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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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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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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1
‘너희’와 ‘그들’

 

현대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복음주의자이자, 저술가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라는 책에서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는 적대적,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호적”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를 배척한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그 이유를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다.

 

사실일까. 요한복음 15장18~19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또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덧붙이셨다.

존 스토트의 설명과 달리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귀로 들은 2천 년 전 유대인들조차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당시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태복음 13장12절).

 이 말씀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 붙어 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 가에, 또는 돌밭에, 때로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다.

 

세상 상식의 기준으로 마태복음 13장12절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차라리 “부자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씩 나누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면 누구나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예수님은 정반대로 해석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유가 있다. 비유 이야기에 좀 더 들어가 보면, 예수께서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천국의 비밀’(11절)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다. 그저 보편적 세상살이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나오자 그들을 향해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친절하게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다. 정반대다.

 

예수님은 의아해 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셨다. 주변 사람들을 ‘너희’와 ‘그들’로 나눈 뒤, 결국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억지스런 이야기는 한 발 더 나간다. 13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구약 선지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한다.

 이사야 6장9절~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되어 있다.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당시 유대인들에게 파송한 이유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서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는 의도다. 이런 하나님, 예수를 세상이 좋아할 리 없다.

 

흔히 말씀을 듣고, 잘 실천해서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자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교회는 예수님의 예언이 무색하게, 세상의 칭찬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존 스토트가 말한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는” 시도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길이다. 복음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를 실시간으로 눈 여겨 보면서 점수도 매기고 매일매일 평가도 한다. 그들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 ‘그들’이다.

 

천국의 비밀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고, 천사들과 불 칼을 두어 동산 동쪽에서 지키게 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셨던, 또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말씀의 맥락이다. 여기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는, 천국에 침노해 들어갈 방법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에는 세상의 본질에 관한 힌트가 숨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시면서 세상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 나뉠 것을 말씀하신다. 똑같이 ‘너희와 그들’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살인자 가인과 희생자 아벨이 등장한다. 가인의 자손은 문명을 열심히 발전시키는데, 반대편에선 아벨의 ‘대타’ 셋의 후손은 그저 ‘죽었더라’로 끝난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노아와 물에 빠져 죽는 세상 모든 사람의 분리 이야기가 계속되며,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첩의 자식 이스마엘과 약속의 자녀, 이삭으로 갈라진다.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야곱으로 나뉘어 정반대 편에 서 있다. 힘을 가진 애굽(이집트)에 재앙이 퍼부어지고, 온갖 핍박을 당하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다. 이것이 역사 내내 되풀이되는 세상의 본질이다.

 

여호와께서 귀가 막히고 눈이 멀게 만들어버리신 ‘그들’은 결코 예수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 그것은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의 착각이자, ‘뇌피셜’이다. 마태복음 10장은 그 이야기를 더 상세히 다룬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반드시 ‘너희’를 미워해야 한다. 미워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받아, 뽑혀져 나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다. 그래서 ‘너희’는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세상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과 귀가 열려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는다. 예수님의 열심 때문에 길 가의 황무지, 가시덤불로 덮여 있던 쓸모 없는 광야가 기경을 당하고, 좋은 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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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농담의 계절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금은 다르지만, 당시만 해도 국립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학이면 2박3일 지리산 종주에 나서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리산 계곡은 천왕봉으로 가는 최단코스 입구였다. 계곡 주변에는 여름 내내 텐트가 빼곡했다.

일을 하러 가면 오전에는 주로 야영장 청소를 했는데, 문제는 음식쓰레기였다. 먹다 버린 수박 때문에 특히 골치를 앓았다. 무더운 날씨 탓에 버려진 수박껍데기 주변에는 항상 파리가 들끓었고, 구더기도 어지간히 많았다. 냄새가 하도 역해 정말 코를 막지 않으면 청소가 불가능했다.

 

하루는 태풍예보가 나왔다. 지리산 일대에 폭우가 예상됐기에 등산객, 피서객을 모두 대피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국립공원 직원들과 함께 오후 내내 야영장을 돌면서, 특히 계곡 주변의 피서객들에게 텐트를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고 안내했다.

그날 밤새 폭우가 쏟아졌고, 지리산 계곡은 시커먼 흙탕물로 뒤덮였다. 물 흘러가는 굉음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출근했을 때는 이미 비상이 걸려 있었다. 소방관들과 경찰관까지 출동했다. 알고 보니 남녀커플이 대피안내를 무시하고 야영장 건너편 산기슭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샌 것이다. 텐트는 계곡물에 휩쓸렸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은 가까스로 산 중턱으로 피신해 나무를 붙잡고 구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119 구조대는 겨우 계곡 건너편으로 밧줄을 연결했다. 캠핑남녀는 몸에 밧줄을 감고 구조대원과 함께 밧줄에 의지해 계곡을 건너와야 했다. 불어난 계곡물은 여전히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자가 먼저 계곡을 건너왔고, 기다리던 여성이 뒤따랐다.

모르긴 해도, 그 캠핑남녀는 전날의 대피 안내를 농담으로 여겼을 것이다.

 

‘농담’은 구약성경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핵심이자, 주제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심판 전에 그곳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미리 천사들을 보냈다. 천사들이 소돔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에서 난리가 났다. 롯의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그들은 한시바삐 소돔을 벗어나야 했다. 롯의 두 딸은 소돔의 청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예비사위들은 ‘그곳을 속히 떠나야 한다’는 천사들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창세기 19장14절)

 

성경 속에서 ‘농담’의 역사, 또는 그와 관련한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수롭지 않은 농담으로 받았다.

노아가 산에서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노아가 잠시 정신이 빠져 농담하는 것으로 알았다.

애굽왕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홍해를 건넜던 히브리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굳게 약속하고도 곧바로 뒤돌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다. ‘농담성 약속’이었던 것이다.

 

농담의 역사는 신약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를 직접 보면서, 그분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다. 광야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배부르게 먹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칭송했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새생명을 주기 위해 내려온 하늘의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군중들은 “그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그러더니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렸다. 배고픔을 달려주는 떡은 덥석덥석 날름날름 받아 먹으면서 영생 이야기를 하자 개무시하고 농담으로 취급해버렸다.      

3년 넘게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농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가복음 16장11절과 13절, 14절에는 부활 소식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구절을 일부러 반복해서 기술한다.

 

남아 있는 제일 큰 ‘농담’은 심판이다. 개인에게 닥칠 심판, 남아 있는 인류에게 한꺼번에 닥칠 심판, 모두 다 농담 취급을 받는다. 놀랄 일은 아니다. 아담 이래로 모두 그래왔다.

인간들이 농담으로 시작해 농담으로 끝내고 싶어 해도, 언제나 진심인 분이 있다.

오병이어 내러티브의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그저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취급하는 인간 중에 어떤 무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가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이 그림이 정확하게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그려진다.

사실 소돔에서 구원을 받은 롯도 천사들의 심판 이야기를 농담으로 받았다. 어서 피하라는 재촉에도 불구하고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 강제로 그들을 끄집어 내시는 분이 계셨다. 도무지 대책 없는 자들에게도 한없이 자비롭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19장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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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7
소원성취의 비법

 

독일 출신으로 보수적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폴 틸리히는 ‘문화 신학자’라고 불린다. 그는 평생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학방법론은 ‘상관’이란 단어로 정의되는데, 철학과 신학, 문화와 종교를 이분법으로 나누기 보다 양측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 베를린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유대인 탄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나치정권에 해직된 뒤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경향인지도 모른다.

 

 틸리히가 쓴 책 ‘문화의 신학’은 현대 교회에 만연해 있는 가치관을 직격한다. 세속문화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거나 또는 종교를 특수한 영역, 거룩한 것으로만 여기고 세상과 구별하려는 태도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교회가 문화 안에 있으며, 오히려 세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을 다루고 있다. 결국 복음을 소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참된 결단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속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며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다. ‘종교로서’ 기독교와 세상은 뼈에 살이 붙어 있는 것처럼 한 몸이다.

이것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한국 기독교 일각의 움직임, 소위 ‘보수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유통일’ 또는 ‘기독교 입국론’을 외치는 세력이다.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북한 김정은 정권 해제 등을 주장한다. 종교를 정치화해서, 또는 정치를 종교화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이라는 정치, 국가체제를 한국기독교와 분리하지 말고 양측의 조정과 중재를 통해 한국사회가 복음화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끌어내 김정은 정권 아래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북한으로 복음이 흘러가는 길을 열자는 뜻이다.

 

복음은 북한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

단, 사람들이 ‘자유’나 ‘민주주의’, ‘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복음을 들먹일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평안과 육신의 안달을 위한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초대교회를 돌아보고, 현재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보수’만 그런가. 소위 기독교 안에 진보라는 세력은 세상과 아예 잡탕, 짬뽕이 됐다. 다원주의니, 통합이니 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스스로 허물어 버렸다. 

 

틸리히는 종교의 정의를 ‘인간 정신생활의 한 차원’이라고 한 다음 그것은 ‘감정’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틸리히가 말한 그 감정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한 몸이 된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나 자신을 신으로 떠받드는’ 소원성취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야기 중에서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등을 “역사적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명확한 전설”이라고 치부했다. 성경을 누군가 꾸며낸 전설 같은 이야기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명한 신학자가 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20층이 넘는 사옥의 4층에는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하루는 1층 로비까지 들릴 정도로 짝짝짝짝 박수 리듬에 맞춘 찬송가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건물 입구에서부터 행사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들려온 찬송가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이단사이비 신도들이었다.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틸리히가 말했던 복음은 어떤 것이고, 소위 기독교가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들먹이고, 신학의 각종 교리를 그럴 듯하게 읊어대도, 신학자라는,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도, 그들이 외치는 것이 진짜 복음인가에 대한 고민은 도저히 중단할 수 없다.

틸리히는 복음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인간의 결단’으로 보았다. 인간에게 복음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부자 이야기’를 했는데, 틸리히도 그런 면에서 부자 청년이었고, 소출을 많이 낸 어리석은 부자였다. ‘하나님께서 흘린 피’가 아닌 ‘자신의 결심과 노력’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런 기독교는 진짜 기독교가 아니다. 진짜 교회는 세상에서 뽑혀져 나온 자들이다. 인간의 결단이 아니다.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에 힘입어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머물게 되는 자들이 진짜 기독교다. 그들은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살이 뼈에서 발라지는 것 같은,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종교인)은 표적을 바라고, 헬라인(철학자)은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고린도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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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4
부자 이야기


#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계명을 지켜라."

관원이었던 청년은 대답했다.
"내가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 청년을 보셨다.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 부자가 있다.
그가 소유한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내 영혼에게 이르되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성경에는 부자들 이야기가 많다. 심지어 부자인 교회도 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원인과 결과, 노력과 보상. 이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다. 그것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믿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아예 도식화 한다. 예측 가능한 설명, 그래야 사람들이 편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것을 투영한다. 
노력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때 군말이 없다. 노력 없는 보상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 성경 대로 지키면 영생 얻는다. 기도 열심히 하면 응답 받는다. 남들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주신다.” 

 

이것이 인과율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세상에 속한, 종교로서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 설교가 실제 난무하고, 그런 성공담이 간증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런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했던 부자는 돈 많은 사람을 의미할까. 
부자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는 자부심을 재산으로 챙겨 갖고 있었다. 
소출이 풍성했던 부자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착각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은 수치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자아에 도취돼 있었다. 

 

부자들 에피소드에서 핵심단어는 ‘소출’, ‘영생’, ‘계명’ 등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내가’이다.  
사람들은 ‘내가 계명을 지킨다’거나 ‘내가 재산을 모았다’거나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능력까지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부자 청년은 계명을 지킬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도 은근히 과시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 지킴의 대원칙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정리하셨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의 율법지킴은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난다.

 

재물을 많이 쌓아둔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자신의 영혼까지 편히 쉬면서 먹고 마시길 원했다. 그러나 영혼의 소유권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나는 부자’라고 너스레를 떨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었다’는 수치스런 책망을 들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세상이 기대하는 인과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아니 기독교가 선포하는 ‘은혜’라는 복음 안에는 인과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의인과 악인, 종교인과 비종교인,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버린다. 오직 ‘예수’라는 두 글자만 남는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무소유의 삶을 이를 악물고 실천했다 하더라도 그 보상으로 영생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여기 세상에 존재했던 어느 부자의 고백이 있다.  
구약성경 전도서를 남긴 솔로몬의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서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 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와,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라.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라.”(8장17절~9장3절)

 

부자 청년 이야기의 결론은 예수께서 요약하셨다. 
“그런즉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두려움에 찬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답하셨다.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원인, 동력,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솔로몬이 쓴 전도서의 내러티브도 이렇게 이어진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9장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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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나는 임금이로소이다 (하)

 

  구약성경 열왕기상 11장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이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였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1~2절)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니.”(4~7절)

 

  안타깝지만 이것이 ‘여디디야’, 즉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자’의 삶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통해 낳은 첫째 아이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솔로몬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셨다.(사무엘하 12장)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여호와께서는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려니와”(열왕기상 9장 4~5절)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솔로몬의 삶은 다른 길로 갔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왕상 9장 6~7절)”라는 저주의 길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이 죄의 길로 내달린 것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신’ 솔로몬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던 다윗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주변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벌였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저주를 받아 죽는 사건을 일으켰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택한 백성들의 삶에서 터져 나오는 불의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있다. 인구조사 사건을 두고 성경은 다소 상반되게 진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무엘상 24장1절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고 기록하고, 역대상 21장1절은 같은 사건에 대해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말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 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신 것처럼, 다른 쪽은 사탄이 배후에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이 대목은 열왕기상 9장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이란 구절에 종속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격동시켰든, 사탄이 다윗을 충동질 했든, 여호와께서 사탄을 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만들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윗의 부적절한 행위 자체를 하나님께서 덮으신 뒤 온전하고 바르게 행한 것으로 여기시기로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의 포커스는 등장인물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 은혜에 맞춰져 있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 한 사람의 출생과 일생 말년을 통해 읽어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짐승1천 마리로 번제를 드렸다거나 누구보다 뛰어났던 지혜, 그가 누렸던 어마어마한 경제적 축복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다.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다.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절)”는 것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는 말씀이다.
 역사의 관점으로만 보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아들 솔로몬을 지나기도 전에 깨져버렸다. 솔로몬의 불순종으로 그의 아들 대에서 이스라엘은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온갖 우상을 섬겼던 솔로몬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솔로몬의 삶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 사랑 받은 인간’ 마저도 결국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갔다. 십계명 가운데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조차 인간은 지켜낼 능력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다셨는데, ‘온갖’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솔로몬의 불가능이 내포돼 있다. 
이는 바울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장10절)”고 기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모든’과 ‘항상’이라는 조건에 걸려있는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주 아래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언약을 성취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다. 그분 스스로 언약을 성취하신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씨’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이삭과 야곱,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실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동원된 인물이다. 

 

 인간 대표’ 세상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을 드러냄으로서 반드시 여호와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아브라함과 다윗, 이삭과 솔로몬의 죄를 덮어쓰고 대신 죽으셔야 했다. 그것이 갈보리의 십자가다.

 

 솔로몬 왕이 사용하던 그릇은 모두 금이다.(열왕기상10장) 은은 아예 보석귀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하루에 살진 소 10마리, 양 100마리, 사슴 노루 등을 하루 음식재료로 소비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을 우상 소굴로 만들었다.  

 

 그가 전도서에서 내놓은 고백은 이것이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3장 17~18절)

 

 솔로몬은 자신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개차반이란 사실을 평생을 통해 절감했다. 그것이 율법 아래 속하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살다간 임금이 기필코 살아내야 하는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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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나는 임금이로소이다(중)

 


 유대인들은 늘 화려했던 다윗 왕국의 부활을 꿈꾼다. 여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택한 백성답게 강력한 힘을 갖고, 세상의 중심에 서겠다는 의지다.

현대 교회 안에도 이런 신앙이 적지 않다. 병 낫고, 부자 되고, 자식들 출세하고. 그것을 위해 헌금하고, 봉사하고, 선교도 간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복음과 무관하다. 메시아는 세상의 힘을 쟁취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박해를 당하고, 죽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의 요구로 세워진 왕 사울이 망한 뒤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등장한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사도행전 13장21~23절)고 전했다. 

 

 다윗은 세상이 원했던 왕 사울이 망하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징검다리였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이유로 사울과 다윗의 행적에서 잘잘못을 따져 점수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윗의 삶에서 무언가 배워서 그대로 따라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은 인간이 내놓은 훌륭한 일과 잘못을 저울대에 올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이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의미는 다윗이 골리앗을 단번에 때려 눕혔을 때나 자신을 죽이려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너그럽게 살려뒀을 때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윗이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이고, 그의 처 밧세바를 범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의 삶이 아들 이삭을 죽여 제사 지내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가는 여정이었다면 다윗의 생애에서 하이라이트는 밧세바와의 사건이다.

 

 다윗의 신앙고백은 시편 51편에 잘 집약돼 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죄인들이 내놓는 공통된 신앙고백이다.

 세상 꼭대기에 있음을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임금’이라는 존재감을 마구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아니면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단말마 같은 비명이요, 또 환희의 찬양이다.

 

 다윗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불러 동침한 이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죄를 지적했다. 그때 다윗이 참회하면서 부른 노래가 시편 51편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구하면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2절)라고 고백했다. 또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자신의 출생과 본질에 대한 정확한 자각이다. 죄는 평생 다윗을 따라다녔고,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죄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의롭다고 여겨주심이 아니면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자인식이다.

 그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7절)라고 외친다. 우슬초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를 때(출애굽기 12장22절) 사용했다. 레위기 14장에서는 부정한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데 우슬초와 피가 등장한다. 민수기 19장에서는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희생제물로 바칠 때 우슬초와 백향목, 홍색실이 동원된다.

 

 우슬초는 흠 없는 어린 양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수난 장면(19장29절)에서 우슬초가 등장한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우슬초에 매달아 예수의 입에 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속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신 피 흘려 죽을 때만 성취될 것임을 앞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것이 꺾으신 뼈다. 

  다윗은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2장46절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민수기 9장에 등장하는 유월절 관련 율법도 “이월 십사일 해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 대로 지키라”(11~12절)고 하셨다. 

 

 꺾으신 뼈와 관련된 이야기는 시편 34편으로 이어지는데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19~20절)라고 기록한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의 덫을 피해 몸을 의탁했던 아비멜렉 앞에서 위기에 빠졌다가, 미친 척하는 임기응변으로 도망한 뒤 지은 시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시편 34편이 말하는 의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유월절 율법을 통해 말하듯 하나님께서 모든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유일한 의인은 죄 없으신 예수님이다. 

 

 유월절 어린 양과 다윗이 노래한 의인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 19장32~36절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다리는 꺾였으나 예수님의 뼈는 온전히 보존됐다고 기록한다. 로마시대 십자가 형을 당한 죄수는 군병들에 의해 모두 다리가 꺾였다. 죽음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수님의 뼈는 성경의 언약 성취를 위해 마땅히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했다.

 다윗이 시편51편에서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한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반드시 뼈가 꺾이고, 저주 받아야 할 죄인들이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모든 사람의 뼈는 하나님께서 친히 꺾으신다. 다윗은 멸망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뼈가 꺾인 죄인들에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인들이 닮고 싶어할 만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뼈가 꺾여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윗 왕국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살고 싶어하는 교회는 그래서 미몽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을 읽어보면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그가 당할 고난과 흘려야 하는 피에 모아져 있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 부크크출판사 중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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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3
나는 임금이로소이다(상)

 

유력한 집안에 잘 생긴 젊은이가 있다. 그 지역에서 그보다 잘 생긴 남자가 없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위가 더 있을 만큼 키도 컸다. 게다가 유력했다고 전해진 자신의 집안을 “보잘것없다”고 낮출 정도로 성품까지 겸손했다. 인간들이 갖고 싶은 모든 조건을 갖춘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일하던 막바지, 그러니까 사사시대 말년에 암몬 족속이 왕 나하스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치려 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몰려갔다. “우리를 다스릴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왕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원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신뢰를 저버린 행위였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께만 복종하기로 약속했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라(사무엘기상 8장7절, 새번역)”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왕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삼상12장12절)고 기록한다. 

 

그리고는 희한한 이야기를 하신다.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사무엘상 12장13절)고 말씀하시고,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왕)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장21절)고 경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을 세웠을 때 벌어질 일을 미리 아셨다.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유익하게도, 구원하지도 못 하며 왕을 세우는 것 자체가 다만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시켜 굳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12장25절)고 부탁했다. 왕을 세우게 허락하시고, 그것이 헛되다고 하시고, 나아가 그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고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처음 선지자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을 때부터 주어졌다. 사무엘상 8장18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다.

 

 사울 왕의 모든 생애와 에피소드를 들여다볼 때 이런 상황을 종합해서 이해해야 한다. 사울이 왕에 등극한 뒤 이어지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앞서 경고하신 내용에 수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와도 맥락이 같다. 창세기 이후 구약 사무엘상까지 오는 과정에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모든 순간 세상나라 이방신을 섬긴 것뿐이다.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 부름을 받아 기적을 체험하고, 암몬 족속을 쳐부수고, 블레셋과 싸우고, 여호와의 영이 임해 새사람이 되어 예언을 했더라도 그것은 망하는 길로 걸어가는 단계에 불과했다. 

 

그 압축판은 사무엘상 15장에 등장하는 아말렉과의 전쟁 이야기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에게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전쟁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았고, 적군 대부분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선악지식을 앞세워 판단했을 뿐, 전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염소를 끌고 왔나이다”하고 변명한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사울왕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운 것이다. 그것을 제사라는 명목으로 포장까지 했다. 이것은 사울이 지위와 직책으로서 왕의 자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대표로서, 여호와 하나님 머리 위에 올라 앉아, 그분의 명령까지도 가볍게 무시하는 진짜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사무엘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선언한다.

 

많은 오해가 여기서 발생한다.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왕에서 퇴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사울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예견된 것이었다. 실제로는 사울이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여호와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버림받았던 결과가 아말렉과의 전쟁 사건을 통해 재차 확인된 것뿐이다. 

그런 면에서 사울은 복음의 내러티브에서 버림 받는 역할 수행을 위해 이스라엘 첫 왕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한치의 오차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대목에 오면 인간을 ‘하나님의 모형과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라고 믿는 쪽에서는 큰 소리로 항변한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그렇게 장난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실제 그런 하나님이라면 절대로 믿거나 인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과 경험, 주변 상황을 참조해 닥쳐오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려고 한다. 특히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두려움은 더 커진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도 이런 두려움 앞에서 자신들을 위해 앞장서서 대신 싸워줄 구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세운 왕과 그런 통치자를 원하는 백성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손바닥에 ‘왕’ 글자를 새긴 임금이 출현했다 할지라도 ‘너희와 너희 왕이 다 같이 멸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사울이 함께 망하는 이유는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삼상12장25절)에 설명되어 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 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다”(12장10절)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쫓던 그들이, 키 크고 잘생겼으며 전쟁에 능하고 카리스마까지 갖춘, 원하는 왕을 세웠다고 해서 여호와만 섬길 리 만무하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과 사울 왕의 이야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를 통틀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하나님을 밀어내고 ‘왕’이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왕좌에 앉힌다. 그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악의 실체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간이 왕의 자리에 앉을 때 그들은 반드시 멸망한다. 유일한 왕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대신해 악마와 싸워주실 분, 대신 죽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품어 안고 먼저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간다. 만사형통이 아니다. 왕의 자리를 탐하다 저주에 빠진 죄인과 함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 그것이 성경의 복음이다. 그것이 진짜 왕의 역할이다. 
사울 왕은 그의 실패와 불순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존재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 부크크출판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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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9
당신들의 법대로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를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때는 어린 양의 희생에 힘입어 이집트에서 탈출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다. 이제 진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에 나타나 죽임 당하는 날이 온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가?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라”며 유대인들에게 떠밀었다. 흉몽을 꾼 빌라도의 아내까지 나서 예수와 관련된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들은 “만약 예수를 놓아주면 빌라도 총독 당신은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다”고 협박까지 했다. 결국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라”며 예수를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구명하기 위해 나름 애쓴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물을 떠다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는 행위를 보여주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벗고자 했다.

그러나 빌라도의 말이나 노력,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그는 예수의 죽음에 가담한 가해자였다. 대제사장 무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재판한 세상의 대표였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동의하지 못 하든, 성경은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대제사장 무리의 일원이며, 십자가 사건의 주범 빌라도 소속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일상 생활을 통틀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날마다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나라’에 대한 대화가 등장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끌고 온 대제사장 무리에게 “너희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요구했고, 예수께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8장)

여기서 빌라도는 자신과 유대인 무리를 구분 짓고 있다. 예수 또한 대제사장들과 같은 유대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약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오히려 유대와 로마를 한데 묶었고,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를 한통속으로 분류했다. 이 대목에서 빌라도의 구별짓기는 무력화된다. 예수님의 기준은 바로 ‘이 세상’과 ‘내 나라’로 나뉘기 때문이다.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소속이었다.

빌라도가 “당신이 왕이오?”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라고 대답했다.(18장37절)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개역개정)”라는 번역과 “진리가 무엇이오?(새번역)”라는 질문은 어감에서 차이가 있다. 글로 옮겨진 말은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질문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진짜 진리가 궁금해서 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죄수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던 대화의 흐름상 허황되게 들리는 예수의 진술을 비꼬는 말투였을 수도 있다.

빌라도의 진의는 중요하지 않다. 해답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예수의 대답 안에 있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친히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고통을 받던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유대인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것처럼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다. 예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되어 태어났다. 동시에 유대인과 로마총독 등 모든 인류는 예수를 죽인 가해자로 판명된다. 빌라도의 몸부림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예수의 수난 과정에서 소속이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다. 흉악범이었던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저주하며 세상의 왕 노릇을 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며 예수께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예수는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란 말로 강도의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복음은, 사형 집행이 갑자기 보류되거나, 혹은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는 긴급속보가 아니다. 로마 군병들이 급히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양 손에 박힌 못을 빼거나 상처를 치료한다 해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는 후회조차도 필요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깜짝 놀람과 감사, 예수에 대한 찬양만 있을 뿐이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잡는 복음’(-부크크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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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정의봉의 추억

 

 1949년 6월26일,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는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군 당국은 다음날 ‘우발적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석 달만에 그는 징역 15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위로 군에 복귀했다. 1951년에는 국방장관의 지시로 잔형을 모두 면제받은 뒤 육군 소령으로 제대했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에서 시내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박기서씨는 40cm 길이의 작은 몽둥이,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안두희의 부인을 결박한 뒤 준비한 장난감 권총으로 안씨를 위협했다. 백범 암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라는 것이었다.

 중풍으로 투병 중이던 안두희는 우물쭈물 얼버무렸고, 격분한 박씨는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안두희의 온 몸을 난타했다. 안두희의 목숨이 끊어지자 박기서씨는 경찰에 자수했다. 박씨는 이후 ‘역사가 안두희를 처벌하지 않으니 내가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안두희를 죽인 동기 가운데 하나는 권중희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이다. 권씨는 이 책에 백범 암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울였던 40여 년의 노력을 담았다. 사건 이후 안두희에 대한 처벌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분노한 권씨는 1950년대부터 정부에 탄원을 넣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안두희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듯한 잡지 인터뷰를 하자 직접 죗값을 묻기로 결심했다. 권씨는 1987년을 시작으로 90년대 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안씨를 응징했다. 이 과정에서 권씨는 구속 수감되는 곡절도 겪었다.

20여 년 전 안두희의 죽음과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어 하나는 ‘정의봉’이다. 몽둥이 하나로 역사의 심판을 올바르게 집행할 수 있다면 세상 나무를 모조리 깎아서라도 정의봉을 만들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안두희는 정의봉에 맞아 절명했지만 여전히 역사의 심판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개화기 어수선한 틈에서 친일행위로 동족의 고혈을 빨아 배를 채우던 이들은, 해방이 되자 빨갱이를 때려 잡는 반공투사 변신해 여전히 잘 먹고, 잘 산다. 독립을 위해 애썼던 많은 분들, 그들의 자손은 타국을 전전하며 이방인으로 개고생을 하는데,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친일 배신자의 후손들이 정치인으로 혹은 검찰의 칼을 쥐고 세상을 호령한다.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대법원 판결까지 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조치까지 머뭇거리면서 말이다.

이렇듯 약육강식, 힘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역사에서 심판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행하는 심판 역시 힘의 논리에 지배 당하기 때문이다.

 각자 부르짖는 정의에 대한 잣대, 기대하는 정의 실현의 정도도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는 게 아니라 시효조차 힘있는 자들 멋대로 정해진다. 아예 시효 자체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그런 난장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한국 정치판이다. 한 때는 ‘군바리’들이 겨눈 총부리가 정의봉이었고, 이제는 검찰이 휘두르는 칼이 정의봉 행세를 한다. 애완견에 사과 한조각 들이미는 ‘개 사과’ 정도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가볍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이 불완전하다고 슬퍼할 이유나 여유는 없다. 성경이 심판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장27절)”라고 말한다. 그 심판대는 부정축재를 일삼는 재벌이나 정치인, 고관대작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를 향해 시시각각 진격해오는 대적들에게 있는 힘껏 정의봉을 마구 휘둘렀던, 바로 나 자신이 서야 하는 심판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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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사랑, 그 씁쓸함에 대하여

 

최근 어느 자칭 ‘선지자’의 유튜브 방송을 봤다. 기도 가운데 곧 선출될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언질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실로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지자는 한국 여당을 이끌 후보를 만나서 축복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조만간 서울에서 1980년 광주와 유사한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그런 기도응답을 받은 뒤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며 자유우파와 주사파가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선지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한다. 나무에게, 돌에다, 때로는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에게도 기도한다. 인간이 기도하는 이유는 욕심, 좋게 말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정당의 대표로 누가 선출될 것인지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선지자’의 마음 속에 가득 찬 것도 결국은 욕심이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M. 바운즈가 쓴 ‘응답되는 기도’(드림북출판사)에는 인간들이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저자는 “기도는 약속을 풍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 준다. 기도는 이 약속들을 계속 유지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약속은 기도에 영감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지만 기도는 약속을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시킨다”고 강조한다.

바운즈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힘주어 말한다. 그는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실 일을 행하도록 한다”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 순수한 기도는 절박한 상황들을 면제시킨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기도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해악들을 없앨 수 있다”고 덧붙인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바운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열심히 간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바운즈의 설명은 자칫 하나님이란 존재가 인간들의 내놓는 기도라는 ‘기특한’ 행위에 감동해서 그분의 계획과 언약을 수시로 바꾸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겠다는 인간의 악마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 아무리 성도가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은 바뀔 수 없다. 아니 그분은 성도의 기도에 맞춰 언약과 뜻을 변경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도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기도의 주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죄인 중 괴수라는 것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욕심으로 가득찬 인간들에게 기도를 토해내도록 하신다. 그분의 언약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출애굽기 2장 23절은 이집트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됐다”고 기록한다. 모세를 투입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정이다. 야곱과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내려간 이후 400년이 흘러 때가 되자 아브라함에게 미리 힌트를 주시고 약속하셨던,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끄집어 내시기로 했던 약속을 기도를 통해 신실하게 이뤄가시는 것이다. 사사기에서는 죄악에 빠져가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 넘기시고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삿 3장9절, 3장15절, 4장3절, 6장6절, 10장10절 등) 구원하시는 장면이 반복된다.

바운즈는 성경에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세 가지를 꼽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와 밧세바와의 불륜을 통해 낳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위한 다윗의 기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다. 하지만 이 기도들은 정확하게 응답됐다.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도를 드린 ‘자기의 유익을 우선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그렇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응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그것이 창세 전 언약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 성전 제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복해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그분이 예정하시고 준비하신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계획을 이미 다 밝히셨다. 그 언약에 따라 십자가를 세우셨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다. 바울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기도응답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그 내용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역으로 성도들이 구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유익이 아니라 성령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육신을 입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질병에서 고침 받기 위해, 육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께 드리지 못할 기도는 없다. 그러나 한 번 더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 그분의 응답 방식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두 구절의 공통점은 ‘마음’에 있다. 구하는 것은 전부 너희들 요구하는 대로 이뤄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칭’ 선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들의 마구 씨불이는 설교에 두 손 들고 ‘아멘, 아멘’ 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오직 자기 백성들만 사랑하셨다.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죄의 저주를 받으실 만큼 사랑하셨다. 그 사랑 앞에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육신의 욕심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씁쓸하실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한 단락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교회가 무시한 십자가(부크크 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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