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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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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 제입국시 빚어진 사연
evergreenon

방문객으로서의 카나다 제 입국 피어슨 국제 공항에 거의 가까워진 듯 싶었다. 승무원들의 입국 신고서를 나눠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4명이기 때문에 한번에 모두를 적게되면 아마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 둘 따라 남편과 나를 한조로 2매의 입국 신고서를 작성했고 공항 착륙 후 아이들에게 입국 심사 시에 각기 다른 줄을 서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제 입국 시에는 다소 까다롭게 군다는 말을 전에 들은바 있어 그것을 생각하니 나의 가슴은 솜방망이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우리 아이들은 바로 옆줄에 있었고 이들은 질의가 별로 없이 대충 보고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옆줄에 있는 나는 볼 수가 있었다. 일단 아이들은 성공 이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순간 우리 차례가 왔다. 이민관 은 남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남편은 그 질문에 또박또박 답을 했었는데 이민관 은 다시 한번 남편을 보더니만 우리의 서류를 접어 옆에 serving하는 안내원에게 주었고 그 안내원은 우리에게 따라 오라는 말을 하고 앞으로 총총 히 걸어갔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니고 입국 재심사 상세 검열쪽으로 우리를 인도 하는 것이 였다. 우리 아이들과 스위치 되면서 아이들에게 너희는 먼저 나가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 반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닥쳤다면 더 큰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한숨을 돌렸다. 우리가 간 입국 재심사 장소에는 마침 동양계로 보이는 이민관 이 앉아 있었고 이 이민관 은 남편에게 이미 6개월을 체류하면서 관광을 하고 했는데 왜 또 방문을 했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것이 였고 남편의 영어 발음이나 어학 실력은 이 나라에 살 때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영어로 또박 또박 대답을 하는 남편에게 더욱 의심이 갔는듯 싶었다. 그리고 이정도의 수준이면 이곳에서 Job을 가지고 충분히 불법 체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또 한국에 직장이 있느냐? 그런데 전번에 또 6개월을 쉬고 또 어떻게 지금 입국하여 쉴 수 있는가 등에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분명히 당신들은 불법 체류할게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직장에서 6개월씩이나 휴가를 주느냐는 거고 남편은 20년 이상 장기 근속으로 근무를 하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해 줬다. 그렇게 설명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남편은 당황했다. 남편이 나에게 이 말을 전할 땐 남편의 얼굴은 이미 하이 얀 종이 짝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민관 은 한국 여자 통역 자원 봉사자와 나를 동시에 불렀다. 그리고는 지금 타고오신 비행기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입국거부 사인을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인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뒤에 잠시 물러서 있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렇게 조사를 받는다고 2시간이 훨씬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먼저 나간 아이들 걱정이 되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말 진퇴양난 이었다. 아이들에게 이사실을 연락을 해야 하는데 연락할 길이 막막했다. 옆줄에 처음 이민 오신다는 한 가족이 수속 절차를 끝내고 웃으며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잘 모르는 그분들 이였지만 그분들에게 부탁을 했다. 혹시 나가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설명을 하면서 아빠,엄마 짐 모두를 다 찾아서 조선생님댁으로 연락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가 좀 있어 더 늦어 질것이라고 전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하고 정중히 부탁을 했다. 조금 있으니 여자 통역 자원 봉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통역원에게 설명을 했다. 실지 이민 신청자이고 (서류를 보여줌), 이민 신청 상태에서 집을 살려고 다시 왔다. 전에는 아이들 학교 알아보고 여행 다니고 한다고 들렀었고 금번은 상기의 이유에서 왔다고 했더니 통역관은 이민관 에게 그대로를 전했다. 그러자 이민관 의 이야기로는 너희들이 영주권을 받을지 안받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집을 사려 하느냐고 물어왔고 우리는 에이전트에서 영주권 나오기 전에 집을 알아 보라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왔다고 답변을 하니까 그 이민관 은 당신의 에이전트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이니까 당신네들 조심하라고 충고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리고는 집 살 돈을 가져왔으면 그를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 였다. 마침 캐나다로 출발하기 전날 나는 한국 외환은행에서 이곳으로 송금을 하고 그 영수증을 나의 지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영수증을 보면서 그는 다소 얼굴이 달라졌다. 송금을 다소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집을 사고 하는데 얼마의 기간을 주면 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당장 안 돌려 보내는 것도 고마운데 나는 얼떨결에 집에 가서 아이들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하고 한국에 다시 나갔다가 영주권을 받으면 들어온다는 생각에서 일주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민관 은 그때서야 씽긋이 웃으면서 2개월을 줄 테니 집을 신경 써서 사라고 까지 하면서 사연도 많은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 여권을 받아 쥐고 있는 나의 손이 부르러 떨려왔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 논하기는 싫다. 영주권을 받아 쥐고 난 뒤 하나하나씩 이야기 하기로 하자. 갑자기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빨리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리고 잠을 자고 싶었다. 왜냐면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정말 공항 안에서는 호흡하기 조차도 실었다. 총총 걸음으로 걸어 나온 그 시간이 11시가 훨씬 넘었다. 7시 20분에 도착되어 와우! 너무나 괴로운 시간 이였다. 지금도 그날 1999년 12월 1일 을 시년 서러웠던 캐나다 피어슨 국제 공항의 일들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와 우리 아이들을 찾아보니 짐도 아이들도 없었다. 조선생님댁으로 전화를 했더니 아이들이 그 집에 있었다. 벌써 오셔서 아이들 공항 픽업을 하고 우리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20분 후 제차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으로 늦은 밤에 또 나오셨다. 우리는 미안한 맘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친 몸과 육신을 차에 싫고 일단은 조 선생님 댁으로 갔다. 집에는 사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역국과 비빔밥을 정성껏 준비해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정성과 남다른 배려가 있었기에 지금껏 우리는 이 먼 이국 땅 에서 이들을 우리 친형제 마냥 지내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저녁을 드는 동안에 일어났던 해프닝을 이야기 했고 2개월 체류허가를 받아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2개월동안 남편과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논하기 위해 우리는 집을 향했다. 집은 이제까지 사람이 살지 않아 훈기를 잃어 버렸고 그 찬 공기가 뼈 속까지 파고 드는 추운 캐나다의 겨울 이였다. 얼른 히터를 작동 시켰다. 6개월동안 정든 집이었다. 집 공기가 데워 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밤 시간은 늦었지만 대충 가져온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침실로 갔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혼란스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머리 속이 이만큼 복잡한 것은 사실 내가 세상을 태어나고는 처음인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도미노 현상 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뿐 이였다. 그리고 모든 생각들을 평소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나 였었지만 오늘 따라 나쁜 일들만이 생각난다. 어쩌다 보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전화벨소리에 잠을 깼다. 시간이 오전 10시경이 되었다. 미시사가에 있는 외환은행에서의 전화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싶었고 지난 6개월동안 우리는 줄곧 외환은행의 단골 고객이었기에 이들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송금된 돈이 도착했다는 말을 해줬고 또 이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목적을 물어왔다. 이 나라의 제도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뭉칫돈의 출처나 사용목적을 항상 보고 해야 하는 문제를 겸하고 있기에 은행에서 전화를 한 것이 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제 입국 시 겪어야 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비자 연장 신청하는 장소와 아는 분이 그곳에 근무하고 계신다며, 우리와 같은 처지는 6개월 연장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이 였다. 그리고 신청 기간이 1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은 여전히 열려 있구나 생각하고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서 우리는 은행을 향하였다. 은행에서 돈을 사용하고 져 하는 목적을 이야기 해주고 난 뒤 토론토에 위치한 비자 연장 신청 사무소의 주소와 지인의 명함을 받아 들고 우리는 내일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 비자연장 신청 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서류들과 요구사항 들을 질의 한 뒤에 남편은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 서류 중에는 비자 연장 신청 이유서를 작성하는 게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이민을 와서 해야 할 사업을 주요 내용으로 사전조사에 요구되는 내용과 일자를 구역별로 그 요지를 글로 완성 시켰다. 그리곤 다음날 접수를 시켰는데 담당자의 말해 의하자면 이런 일이 우리뿐만 아니라 허다하게 제 입국하는 사람에게는 많고 또 그게 정부의 수입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제도 하면서 내놓는 몇 명의 서류가 나의 맘을 조금은 안심 시켰다. 1달 후면 아마 연장 서류가 집으로 직접 배달될 것이라고 했다. 단지 몇 개월을 더 연장해 줄지는 이민관 의 손에 달려 있지만 대다수 6개월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6개월 정도면 통상 우리의 영주권도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을 했다. 일단은 제입국시에 겪었던 그런 일들이 비자 연장 신청을 계기로 나의 마음을 좀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고 또 생활의 활기를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