는 진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의 다른 그리스도인이 범죄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실족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좋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형제 자매여,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족할지라도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지어도 되며 그리스도인이 실족하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믿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모두 실족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교회 안에 분쟁과 사역상의 어려움과 사역의 많은 다툼들에 있어서 만일 인간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감정 혹은 개인적인 문제가 다 제거된다면, 이러한 것들은 멈추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이 문제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면, 무슨 일이나 다 느슨하게 할 것이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이 없고 이러한 습관이 없다면 조만간 당신에게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어떤 형제는, 『나는 이곳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여기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이 결코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는 그 지방에 대해 애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게 되면, 그는 아마도 이곳이 옳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나에게 잘 대해 주면 옳고 나에게 잘 대해 주지 않으면 틀리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대우해 주는가에 따라서 이곳 교회가 옳은지 그른지를 단정한다면, 그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사가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많은 때에 어려움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나 자신을 한쪽에 제쳐놓고 자신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처리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개인의 감정과 선호, 우리가 상처를 받고 받지 않는 것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결코 개인의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옳은 것이며 틀린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틀린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길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다른 모든 사람이 걸어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이 아주 벅적벅적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요, 어떤 형제가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나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은 길이라면 어떤 형제가 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걸어가야 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면, 당신은 사람을 진리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다. 심판은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지 우리 개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 심판의 근거가 우리 개인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통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 된다.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다. 사람이 당신에게 잘 대해 준다고 해서 이렇게 하고 잘못 대해 준다고 해서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를 보아야 하며, 우리 개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일이나 개인의 감정이 사역 안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좋은 친구일지라도 교제를 끊어야 한다. 비록 날이면 날마다 동락하며 지내온 사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절대적이어서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사람의 사사로운 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우리는 비록 매일 다투고 마찰하는 사이일지라도 교제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로 인해 계속 교제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을 잘 갈 수 없다. 형제 자매여,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당신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아주 크고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진리는 당신 때문에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당신 자신을 비워야 하며 당신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저마다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기질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켜도 되는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도 없으며, 자신의 감정의 편안함을 위하여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는 사역자는 하나도 없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낮게 본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길을 갈 수 없다. 세상 법정에서도 법관의 재판은 법률에 대하여 절대적이다. 죄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죄가 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가 내 형제이기 때문에, 그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사적인 감정을 법정 판결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다. 법률은 절대적이어서 개인의 감정이 결코 그 안에 개입될 수 없다. 판사의 원수가 재판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법이 무죄라고 한다면 무죄 선고를 해야지 그의 사적인 감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판사는 법률을 지켜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해야만 한다. 개인의 감정은 결코 진리 안에 개입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일을 명심해야 하며 모든 사람의 감정은 진리 속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처리받아야 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사역에 있어서의 어떤 분쟁이나 어려움도 없게 된다. 만일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절대성을 유지한다면, 한 가지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 사역자들 사이에 말하기가 쉬워지고 일을 하기도 쉬워진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일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면, 그대로 실행한다 해도 당신은 다른 형제의 심중이 어떨 것인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만일 우리 모두가 진리의 절대성을 본다면, 오직 주의할 한 가지 일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셨는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꺼릴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절대성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길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만일 우리가 거기서, 「왕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주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또 유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진리는 우리 때문에 큰 손실을 입게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감히 많은 말도 할 수 없고 많은 일을 규정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다면, 어려움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된다. 만일 한 단체 안에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이 있고 사람의 수단이 없다면, 그 단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만일 한 단체가 수단과 수완을 쓰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타협하여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어떤 일을 행한다면, 그 단체는 실로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지키며 사역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마땅히 동역자들 사이에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거리낌이 있게 되고 수단을 쓰게 되며 배반이 있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해야 한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이 결코 사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당신 개인의 감정은 다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역 안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오늘 당신이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당신의 감정으로 인하여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당신이 진리를 돕고자 한다면, 이 마음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의 손으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자체가 지위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존중하기를 배워야 하며, 진리의 길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낮추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진리의 절대성", 한국복음서원] --------------------------------------------------------- 3.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벧전4:1).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성경의 가르침은 상당히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으시다. 어떤 철학 사상은, 사람의 육체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며 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떤 누림도 옳지 않다고 여긴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이러한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사상이 아니라는 것에 분명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녀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므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방금 밥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죽 한 그릇을 준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는 배 불러서 더 필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시편 23편 1절의 뜻은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므로 우리는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도 아낌없이 주신다는 말이다. 구약 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항상 분별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하를 막론하고 고센 땅은 애굽과 달랐다. 하나님은 고센 땅을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그러한 철학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면, 즉시 기독교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도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돌보시고, 돕고,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필요한 때에 그분은 또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하시고 시련을 주신다. 이것은 결코 그분이 날마다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채찍질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을 하시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시지만, 보통 때는 항상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굴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배하심에 있어서 그분은 늘 평상시에 하고자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며,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길은 바로 선택하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을 좇으며 생활한 세 용사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물 한 모금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생명을 초개(草葬)같이 여기고 다윗의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나갔던 것과 같다(삼하23:14-17).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규정된 것이 아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아주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많은 고난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격이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이 점이 부족하다면 그의 일은 매우 얕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점을 약간 언급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곧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란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갈망을 가지며, 우리 마음이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항상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자신을 드리고 달게 고난을 받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좋은 가구로 장식된 비교적 좋은 집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 주님이 만일 이렇게 안배하셨다면, 당신은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비록 지금 당신의 육체에 고난은 없지만 당신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마음가짐이다. 모든 것이 좋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고난받도록 안배하시지는 않지만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하루라도 고난받을 마음의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고난이 매일매일 당신의 생활에 꼭 있지 않을지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매일매일 있어야 한다. 많은 형제 자매와 많은 동역자들의 가족들은 단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좌절한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순탄한 환경을 안배하여 우리로 물질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우리의 몸도 건강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께 봉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순리적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일에 조금의 시련만 닥쳐와도 우리는 곧 무너져 버리는데, 이는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지 않도록 안배하실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다만 언제나 고난받을 것을 예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 몸에 닥칠 때에도 우리는 응당 이것을 감당해야 하며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물러나거나 혹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은 입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편안해도 이렇게 하며 편치 않아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건강할 때도 이렇게 하며 몸이 약할 때도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며 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보배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게 된다. 그들은 때로 심지어 속에서 원망하며, 원망의 말을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고난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간구만이 있을 뿐 어떠한 찬미도 없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속에서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기만을 갈망한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날들을 허락하셨을 때,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당신이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고난받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더라도, 주님이 반드시 당신으로 고난받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고난받는 사람이 모두 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고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거의 매일 그 속에서 구출되기를 외치고 그 괴로움을 부르짖으며 그런 날들이 어서 속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고난만 받을 뿐,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신체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기타 모든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 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당신에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심중의 괴로움이 있을 수 있고 많은 실제상의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고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 또한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차이점을 발견하는가? 이것은 마치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영 안에서 빈곤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면에서는 빈곤하지만 영 안에서는 빈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많은 형제 자매가 분명히 고난을 받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택하도록 하신다면, 그들은 단 일 개월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으며 하루 혹은 일 분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 가짐이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에 지나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그러한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순탄한 날들 속에서 가장 순리적인 일들만을 할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모든 방해 요소를 가져 가시고 그로 하여금 여기서 평안 무사히 일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처럼 바란다면,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평안한 가운데 있는 형제가 그의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시련중에 있는 형제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으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잘 예비한 것이다. 반면에 고난중에 있는 그 형제는 결코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한 형제는 평안중에 있고 다른 한 형제는 시련중에 있는데,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시련중에 있는 형제가 분명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중에 있으면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그 형제를 더욱 귀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지 고난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아야만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몸에 한 가지 요구가 있으신데 이 요구에 잘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이것으로써 병기를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 병기가 없다면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싸울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후퇴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조금만 대가를 요구해도 당신은 견디지 못한다.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조금만 고통을 겪게 해도 당신은 즉시 좌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묻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얼마나 있나를 묻는다.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많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많이 받은 형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뜻밖에도 그에게서 조금의 도움도 얻지 못하며, 후에 그에게는 본래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었으며, 그는 고난받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면 그는 고난받는 것이 단지 일 분이라 해도 도망가려 했을 것이다. 그는 고난을 받았지만 그 내면에는 조금도 기꺼운 마음이 없다. 그는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공과도 배우지 못했으며 그의 내면은 배반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과 고난받는 것이 결코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고난받을 마음을 품지만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난받는 것으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어떤 때에 하나님이 마치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예비하심이 충분치 않은 것처럼 우리를 이러한 재정적인 궁핍의 시련 가운데 두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물질적으로 조금만 궁핍해도 우리의 사역을 멈추고는 주님이 우리를 어쩌면 그토록 야속하게 대하시는가라고 생각한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섬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라고 물으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당신이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는가가 하나의 큰 관건이다. 당신은, 『나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조금만 시련을 받아도 즉시 멈추고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의 사역자도 맑은 날에만 일하러 나가고 비가 오면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는 사역자는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만 있다면 어려움이 닥쳐도 당신은 이렇게 하며 고난이 와도 당신은 해낸다. 병이 들어도 하며 죽음이 닥칠지라도 당신은 그렇게 행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을 때 당신은 당당히 서서 귀신에게, 『어떤 것이 와도 나는 해낸다.』라고 말한다. 당신의 내면이 만일 무엇을 두려워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손쉬운 미끼를 제공하여 당신으로 떨어지게 한다. 만일 당신이, 『굶주려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또한 사탄이 당신에게 굶주림을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추워도 난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사탄이 당신에게 추위를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간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病)이 무섭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반드시 당신에게 병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병들자마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방법이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점을 이용해서 당신을 다루므로 당신은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잘 예비되어야 하며,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와도 여전히 일을 하며 저것이 닥쳐도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가정에 시련이 닥쳐도 하며 신체의 질병이 생겨도 이렇게 해야 한다. 굶주림이 와도 추위가 와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당신에 대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으면 즉시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가져와서 당신으로 실패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후퇴하게 하며 당신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다음과같이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의 강권함과 오늘날 당신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천당이 오든 지옥이 오든 결과가 어찌되든 나는 변함없이 이렇게 행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도 이렇게 행하고 좋지 않아도 이렇게 행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의 약점이 사탄에게 붙잡히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끝나고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당신 내면에서 앞길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고 무엇을 만나든지 주님을 위한다고 이미 작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반드시 고난을 받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면의 그러한 확신은 견고해야 한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과 뜻이 없다면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무너진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이 있다면 어려움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당신은 보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고난을 받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좋은 것과 입을 좋은 것을 주시면 당신은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주님께 감사할 줄 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좋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고 나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있어도 이렇게 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예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러 나갔는데 몸이 약하다면 건강한 사람보다 비교적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몸은 건강하지 않아서 잠 잘 침대가 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즉시 이 점을 공격하여 당신이 잠 잘 침대가 좋지 않게 한다. 당신의 침대가 좋든 좋지 않든 상관없이 사역은 항상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좀더 안락한 침대를 안배하셨다면 당신이 일부러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자려고 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침대를 주셨다면 당신은 자면 된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침대를 마련하셨을지라도 당신은 자야 한다. 침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언제나 사역을 수행해야 하며, 침대가 좋지 않다고 해서 물러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어떤 형제가 평소 물질 생활에서 좀 궁핍하다고 해서 그에게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질 생활에 있어서 좀 어려운 환경에 있는 형제가 물질 생활에 있어서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있는 형제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하게 자신을 주님께 바친 형제에게만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 당신이 어떤 곳에 갔을 때는 잠자리가 마루바닥이었지만 다른 어떤 곳에 가 보니 마루바닥은 고사하고 다만 짚을 깐 땅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잠이 들기는 하였지만 마지 못해 잠을 청한 것일 수 있다. 그가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고난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마루바닥에서는 잘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그의 평상시의 생활이 이미 좋지 않은데 환경이 더 나빠지면 어떤 것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평소에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리다가 생활 환경이 안 좋아질지라도 여전히 거기에 안주할 수 있다. 그는 마루바닥에서 잘 수도 있고 짚을 깔은 땅바닥에서 잘 수도 있다. 그는 불평하지 않으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택하려 하신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시련을 당해도 금방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당신 몸에 한 가지 일만 임하게 해도, 당신은 즉시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점을 보았는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생활의 환경이 낮아지는 그 정도가 한계가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고난받을 수 있는가이다.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 몸에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우리 내면에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창출해 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사역하러 나갈 때 고난받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결코 굳세게 사역할 수 없다.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당신은 조금만 어려움이 직면해도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국 이러한 경지에 떨어졌다.』 과거에 수년 동안 주님을 섬겨 오던 한 자매가 한번은 울고 있는 다른 한 자매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가 자신을 볼 때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중한데 뜻밖에도 이런 지경에까지 떨어졌으니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그는 일에 부딪히자마자 그 자신이 먼저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괴로움이 몰려올 때 당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에 있다. 한면으로는 당신의 고통의 문제이며, 다른 한면으로는 주님의 사역의 문제이다. 당신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즉시 주님의 사역을 희생한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괴로워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찌 주님의 사역을 돌볼 마음이 있겠는가? 형제 자매여!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기를 배워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사역을 내려놓으면 고난받는 것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지만 사역은 이로 인해 손실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고 이것이 결여되었다면, 어떤 때든지 사탄은 우리로 사역을 버리게 하고 주님의 사역을 희생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할 자로서 하나님이 우리로 살게 하시든지 죽게 하시든지 우리의 책임을 저버릴 수 없고 우리의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항상 끝까지 견뎌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만일 가능한 상황 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식주의 필요가 다 채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일부러 고난을 찾아서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며 결코 그 몸에 고난이 더해지기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른 한면으로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나도 쓰러지게 되며 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성경의 요구는 『죽도록 충성하라』(계2:10)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죽기까지 변함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중용(中庸)을 취할 수 없다. 만일 중용을 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시게 하고 교회나 혹은 나이 많은 형제들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게 하고 당신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편이 낫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중용의 위치에 둔다면, 당신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일에 있어서 어떤 길도 잘 걸어갈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생명을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수중의 사람을 끌어들이기만 할 뿐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리 일을 해도 별로 해내지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물론 주님은 당신의 충성으로 인하여 당신을 죽으러 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 자신이 지켜서는 안 된다. 주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는 다만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슨 고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참고 견뎌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일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당신은 죽기까지 충성할 수 없다. 죽기까지 충성하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아껴서는 안 된다.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응당 강해야 하며,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는 다음과같이 말할 수 있기까지 강해야 한다. 『주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떠한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이러한 공과를 배워야만 한다. 무릇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한계가 있으며 어느 때인가는 멈추게 된다. 하나님은 마음가짐이 대단한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이 극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안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언제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꼭 고난받지는 않더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항상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상관없이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외적인 어려움도 고려하지 않으며 신체상의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치기 원합니다. 지금 이후로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그 어떤 것도 내가 주님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난이든지 즐거움이든지 언제나 나는 이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효과 있는 한 가지 일은 죽기까지 충성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당신이 그 위치에 서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사탄이 당신에 대해 아무런 방법도 없으며 사탄에게 길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므로 조금만 고통을 당해도 그침 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물도 없고 탄식도 없을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모든 형제 자매는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이 정하신 길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나는 언제나 고난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난받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마땅히 한계가 없어야 한다. 주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실제로 받게 하는 고난은 한정적이지만 당신이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계가 없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라면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일단 제한이 있으면 옳지 않다. 이 요구는 대단히 큰 것이며, 주님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보다 작다면 하나님을 섬길 도리가 없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다만 어느 정도까지만 고난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기꺼이 고난받는 것은 제한 없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한다. 만일 이 요구보다 작다면, 사탄이 당신을 시험하여 당신으로 설 수 없게 할 뿐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만일 당신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사탄에게 승리의 간증을 하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사탄도 당신에 대해 어떠한 힘을 쓸 수 없다. 사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을 다룰 어떤 방법도 없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사탄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욥을 그렇게 공격하였다.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2:4-5). 사탄은 욥의 생명을 만지고 욥이 그의 생명을 아끼기만 하면 자신에게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사탄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실패는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같이 물어야만 한다. 『사역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하나님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아끼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또한 고난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 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고난받기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잃게 하실 뜻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형제 자매들의 많은 일에 있어서의 실패는 모두 자신의 나태함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과 자신을 버릴 수 없는 것에 기인한다. 세상 사람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거나 형제 자매들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여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역하러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것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람들도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보류하거나 중용의 길을 고수한다면 그들 역시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드리라고 하셨다.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중 한 사람도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연민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역에는 언제나 제한이 있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얼마 있다면 영적인 일도 그만큼 있게 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제한적이다. 고난을 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우리가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도 제한적이며 우리의 사역의 결과도 제한된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 헤아리지 말고, 오직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를 측량하라. 만일 고난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한량 없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한국복음서원] ---------------------------------------------------------------- 4.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함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뿐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솔로몬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잠17:5)라고 말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두 다 사랑스럽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만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거나 혹은 단지 형제 사랑하는 마음만 있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자격이 없고 조건도 부족하다.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 대해 사랑이 있어야만이 비로소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분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싫어하거나 번거롭다고 느끼거나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사람이 비록 타락했지만, 그러나 사람은 우리 주 예수께서 구속하신 자이다. 사람이 비록 상당히 강팍하지만 성령이 감동시킨 자이다. 주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며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점차로 자라 성인이 되셨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의 표준적인 사람, 즉 하나의 대표적인 사람을 세우시기 위해 그분이 가지셨던 계획을 이 한 사람 위에 두셨다. 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교회가 있게 되었는데 그러나 교회는 한 새 사람을 이룬 것이다. 구속의 계획은 사람을 높이 들어올린 것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보다 「사람」이란 말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의 영광스런 사람을 얻으시는 것임을 보아야만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을 보게 될 때, 또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의 초점이라는 것과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사람의 귀중함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분명하다.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여기의 「사람」은 교회를 가리켜 말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아들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인자가 되어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주 예수님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가진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오늘 우리는 형제 사랑하기를 조금 배우고는 자신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본래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는데, 오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을 굉장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형제 자매여,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넓혀져서 사람은 모두 사랑스러우며 모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의 당신의 일이 잘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최대 관건은 당신이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당신이 장차 사역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바로 당신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흥미가 있는가, 또 당신이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당신이 한두 명의 총명한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한두 명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차이가 많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사람」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는가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인자가 온 것은」이라는 구절이 첫째 의미하는 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지대한 흥미가 있으셨고, 이 지대한 흥미로 인해 그분 자신이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흥미가 있으셨는데,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도 좋게 보이려 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어떤 흥미도 없는 사람 같다. 우리는 주님이 이런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보셨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자의 온 것은」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그분은 인자이시며 사람의 아들의 위치에서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흥미가 있으셨고, 사람에 대해 느낌이 있으셨으며, 사람을 중시하셨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흥미는 너무도 크셔서,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까지 서셨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형제 자매들은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격노해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사람에 대해 지대한 흥미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만약 당신이 『나는 보통 사람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합당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사람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가 흥미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을 골라서,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사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항상 사람에 대한 흥미를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서 사람에 대해 감정과 사랑을 가지셨고, 「인자의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에게 흥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지방에 가서 사역을 할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곳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태도는 옳은 것이요 우리의 그 길과 위치도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려는 사람은 사랑을 남겨 두었다가 형제가 왔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을 꺼내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주님의 사역자가 만약 그의 사랑은 형제가 와야 비로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나중 일이며, 별개의 문제이다. 당신은 항상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여겨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이 세상은 누구인가? 이 「세상」은 바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말하며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은 바로 세상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땅 위의 개개인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당신은 그에 대해 흥미가 없고 그가 형제가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그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주님과 다르며,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모든 사람에게 흥미가 있으며, 그들이 단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까지 당신의 마음은 응당 넓어져야 한다. 그 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Ⅱ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여기에서의 주님의 태도는 언제나 사람에 대해서 선택한 것이 없다. 우리는 마땅히 사람에게 흥미를 가져야 하며, 사람에 대해 사랑스럽다고 느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 이익을 구치도 말아야 하며, 사람에게 섬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어렵게 하고, 그들에게 해를 주는 일을 조금도 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섬김을 받으려 해서도 안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어쩌면 이미 여러 해 동안 가르침을 받아서 「나와 함께 사람이 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당신과 형제가 되었고, 당신에게는 느낌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당신의 형제라고 느끼며, 그와 함께 형제가 되었다는 느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에게는, 『나는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그들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들에 대해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주 역량이 큰 사람이어서 모든 사람을 그의 품에 포용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여기에 하나의 큰 난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역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이러한 마음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도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더욱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말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백 명 중에서 어쩌면 단지 한 사람만 선택하여 사랑하거나 만 명 중에서 단 한 사람만 선택하여 사랑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같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넓혀져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도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서 이익을 구해서도 안 되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인자의 온 것은 곧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에게 이익을 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형제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잘못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 손해를 주는 것도 잘못이다. 사람에 대한 우리 주님의 기본적인 태도는 소극적인 방면에 있어서 언제나 사람의 섬김을 받지 않으셨고, 그분 자신을 위해 사람으로부터 어떤 것도 얻기를 원치 않으셨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이나 손해를 요구하면서까지 이기적으로 그들의 섬김을 받거나 그들의 공급을 받는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명령하신 연고로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우리와 세상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로부터 추호의 이익도 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약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매우 제한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이 모두 분량이 넓은 사람이고,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있기를 갈망하신다. 오직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Ⅲ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분이 오신 것은 모두 사람을 위해서이다. 마가복음 10장은 그분이 오신 것은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며, 목숨을 버려서 대속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분이 오신 목적은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다. 섬기는 데 있어서 사람에게 한 가지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목숨을 버려서 대속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목숨을 버리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다. 대속물이 되는 것은 곧 사람을 섬기는 데 있어서 가장 높고 최종적인 일이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온 것은... 도리어 사람을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목적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에 대해서 흥미가 있으셨고, 사람이 정말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섬길 만하다고 여기셨다. 그분이 사람을 섬기신 것은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 곧 한 분의 구주를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그분은 목숨을 버리시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대속하신 이 복음을 사람에게 전하기만 하고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에 자격이 없다. 사람은 정말 사랑스럽다. 그러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은 먼저 사람을 섬기시고 사랑하신 후에야 사람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사랑이 먼저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나중이다. 당신이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사람들 가운데 가서 주님이 목숨을 버리신 것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주님의 대속하심을 전하고 그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사람에 대해 흥미가 없고, 사람을 귀하게 느끼지도 않으며, 그들과 당신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는 이 사실이 당신에게서 매우 경시되고, 당신 자신도 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사람에게 주님이 목숨을 잃으심을 전할 수 없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그들을 인도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형제가 된 후에야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면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을 저쪽에다 놓아 두고서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나 자매가 되어야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형제 자매여! 우리 주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런 후에야 그들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다. 우리도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구속을 전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먼저 사람을 섬기시고, 먼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에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도 먼저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그들을 귀중히 여기며, 먼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야 주님의 구속을 그들 앞에 내놓아야 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열려져서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면,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귀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보아야만 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사람은 여전히 애초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당신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성격과 기질 등이 근본적으로 옳지 않다. 만약 당신이 사람을 자기 몸의 한 골칫거리, 귀찮은 존재, 무거운 짐 등으로 느낀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비록 사람이 타락은 했지만 사람의 앞 길에는 여전히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다고 느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이 우리에게 얽매임이 아니요, 무거운 짐이 아니며 귀찮은 존재가 아니요, 골칫거리가 아니라고 느껴야 한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오르셨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작은지! 사람이 주님에 의해 일단 만진 바 되고, 진실로 만진 바 되며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알게 된다면, 그는 즉시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며 참으로 주님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은 정말 사랑스럽다. 어떤 사람의 죄악도 용서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연약함도 납득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혈기도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안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사람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안다. 형제 자매여! 오해하지 말라. 주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어서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잃어버려서 그 양들을 찾으러 나서신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단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어도 찾으러 나서신다. 바꾸어 말하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침륜당하지 않고 단 한 사람만 침륜당했다 해도 그분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심중(心中)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면, 그분은 한 사람,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오신 것 같다. 성령은 은전 열 개를 모두 잃어버려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은전 하나를 잃어버리고서 찾아 나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받은 것은 그의 모든 아들이 탕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온 것을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직 한 명의 탕자가 돌아와도 환영하신다. 주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의 구속 사역은 단지 한 사람이 필요해도 그분이 이루셨고, 많은 사람이 필요해서 이루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주님의 흥미가 얼마나 지대한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여러분이 만약 주님을 잘 섬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갖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설령 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너무나 역량이 적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신이 사람에 대해서 더욱더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마음이 점점더 커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구속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옹졸한 우리 사람이 그렇게 큰일을 하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어찌 영혼을 사랑치 않으면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치 않고서 어찌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에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사람의 지식 없음이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이 굳어 있다 해도 당신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당신에게 사랑이 있다면, 사람을 가벼이 보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당신도 다른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이끌려질 것이다. 도시에서 자란 어떤 형제 자매들은 농촌에 가서 농부를 대할 때 일종의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갖는데 그것은 그들이 농부보다 조금 높은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합당치 않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때에, 사역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는 뜻밖에도 자신을 낮추었다고 느낀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가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지식에 있어서 그들과 같지 않다고 여겨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결코 낮아진 것이 아니다. 당신의 그런 의식적인 겸손은 자연스럽지 않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에게 다만 마리아의 아들로 보여 지셨다. 사람들은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을 그분의 형제로 알았고, 그분의 자매들도 또한 그들 사이에서 그분을 단지 인자로 알았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당신은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사람다워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마치 당신이 그들보다 높은 체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 앞에 갈 때에는 마땅히 그 사람과 똑같은 것 같아야 하며 그 사람에게 당신이 스스로 낮추어서 거기에 갔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사람을 섬길 수 없으며, 당신의 그러한 방법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우리는 단지 「사람」으로서만 「사람」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줄곧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진실로 자신을 비천한 데까지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당신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 만일 당신이 다른 위치에 서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한다면, 당신은 그들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만일 우리가 비천한 데까지 낮아질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우리가 비천한 데까지 낮추었다면,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도 지식이 적은 사람을 경시할 수 없다. 지식이 적은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계획 안에서는 모두 소망이 있으며,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바로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때 형제 자매들의 태도는 매우 합당치 못하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 오셨으며 우리도 또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낮아질 수 있다. 결코 지식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적은 사람에 대해서 나는 그들을 경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기꾼이나 범죄자나 방종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 자매여, 이런 이들에 있어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만 한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 때 당신은 그들보다 좋았는가? 당신에게서 주님의 은혜를 제해버린다면, 당신은 그들보다 얼마나 좋은가? 누가 당신이 그들보다 더 성결하다고 말하겠는가? 당신이 은혜 밖에서 자신을 볼 때에, 당신은 당신과 그들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은혜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들과 다른 점이 있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당신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당신으로 하여금 티끌 가운데 엎드려 『주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라고 주님께 말할 수 있게 한다. 은혜는 결코 당신 자신을 높이지 않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본래 그런 거짓되고 죄 있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을 보게 한다. 당신이 그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 당신 자신이 아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받은 것이라면 당신이 교만할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들과 다른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은혜로 인한 것이라면 당신은 결코 은혜로 인해 자신을 높일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찬미하고 은혜에 감사해야 할 뿐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과 그들이 똑같은 사람이며 그들도 마땅히 당신이 사랑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죄는 밉지만 그들의 사람 됨은 응당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Ⅳ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에게는 모두 그의 특징이 있고 하나님께 쓰임받을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또한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되, 그것도 아주 깊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어떤 형제가 마음이 좀더 넓어져서 사람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더욱 하나님께 쓰임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당신은 사람에 대하여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만약 사람에 대하여 냉랭하고 흥미가 없다면, 어떻게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나간 것은 사람을 접촉하고 구원받게 하여 얻기 위한 것일진대, 만일 당신이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사람을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로 느낀다면, 당신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어떤 의사도 환자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선생님도 학생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사람 보기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있어야 한다. 억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흥미가 있어서 사람을 접촉하고 사람과 교통하는 것이다. 남이 권하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흥미가 있어서 사람을 만나고, 그와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고 귀중하다고 여겨져서 그 사랑을 억제할 수 없어 나가는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가서 사람을 접촉하고 교통하라고 권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 속에서 사람이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느껴져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이것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와 그들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가 먼저 믿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믿도록 인도해야 하며, 그들에 대해 지극한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끝없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비로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일 하나님을 잘 섬기려 한다면, 이 길을 바르게 걸어가야만 한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한 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개개인에게는 모두 영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그를 사랑해야 하며, 그를 섬기기를 갈망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길을 가다 한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빛 비췸을 받은 사람은 그와 다른 형제가 한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는 것을 보게 되고, 형제에 대한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사역하는 우리에게는 또한 한 번의 빛비췸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 우리가 동일한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빛 비췸이 있으면, 다음에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는데, 이 느낌은 바로 그가 나의 형제요 자매라고 느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며, 개개인 모두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우리의 섬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 비췸이 필요하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사정을 만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사람을 주의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는 능히 이 사람들을 구원해 내어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주의하고 계시며, 사람을 얻기 원하신다. 주님의 사역자가 되려는 사람은 영혼을 가진 다른 어느 한 사람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의 태도나 행위에 있어서 어느 한 영혼이라도 경시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잘 심기기 원한다면, 당신은 한 영혼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배우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항상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은 경시하고, 자기보다 조금 나은 듯한 사람에게는 아첨한다. 하나님의 종 가운에서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소위 우리 아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경시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지위를 보아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보아야만 하는데, 이것은 매우 큰일이며 또한 즐거운 일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이 어찌하여 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보았다면 당신은 주님이 죽으러 오신 그 성품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의 그 느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람이 정말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당신은 사람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의 그러한 느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주님의 일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전집 52,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한국복음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