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당도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8절) 하고 맹세했다. 그들은 24장에서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했을 때도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7절) 하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출애굽기 31장까지 세세하게 주어진다. 31장 마지막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율법을 직접 글로 쓰신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셨다.
그러나 “명령대로 다 행하겠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는 깃털만큼의 무게도 갖지 못했다. 32장에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진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이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갔다.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절). 이 구절은 32장 23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다시 출애굽기 19장 4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모세”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생활과 도무지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여호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초점은 ‘우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나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상을 만들지 못한다”(20장 23절)고 앞서서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모세의 형인 아론도 다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기 28장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1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 역시 여호와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기는 백성들과 마찬가지였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32장 4~5절).
이 장면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기독교’와 겹쳐지는 것은 ‘우리’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아니라 ‘우리’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확장이다. 다른 말로 고쳐 의미를 명확히 하면 “나를 위하여, 나를 인도할 신”이다. 그것은 ‘나 = 신’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병적 증세다. ‘하나님 놀이’에 푹 빠진 존재들이 모여서 ‘나를 위해’ 성경도 읽고, 찬송도 부르는 곳을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라고 일컫는다.
그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자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집단이다.
물론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는 인간들이 찾아낸 이념 가운데 어쩌면 가장 효율적이다. 내가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장치라는 말이다. 이것을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나라다. 사람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되고, ‘내가’ 통치권을 행사하며, ‘나를 위해’ 필요한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 나라를 추구하시지 않으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완성을 위해 그저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다.
광야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8~10절)
성경구절을 들먹이며, 복음을 팔아 사기를 치는 자들의 정체를 출애굽기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정의한다. 성질이 나면 머리를 치켜들고 목이 빳빳해지는 짐승이 있다. 뱀이다.
목이 곧은 백성을 대신해 예수께서 놋뱀이 되어 나무에 매달리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 십자가 만을 바라보는 존재들을 성경은 ‘성도’라고 부른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편하게 잘 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나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과 시선은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늘 도돌이표처럼 고정된다. 그들의 자아인식은 “내가 뱀 맞습니다, 은혜 베풀어 주세요”라는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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