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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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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에 날아든 낭보 1탄
evergreenon
2004-10-22
2000년 1월달 동안에 우리집에 날아든 낭보 1탄
해가 바뀐 지가 오늘이 3일째가 된다. 나는 바깥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우리집 우편함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고지려니 하고 생각을 하고 가까이 갔다. 아니다. 큰 우편물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니면 소포가 올 때가 없을 텐데 하고 손으로 짚어 들었다. 그런데 봉투 위에 캐나다 국기가 걸려 있는 관공서 봉투였던 것이다. 아마 내 짐작으로는 십 중 팔구는 비자 연장 했던 게 돌아 왔는가라고 직감 되었다.
나는 옆집에 있는 남편을 불러 서류를 보여 주니 캐나다 대사관에서 보낸 것 이란다. 우리는 얼른 개봉을 하고 서류를 읽어 나갔다. 6개월 연장이 되었다는 내용 이였다.
또 이게 웬일인가 이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6개월 연장이니 약 8개월을 이곳에서 체류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말 도와준 분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일일이 도와준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옛날 말에 이런 속담이 있다. 화장실 갈 때 종이가 급하다고 그런 후에는 그 종이의 고마움을 모른다. 나는 나의 인생사에서 이 말을 젤루 싫어한다.
이 연장 비자 서류를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내 머리에 떠 올랐던 것은 피어슨 국제공항의 이민 심사관의 얼굴 이였다. 왜 일까? 나의 간장을 그토록 애타게 했던 그가 괜스레 미워졌다. 이러면 될 것을, 물론 자신은 자신의 업무를 이행했을 뿐이 였겠지만 나는 피가 말랐었잖아!
이제는 우선 급한 불은 소화가 되었지만 다음 걱정은 우리 아이들의 학교 문제 였는데 빨리 우리가 영주권자가 되어야지만 아이들 학교를 보낼 수가 있었고 개월을 더할수록 나이는 한 살씩 더 먹게 되고 공부는 한층 더 어려워 진다.
나는 우리 어린 시절에 흔했던 말 한가지가 생각이 났다. 학교를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가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다는 말을 수 없이도 들어왔었는데 그게 지금 우리 아이의 현실이다 이제는 학원은 그만두고 학교를 가서 정상적인 수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껏 잘 참아주고 불평을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을 그들은 영어라는 제2 외국어에 소비했던 것이다. 입국할 때 내가 결심한 결심 중에 하나가 영어를 정말 열심히 잘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 내 나이에 한쪽 귀로 들으면 한쪽 귀로 세어나가는데 정상인데 그래도 나는 오기심을 갖고 입국 후에 시간만 나면 TV앞에서 떨어 지지 않았다. 알아 듣든지 못 알아 듣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언젠가 귀가 뚫히고 입이 열리겠지 생각하며 캡션 자막에 나타나는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 메모 해가면서 실지 나의 선생은 TV이라고만 생각 했다.
또한 주변 사람의 충고도 우선 말보다 귀가 뚫려야 된다는 것이다. 말은 중학교 때부터 해온 영어가 밑 바탕이 되기 때문에 단어를 생각해서 꿰 맞추면 된다는 것 이였다.
날과 해가 갈수록 제일 처음 외국인을 대할 때 보다 이젠 많이 달라졌다. 겁이 안 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외국인이 금방에만 와도 주눅부터 들었다.
그리고 쥐구멍만 찾았고 남편만을 찾았다. 이게 그래도 좀더 진보됐다는 증거라도 생각하고 싶다. 1월 중순쯤해서 서울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학 서류 수속한 학생들 모두가 학생 비자가 나와서 케냐다행 비행기를 2월 16일자로 모두 티켓팅을 해 두었다는 연락 이였다. 너무나 기뻤다.
지금 나는 영어라는 단어 때문에 심히 고생을 한다. 이 언어 때문에 한국에서 그렇게 마당발이라던 나는 이곳에서는 그 세끼 발가락에도 못 미친다.
설레임 속의 연속된 날 들은 나의 기분을 다른 한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 아이들과 연계가 되었던 이 아이들을 잘 길러 내리라는 나의 사명감 같은 게 치솟아 올랐다.
이즈음해서 내가 돌보고 가정 교육부터 학교교육까지 이들을 선도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 아이들과 우리집과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싶다.
캐나다로 유학을 올 4 학생 중에서 한 학생은 바로 나의 조카이고 중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친구들의 두 딸, 대학친구의 딸 이렇게 4명이다. 물론 남편의 친구이긴 하지만 나도 전 부 터 이들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카와 중학교 친구의 2딸 만을 데리고 오려고 했었는데 나중 대학 친구의 딸과의 인연이 묘하게 되어 남편과 나는 그 학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남편이 캐나다로 올 때 대학 친구였든 그와는 연락이 되질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잘되던 사업이 파산이 되는 바람에 그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연락이 닿을 수가 없었다. 한국 제 입국을 했을 때 우연히 전화 통화가 되었는데 그는 깜짝 놀라면서 꼭 만나자는 것이 였다. 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우리는 저녁 식사를 겸해서 만나게 되었다.
자신이 그 동안 연락이 안됐던 사정을 우리에게 이야기 했고 자신은 자신의 이름으로는 이땅에서 아무 사업도 새로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 동생 밑에서 부인이 봉급을 받아가며 일을 하는 상태라고 현재의 처지를 우리에게 알려 줬었다. 본인은 지금 피지섬으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도 기뻤다는 것이 였다.
몇 개월 살지는 아니했지만 친구의 질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최대한의 상식을 알려 주었다. 이민 신청을 어디서 했으며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정보와 함께 캐나다로 돌아가면 조카와 남편 친구의 두 딸을 키워야 한다고 말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헤어졌다. 그 다음날 또 전화가 와서 우리는 만났다. 그 만난 자리에서 자기도 캐나다로 이민을 갈려고 결정했으니 우리가 알고있는 에이전트를 소개 해달라는 것이 였고 또 한가지는 자기도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딸이 있으니 현재 상황으로는 자신이 충분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니 두고 두고 그 신세를 갚겠네 라면서 다른 아이 밥 먹을 때 숟가락 하나 더 올려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였다.
숟가락 하나 더 올려 놓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는가? 실지 그러고 보니 그는 실지 다소 떵떵 거리며 살긴 했었다. 그런 이가 이렇게 사정까지 하는 연유를 보면 정말 딱하게 보였다.
남편과 나는 이 아이까지 거두기로 약속을 하고 우리가 진행 중에 있는 에이전트에 연락을 취해주게 되어서 오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충 설명을 하겠지만 인연은 중요한 것이고 인연은 잘 맺어져야 한다.
2월 16일에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오고 나면 당장 기거해야 할 문제 였는데 우리는 집을 샀지만 전 주인이 이사를 갈 때까지의 기간이 무려 세 달하고 10일이라는 중간의 갭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당장 3월 초면 개학에 들어 가게 된다. 현재의 집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다소 힘이 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냐면 인구 밀도가 8명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방 세 개에 화장실은 1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침 등교 시간이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이들 학교 까지는 고속도로를 거쳐 약 40분 정도가 소요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이들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와야 하는 문제가 발생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족 회의를 거쳐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브로커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가 산 집으로 입주하기 3달 정도를 임시 렌트할곳이 없겠는가라고 상의를 하였고 그래서 그분이 소개해준 몇몇 장소를 들렀지만 너무나 낡은 집들이였고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아 먼지며 겨울의 냉기에서 오는 거부감들이 도저히 거주하기가 불가능 했다.
아울러 우리 아이들도 기겁을 했다. 단지 2개월 정도만 임시 랜트 할 곳은 정말 하늘에 별 따기 였다. 그러한 곳을 찾는 우리가 어리석은 것 처럼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도 조금 비좁더라도 참고 우리의 집으로 이사할 때 까지 현재 그곳에서 지내자는데 동의했다. 단지 꿈을 갖고 오는 학생들이 현제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보면 실망을 할까 싶어 아이들이 오면 우리가 이사 올 집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이사할 때 까지 참아 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