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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보3탄과 함께 꿈의 둥지로
evergreenon
2004-10-22
날아든 낭보 3 과 함께 꿈의 둥지로
아이들과 남편을 학교로 보내고 나는 식탁 위에 홀로 앉았다. 구수한 한국에서 가져온 녹차 한잔을 홀짝 홀짝 마시면서 식탁 창가로 내다 보이는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새들이 우리집 뒤뜰에서 옹기 종기 모여 놀고 있었고 한번씩 불러대는 노래 소리가 유리 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선율을 들렸다.
갑자기 한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는 한국의 까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캐나다는 그 까치가 없다. 나는 그 까치를 대신하는 길조의 새로는 카나다에서 어떤 새가 있을까 하고 생각 해 보았다. 아직 까지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한 내가 그런 문화까지 아직 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기분은 이상하다. 저 새들이 유난히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우리집 뒤뜰에는 블루베리라는 버찌 나무가 있는데 새들은 그 열매를 너무 좋아했다.
아침 기상은 항상 새소리에 깨어 나곤 하였다. 그날 저녁에 한국에 있는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주권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애태우게 기다리던 영주권 이였던가.
너무나 기뻤고 몇 만번을 외쳐도 부족함이 없던 이 세 글자가 아니던가. 잠시 나는 내 몸에 힘이 모두 빠지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뇌리를 지나가는 많은 일들 특히 이민자가 아닌 관계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순간들 뒤에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차를 들여 받아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보내 주던 일,
공항 이민관 과 한국 여자 통역 자원 봉사자와 합세 우리가 뭐 죄 지은 사람 마냥 심문 아닌 심문을 3시간 이나 받으며 우리에게 대하던 그 모질고 냉정한 그 얼굴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써가면서도 뜻뜻하지 못했던 우리의 입장,
먼저 이민 왔던 못 되 먹은 인간들의 영주권자라는 거드름, 아이들이 이제는 정식 학교에 가고 싶다는 투정의 말들 등등 이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나의 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이로 부터는 해방이다. 내가 정말 이곳에서 절대 절명으로 살아 나가야 할 과제 만 남은 것이다.
우리 집으로 이사를 가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열심히 교회를 다닐 것이고,열심히 영어를 배울 것이고, 열심히 이웃을 사귈 것이고, 그리고 더욱 열심히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훌륭히 키울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을 했다.
에이전트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영주권을 붙이려 하기에 마침 이 시기가 우리의 보금 자리로 거처를 옮기는 날과 거의 맞물리게 되어 잘못하면 또 우리에겐 너무 중요한 서류들이 제차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사 갈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집의 전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우리가 이사 가기 전에 서류 우편이 도착을 하면 꼭 좀 받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사를 하던 날 아침 우리 집에는 그 동안 남편이 이곳에서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 주려고 왔었다.
조선생님댁과 또 그분의 친구분 인 박 선생님, 페루에서 이민 와서 7년이 되었다는 아르만도씨, 불이 나서 내가 도와 주었던 옆집의 에쉬리의 아버지, 타운하우스와 아파트 단지의 매니저의 남편인 알비씨, 일전에 이사를 도와 주워 고맙다고 이사 차량을 연락 해준 루나씨의 고향 후배인 폼피씨 등 여러 사람이 우리의 이사를 축복해 주었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영주권 없이 이곳에 정착 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조 선생님 댁과는 이제 약 40분 거리 밖에 안된 곳으로 이사를 가지만 그래도 너무나 정 들었던 미시사가의 많은 날들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오늘도 우리의 이사를 도웁겠다고 우리가 떠나고 난 자리를 청소하고 뒤차로 우리가 이사 가는 집으로 떡을 하여 오시겠다고 했다. 캐나다의 이사 문화는 한국과는 다소 좀 다르다 아니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이런 문화는 권하고 싶다. 이곳은 살다가 이사를 하게 되면 이사 짐을 다 싣고는 집안을 말끔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이사 들어 오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그러나 한국은 청소를 하려면 비자루로 쓸면 복을 쓸어 낸다느니 하는 이상한 문화가 정착이 되어 있지 않는가. 이곳은 냉장고 안이며 방, 어느 구석구석 할 것 없이 먼지 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고 가는 것이다.
거의 1년 남짓 이곳에서 살았는데 제법 가제 도구들이 불어 있었다. 차 한대로 도저히 이사를 할 수 없어 운전 기사분 에게 두 번을 운송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고도 너무나 싼값에 즉 그분이 도와 준다는 입장으로 우리의 이사 짐을 운송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은 인덕도 참 많은 편이였다.
우리의 보금자리에 도착을 했을 때 그곳은 한창 물건을 실어내고 한쪽은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집에 서류가 왔는지 만을 확인하고 곧장 변호사 사무실로 인수 열쇠를 받으러 갔다.
이곳에서 집을 사고 팔 때는 반드시 변호사가 중심 역할을 한다. 매매인과 매수인이 직접 거래하는 법은 없다. 매매인과 매수인의 변호사가 각각 따로 있기 때문에 변호사 끼리 연락을 하고 집 값이 완벽하게 지불이 되었는지,
집의 주 입구의 열쇠는 도착이 되었는지 등 집주인에게 무엇을 받고 주고 하는 이런 일은 없다. 반드시 변호사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매매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던 것이고 그곳에서 우리가 구입한 집의 열쇠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의 가장 큰 일은 이사에도 있었지만 영주권 서류를 받아 쥐는데 그 뜻이 더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영주권이 가지는 비중이 컸다. 다시 우리 집으로 도착을 했을 때 아직 까지 계속 이삿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주인집 아들이 나와서 노란 서류 봉지를 전해주고 갔다.
그렇다 얼마나 바라던 영주권의 서류가 내 손안에 들어 왔는가. 나는 너무나 행복 서러웠다. 남편은 우리 차 안으로 이 귀중한 서류들을 들고 들어 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 같이 개봉을 했다. 이 서류를 가지고 이민국에 가서 접수를 하고 랜딩 허가를 받으면 이제 100% 영주권자가 된다고 남편은 나에게 설명을 해 줬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로 왔다면 공항의 이민국에서 서류 절차를 다 수속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민국을 어떻게 가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에 우리 비자 연장 신청을 했던 곳으로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해 본 결과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는 캐나다 이민국으로 가시면 되는데 차를 타시고 미국 국경 있는 곳으로 그냥 한 바퀴 도시고 캐나다 이민국으로 들어 가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대답을 해줬다.
작년에 아버님과 동생이 방문했을 때 우리는 미국 국경을 한번 통과한 전례가 있었기에 금방 이해가 갔다.
내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월요일 날 수속하기로 결정을 하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캐나다 에서의 첫 우리 소유의 집에서 기분 좋게 아무 걱정 없이 꿈나라로 갈 수 있는 행복한 첫날이 될 수가 있었다.
일요일 날도 우리는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의 방 배정을 다 끝내고 나의 성격상 전 주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고 떠났다 해도 나는 다시 진공 청소를 하고 걸레로 훔쳤다. 이렇게 열심히 육체적인 노동을 해도 피곤 하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게 내 집이고 또 손에는 영주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라고 나는 나 혼자서 뇌 아려 보았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우리 4식구는 나이아가라를 향했다. 나이아가라 레인보우 다리 위에서 우리는 순서를 기다렸다. 국경소 입구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온 서류를 보여 주니 차를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류에다가 미국 입국 거절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면서 그곳에서 돌아서 다시 캐나다 국경소로 가라는 것이 였고 우리를 그곳 입구까지 안내 해 주었다.
우리는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국경소에서 랜딩 허가를 받았고 담당자는 아주 친절하게 농담을 섞어가면서 우리가 살 주소지 등등을 물었다.
서류 작성을 완전히 마치고 이민관 이 페이퍼를 접어 여권 속에 집어 넣으면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는 캐나다에서 좋은 삶 사십시요 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우린 밖으로 나왔는데 아! 이 기분을 어디다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발걸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캐나다의 정식 영주권자다.
그리고 영주권자로서 모든 혜택을 누릴 수가 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이 영주권이 너무나 크다란 정신적이고 때론 경제적인 이익까지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이제는 편안한 나머지 아이들과 나는 농담까지 나왔다. 좀 전에 우리가 잘못 알고 실수한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이 여태 까지도 미국 비자 없으면서도 미국 땅 밟아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는 농담을 하고 있다.
사실 미국 국경 검문소를 가지 않아도 충분히 바로 캐나다 이민국을 바로 갔으면 될 수 있었는데 캐나다 이민국이 너무 작고 코너에 위치해 있어 다리로 돌아간다고 가는 것이 미국 쪽으로 가게 된 것 이였다.
그렇다 2000년 5월 28일은 우리가 캐나다의 정식 영주권자로서 새로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이 날이 있으므로 나는 나의 서재에서 이렇게 나의 수기를 쓸 수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