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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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에 이민을 알리다.
evergreenon
2004-10-22
시댁에 고한 나의 이민 알림
인간이 세상사를 살면서 부모와 형제를과 헤어진다는 것 만큼 어려운게 없을 것이다. 키워주고 교육시켜주고 장가 시집보내주고 등등 그 이후에 자신들이 날개를 달았다고 횡하니 떠나 버리는…..
인간은 타 동물과는 달리 생각을 할줄아는 차이점이 있지 않는가. 이제 부모의 설하에서 벗어날 연령은 훨씬 지났지만 그래도 부모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한다.
이민을 가겠다는 결정이 되고 날은 자꾸만 간다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기 전에 먼저 시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설명을 하고 설득을 시킬것인가에 대해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모든 이민자들이 같은 소릴 들었겠지만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대체 이해가 가지 않을것이다. 아무리 이해를 시킬려해도 말이다. 단지 말씀을 드릴 때 그저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돌아오겠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시집쪽에는 시어머님만 계시고 남편이 장남인지라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종교를 가진 우리로서는 명절 때 추도예배로 대신하지만 이제까지 큰명절때에는 우리집으로 모든 친척들이 모였었다.
그러니 남편이 집안의 기둥이 아니었던가. 만일 이자리가 비워진다면 당분간은 그 공석을 메꾸기 위해서 모두가 물론 노력하겠지만 옛말에 형같은 아우 없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어떠했든간에 이민을 가겠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어머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마음의 안정스런 것은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면서 큰시누이댁을 들러 아이들 돌보아 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계셨으니 바로 및 시동생들보다 큰 시누이에게 부탁하는게 더욱 자연스럽고 또 자주 찾아 봐 달라는 부탁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전 시어머님께 칠순상을 차려 드리고 왔지만 나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편치가 않았다. 한가지 더욱 안타까웠던 일은 나에게는 유일하게 시삼촌 한분이 계셨는데 평소에 시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시삼촌이 시아버님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소사 및 모든일들을 도맡아 해주셨고 우리의 경제적인 어려웠던 시기에도 늘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지병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건강히 좋지 않으셨는데 내가 병원에 근무할 당시 늘 병원 신세를 지셨는데 이럴때마다 내가 병원에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성껏 간호해 드렸고 좋은 정보나 약이 나오면 얼른 달려가서 드리곤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약 10여년을 병원에 드나 드신 것이다.
삼촌은 나와 남편을 너무 좋아했고 신임을 갖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계셨지만 아무리 다른 병원에 혹은 선전이 좋다고 한들 믿지 않았고 꼭 우리가 근무하는 병원 또 우리를 보기위해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오셨다.
어떻게 보면 나와 남편을 의지하고 사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했다. 어느 조용한날 이민을 간다고 발표를 했을 때 두말도 하지 않으시고 눈물만 흘리셨다. 왜 가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으셨다.
너무나 우리를 의지하고 살아온 그였기에 속으로 많은 희비가 엇갈렸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고 싶은 것은 시삼촌께서는 자신의 진료날은 케나다로 비행기 티켓을 보낼 테니 나와 달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넘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살아봐야 얼마 살지도 못살 분 한테 너무나도 큰 쇼크를 드린 것 같아 아직까지도 속마음이 편하지를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내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가 이민을 떠나고 2년이 지났을 때 그는 고인이 되셨고 다행히 마지막 눈을 감을 당시 나는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기에 천국에서 좋은 날들을 맞이하시라고 빌고 또 빌어 드렸다. 이렇듯 이별은 넘나도 힘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