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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에 날아든 낭보2탄
evergreenon
2004-10-22
낭보 2탄
2월18일의 새벽 이였다. 어제 그리고 아래 이틀동안에 임시 렌트할 집 결정 때문에 많은 신경을 쏟았더니 피곤이 엄습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비몽사몽 간에 듣게 되었다. 큰 아이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지금 이 새벽시간에 캐나다에서 전화할 주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도 완연히 안 깬 상태 속에서 말이다. 그런데 난데 없이 큰 아이가 방에 노크도 아니하고 문을 후다 닥 열고 엄마! 하고 들어 와서는 서울 에이젠트서 전화가 왔는데 아빠의 이민 인터뷰가 면제가 되었으니 신체검사, P.R여권 그리고 Landing fee 이 모든 과정을 동시에 서둘러 하라는 통보였다.
이런 낭보가 어디 있을까? 우리 가족은 이웃 모두가 꿈속에 있을 때 그때 시간이 정확이 1월18일 새벽 4시였는데 환호를 지르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그 기쁨을 이루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바라던 소식 이였던가. 아니 인터뷰 면제 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인터뷰 날짜가 나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다고 생각 해 왔었다.
왜냐면 인터뷰 후에 이민을 오지 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호 조건을 갖고 있는 경우엔 100% 가능하리라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가 면제 된 것은 우리에게 경제적, 정신적의 모든 부담을 덜어 주게 되었다.
실지 이민 신청할 당시에 인터뷰 지정 장소를 필리핀으로 했기 때문에 인터뷰 날짜가 잡히면 우리 가족 즉 작은 아이를 제외 하고는 모두가 필리핀 대사관으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으로 가면서 발생되는 3사람에 대한 비행기 티켓이며 또 숙소 및 식사 등에서 발생되는 비용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이미 그곳을 다녀온 선배 이민자들에게 수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사 드렸다. 처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감사 드렸고 다음은 캐나다 대사관에 참작 해달라고 서류를 잘 정리하여 보내주신 에이젠트에 감사를 드렸다. 실지 캐나다 대사관에서는 참작 서류를 검토한 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걱정을 하고 있는 한국 친지들에게도 전화를 내어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아침 일찍 조선생님댁에도 전화를 내어 이 소식을 알렸다. 그들로부터 축하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지 내 큰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빠른 결정을 내렸다. 오늘은 이곳에 비행기가 뜨는 날이기 때문에 모두 한국을 가서 신체검사부터 시작하여,PR여권도 만들고 Landing fee도 내고 모든 서류를 마친 뒤에 우리집으로 올 예정으로 되어 있는 조카와 남편 친구 아이들과 들어 온다는 계획으로 일단은 비행기 좌석을 알아 보기 위해 LA에 있는 대한 항공 지사로 연락을 했더니 마침 스페어 좌석이 있어 예약을 해두고 아침부터 부산하게 짐을 꾸리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 간다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한국에 가면 자신들이 할 계획들을 미리 얘기하며 부산을 떨더니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남편은 이웃에 살고 있는 예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상황을 얘기하고 저녁에 공항까지 실어다 줄 것을 부탁했다. 짐을 꾸려 놓고도 한국가면 또 친척들으 선물이 생각나서 가까운 몰에 가서 여러 가지 선물들을 준비하여 가방 빈틈 사이를 채워 넣었다.
자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조 선생님 댁에 전화해서 우리가 없는 동안 집에 가끔씩 들러 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옆집의 예준 아빠는 벌써 우리의 집을 자신의 벤에 싣고 있었다.
그때 였다. 난데 없이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서울 에이젠트 ** 대리라는 분으로 부 터 전화가 왔다. 이번 전화는 내가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한국에 올 필요 없이 신체검사 며 모든 것을 카 나다 땅에서 다 해도 된다는 것이고 자신들이 보내 주는 주소를 바탕으로 이곳에서 모든 서류를 하라는 것이다.
신체검사는 어느 곳에서, 보내 준 주소로 Money order를 발행하여 대사관으로 보내고 , PR 여권은 캐나다 한국 대사관에서 모든 수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경비 지출하여 한국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였다.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더니 갑자기 우리 식구의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쪽에서는 한국에 가서 수속을 하자는 것이고 그래도 경제적, 시간적 모든 사료가 밝은 어른들인 우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수속 처리를 하겠다는 쪽이 였다. 그때의 아이들의 실망스러운 그 눈초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성장하여 나의 처지가 되었다면 그저 한국을 가는 것 자체에만 비중을 둘 것인가를…. 그렇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의 사고 방식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아이들을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이며 또 한국에 갔을 때 주변 친척들에게 주는 피해며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하늘과 땅에서 소비되는 시간이며 일일이 예를 들어 가며 설명을 했더니 수긍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을 약속했다. 예준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의사를 전달 하였다. 예준 아빠도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너희들은 어른들의 굳은 심경을 잘 이해 못 할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집을 향했다. 다음날부터 무척 바쁘게 보낸 날이 되었다.
신체검사 지정 병원에 예약을 하니 신체 검사가 밀려 있어 1주일 후가 된다고 하고 또 신체 검사로부터 1 주일 후에 검사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검사결과 통보를 병원에서 직접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송부하여 각 해당 지국 대사관으로 송부 한다고 했다.
일단 신체 검사를 하면서 혹시 신체검사에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담당 의사의 말에 따르자면 이상이 있으면 상세 검사를 위해 다시 나와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늘 검사 결과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1주일이 지나갔다.
병원에서 연락 온 사항은 전혀 없었다. 일단 안도에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한국대사관에 가서 우리의 PR여권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리핀으로 Money Order를 발행하여 우리 식구들의 Landing Fee를 송부하였다.
그래 이젠 거의 안심이다. 우리는 이제 영주권만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자 하고 나는 나 혼자 중얼 그렸다. 실지 나의 기분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아직 완연한 영주권을 못 받아 쥐었지만 80% 정도는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과 비교 해볼 때 이는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다.
정신없이 보낸 2주후에 나는 피어슨 국제 공항으로 조카와 남편 친구의 딸들을 마중 나가게 되었다. 이전에 실지 나는 너무나 바빴던 것이 아이들이 오면 같이 사용해야 할 방들을 청소하고 또 남편과 내가 쓰던 방이 그 중에서도 제 일루 크고 좋았기 때문에 이방은 남편 친구 딸들이 사용을 하도록 준비를 했다.
사실 조카는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이고 그리고 남편 친구 딸들은 첫 객지, 부모를 떠나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해 줘야 한다는 나의 배려였던 것이었다.
또 우리는 이사 갈 때 까지 1층 거실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장실 사용이 문제 였는데 지혜롭게 사용 하기를 기대했다.
한국에서는 벌써 남녘에서 화신의 소식이 들려 올 때 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한 겨울을 아직 탈피 하지는 못했기에 밖의 날씨는 살을 애는 듯한 매섭고 차 거운 바람이 불어 왔다. 아이들 모두가 출구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인형과 선물 꾸러미들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 해 두었는데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부모와의 첫 헤어짐과 친구와의 먼 훗날 성공하여 만나자고 하던 약속들이 너무나 힘이 들었던지 각자의 얼굴에는 그렇게 밝은 표정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방들을 배정해 주고 이사를 할 날까지 조금 불편 하더라도 잘 지내 달라는 양해를 구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탁을 했다.
너희들은 이곳에 공부를 목표로 온 이상 잠자는 시간 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더 길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이구 동성으로 “예” 라는 답을 들었을 때 무척 흐뭇했다. 그 다음날부터 아이들의 시차 적응을 위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비롯해서 북쪽에 얼음 낚시로 유명한 심코 호수, 카사로마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낮에는 각 몰을 다니면서 전시되어 있는 이 나라의 상품을 감상 하기도 하고 이들은 어떤 것을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도 그로서리 스토어를 다니면서 익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모두가 부모들 밑에서 이날 이때까지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온 아이들 이였기 때문에 남과 같이 사는 공동생활에 대해서도 인지 시켰다. 아이들은 서로 서로 상부하며 양보하는 미덕 속에서 공동생활을 배우고 이해 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서서히 터득해 나가고 있어 정말 보기가 좋았고 나의 마음도 푸근했다.
유학생들이 입학을 하는 날 우리 온 가족은 그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에 대한 소개를 해주고 선생님들을 만나보며 그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제일 처음 아이들에게 이게 너희들의 학교라는 것은 소개 시켰을 때 아이들은 학교 건물만 보고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다. 캐나다의 대부분의 학교 건물은 한국과 같이 외부 장식을 거창하게 지어 놓은 것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학교 내부의 구조나 실험 실습 기자재며 속이 알차다고 보면 옳다. 이곳도 마찬 가지이다. 겉으로 건물은 너무나 볼 것이 없다.
한국의 여느 오피스 건물 같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남편이 아이들을 매일 데려다 주고 데려 와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길은 너무 멀고 한번 왕복하는데 실지 들어가는 자동차 휘발유 값도 카나다는 싸다고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형편 이였다.
그래서 남편은 그 대책으 일환으로 아이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다운타운 금방에 위치한 Salvation Army(구세군 교회)에서 정부의 보조를 받아 운영하는 ESL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과 우리 아이들과 유학 온 학생들의 하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그곳에 등록하게 되었다. 이곳은 각 나라에서 온 이민자나 난민자 등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데 비지터는 적절한 수업 비를 내고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도 비지터의 신분 이였지만 남편이 그곳 선생님에게 현사정을 설명하니 이민 접수 file number가 있으면 되니 그걸 내일 가져 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남편이 수업 해야 할 Level Test를 치루였다. 이곳은 초급 반 1, 중급 반 2, 고급반1 해서 4 학급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우리 아이 둘과 남편이 같은 고급반에 Level Test를 통과하여 내일부터 정식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업시간은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오후 3시 30분이면 마치니 유학 온 아이들 마치는 시간이 3시40분이고 보면 거의 시간이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후 아이들이 파할 시간 즘이 되어서 우리는 학교 비지터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들이 몰려있는 곳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모두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손에 낀 모양은 한두 번 그 행동을 한게 아닌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서로 안고 뽀뽀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 보통 이였다. 나는 내가 너무 과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담배를 태우는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허깅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글 담배를 하다 보면 이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약과 마리화나에 노출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의 문화는 이러한 난잡한 행위나 행동을 받아 들이는데 그렇게 관대 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엄한 관리자 밑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참다운 교육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내가 아이들의 교육에 가정 에서부터 신경을 써야겠다는 마음 가짐을 다시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날 첫 만남의 타 유학생들이 취한 이미지들이 지금 이순간 까지도 없어 지지 않는다.
유학생들은 부모를 떠나 감시 감독이 소홀한 이곳이 천국이다. 이곳이 그들을 위한 낙원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한국 보다도 훨씬 자유 서러운 모든 것 들은 이들을 유혹하는 연결 고리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공부에 흥미를 잃으면 모두가 유흥쪽으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 수기 속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부모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부모들이여! 절대 일가 친척 없는 이곳으로 학생 혼자 절대 유학을 보내지 마십시오 하고 단호히 부탁 아닌 부탁을 보내고 싶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아이들에게 부모와 자식 관계 이상으로 키우고 있다.
아마 자신들의 부모 보다 더욱 엄하다면 정답이 될 것이다. 실지 주변에서 내 자식 키우기도 힘든 데 넘 자식을 키운다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은 수십 번 또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난 이상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대로 이들을 키우겠다. 그리고 이들에게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을 50% 씩 만을 배정 할 것이다.
우리 부부의 정직한 삶과 노력을 배운다면 이들이 후회 없는 자신들의 결혼 후의 삶이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저녁 먹이고 그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는 남편을 볼 때 아이들이 이곳에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다 싶어서 너무도 행복했다.
한번씩 나의 눈에 눈망울이 메이도록 하는 일도 있다. 아니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한국의 부모들이나 동생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받을 때 이들은 훌쩍이면서 울면서 통화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인들이 보고 싶어서 일어나는 현상은 백번 이해가 가지만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섭섭한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걱정도 하고 또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눈 속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이다.
옆집에 살고 있던 예준아빠는 미국에 직장이 되었다고 미국으로 가야 된다고 인사를 왔다. 남편이 그들의 이삿짐을 싸는 것을 도와 주려고 했더니 자기가 취직된 회사에서 이삿짐 전부를 싸고 부치는 게 포함이 되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부러운 한 대목 이었다. 지금도 가끔 전화가 오지만 이들이 그 동안 너무도 고마웠고 그리고 이들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근처 Eldorado Park을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 일주간의 모든 스트레스도 풀고 아이들은 마음껏 그곳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또 목이 터 저라 한국 가요들을 불러 보곤 했던 곳으로 자주 갔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참나물이나 고비 등을 채집하기도 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곳에서 먹기 힘든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아직까지 랜트 하여 살고 있는 타운 단지 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불을 피워 BBQ를 만들기도 어려웠고 해서 우리는 이곳으로 고기를 장만해서 항상 야외 BBQ를 즐겼던 것이다.
우리가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날 한국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 벼락 같은 소린가.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아니 우리 큰 아이의 신체검사 서류가 빠졌다는 것이다. 정말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정 신체검사에 전화를 내어서 사실을 이야기 하고 지금 당장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확인을 하였는데 자신들은 한 봉투에 다 같이 붙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들의 이야기로는 아마 오타와 대사관에서 분류 도중에 미싱 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 서류를 다시 한번 카피 해서 부쳐 달라고 이것은 우리 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서류라고 우리는 사정을 했다.
다행이 담당자는 실지 이건 개인이 볼 수 없는 일급 서류이므로 봉투에 넣어 봉해서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게 더욱 인정스러운 것 같아 승낙을 했다. 그리고는 우체국에서 특급으로 그 서류를 필리핀 카나다 대사관으로 직접 송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