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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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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적지 않은 소요가 있었으니 ( 설교자 : ???? )
lhyunsik
2005-07-14
그 무렵 적지 않은 소요가 있었으니
[그 무렵 그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요가 있었으니](행 19:23).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전파한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흥분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거리 한복판에 큰 불이 지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고 9천 달러 어치나 되는 책들을 가지고 나와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바울은 왜 그토록 강력한 설교를 했던 것일까요?
그의 담대함은 한도 끝도 없어보입니다. 이제는 아예 다이아나 신전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현재 런던에 있는 바울 교회 건물의 두배는 족히 되는 크기의 그 신전을 말입니다. 신전의 지붕은 푸른 벽옥으로 다듬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고, 지붕 아래에는 프락치텔레스(Praxiteles)의 조각 작품들이 즐비하며, 벽은 파르탁시우스(Parthasius)의 그림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부는 수천명 이상의 우상 숭배자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 공간이 넓습니다.
에베소 시에는 5월이 되면 수많은 여행객들이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게 성전의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진 메달을 구입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태를 겨냥해서 천둥같은 목소리로 설교를 했습니다. 자질구레한 장신구 가게가 문을 닫을 지경이 되고 메달을 파는 상인들이 망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자 분기탱천한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바울을 윽박지르면서 당장 입을 다물 것을 요구합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런 큰 소동이 일어나기는 처음입니다.
바울은 그 시대의 큰 사고 뭉치였습니다. 그는 이코니움에 가서도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큰 화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말 그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어떤 단어의 의미를 뒤틀어놓습니다. 전통주의라는 단어 속에 담겨 있던 고귀한 의미는 무사안일주의라는 뜻으로 대체되어버렸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놓는다는 의미의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비틀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처럼 이 "소동"이라는 단어는 때로 엉뚱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의미하는 말로만 인식해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 그 어떤 교회도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라고 말입니다.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생명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침체되어서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음의 증거입니다. 저는 때때로 소동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듣곤 했는데, 저는 그 때마다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속속들이 영향을 미쳤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습니다. 또한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저에게 좀 더 주도면 밀하고 치밀하게 소동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시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1. 잠자는 교회
제가 아직 평신도로 지내던 시절에, 저는 우리의 신앙이 너무도 자주 무기력해지는 것을 자각하곤 했습니다. 주지사 후보 임명을 위한 정치 집회라도 열리게 되면, 사람들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온 신경을 다 기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 집회에 관해선 그저 연신 하품만 해대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재정문제가 논의되기라고 할라치면 모든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를 집중하지만, 저 영원한 저택과 하늘 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법정에 서서 사형이나 아니냐하는 문제로 심문을 받고 있을 땐 아주 흥분을 해서 그 재판 과정에 열중하지만, 교회에서 연 집회에서 그 자리에 모인 수백명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설교를 경청할 뿐입니다.
저는 모든 평신도들이 교회에 이같은 전형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년 시절에 저는 교회에서 졸지 않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습니다. 캐러워이 씨앗이나 회향풀 혹은 육계피를 씹어보기도 하고, 다리가 아파올 때까지 한쪽 발을 들고 있어보기도 했습니다. 또 멍이 들 정도로 허벅지를 때려보기도 했고, 나이 많은 형이 핀으로 콕콕 찌르는 바람이 깜짝깜짝 놀라며 정신을 다잡은 일도 있었습니다. 또 누나들이 저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선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해서 눈을 부릅뜨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던가 집사님들이 앉아 있는 좌석쪽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들 중 일곱명이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실한 사람들이 설교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부터 집중력을 잃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토록 선한 사람들도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다면 우리 같은 아이들이 좀 조는 건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을 숨겨 무었하겠습니까? 기실 그 어떤 건물에 모인 무리들보다 교회에 모인 회중들이 가장 많이 좁니다. 어떤 교회는 거의 일요 기숙사가 되어버릴 지경입니다. 불면증 때문에 베개를 껴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만큼은 수면제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어떤 약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설교와 길고 지루한 기도가 해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포즈로 찬송가를 받쳐놓고 그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있습니다. 사실은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꾸벅꾸벅 조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 성직자들 말입니다.
Ⅱ. 설교자들에게는 바울처럼 사람들을 각성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사역자가 설교를 하고 있다가 청중들 중에 한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도널드, 졸지 말게나. 정 정신을 차릴 수 없겠거든, 코라도 한번 비틀어보게." 그러자 도날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목사님, 제 코보다 목사님 설교나 한 번 비틀어보시지요."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라는 대포를 가지고도 청중들을 깨어있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한눈을 팔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겨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연회에 참석해서는 언제쯤 머랭 과자를 후식으로 먹고 나서 식사를 마칠 수 있을 지 매분마다 시계만 힐끔힐끔 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연회를 베푸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굶주려 있고 무엇이든 먹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들은 냅킨 꽂이와 손을 씻는 물 그릇 등의 지겨운 겉치레만 가득하고 막상 먹을 것은 없는 연회에는 도저히 참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회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권고하는데,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한다면 바울이 했던 것처럼 소동을 일으키십시오.
『그 무렵 그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요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도움을 원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 교회로 나올 것입니다.
그들이 그저 껍데기만 남은 상투적인 예배에 무슨 흥미를 기울이겠습니까? 당신이 라틴어를 아무리 많이 알고있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란틴어 단어를 들을 때면 그저 머릿속에 발이 수천 개 달린 벌레가 휘익 지나갈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그저 설교문을 적어와서 노트를 읽어내려가기에만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들은 또 당신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곱슬 머리는, 손가락으로 머리채를 쓸어올리며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란 사실도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500달러짜리 약속 어음을 200달러로 해결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관심이 있겠으며, 어제 낮에 죽은 아이를 그린우드에 매장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설교자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시시한 이야기들이 무슨 위로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저 자신에 비추어서 판단합니다. 실재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예배에 참석해서 졸음을 이겨낼 수 있는 장사는 좀체 없습니다.
저는 어느 아름다운 교회를 방문해서 그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건물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가대의 찬양도 멋있었고 설교도 괜찮았습니다. 오르간도 꽤 좋은 것이었고 사역자도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음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남자답게 버텨 보려고 노력했지만 얼마 안가 같이 동행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못참겠군요."
그리곤 머리를 숙이고 깊은 오수에 빠져들었습니다. 제 평생에 그토록 달디 단 낮잠을 즐긴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죄를 지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50분 가까이 똑같은 자세로 미동도 않고 서서 중얼거리던 납덩이처럼 무겁고 딱딱한 설교가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늘 형식에만 얽매여 있다면, 교회에는 반드시 교회를 가야한다는 의무에 얽매여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투철한 의무감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음 창고에 들어가 있거나 납골당 안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지언정, 교회에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땅에는 큰 싸움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과 불신자들 간의 영적 싸움이 아니라, 소동을 일으키려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과 침체되어 있는 타락한 교인들 간의 영적인 싸움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여, 일어나십시오. 군기를 굳게 잡고 진군 나팔을 부십시오. 소리를 지르며 전장으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혼을 이겨오십시오. 우리는 지금 갈보리로 진군해 가야할 순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진창에서 일어나 영적인 무기들을 휘둘러야 할 때란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엔 소동이 없습니다. 모두들 그저 축 가라앉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큰 위기의 때입니다. 소동과 소요는 생명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고 침체만 지속되고 있는 것은 죽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지난 주 일요일에 지난 6000년 동안 유효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할 해결책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결심을 절대로 무디어 지게 않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바입니다.
Ⅲ. 열정도 웃음도, 눈물도, 풍자도, 새로움도 혹은 영광도 없는 무
미건조한 신학이론과 진부한 정통파적 관행에 대하여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마음을 환기시켜주는 자극이 없으면, 사람은 침체되어 갑니다. 목회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자주 듣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소화불량에 걸려 있는 까닭입니다.
항상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일상과, 늘 앉아 지내는 생활 형태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한 기독교 신문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 편집부로 들어오는 책 중에 일부만 발췌를 해야할 책이 있으면, 저는 이 작업을 같이 일하던 한 비평가에게 맡곁습니다. 그는 소화불량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작업을 맡으면 본문을 아주 갈갈이 찢다시피 해서 발췌를 해내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건강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늘 침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회중석이든 강단이든, 아니면 주일 학교든 기도 모임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우리가 가진 은사들을 기꺼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논리력이 뛰어납니까? 그러면 그 재능을 쓰십시오. 기발한 발상을 잘 해낸다면 그것도 사용하고, 말을 재치있게 잘 한다면 그것 또한 묵혀두어선 안됩니다. 육신적으로 강건하다면 그것도 귀히 쓰임 받을 능력입니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응접실에서건 강단에서건 모두 충분히 쓰임받을 수 있는 귀한 은사들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느낌을 가지고 하고, 또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하는 도구가 된다면 강단에서 쓰기에 적절치 않은 제능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성경에 나타난 풍자에 관한 긴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풍자적인 말을 했고, 바울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을 웃기는 일에만 열중한다면야 비난을 받을 만도 하지만, 그 속에 깊은 진실이 숨어 있다면, 그건 결코 비난의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울부짖든지 웃어대든지, 아니면 볼멘 소리를 내든지 박수갈채를 터뜨리든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든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버리든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행동을 하든,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죄를 그치고 하늘 나라를 소망하게만 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코자 저는 광물학 서적과 식물학 사전, 그리고 농업 서적들과 미학사전, 또 과학, 시, 문학, 역사, 천문학 관련 서적들을 샅샅이 뒤지곤 합니다. 예화를 따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일 우리 손에 부싯돌 두 개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걸 들고서라도 서로 맞부딪혀 불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칼이 적을 벨 수도 없을 만큼 무디어져 있다면, 그 칼을 꽂는 칼자루에 황금으로 무늬를 새기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날고 있는 금빛 꿩과 회색빛 수오리가 그려진 100달러 짜리 낚시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로 고기를 한 마디도 잡지 못한다면, 무늬가 아무리 근사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고 거기가 신학 교육을 7년 혹은 10년간 받을 만한 돈이 있다고 해도, 본인이 아무 마음이 없이 가만히 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는 전쟁 기간 중에 몇 주 동안 군목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한 기병 대원이 부상을 입은 채로 4,5마일 떨어진 어느 헛간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목숨이 위태로운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하며 안절부절을 못했는데, 이 모습을 본 그 보고자가 저에게 자신의 말과(녀석은 전쟁터에서 고생 꽤나 한 놈이었습니다.) 온몸에 가득 갖추고 있던 자신의 장비들을 빌려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저와 제가 타고 갈 말 위에는 큰 칼과, 기병총, 권총들, 그리고 안낭들 또 그 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비들이 그득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몸이 너무 무거워 한껏 느려진 걸음걸이로 말에게 다가가 말 안장의 앞머리를 꽉 부여잡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등에 올라타려고 몸에 힘을 주는 찰나, 말의 뱃대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저는 말에서 툭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짐을 다시 싣고 장비를 다시금 가다듬는 일도 큰 일이었습니다.
제가 말을 타고 당도한 숲에는 여기 저기 패잔병들이 즐비했지만, 그들은 제가 군인같이 하고 나타났는데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진지 가까이 다가서자 나이 어린 소년들이 말을 잡아타고 올만큼 용감한 군목에게 환호를 보냈고, 저는 그 소리를 듣고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기분이 우쭐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그때 제가 처해 있던 그러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아폴루온을 물리칠 수도 있을 만큼 어머어마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그 장비들을 사용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 이론들을 옆구리에 비뚤어지지 않게 단단히 꿰어차고서 혹시나 신학 체계가 땅에 툭 떨어지지는 않을지, 아니면 교회 역사에 관한 지식이나 설교학에 관한 지식이 땅에 떨어지지나 않을지 조심조심 아주 느릿느릇하게 걸어다닙니다. 다윗이 양치기 소년의 물매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죽이고 샴갈이 소를 모는 막대기로 필리스티아인 육 백 명을 쓰러뜨리는 동안 말입니다.
저는 영원 세계에 가보면 의외로, 정규 교육이라곤 3달 정도가 고작이지만 이곳저곳의 초지를 하나님의 질투의 불로 불타오르게 하고 또 여름이면 공터에 모인 회중들에게 투박하고 어눌한 설교를 열과 성을 다해 했던 벽지의 시골뜨기 목사들이, 수많은 학교 졸업장을 소지하고서 성도들에게 긴가운을 입히고 거기다 흰 칼라를 드리우게 하거나 성가대복을 입혀서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교회의 관행주의의 한기에도 얼어죽기 않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여느 시내의 목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내었음이 밝혀지리 라고 생각합니다.
Ⅳ. 꼭 필요한 내용을, 또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설교해야 하며,
추측이나 사사로운 의견, 그리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은 멀리해야 합니다
지난 십 년간 저는 제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한 내용을 여러분에게 설명하려고 드는 우를 범하자 않으려고 항상 조심해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 한분 안에 세인격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셨습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수년간이나 위의 사실들을 설명할 길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목회자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것도 제가 맡은 사역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로 저는 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자신보다 더 명백히 이해하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를 하고 나면, 몇 사람 정도는 설교가 끝나자 마자 저에게 달려와 저를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꼭 대답을 해 드리겠다고.
그러나 여기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죄는 나쁘다는 것, 그것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의 모성과 부성에 비교한다면, 인간의 사랑이란 오히려 무자비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분의 사랑이 깊고 넓다는 것도 제가 명백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재난 중에도 우리를 감싼다는 것 또한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소망이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기쁨을 준다는 사실도 저는 압니다. 그 소망은 불안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고, 타성에 젖어있는 마음을 작그해서 다시 일어서게 하며, 인간의 마음 속에서 전쟁을 상징하는 붉은 달리아를 뿌리 뽑고 평화의 백합이 피어나게 한다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 이 소망은 죽음의
침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 그로 하여금 구름을 샤프란 꽃의 빛깔과 오랜지 빛 그리고 자주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천상의 해를 바라보게 하며,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무덤의 문들이 쿵하고 뒤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영광의 문이 활짝 열려진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고 잘못 전달될 염려도 없었으며, 제가 몸소 겪은 경험과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더욱더 확고한 진리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니 제 자신도 이해 못할 일들을 가지고 귀한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언젠가 한번 500편이나 되는 제 설교 초안을 불태운 적이 있습니다.(제가 처음 설교를 시작할 당시에 저는 설교할 내용을 한자한자 그대로 다 공책에 기록을 했었습니다.) 제가 불태운 설교 속에는 기독교의 신비들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부엌 화로에서 설교 노트들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저 설교문들이 이전에는 전혀 내지 못한 온기를 드디어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Ⅴ. 하나님의 화톳불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서 행했던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그 속에 온정이 없었다면, 불태워버리십시오. 강단과 교회는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벽난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추위로 꽁꽁 얼어서 감각조차 잃어버린 그들의 온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어야 합니다. 큰 장작들을 헤집어서 불을 더 크게 일으키고 의자들을 더 바짝 난로 앞으로 끌어당셔 놓으십시오.
사람들은 목사들의 설교 노트를 "골자(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참으로 통렬한 풍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만일 목사의 설교에 해골과 뼈대밖에 없다면, 거기에는 그 뼈대를 둘러싸고 있는 따뜻한 온기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감정이 흐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에 관련된 역사처럼 매혹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는, 날카로운 칼로 분석을 하고 그 심장에는 구멍을 내놓아서 영 보기 싫은 시체꼴로 만들어 버립니다.
Ⅵ. 거룩한 열성으로 죄를 책망하면 교회가 각성을 하고 죄인들이 회심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십년간 여러분의 목자로 생활해왔으며, 그것은 저에게 큰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죄악이 발견되면 장소를 막론하고 그 죄를 향해 일격을 날리는 것을 제 의무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 나라에 이토록 죄가 만연한 까닭은, 사람들이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는 주의 군대의 포병과도 같습니다. 죄악이 눈 앞에 보이면 포병은 즉시 포를 발사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구급차를 보내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역할입니다.
제가 요 석달, 혹은 넉달 간 했던 설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또 동요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설교의 내용이 모두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간혹 보면 개들이 사람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돌을 집어들어 개에게 던집니다. 어떤 개가 컹컹거리면서 울부짖어댑니까? 예, 바로 돌에 맞은 개입니다.
어느 시대에 있어 가장 불길한 징조는 바로 사람들이 사역자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의 입을 다물게 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사역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보다는 아시아 진성 콜레라를 종식시키거나 그레나다섬과 뉴오를레앙에서 발생한 황열병을 퇴치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저는 죄악을 좀더 적나라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다녀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저의 잠행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동의하고 있습니다. 상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상식을 사고에 적용시키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상식적인 말을 할 것입니다. "죄악의 실체를 직접 목도하기 전까진 그 죄악을 향해 저돌적으로 덤벼들긴 힘든 법이지요."
그러나 제가 취하는 방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브룩클린 하이츠(Brooklyn Heights)에 가서 총에다 공포탄을 장전 한 뒤, 우선 포스구(Fourth Ward) 쪽으로 한방을 쏘고, 그리고 나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눈언저리를 실그러트리며 한 번 쏘아 본 뒤 다시 공포탄을 장전하고서 부시윜(Bushwick) 쪽으로 걸어가는 식으로 순회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개중에는 제가 시내를 둘러보는데 대해서 거의 미친 듯한 반응을 보이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대륙의 심장부에 관해선 직접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사는 브루클린의 시청에서 5분만 걸어가면 직면하게 되는, 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5분을 채 걷기도 전에 마주치게 되는 이교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을 직접 목도하는 것은 죽으라고 안된다고 합니다.
어떤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우리가 사는 시의 음침한 구석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성직자가 저 이전에는 없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이 나라에서 저와 같은 잠행을 한 사역자들과 복음전도자들을 대라면 줄줄줄 나열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와 함께 밤거리를 시찰했던 한 경찰관은 저에게 그들 역시 저와 똑같은 길을 따라 걸으며 이 도시의 밤 풍경을 둘러보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심장이 조금만 더 뜨거웠더라면, 저는 아마 브룩클린과 뉴욕에 있는 큰 교회들에 소동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아직까기 한 번도 그렇게 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제가 그런 곳들을 둘러보는 것과, 형제들이 그곳들을 둘러보는 것의 차이는 그 결과에 있습니다. 즉, 그들은 사역을 할 형제들 외에는 거기서 보고 들은 내용을 이야기 하지 않지만, 저는 제 교회의 성도들에게 낱낱이 고해바칩니다. 그 죄악들을 겨냥해서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번개를 쏘아대고, 우리 젊은이들이 그것들을 경계 하도록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제가 죄를 비난하든, 아니면 그리스도를 전하든 간에,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항상 여러분들을 가장 깜짝 놀라게 할 수 있고 또 가장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가시고, 제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놀랍고도 가슴 뜨끔한 예들을 들고와서, 여러분들을 경악케 하고 또 자리에서 벌떡 벌떡일어서게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소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비난을 들을 의향이 있습니다.
Ⅶ. 복음의 주제는 영원한 구원입니다
저는 지금껏 여러분들에게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내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들을 전파하려고 늘 노력해 왔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시카고에서 출발한 기차가 곤경한 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근사하고 신속하게 정거장을 빠져나갔겠지만, 얼마쯤 가다가 그만 눈더미에 쳐박혀서 가던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 후로 기차는 다시 달리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달리는 기차를 타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그저 이 생애에서 이 땅 몇 마일 정도를 달리다가 우울한 무덤이라는 눈덩이 속에 우리를 쳐박아 놓고는 자기 임무를 끝내버리는 종교 따위를 잡아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런 기차를 잡아타는 이가 꽤 있지만, 전 아닙니다. 전 그런 기차 안탑니다. 저는 묘비석 즈음은 그저 이정포 정도에 불과한 밝고 환한 고속도로를 달리겠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하잘 것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이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대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오늘 이 아침에, 저는 여러분 모두가 저와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 게 되길 바랍니다. 이 길 위에는 여기저기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작은 발자국도 있고, 보폭이 큰 것과 노인의 것처럼 보폭이 좁은 발자국도 보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많은 발가국들 가운데, 발 한 중간에 우묵한 상처를 가지고 맨발로 걸어간 듯한 발자국이 보입니다. 아! 이것은 그리스도의 발자국입니다. 여러분 이 길로 나아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곧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2000년 전에 이미 구원의 길을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그분께 나아오기만 한다면, 그 즉시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은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바뀌게 됩니다. 나아오십시오. 이 길로 오십시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