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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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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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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8
풀과 꽃, 복음

 

‘나그네 설움’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 통치가 한창이던 1940년 백년설 씨의 노래로 발표됐다. ‘번지 없는 주막’ 등과 함께 백씨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이에 안 어울리지만 ‘나그네 설움’을 흥얼거릴 수 있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시골 어르신들이 부르던 곡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농번기가 끝나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장구를 치면서 흥겹게 놀던 기억이다.

새삼 ‘나그네 설움’을 들먹이는 것은 가사 때문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이민자의 애환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 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라는 2절은 더 곱씹어 보게 하는 맛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성도의 정체성을 ‘나그네’로 정의했다.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언약, 그 말씀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나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베드로가 말한 나그네들이다. 이것은 베드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십자가 사건 이후 스스로도 부끄러워 달아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며 숨을 수밖에 없던 그를 예수님은 기어코 디베랴 호수까지 찾아가셨다. 무안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들이 무서워 또 달아났다.(갈라디아서 2장)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알게 된 ‘성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예수께서 계시는,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 본향을 늘 그리워했을 것이다. 한심할 정도로 한숨만 나오는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아마도 베드로의 가슴 속에는 ‘나그네의 설움’이 늘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베드로는 서신을 통해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나그네로 살며 평생 복음을 전했을 베드로가, 복음을 요약하는 장면이다.

복음은 찬란한 역사와 화려한 문명 같은, 인간들의 육체가 생산한 모든 것을 한낱 풀이라고 치부한다. 그 풀이 맺어낸 걸작품, 그 꽃마저 결국은 시들고 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되레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며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그리스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들에게 복음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것”이라고 직격한다.

그러면서 복음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영원의 관점에서 ‘풀의 꽃’과 대조되는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이다. 그것 만이 세세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풀에서 활짝 피워낸 꽃이 아니라 바로 그 주님의 말씀이 성도를 거듭나게 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23절)”

그러면 이 씨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고, 22장 모리아산 사건 이후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육체적으로 그 씨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이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씨, 상속자, 자손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결국 바울과 베드로는 ‘썩지 아니할 씨=예수’라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육신의 씨와 자손, 다시 말해 유대 혈통이나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성도의 출생과 구원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가르친다. 세상에 주어진 유일한 큰 복과 번성의 통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뿐인 것이다.

사도 요한의 진술도 맥락을 같이 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아 밀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요한복음 1장14절)

그런 관점에서 베드로전서 1장21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베드로가 복음을 요약한 부분은 사실 구약성경 이사야 40장 초반부의 인용이다.

이사야 40장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희망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예루살렘에 외치기를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앞두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목소리가 이사야를 통해 먼저 들린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 40장 5~8절).

 

주목할 점은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이유다. 이사야는 그것이 여호와의 ‘기운’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로, 창세기 1장2절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을 마르고 시들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 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피운 꽃이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예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요약한 복음의 비밀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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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1
우연히

자크 모노는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다. 그는 1971년 펴낸 ‘우연과 필연’을 통해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진화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의 출현은 분자적 차원의 미시세계에서 ‘우연히’ 일어난 ‘변이’의 결과다.

다시 말해 ‘우연’이란 DNA의 복제와 같은 생명 탄생의 원리이며, 진화를 끌어가는 과정의 핵심 요소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역사 전체의 원리라고 모노는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자연과학을 넘어 과학철학을 다룬 책으로 평가된다.

자크 모노가 설명하는 우연은 앞선 사건에 의해 현재 사건이 결정되지 않는, 즉 통제할 수 없는 예측불허성에 기반한다. 반면에 필연은 이전 사건의 영향으로 현재가 결정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메커니즘화된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한국사회에는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소련의 해체 등을 국제사회 질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체제 변혁의 동력을 어떻게 얻어낼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나 ‘우연과 필연’ 등이 필독서로 자리잡기도 했다. 자연과학의 원리를 사회과학에도 적용해 이해하려는 일각의 시도였다.

 

구약성경 룻기 2장 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개역개정)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인 보아스의 밭이었다.”(표준새번역)

 

어느 곳보다 풍족해야 할 ‘빵집’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유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고, 엘리멜렉 가족은 ‘더 풍족함을 찾아’(1장21절) 이방 모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10년쯤 지났을 때 가장인 엘리멜렉은 물론 한참 젊은 두 아들 말론과 기룐까지 죽었다.

집안에는 ‘기쁨’ ‘행복’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인,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아들들이 결혼해 얻은 모압 출신 며느리 오르바와 룻 등 세 여성만 남았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이런 순간에 ‘주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1장6절)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어차피 이방 여인이었던 며느리들에게는 모압에 남아서 결혼도 하고, 새 삶을 찾으라고 권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절)고 했다. 모압에 머무르는 것은 단순히 주거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것은 어느 신의 영역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치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귀신 들린 딸 때문에 찾아온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짐짓 냉정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매달렸다.

룻도 예수를 찾아갔던 가나안 여인 못지 않게 절박했다. 굳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나름의 이유를 내세웠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장 16~17절)

 

신약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의 비유’가 앞서 구약성경 룻기 1장 마지막 부분에 되풀이된다. 풍족함을 찾아 떠났다가 완전히 탈탈 털린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자들의 모습이다.

사실 이것이 성도의 귀향이며, 인생살이다. 그 목적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그 두 사람(나오미와 룻)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고통)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1장19~20절)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시점은 절묘하게도 보리 추수를 하는 시절이었다. 룻은 생계를 위해 이삭을 줍기 위해 나간다. 그런데 하필 그 밭이 나오미의 남편, 죽은 엘리멜렉의 대를 이을 권한이 있는 친족인 보아스의 소유였다.

룻기 2장3절은 이 장면을 ‘우연히’라고 했다. ‘미크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우연한 기회’ ‘뜻밖의’ ‘행운’ ‘추첨’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우연히’라는 단어를 자크 모노의 설명처럼 ‘통제할 수 없는 예측 불허한 일’로 이해하면 성경의 맥락을 오해하게 된다. 우주의 역사는 ‘우연’을 통해 전개되지 않는다는 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우주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창세 전에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창조를 시작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라 풍족해야 할 ‘떡집’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고,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가야 했다. 희락으로 가득 차야 마땅한 나오미에게 ‘고난’이 닥치고, 그런 자리로 밀어 넣은 것은 순전히 여호와의 손길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원리에 따라 룻은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으러 가야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태복음 1장5~6절)”는 역사가 전개된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2장 10~12절)

필연의 원리에 따라 룻은 자기 백성을 떠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갔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내놓는 신앙생활이다.

더 이상한 것은 여호와께서 미리 아시고, 조치해 놓은 길을, 그저 따라서 걸어간 것 밖에 없는 성도를 오히려 칭찬하시는 장면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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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3
나그네들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장1~2절)

베드로가 인식하는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거룩한 무리, 곧 성도들은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 신분으로 통과하게 된다. 그들이 나그네가 된 이유는, 또한 택하심을 받은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다.

나그네는 정착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떠나온 그리고 돌아가야 할 본향뿐이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을 나그네로 만드신 분의 손길이다. 성령께서 그들을 순종의 자리로, 거룩으로 끌고 가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1장3절)

하나님의 미리 아심, 즉 택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의 결말은 거듭남이다. 다시 태어남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성도의 거듭남을 가능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 오면 자칭 성도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 가운데 일부는 실망할 수 있다. ‘그럼 내 신앙은 뭐가 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데, 모든 일의 근원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의 피에 있다고 해버리면, 그 기독교의 복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싫어진다. 내 실력으로 산 소망을 쟁취할 기회를 달라고 떼를 쓴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1장5절)

거듭난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다. 그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는데,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구나 나그네 된 성도들은 이 세상의 삶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러티브는 철저하게 제3자 입장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그 작동원리를 한 발 떨어진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한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하시는 내용을 반복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베드로전서 1장6절)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으려 애쓰는 소위 ‘기독교인’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베드로의 정체성은 여기서 갈라진다.

성령이 오시기 전 베드로의 삶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그는 한때 멋진 신앙고백을 내놓아 칭찬을 받았고, 4복음서에 기록된 중요한 순간마다 베드로는 현장을 지켰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용감하게 대제사장 무리에게 맞섰으며,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확신에 찬 어조로 부인했다. 그 모든 순간이 베드로에게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체는 십자가 앞에 서는 순간 발가벗겨졌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었다.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났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도 고기를 잡으려 떠나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희한한 고백을 내놓는다. 그의 삶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들 때문에 근심하고 고민했으나, 결국 그 결말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 모든 일들이, 심지어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났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택하심이 증명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성령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저 삶의 순간순간 작동했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이끄심, 그에 따른 구원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1장8~9절)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 가운데 예수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이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사랑하게 된다. 왜냐 하면 그들 안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구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함이 완전히 배제된, 성령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1장10~11절)

이런 구원의 이야기는 베드로가 고안하거나 연구해서 정립한 이론이 아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기록한 성경이 바로 이 구원을 설명한다. 선지자들이 했던 유일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것과 부활을 통해 영광을 얻으실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구약의 선지자들 안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시며, 구원의 메커니즘을 가르치고 계셨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39절)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결론은 이것이다. 성도들의 신앙고백도 마찬가지다.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됐고, 십자가에서 실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베드로전서 1장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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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이것을 알라

#여러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군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부대에는 훗날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육군 장성이 사단장으로 부임했었다. 부대 입구에는 ‘언론인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언론을 담당하던 군무원의 안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저녁에는 부대 참모들과 식사를 겸한 술자리가 있었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았고, 취기가 오를 무렵 사단장이 뒤늦게 합석했다.

군부대의 초청으로 기자들이 방문한 형식이었지만 긴장감은 팽팽했다. 술자리 한 번으로 출입기자와 취재원 사이가 급격히 친해질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부대 안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함께 폭탄주를 기울이던 기자들이 군을 상대로 집요하게 진실을 추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감은 부대 참모들의 건배사 때문에 폭발했다. 한 참모가 ‘사단장님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냈고, 또 다른 참모는 ‘사단장님께서 하사하신 어사주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시겠습니다’라며 납작 엎드렸다.

취기가 오른 데다 이런 장면을 못마땅하게 여긴 A기자가 “손님 불러놓고 무슨 충성 경쟁이냐”며 술상을 내리쳤다. 술병이 바닥에 나뒹굴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러자 젊은 장교가 벌떡 일어나더니 “새파란 XX들이, 사단장님 앞에서 건방지게”라며 A기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술상은 엎어졌고, 순식간에 기자들과 부대 참모들이 뒤엉킨 몸싸움이 벌어졌다.

 

#B씨는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나름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정년을 채우고 공직을 떠났으나 당시만 해도 승진은 빨랐고, 보직도 동료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를 옮겨 다녔다. 집안까지 좋았는데, 고위직을 지낸 군 장성 출신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동료 기자 몇 명과 우연히 저녁자리에 합석하게 됐다. B씨는 며칠 휴가를 내고 집안 어른의 장례식에 다녀 왔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다만 “절대로 기사를 쓰면 안 된다”는 다짐을 여러 번 받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집안의 여러 어른들까지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이 있던 기자들도 고심 끝에 그렇게 하겠노라 동의했다.

B씨의 이야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 낯익은 군 장성 출신들이 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삼촌뻘 되는 분이 B씨를 불러 전두환에게 “XX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전 전 대통령은 비서를 불러 봉투 하나를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나중에 열어보니 봉투 안에는 조금만 더 보태면 어지간한 자동차 한 대를 거뜬히 살 만한 큰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전 전 대통령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전 재산 29만원” 발언이 화제를 모았던 때다.

 

#“MBC는 잘 들어, 내가 (군) 정보사 나왔는데 1988년에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이 찔렸어.”

KBS 기자 출신인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최근 출입기자 오찬 자리에서 MBC 기자를 겨냥해 했다고 알려진 발언이다. 언론 뉴스를 종합해 보면 황 수석은 이날 여러 언론사 기자들과 가진 점심식사 자리에서 국정현안에 대해 언급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은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 당시 ‘중앙경제’ 사회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오홍근 기자가 월간지에다 군사정권에 비판적 내용이 담긴 기사를 연재하던 중 정보사령부 군인들에 의해 테러를 당한 것이다. 오 기자는 이 테러로 허벅지가 크게 찢기는 중상을 입었다. 국방부 수사 결과 정보사 예하부대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단체들은 황 수석이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것을 문제 삼으며 뱉은 발언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식사 자리에서 한 기자가 ‘왜 MBC에게 잘 들으라고 했냐’고 물었는데, 황 수석은 “농담”이라는 말과 함께 ‘정보보고하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다고 한다.

‘정보보고’는 기자들이 취재 도중 듣거나 취득한 정보 가운데 기사로 쓰기는 애매하지만, 소속 회사에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 주로 써낸다. 황 수석이 정보보고 하지 말라고 요청한 게 사실이라면 그 역시 “MBC 잘 들어”라는 발언이 알려질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황 수석의 발언 이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기사화한 것은 오찬에 참석했던 4~5명의 기자 가운데 MBC 단 한 명뿐이었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머지 기자들은 대통령실 관계자가 이런 협박성 멘트를 아무 때나, 어느 자리에서나 마구 쏟아내도 문제의식을 못 느낄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뜻도 된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면서 사람들이 정치놀이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지 새삼 놀랐다. 가끔 TV를 켤 때마다 주요뉴스는 언제나 정치 관련 소식이고, 정치평론가 여러 명이 둘러 앉아 늘 무슨 말인가를 떠들어댔다. 식당에서건 기차역에서건 TV가 켜진 곳은 그런 장면이 계속 나오고, 사람들은 정신을 놓고 그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 모든 일에 가치 판단을 할 여유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다.

사단장의 어사주를 원샷했던 젊은 장교나 호기롭게 술상을 내리쳤던 기자들 모두 흘러간 과거 속에 묻혔다. 전두환이 거액의 용돈을 펑펑 뿌리고 다녔다 한들 지금 무덤 속에 있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치평론을 한다고 게거품을 물고 떠드는 사람들도 한철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진 존재가 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디모데후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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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상 주세요”

케네스 보아가 쓴 ‘기독교 영성 그 열두 스펙트럼’은 실제적인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영적인 삶이란 모든 영역과 전 생애에 걸쳐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성경적인 영성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영성의 12 측면을 말하면서 각 장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1부 끝자락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연습이라 생각하고 수년간 당신을 힘들게 했던 자들의 목록을 적으라고 조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 동안 겪었던 아픔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용서를 결심한 뒤, 목록을 적은 종이를 구겨 태워버리라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실제로 영성을 깊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상급과 관련한 부분이다.

기독교 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가 상급인데, 케네스 보아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 한다.

‘패러다임 영성’ 부분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면 삶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이어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둘 것인가도 알게 된다… 영원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짧은 지상의 체류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시민권을 준비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 인생의 초점을 맞춰 자신을 더 많이 조정하라는 조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더 많이,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화됨을 통해 하늘의 시민권을 준비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또 저자는 ‘교환된 삶의 영성’에서 “우리 스스로를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동기화된 영성’에서는 상급에 대한 이야기가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저자는 “구원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은 행위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지상에서의 삶의 질이 영원한 결과를 가져다 주며, 한시적 세계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의 질이 직접 결정된다는 뜻이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는 각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하늘 나라에서의 손실과 상급과 관계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믿음이 부족해 상급 받을 자격을 상실하거나 믿음이 신실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에서 상급은 생산한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케네스 보아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실제 성경에는 상급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절이 여럿 등장한다. 시편 18편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라고 노래했다. 바울 사도 역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린도전서 9장24절)”고 적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상급이 실제 있는지, 아닌지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상급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상급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실망할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 나라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만이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만을 찬송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급의 유무를 따지기에 앞서 구원과 은혜에 대한, 성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케네스 보아의 논리 대로 믿음에 따라 상급이 결정된다면 그 믿음은 먼저 우리의 생산물로 인정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성경의 설명과 배치된다. 또 에베소서 4장은 믿음은 하나라고 말하는데, 케네스 보아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한 가지 믿음이 어째서 본질적으로 부족하거나 신실함의 측면에서 어떻게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삶의 과정에서 외부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들 “누구누구는 믿음이 좋다, 누구는 믿음이 약하다”고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단지 믿음이 성도의 삶을 끌고 가는 과정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뿐이며, 믿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결국 온전한 자리로 성도를 밀고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케네스 보아의 말처럼 구원은 은혜로 받고, 상급은 행위로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에서도 상급의 차등에 따라 인간들의 자기 자랑만 난무할 것이다.

또한 저자는 ‘포괄적 영성’을 설명하면서 “그분이 우리 삶의 모든 요소에 관여하고 계신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어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쟁취하거나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날 사람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요소를 관여하고 계신다는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떤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상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영적인 삶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관여로 일어나는 일이며, 이미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실존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고 말한다. 죽었던 인간에게 은혜로 새 생명이 부어졌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언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계시록의 장로들은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주님 앞에 놓는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통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칭했다. 그에게 상급이 혹시 있다면 그것은 괴수에게 마땅한 대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다.

저자는 또 8부 과정영성에서 “이 땅에서 존재하는 주된 목적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시민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 놓고 “우리의 임무는 스스로를 성장하기에 좋은 상황 아래 두고 영성 형성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이런 저자의 모순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내 성취물을 앞세워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인생의 주체자로 서려 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떼를 쓰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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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17~18절)

 

정의가 사라지고, 악인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못살게 굴고, 겁탈과 강포가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한 분통을 터트린다. 선지자 하박국은 이런 세상이 과연 옳은 것이냐고 여호와께 두 번이나 따지고 호소한다.

이때 여호와의 대답은 이것이다. 종말과 묵시가 반드시 정해진 때에 성취될 것이며, 그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의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며,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에 하박국 선지자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마주한 현실과 관계없이 이미 여호와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하박국은 더 이상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일 때문에 슬퍼하거나 애통하지 않았다.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여호와의 응답이 있은 뒤에도 현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제 슬픔과 분노, 기도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며 기뻐할 건수로 탈바꿈한다. 하박국은 주님의 계획하신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같은 이야기가 신약 누가복음 21장에 등장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혼란이 극에 달한다. 지진과 기근, 전염병, 무서운 일이 잇따르는 때가 온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그때에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끌려가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21장17절).

어느 한 곳에서도 희망을 찾기 어렵다. 절망 그 자체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크다. 하박국이 불평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이런 환난이 오히려 성도들에게 증거가 된다. 성경말씀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에서 그대로 이뤄진다는 증명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며, 미리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변명하고, 방어하고, 설명할 것을 준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예수께서 그때그때 지혜를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심지어 성도들 중 일부는 부모형제 때문에 끌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시며, 그럼에도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목숨을 잃는데,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란 위로는 이율배반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하박국이나 누가복음 21장의 성도들이나, 삶에 닥친 고난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약이다.

 

이런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더 구체화된다.

마침내 세상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이, 귀신의 처소 바벨론과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의함을 기억하고 계셨다. 왕들과 상인들은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치하였고, 금은보석은 물론 심지어 사람들의 영혼까지 상품처럼 사고 팔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화 있도다, 화 있도다, 무너졌도다”라는 탄식뿐이었다.

그 혼란한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린다.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장4절)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그분의 백성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구원해 내시는 예수의 음성이기도 하다. 그 음성을 들은 자들은 하박국처럼 세상의 일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다.

 

세상의 실체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발견된 곳”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그대로 확정돼 있는 종말의 그림이다.

역사 속에 등장한 성도는 세상에 뒤섞여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성도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오늘도 자기 백성을 부르고 계신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이 외쳤던 그 기도를 오늘날 교회가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보다 자유민주주의에 더 관심을 가진다. 교회의 이름을 앞세워 공정과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부르짖는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발광한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과 관계 없는 세상, 인간이 더 살기 좋은 세상, 자유민주주의가 활짝 꽃피고, 시장경제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바벨론이라고 가르친다. 인간들이 주인이 된, 왕들과 상인들이 북적거리는, 그런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꿈꾸는 게 과연 교회의 일인가.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에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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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9
자랑할 것들

 

2006년쯤이다. 신문사 스포츠부에서 축구를 취재하며 K리그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프로축구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에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를 거쳐 레딩FC를 찾아갔다. 당시에는 2002년 한국월드컵대표팀 멤버들이 유럽 무대에 많이 진출해 있었다. 최근까지 경남FC감독을 했던 설기현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레딩FC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레딩FC 홈구장을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경기장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돌이었다. 레딩 축구단의 애칭인 ‘Royals’를 사용해 ‘Loyal Royal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서포트 하는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레딩은 런던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지만 축구단은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프리미어리그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았고, 주로 2~3부리그를 오르내리지만 구단 직원은 약 2만5천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늘 꽉 채워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공 하나를 두고, 몸과 몸이 치열하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팀의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고, 선수들의 화려한 개인기가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축구를 ‘뷰티풀 게임’이라고도 부른다. 축구는 국가와 그 도시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유럽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라도 차지하는 날이면 그 도시 전체가 퍼레이드를 벌이고, 축제에 휩싸인다.

최근 한국축구대표팀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개념 없는 감독의 처신부터 시작해 선수단 내분도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태는 위르겐 클린스만이라는 독일 출신 감독을 선임했을 때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그가 지도했던 팀-그것이 클럽이든, 국가대표팀이든-의 행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대부분 실패했고, 감독으로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축구협회는 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독을 기어코 선임했다.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축구팬들이 분노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시안컵 결승 진출에 실패하면서 한때 한국대표팀의 재능으로 불리던 어린 선수는 졸지에 ‘싸가지 없는 X’으로 낙인 찍히며 국민 비호감이 됐다. 혈기 왕성한 20~30대 초반의 선수들이 모인 곳이 축구대표팀이다. 그들 가운데는 어디를 가든 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고, 슈퍼스타로 인정 받기 원하는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많다. 의견충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축구팬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국가대표팀을 곧 자신의 팀, 우리 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대리만족 장치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을 곧 내 팀이라고 여기면, 그곳에서 불거지는 문제는 곧 ‘내 문제’가 된다.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소속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훌리건처럼 때때로 축구장 폭력사태 때문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단체나 국가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며,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국가나 단체가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기도 한다.

 

바울 사도가 그랬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사울(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시골 촌뜨기 청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믿는 초기 기독교는 우매한 집단이었고, 박멸해야 할 이단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교회 지도자였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사도행전 7장)했고,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8장 1절).

사도행전 9장에 넘어가면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바울이 눈에 불을 켠 채 기독교를 핍박했던 이유는 빌립보 3장5~6절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지라”고 고백했다. 

창세기 17장1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율법의 요구는 레위기 12장 3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바울은 철저하게 유대교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킬 만큼 완벽한 신앙인이었다. 유대교인이며,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자신의 소속, 정체성을 굳게 붙잡은 인물이었다.

갈라디아서 1장14절에서도 바울은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바울은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한 치의 오점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의 삶은 그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스스로 굳게 믿고 붙잡았던 소속감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께서 불쑥 개입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고 물으셨다.

그 예수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5절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칭한다. 에베소서 식으로 바꿔 말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택하신 예수”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던 바울의 진짜 소속이 그의 삶 속에서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소속이 바뀌자 바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빌립보서 3장7~8절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한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며, 교회를 핍박했던, 그 모든 열심은 배설물로 드러났다. 자신의 유익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던 것이 실제로는 자신에게 전부 손해로 여길 수밖에 없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소속이 바뀐 바울이 내놓은 신앙고백의 정점은 갈라디아서 6장14절에 모아진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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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이처럼 사랑하사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여호수아 11장20절)

 

언젠가 한국의 지하철 역에서 시선을 끄는 광고 문구를 봤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행하자.”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순간 어느 교회의 신앙표어쯤으로 생각했다. 아니었다. 다른 종교의 광고였다.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고, 특히나 갚을 수도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인생은 속된 말로,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핵심 단어 가운데 하나는 ‘은혜’다.

 

여호수아 11장은 이집트(애굽)을 탈출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벌였던 정복전쟁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그린다. 그 설명에 ‘은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11장20절을 새번역성경 버전으로 읽어보면 의미가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호수아가 이들 원주민을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친 까닭은, 주님께서 그 원주민들이 고집을 부리게 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전멸시킨 것이다.”

전쟁을 벌인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지만, 배후에서 움직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는 설명이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고집을 부리게 만들었고, 싸우다가 망하도록 하셨으며, 또한 여호수아가 그들을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전멸시키도록 조치하셨다.

 

가나안 족속들이 그런 운명을 맞이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테힌나’는 사전을 보면 ‘호의’ ‘인자함’ ‘자비’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가나안 족속들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앞서 여호수아 11장 6절에는 가나안 연합군과의 구체적인 전투 예상도가 나온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다 죽이겠다.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태워라.”

마치 전쟁의 주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주님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에 적대감을 갖고, 또 어떤 이들은 여호와라는 신을 향해 ‘깡패 XX”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족속이나 가나안 족속이나 그다지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향해 뭘 그리 대단한 종교적 열심이나 충성을 보인 적이 없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을 수시로 어겼으나, 우상을 섬기는데 있어 결코 가나안 족속보다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민족이 받는 대우는 천지차이다. ‘은혜’라는 단어는 그래서 너무나 불공평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면 타당하다.

 

성경의 이런 기류는 신약에서도 흐른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다. 요한복음 17장은 기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몇 구절만 읽어봐도 예수의 기도 속에는 지독한 배타성이 드러난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십자가 고난을 앞둔 예수는 세상 가운데서 어떤 무리들만을 특정해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했던 것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어떤 무리들이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기도한다. 미움을 받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14절)

이는 마치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참뜻을 17장에서 펼치고 있는 듯하다. 17장에 등장하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아닌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의 출생을 이야기하는 마태복음에도 등장한다. 1장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에서도 설명한다.

 

남은 질문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것이다. 반드시 이런 질문이 따라 붙어야 한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을 썼다면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한다.

대답은 사도행전 13장에서 풀이된다. 13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식일에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바울은 구약 역사와 예수의 탄생, 그분의 사역과 십자가 고난을 설명한다.

그때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했다”.(45절) 그러나 놀랍게도 듣는 무리 가운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48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의 기도가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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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8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먼저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하는 반역은 살겠다고,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해 달라고 덤비는 것이다.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인간은 기어코 살아 있는 티를 내고 싶어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를 찾아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던 부자 청년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했다. 영생을 스스로 쟁취하려 애쓴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희망을 여지없이 짓밟으셨다. 아니, 사실은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창세기 2장17절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이 선포된다.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이라는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실상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토막토막 잘라서, 시간과 책 순서에 따라 읽고 싶어한다.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에서는 성경의 사건 속에서, 인간들이 내놓은 행위의 결과에 따라 그것을 허겁지겁 수습하시는 하나님으로 가르친다. 명백한 오해이며, 허위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순간, 더 나아가 역사가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완료된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창세기의 “정녕 죽으리라”는 선포는 로마서 6장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술과 연결되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에베소서 2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그렇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죽음의 자리로 밀려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휘말려 살아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이 곧 구원 받은 자들이 이 세상을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역사와 사건의 과정이며, 또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설명하셨다. 누가복음 8장에서 이미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해 예수는 “아이야, 일어나라”는 한 마디로 살려내셨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열두 해를 하혈하던 여자, 병을 고치고 싶어 의사를 찾아 다니며 재산을 모두 날려버린,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죽은 여인을 고쳐주셨다. 또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다. 야이로의 12살 딸이나 12년 동안 하혈했던 여인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내놓을 리는 없다. 육신이 부패했던 나사로 역시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뭔가를 내놓을 능력이 없었다. 
성도는 그저 죽어 있는 그들에게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시록 7장)라는 찬양만 내놓는다. 면류관을 벗어서 반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의 행위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사야 43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 매우 드물다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평생 내달리는 자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구약성경 에스더 4장에 등장하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대목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통해 일하셨다”고 감격하고, “우리도 에스더의 용기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영광 돌리자”고 주먹을 불끈 쥔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시대, 유대인으로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하만이라는 자가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수산이라는 궁에는 베냐민 지파로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때 포로로 잡혀온 모르드개는 남자가 살고 있었고, 에스더는 그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잃어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키웠다.

구약 에스더는 10장에 이르는 짧지 않은 성경이지만 특이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위기에 빠졌던 유대인들이 죽음을 각오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적절한 활약 덕분에 살아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더’에는 인간의 역사, 특히 죽음에 직면한, 사실상 멸절 당할 수밖에 없는 택하신 성도의 삶 가운데 불쑥불쑥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무한히 느낄 수 있다. 
에스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5장과 6장에는 눈 여겨 볼 대목이 나온다. 5장 1절의 ‘그때에’와 6장 1절의 ‘그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6장 4절의 ‘마침 그때에’라는 구절 등이다. 에스더는 물론 모르드개와 유대인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진 가운데 기막힌 타이밍에 어떤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그날은” “이레가 되는 날에” 등등의 구절을 앞세워 이야기의 줄거리를 끌고 간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분이 PD가 되어서 구원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연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에스더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성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건져진 존재”라는 복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더 나아가 에스더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역사와 개인의 종말 지점에 서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회상하며 읽는 복음이다. 

죽음의 자리에서 건짐을 당한 이들이 드리는 찬양은 한결같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 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계시록 5장)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찬양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에스더의 고백과 각오에 대한 칭찬은 어디에도 없다. 
에스더의 그 고백은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둔 어린 양 예수께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그 자신이 죽음의 자리로 먼저 가셨던 예수의 기도를 미리 보여주신 모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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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너는 누구냐

2004년 3월11일, 새천년민주당 유용태 원내총무와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공동 발의했다. '열린우리당 지지성 발언' 등이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다. 
탄핵안 발의 다음 날인 3월 12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밤샘 농성을 하며 탄핵 저지를 위해 국회의장석을 점거했고, 야당의원들과 거센 몸싸움이 난무했다. 이때 한나라당 출신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은 안건 소개나 찬반 토론을 생략한 채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결국 이날 오전 11시55분께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가결됐다.

 

당시 사회부기자로 부산의 한 공공기관을 출입하던 필자는 점심식사를 미룬 채 TV 생중계로 난장판 국회를 지켜봤다. 
탄핵 과정에서 기억에 뚜렷하게 새겨진 장면은 국회본회의장에서 울부짖던 유시민 의원과 "대한민국은 어떤 경우에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의사봉을 두드리던 박관용 국회의장의 모습이다. 수많은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어떤 한나라당 의원은 환하게 웃으며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시점이 문제였을 뿐,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현재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취임한지 고작 14일째부터 '탄핵'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후 1년 동안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100여 차례 넘게 탄핵 이야기를 꺼냈었다. 
2004년 5월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정당화할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각했다.

 

최근 한인사회 어떤 인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첫 질문이 대뜸 이랬다. "당신은 보수냐, 진보냐."
글쎄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빨치산이 득실거리던 지리산 근처에서 태어나 경상도에서만 40년 넘게 살았으니 보수적 가치관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 북한을 극도로 싫어할 수밖에 없는 보수 기독교 가정의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 때 전교조 소속이던 1년 차 교사가 강제로 교단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보면서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생 때는 화염병 꽤나 던지고, 각목 들고 전경들과 맞서기도 했으니 진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 때는 새누리당 후보를 찍은 적도 있다.

 

한국에서만 20년 가까이 일간지 기자생활을 했지만 최근 한국 상황을 보면 좌우 대립이 더 극한으로 치닫는 것 같다. 정치적 견해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로지 상대 진영을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모습이다. 
"당신은 보수냐, 진보냐"고 묻는 질문에는 은연 중에 "너는 나하고 같은 편인가, 아니면 적인가"라는 판별의지가 숨어 있다. 좀 더 심하게 이야기 하면 '내가 서 있는 진영이 선이고, 너희들은 악의 축'이라는 무서운 패 가르기 시도가 꿈틀거린다.
이런 끔찍한 사회적 분위기는 광기를 부추긴다. 최소한의 진실마저도 인정하기를 거부한 채 교묘하고, 얄팍한 논리로 빠져나가려는 술수만 판을 친다. 누가 세치 혀로 더 잘 깐족거리며 국민들의 눈을 속이는가에 따라 유능함의 여부가 결정된다.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것은 사실 권태, 심심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주인공인 왕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들의 관심은 국가발전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꿀단지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양쪽에 큰 차이가 없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도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타인이 ‘너는 누구냐’고 묻기 전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1977년 발표된 윤흥길 작가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권 씨’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 시위에 휘말린 뒤 전과자가 됐다. 유신정권에서 시위의 주모자로 몰렸다면 그가 번듯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결국 일용직을 전전하게 된다. 셋방살이를 하고, 임신한 아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줍잖게 서툰 강도 짓을 하다 집주인에게 들키기도 한다. 
그런 그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은 “이래봬도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라는 것이다. 하는 일마다 꼬여버린 그의 삶에서 유일한 버팀목은 대학 졸업한 사람이라는 자존심이었다. 그것마저 무너졌을 때 그는 아홉 켤레의 반들반들한 구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은 실상 자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동반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세례 문답 때 몇 가지에 "OK" 했다고 기독교인은 아니다. 목사가 영접기도 따라 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부를 때 벌떡 일어나 중얼중얼 읊은 것이 구원의 증표라고 믿는 믿음은 사기에 가깝다.

 

어느 교회 소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이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지, 현재 세계의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 화제가 다양했다.
그때 30대 젊은 부부가 한마디 했다. “지금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좀 천천히 오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딸, 이제 겨우 4살인데. 앞으로 커서 대학도 다니고, 시집도 가야죠. 호호호” 하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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