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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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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의 물속과 사람의 마음
evergreenon
2004-10-22
열자의 물 깊이는 알아도 한자의 인간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그로부터 1개월 후에 한국에서 부탁 받았던 오누이가 그들의 엄마와 함께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갑자기 식구가 3명이나 늘었다.
여자들의 가정 사에서 식단을 짜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는 이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가정 주부들은 이를 잘 알 것이다.
나 역시 힘이 들었다. 여기에다가 우리 아이들과 유학 온 학생들이 서로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 힘은 배가 들었다. 늘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주 집에서 무역 업무를 처리 할 수 있어 내가 바쁠 때는 나를 도와 훨씬 일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학교에 다녀오면 아이들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해 항상 이야기 해주고 그리고 나는 남편과 의논하여 상담을 해주곤 했다.
오누이의 엄마는 이곳에서 3주 동안을 같이 기거 하면서 우리 집과 주위의 공부하는 환경과 학교 방문을 통하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당 부문을 이해하고 한국으로 자기 아이들을 잘 부탁 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남편 역시 열흘정도의 기간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타이트한 스케줄을 가지고 한국에 갔고 목적이 모회사의 물품을 한국으로 수입하는데 있어 독점권 계약 때문에 가게 되었다.
원예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께서 아이 유학에 대해 문의를 하기에 전화를 한다고 나에게 물어 왔다. 우리집에 같이 거주하고 있는 남편의 친구 딸 중의 한 아이 아버지가 이민 신청을 해두고 있기 때문에 곧 나가기 때문에 자리가 빈다고 혹시 만날 수 있으면 만나보고 아이의 유학에 관한 심중이 어떤가를 물어 보고 아울러 성적 증명서가 있으면 한번 보고 다시 전화 해줄 것을 요망했다.
다음날 전화상으로 성적은 상위 그룹에 속하고 자신이 유학을 가려고 엄마와 투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아버지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어서 나는 가능하다고 확답을 주었고 서류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혹시 시간이 있으면 오누이의 집에 잠시 들러 보라고 주문을 했다. 남편의 말을 들은 나는 좀 찜찜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누이 중에 누이가 남자 관계가 좀 복잡해서 그 아이들과 헤어지게 하기 위해서 카나다로 보냈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 조차도 멀어 진다는 생각을 갖고 믿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누나가 우리집에 처음 와서 침대와 책상을 정리하면서 책상과 침대 머리맡에 남자 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 놓아서 내가 부모님 사진을 올려 놓아야지.
널 누가 키우고 이곳까지 유학을 보냈는지 넌 그걸 아느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농담조로 준적이 있어 이 아이와 관련이 있구나 하고 짐작을 했다.
그 아이들 중에 누나는 새로운 각오로 공부에 임하는 것 같았으나 동생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을 아는 동시와 함께 그 집안도 간접적으로 다 파악이 가능하다.
아이들의 오가는 대화에서 그런 것 들을 감지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우리집에 여자만 있다가 새로운 식구의 남자가 왔기 때문에 그와 장난도 쳐주고 농구도 하며 근래 보기 드문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남편의 이야기로는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이곳의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나에게 설명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몸에 베어 온 행동들이 서서히 들어 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잠이 많다.
그리고 공부는 뒷전이다. 손으로 만지 작 거리는 오락기로 시간을 다 보낸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지하실에 만들어 놓은 공부방에서 내 자식 뿐 아니라 미리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불평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얘기에 의하자면 책상에 5분을 못 앉아 있고 소리를 내고 질문도 되지 않는 것을 돌아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물어와서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1층 남편의 서재에 조그마한 책상을 그를 위해 만들었다. 그리곤 항상 감시 감독하에서 우선 공부를 하던 안하던 책상에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갔다.
남편 이야기로는 공부를 가르쳐도 소 귀에 경읽기 이고 공부를 가르쳐도 듣는지 안 듣는지도 모르겠고 주위가 산만해서 나도 두 손을 들까 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였다.
나는 그러는 남편을 달래면서 최선의 노력은 해 보자고 다시 부탁을 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가정 환경은 너무나 중요하다.
내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은 한국 있을 때 했던 일들을 자랑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했다. 부모님들의 사업이 바빴기 때문에 허구한 날 새벽5시 정도가 되어서야 귀가를 하곤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천국 이였다고 했다.
귀한 자식이 해 달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고 돈으로 해결을 다해 주었다고 말을 하면서 집에 오면 공부라는 것은 생각도 아니하고 컴퓨터와 거의 붙어 살다 시 피 하였다고 했다.
컴퓨터를 할 때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했는데 집에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걸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다. 단 5분이면 채팅으로 여자를 20명은 꼬실 수 있다느니…. 이런 것들을 자랑 삼아 말하곤 했다.
우리집 교육 방법은 방과 후 저녁 식사를 하면 모두 책상으로 가야 한다. 그만큼 공부 하는 아이들은 시간이 아깝다고 스스로들 그렇게 한다.
영어로 공부하자니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날마다 들고 오는 숙제량은 엄청스레 많다. 그래서 보통 12시까지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 시간에는 자신의 침실로 올라 갈수 없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숙제와 관련된 문제라면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지만 단 한국에 있는 친구나 집에 전자 메일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2 시간씩을 주고 있고 전자 메일 수신 여부에 대해서는 매일 가능하도록 규율을 정해 놓고 있고 컴퓨터를 통해 게임이나 체팅은 엄두고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토요일은 일주간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자유 시간으로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형 몰이나 극장 등 아이들과 논의 한 후 선정하여 단체 생활로서 즐기고 돌아온다.
마찬 가지로 일요일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참석을 하거나 숙제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이니 이 남자 아이는 사실 우리집이 지옥 같았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아이 아버지가 컴퓨터를 개별적으로 사 주려고 하길래 남편은 반대 했었다.
그러기 전에 남편께서 아이에게 컴퓨터를 산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동 사무실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야기가 자신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고 자신의 방에 설치를 해 달라는 것이 였다.
한마디로 남편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왔고 며칠 후 이민 신청을 해둔 남편 친구가 오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공항 픽업을 나갔고 그는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업할 때 만난 사람이라고 자기 친구와 함께 왔다.
며칠을 우리 집에서 지낸 12월 1일 이였다. 우리 집에서 거의 10개월 정도를 같이 생활해온 아이 하나가 학교 곁으로 아버지가 이민 신청 중에 있기 때문에 곧 들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가는 날이다.
그들의 경비를 줄여 주기 위해서 남편이 회사 직원에게 부탁을 해서 트레일러가 달린 차와 우리 집 벤으로 이삿짐을 실었다.
이날 따라 유난히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 보라가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를 했다. 이삿짐이 오후 10시경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사 짐을 다 옮기고 난 뒤 냉장고, 화장실,스토브 등을 깨끗이 훔쳐 주고는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 날 이사를 했으니 아마 부자가 될 것이라고 농담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아파트 관리 사무실로 가서 우리가 미시사가에 왔을 때의 그 어려웠던 일이 생각나서 그들이 이 아파트에서 살수 있도록 사회 보장 카드를 복사하고 은행 카드를 제출하여 이들에 대한 보증서류에 싸인 을 해 주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전화가 없었다. 짐이 도착하면 해주기로 한 전화를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어서 남편은 차를 몰고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이삿짐이 도착을 해도 이삿짐을 아파트 관리인이 받아 주질 않는다고 해서 이삿짐이 새로 되돌아 가고 있는 중 이였다.
남편은 그들이 이불 하나 없이 그곳에서 자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음날 남편은 하루종일 그 집에서 이삿짐 정리를 해 주었고
나는 집의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그곳엘 가질 못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남편은 그 집엘 자주 갔다. 왜냐면 아직까지 그들은 운송 수단이 없었고 아직 이곳 생활에 미숙하기 때문에 도와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고 또 잘못되면 가서 바꿔 오기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집에 와서 나에게 별로 듣기 좋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남편도 잘 알고 있는 다른 친구의 딸과 자신의 적은 딸이 이곳으로 유학을 오게 되어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고 12월 20일경에 공항에 픽업을 나가야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유학 수속을 하는데 하루 이틀 소요만 되는가 거의 한달 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들이 오기 며칠 전에 이야기 하는 저의를 몰랐다.
남편은 그래도 친구라고 표현을 안 했지만 나에게는 심히 기분 나쁜 일들이었다. 남편은 그들을 위해 공항 픽업에서부터 나이아가라 폭포 및 토론토의 유명지를 돌아 다니며 이들의 관광을 시켰고 뒤 늦게 온 아이의 책상과 가제 도구를 일일이 돌아 다니며 값싼 집을 찾아 구입하여 집으로 실어다 주고 정리를 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집에 막내둥이의 아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류 수속은 다 끝이 났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 하려니 없어서 여행자 티켓을 구입하여 벤쿠버를 거쳐 관광 후 이곳에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은 금번에 오는 아이는 현재 있는 남자 아이와는 나이 나 학년이 같지만 공부는 무척 잘 하는 아이 이니까 남자 아이와 많은 비교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 아이 앞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사실을 흘려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긴장하는 것이 밖으로 표출 되었다. 우리집의 막내둥이는 부모와 같이 집에 도착하여 하루 저녁을 부모와 같이 이곳에서 밤을 맞이 하고는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가셨다.
며칠을 지나 막내둥이는 학교에 입학을 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우리집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피부로 느껴졌고, 우리집에서 학교 옆으로 이사를 나갔던 자매와 우리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오누이와의 석연찮은 예기가 흘러서 내 귀에 들어왔다.
우리 집에 있는 남학생은 공부를 더 힘들어 했고 또 다른 아이들까지 공부를 방해하여 남편이 주의까지 준 상태였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숙제 때문에 공부하러 모두 지하실로 내려갔고 나는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전화 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아보니 오누이의 엄마였다. 음력 설 경에 아이들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사업에 관한 전시회가 있어 방문 오는 김에 아이들을 보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전화가 너무나 반가웠다. 왜냐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기 때문 이였다. 아들이 이곳에서 적응을 못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와서 많은 도움을 주고 갈 것을 부탁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자기 딸 아이에게로 돌려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은 공부하는 시간이라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기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샤워를 한다고 엄마와 통화를 못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곳에서는 전화 요금이 비싸니까 엄마가 전화해 주기로 되어 있어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은 전부 공부한다고 여념이 없는데 넌 한국에 전화를 공부 시간에 하느냐고 묻고 간단히 통화하고 공부하라고 부탁을 하고 거실에 있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러고 10분 후에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였다. 전화기 수화기를 내 귀에 갖다 대는 순간 나는 심장은 멎을 것 같고 온 몸의 피는 꺼꾸로 쏟아 질것만 같았다.
남학생이 숨이 끊어 질려는 목소리로 나를 살려 달라고 호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무엇이 잘못 되도 크게 잘못 되었구나 싶어 그 다음 내용을 숨죽여 가며 듣고 있었다
그 다음 내용을 들었을 때 나는 이 문제가 우리집 내용인 것을 파악하게 되어 더욱 까무러 칠번 하여 손으로 입을 막고 계속 듣고만 있었다.
갈수록 우리집에 대한 험악한 소리가 나왔다. 14세 된 소년의 입에서 이러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기들은 우리집에 속고 왔으며, 악마들이 살고 있는 곳이여 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이러다가 내 머리 뚜껑이 열리면 이 집을 폭파 할지도 모르니 빨리 자기를 구하러 캐나다로 오라는 것이 였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수화기도 제대로 놓지 못한 체 앙금 앙금 기어서 남편을 불렀다. 그리고는 까무러쳐 버렸다. 내가 눈을 뜻을 땐 우리 두 딸아이가 나의 온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 남학생은 통화를 끝내고 지하 우리 딸아이의 방에는 없었다. 나는 전화 통화 내용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주먹 세계에서나 쓰는 그런 말이 14살 짜리 의 소년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꾸중을 하고 또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함을 지르면서 한국에 있는 부모와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과 통화를 하면서 하루 빨리 캐나다로 와서 문제 해결을 할 것을 요청했고 한시라도 이들과는 무서워서 같이 못 있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모두들 남에 자식 잘 키워야 본전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이제는 내가 계획하고 있던 대로 아이들을 키울 용기도 나지 않고 자신도 없었다.
앞에서 약간 언급을 했듯이 우리 집에서 나가 학교 옆에서 살고 있는 남편 친구의 아빠와 그 딸이 이들에게 접근해 이들의 뒤를 봐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이들 부모들이 만나서 모정의 계획을 갖고 있었던 걸로 들어 났다.
이 오누이들의 속 사정은 이러했다. 정말 열 자 깊은 물 속 깊이는 알아도 단 한자 안 되는 인간의 속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한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오누이들은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같은 가족 이지만 그 집의 아빠는 아들 편이고 엄마는 딸 편이였다. 가족을 편으로 가른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실지가 그랬고 엄마는 딸 아이의 비리나 나쁜 행동을 감추는데 연연했고 이를 잘 아는 동생은 항시 시한 폭탄과 마찬 가지 였다 한다.
어느날 교정에서 중국 학생으로 부 터 담배를 빌려서 피우는 것을 우리집에 있는 한 아이가 목격을 했다고 한다. 담배 한번 피우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학생이 담배를 피울 정도가 되면 벌써 같은 또래나 주위에서 우선 그를 바로 보지 않는 말이 된다. 그런데 동생이 누나의 그런 행동을 보고 참지 못해 교정에서 누나에 대한 과거사를 떠벌리고 다녔던 것이다.
우리 누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곳에 올 때까지 담배를 피웠던 골초이고, 일지매라는 단체원으로 행동해 우리가 살고 있었던 지역에 가서 물어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또 캐나다에 오기 전에 사귀던 남학생과 언약식을 했다는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이런 말들을 교정에서 동생이 하고 다니니 그 소문이 꼬리를 물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았고 또 우리 부부가 이러한 상황을 알까 봐서 하루 빨리 우리집을 나가야 했다.
누나는 동생 말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는 아빠가 그렇게 미웠고 이 아빠는 딸 아이의 삐 뚫어진 행동이 못 마땅해서 닥치는 대로 폭행을 하였다고 했다.
학교에서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니 누나는 동생에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다그치니 동생은 우리집을 악마에 집에다 비유하며 자신들의 탈출구를 위해 동생을 이용한 아주 무섭고 대담한 자작극을 벌렸든 것이 였다.
사실 나중에 안 일이였지만 이 오누이의 아빠는 딸아이의 비행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단지 남학생 2명 정도를 사귀는 그 정도 였다.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이 딸아이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이 벌였든 이런 일들이 누나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또 하나의 구세주 였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30여분에 이를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자그마한 아파트에 오누이 둘 만이 자취를 하며 좋아하는 컴퓨터로 밤을 세우며, 사귀고 싶은 남자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게 가끔씩 들려오는 뉴스 일뿐이다.
이 아이들과 관련된 더욱 경악 할 만한 일은 이민 신청 중에 있는 남편 친구였다. 자신의 아이를 우리집에 부탁했을 때 정말 사업에 실패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여겨 그 아이는 생활비도 다른 아이에 비해 삼분에 일 정도 밖에 받지안했고 행여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싶어 다른 아이들 보다 신경을 더 많이 썼고,
우리 집에서 나가 안정될 때까지 남편이 진정으로 도와 주었던 남편 친구가 캐나다에서 평이 좋지 않는 이민 브로커와 결탁을 해서 이 아이들의 책임도 지지 못할 정보와 행위를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남편은 이와 영원한 결별을 해야 했다.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설명을 했다. 지나온 과거사를 생각해 보니 항상 그는 나를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제물로만 생각했는 것 같고 진정한 친구의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가 평 직원으로 있을 때 소식 하나 주지 않다가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중간 다리 역할만 나에게 부탁 했을 뿐 이였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과거사와 나의 현재사를 비교 해볼 때 한국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는가 .
자기에게 필요성을 느낄 때만 웃음 지으며 친구라고 부르짖는 이는 분명 친구다운 친구가 아니라고 남편은 열변을 토하면서 그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하기로 선언했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자주 한국으로 부 터 유학에 대해 전에 근무했던 직장 동료들이나 동창, 동기 등의 사람들로부터 유학에 대한 상담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보고 느낀 유학생활에 대한 진상과 영어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설명 하면서 다음의 말들을 덧붙여 주곤 한다.
한국에서도 공부를 수준급으로 했다면 적응에 별 어려움이 없이 이곳에서도 공부를 잘하고 자기가 목표하는 목표치 까지 도달하여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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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공부하러 오는 곳이지 여행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
l부모의 강요에 의해 오는 유학은 100% 실패로 가는 지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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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부모가 알고 있는 지인과 함께 있든지 아니면 부모와 동반하여 유학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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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들이 쓰고 있는 용돈에 대해 그 지출 경위를 확인하라.
이러한 모든 말들은 실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하고 보고 있는 상황을 토대로 적은 것이다. 나는 요즈음 정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보면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살아질 때 까지 그들을 응시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우리 집에 있는 남편을 포함하여 자식, 남편 친구의 딸 또 조카 등과 같이 시간만 있으면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러한 대화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미연에 방지도 해 줄 뿐 더러 화목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