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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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나다에 온 까닭
evergreenon
2004-10-22
케나다 이민의 동기
더위가 시작하는 6월초, 냉방병이라 불리우는 레오지낼라의 원내 감염을 일찍 예방 차원에서 보건 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학동기인 모 과장을 찾을일이 생겼다.
동기 이면서도 몇 년전에 얼굴을 한번 본 기억이 있을뿐 서로가 삶과 직업에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가 잘 없었다. 하지만 계기가 업무의 연장이니 만큼 만나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학교 다닐때도 그러했거니와 여전히 하이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보니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기에는 충분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서로의 가정사를 묻고 또 자식이야기니 등등이 인사가 되다시피 했던것이다.
우연한 말중에서 그의 잎에서 나온 말이 “ 김선생, 케나다로 이민가볼 생각이 없어요?” 라고 물어왔다. 그말에 나는 흘러가는 인사치레 대답으로 “ 그러지요 뭐!”라고 답변을 하고보니 문득 이민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 간다면 어떠한 방법이 있는데요?”라고 묻자. 그의 대답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서울 ** 이주공사 사장이고 그리고 그가족은 벤쿠버살고 있는 시민권자인데 아마 내가 특별이 부탁을 하면 잘 해줄거예요” 라고 대답하면서 케나다에 관한 서류 및 이민 홍보책자를 건네 주는 것이었다.
대략적으로 읽어보고 난뒤에 업무를 마치고서 ‘고려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직장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민에 대한 발단은 이때가 시작이였든 것이다.
나는 두 여식을 두고 있는데 그중 큰아이가 몇 년전부터 전공하고 싶어하는 과목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에서는 그럴듯한 적성과가 없어서 유학을 보내기로 하였었는데 그때 떼맞추어 우리나라에 IMF가 닥쳤다.
환율이 실지 말이 아닐정도로 치솟고 나라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아이 유학을 포기하게 된 일이 있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전해 받은 홍보 책자가 실지 너무나도 관심이 있었다. 본업무는 우선 뒤로 하고 홍보책자를 하나하나 꼼꼼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서울 본사로 전화를 해서 이민에 종류와 자격등 전반에 관해 문의를 하니 상세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아! 우리도 케나다로 이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영 없는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는 나혼자만의 생각이지 남편이나 주변의 친척, 특히 시가쪽등의 동의 없이는 절대 불가한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주공사에서 나에 대한 것은 전혀 묻지도 않았고 남편의 직업, 학력, 어학능력,나이, 경제능력 등등에 대해서만 물었었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남편정도의 수준이면 아무 걱정없이 독립이민 신청에서 합격점을 얻을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직원중에 혹시 전화 내용을 들을세라 전화도 몰래하고 또 홍보 책자들도 다른 책자로 덮어 두었다가 직원들이 나가고 나면 새로 꺼내보곤 했다. 이주공사로부터 가능성을 듣고 난뒤에는 벌써 내마음은 케나다에 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