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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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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체류시 이별과 인연들
evergreenon

한국 체류 10일 동안에 일어났던 영원한 이별과 인연들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입원하여 계시는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내가 도착 했다는 것을 알리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벌써 나의 볼기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환자는 주무시고 계셨지만 얼굴은 벌써 황달에서 흑달로 변해 있었고, 복수는 만삭이 된 임산부 같이 가득 차 있었다. 피부는 탈수를 경험한지 오래되어 뼈와 가죽은 따로 움직이고 있을 정도 였다.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와 숙모는 밖으로 나와 손을 꼭 잡고 한참을 울고 난 뒤, 환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간암 환자 인지를 모르고 내가 도착하면 의사선생님과 논의하여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기를 희망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갑자기 8년 전의 악몽의 순간들이 나의 뇌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셨고 또 우리 현재 아이들 까지 나의 직장 생활을 위해서 돌보아 주시던 나의 어머님이 똑같은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 하셨었다. 그 당시 내가 병원에 근무 한다는 호 조건 하에서도 온갖 의학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단지 얼마간의 생명의 연장만 가져 올뿐 올바른 치료법이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그 죽음 앞에는 의사 아니 그 보다 더한 사람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감히 환자에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산 사람의 도리일 수밖에 없질 않는가. 나는 금방 비행기에서 내려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밤새 환자 옆에서 숙모와 간호를 하며 함께 했었다. 때는 3일 후면 추석 이었다. 환자는 추석을 지난 다음 다시 입원 하겠다는 의지를 비쳤기 때문에 그 바람대로 환자를 퇴원 시켜 드리고 내일 댁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는 다른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시어머님과 친정에 나의 10일간의 일정에 대해 계획을 알려 드렸다. 그리고 저녁에 약속이 있어 눈에 잠이 쏟아 지는데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를 향했다. 약속 장소에는 남자 두 분과 여자 한분 이 나와 있었다. 여자분은 내가 알고 있는 남자분과 부부 사이였고 다른 한분은 직장의 직원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분과의 만남은 내가 병원에 재직 할 당시 이분의 어머님께서 위암 선고를 타 병원에서 진단 받고 수술을 위해 병원을 알아 보고 있던 중 나의 후배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되어 수술도 하게 되고 입원 당시 많은 배려를 해준 덕에 그의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신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이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이분들을 만나려고 약속을 했는가는 우리가 이사를 하고 그곳의 문화생활이나 이웃을 알고 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집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케네디언 장로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에디라는 무역업을 하는 분을 만났었다. 그래서 남편과 에디라는 분이 무역업을 하게 되어 내가 한국에 갈 때 몇 관심 있는 품목에 대한 정보를 구해 달라기에 나는 남편 업무를 대신해서 이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사업 규모가 전에 보다 많이 크지게 되었고 상품에 대해서도 생산할 계획을 직원과 합세하여 나에게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자기 집에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있는데 캐나다로 유학할 길이 없겠느냐고 부인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사실 현재 조카를 비롯해 남편 친구 딸 둘을 캐나다에서 거두고 있다고 말을 하고 유학에 대한 현실과 적절한 연령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 분은 부인의 말을 가로질러 유학을 보내면 적은 아이를 보내야지 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나의 직감으론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신이 아닌 이상 이 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선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는 자매가 있다는 것 이였다. 동생은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 이라는 것이 였다. 그리고 만약 유학을 가게 된다면 누나가 동생을 잘 거둘 수 있어 아무래도 적응도 빠를 것이고 등의 좋은 말을 해 줬다. 나는 그런 깊이 있는 의향이 있고 남매를 보내고 져 하신다면 내가 다소 힘은 들겠지만 내일 아이들을 한번 보고 난 뒤에 결정을 하자고 말을 끝내고 이야기를 돌려 무역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리고는 헤어졌다. 다음날 나는 없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가 거둬야 하는 아이들이 될 것 같아 그 집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약 한시간 동안에 대화를 거치는 동안 말도 없는 수수한 아이들로만 나의 인상에는 비쳐졌다. 그래서 없는 시간에 얼른 그 댁에 그렇게 하겠다고 알리고 준비할 서류랑 접촉할 에이전트 등 해서 정보를 남기고 나는 나의 바쁜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는 병원으로 가서 안동에 퇴원해 계시는 시숙님을 위해 각종 영양제 및 약을 챙겨 당지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밤새 간호를 하면서 의식을 갖고 계시는 시숙님에게 이날까지 우리를 보살펴 주신 은혜랑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하루 밤을 꼬빡 세웠다. 나에게는 이게 시숙님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추석 준비를 위해서 나는 시댁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핸드 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나의 귓전을 노크했다. 나는 잠결에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숙께서 각혈을 해서 구급차로 후송을 하고 있는 중이니 급히 병원으로 나와 달라는 전갈 이었다. 갑자기 피곤함과 잠은 사라졌다. 결국 올 것은 왔구나 싶은 감이 나에게 와 닿았다. 밤 11시경의 밤 공기는 이제 겨울을 준비 하는 듯 차가워 지고 있었고 내가 응급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구급차는 도착 하였다. 숙모님의 다급해진 목소리는 그저 큰일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진정을 시키고 평소 잘 알고 지내고 있던 시숙의 담당 주치의 댁으로 전화를 내었다. 위급 상황을 전하니 그는 레지던트에게 자기가 도착할 때 까지 응급 처치를 하고 곧 바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내 도착 하셨다. 초를 다투어 내시경으로 혈관이 터진 위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막고 있었지만 너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속수 무책 이었다. 담당 주치의의 인상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점점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소생을 위해서 환자 위에 의사가 올라가 소생법을 시도 했지만 이미 환자는 숨을 거두고 있는 중이였다. 나는 기도했다. 시숙을 위해서 “ 하나님 이시여 생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몸바친 나의 시숙을 천국에서 받아 주소서” 나는 남편 대신 장례식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대표 인사를 할 정도로 책임이 막중하였기 때문에 나의 다른 일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고인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야 완공시킨 아름다운 시숙의 집을 뒤로 한 채 쉴 사이도 없이 다음 계획을 진행하기에 마음이 바빠 있었다. 너무나 바쁜 일정이다. 다음은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도 만나야 하고 남편 사업을 위한 자료 때문에 부산까지 원예 공장도 둘러 봐야 하고 너무나 시간이 빨리 흐른다. 우선 부모들은 밤에 만나기로 하고 남편 사업에 관한 일부터 마무리를 지우기 위해 부산에 있는 원예공장에서 나는 남편이 수입할 사진이랑 또 각종 자료들을 수집했다. 내가 보기에는 젊은 사장님으로서 너무나 패기가 있고 자신이 만든 모든 제품에 대해 아주 자신 만만해 하시는 것이 였다. 그리고 광고시에 혹시 사용될지 모른다고 또 많은 셈풀도 주셨다. 밤에는 우리집에 기거하는 부모들을 만나 아이들에 대한 근황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 마다 부모들로부터 인성이 예민한 시기에 부모도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는데 대한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그렇게 듣기도 좋았고 또 이들을 위해서 나의 더 나은 최선을 다해서 훌륭하게 키우리라는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지나가 버렸는지 모를 10일의 기간은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날들 이였다. 캐나다에 돌아와 보니 이제 내가 없어도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엄마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잘 있었고 학교 공부도 성실히 하고 있었다. 이제 내 마음이 좀 놓이는 듯 했다. 한국에서 겪어야 했든 시차와 피곤함 들이 겹쳐져서 이곳에서 두 배의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