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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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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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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안다는 것

 

25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 있었다. 어떤 사건을 취재할 때, 일의 과정이나 결과를 추정하거나 예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정보만 갖고 미리 판단하거나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충고였다. 한두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 전언을 조심하라는 선배도 있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어디에선가 살이 더 붙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오보를 내고, 정정보도를 했다. 기사를 쓰면서 결과적으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취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은 고위직 공무원으로부터 A정부기관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준비 중인데, 내용이 아무리 살펴봐도 엉터리라는 제보를 받았다. 관련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에게 물었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는 답을 들었다. 여러 행정기관 간담회 자료도 입수했는데, 그 정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던 중소기업 관련 A기관에 질문을 했다. 담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제일 먼저 문제를 귀띔했던 고위 공무원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더니, “언론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워 일단 발뺌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가 나갔는데 아침부터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왔다. 정책을 준비하던 곳은 A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B였던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사실 확인을 게을리 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A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정정보도를 냈다. 이름을 달고 나간 기사를 정정하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론보도를 위한 취재는 어떤 사실을 알아내려 하는 행위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는 행위에 100% 완벽하기는 어렵다. 예를 든 사례는 사소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무언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늘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서는 ‘앎’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이야기가 1~13절에 소개되고, 16~30절까지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사람들과 엮인 에피소드가 적혀 있다. 31절 이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연달아 나온다.

4장3절에서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다. 34절로 가 보면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또 41절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뜬금 고백을 내놓는다. 

그러니 악마가 광야시험에서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서두를 꺼낸 것은 예수님의 실체를 잠시 헷갈렸거나 전혀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고도 능청을 떨었던 것뿐이다. 악마의 속셈은 뻔한 거짓말로 속이고 넘어뜨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예수께서는 이들 마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사람 안에 들어가 더러운 짓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앎’의 초점은 빗나가 있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특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성경 이사야 61장의 첫 대목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셨다. 이것은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할 일, 즉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회당에 있던 자들이 다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또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한다.(4장22절) ‘놀랍게’ ‘기이하게’라고 번역된 ‘다우마조’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상하게 여기다’는 뜻도 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다음 대목에서 파악된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신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형제까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웃 청년이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여기서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직격하셨다. 예수를 돌팔이 의사쯤으로 취급하면서, 다른 동네에서 했던 것처럼 큰 기적이나 한번 베풀어 보라고 조롱하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면전에서 들추어 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엘리야 시대의 과부와 엘리사 때의 나병환자 나아만 장군을 언급했다. 구원의 은혜는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임했다는 말씀이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그들이 구원 밖에 있는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에 나사렛 사람들은 격분했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절)고 기록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는, 그 예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모세의 제자를 자처하며, 세상 진리를 통달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눈 먼 자들로 들통난 사건이다. 나사렛 사람들 역시 예수를 보았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리에 대한 눈은 멀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은 ‘앎’을 둘러싼 대립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를 ‘틀린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다. ‘선악과’가 낳은 고질 증상이다. 

그러나 눈치가 있다면 곧장 그런 ‘앎’이 의미 없음을 알아차린다. 세상에서 쌓은 지식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거품을 물지만 실제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앎’의 출발점이다. 진짜 가치 있는 ‘앎’이란, 생명을 살리는 ‘앎’이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을 향해 예수께서는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나사렛 사람들의 속마음을 예수께서는 이미 꿰뚫고 계셨다. 

 

다시, 나사렛 회당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눈 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일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장29~30절)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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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허망한 경계 짓기

 

 

필자가 살고 있는 토론토 서쪽 동네를 걷다 보면 스포르팅이나 포르투 등 포르투갈의 유명 축구클럽 간판이 보인다. 아마 팬클럽일 게다. 이들 프로축구팀은 벤피카와 함께 포르투갈 리그를 대표하는 3대 명문클럽이다.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고국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서포터들이 한 자리에 모일 공간까지 만들었다는 데서 그들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지난 7월1일 오후에는 포르투갈 축구팬들이 몰려나와 그 동네 주요도로가 마비됐다. 포르투갈 국기와 축구대표팀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드는 주민들이 차량 퍼레이드를 한 것이다.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고, 깃발을 펄럭이며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은 EURO2024 16강전 포르투갈 대 슬로베니아의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포르투갈은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8강에 진출했다. 그 기쁨을,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2시간 넘게 길거리를 점령하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로 8강 진출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7월5일에는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8강전 경기가 있었는데, 온 동네가 조용했다. 경기중계를 보지 않고도 포르투갈이 패하며 프랑스가 준결승에 진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축구가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런 현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국가와 민족, 뿌리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소속감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공동체의 성취를 자신의 자부심으로 챙기려는 마음이다. 최근 벌어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도 결국은 이런 메커니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는 축구대표팀이, 감독 선임조차도 투명한 절차대로 못해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보면서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경계와 소속감만큼 강력한 매개도 없다.

 

구약성경 에스라 3장에는 바벨론에서 70년 포로생활을 하다 유대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몰두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차례로 멸망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 여호와의 능력으로 모세와 여호수아에 이끌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이내 죄의 길로 빠져들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속에 모두 패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역사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듯, 그들의 70년 포로생활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예언됐던 바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 29장10절).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제로 성취됐다.

“바사와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에스라 1장1~2절).

 

유대 땅으로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7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모였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단을 만들고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초막절 등 절기를 지키기 시작했다. 2년2개월 후에는 성전 건축도 시작했다.

제사와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 짓고, 한 데 묶는 매개체였다.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큰 소리로 즐거이 찬양했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은 3장 12~13절이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문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바벨론 군대가 무너뜨리기 전 화려했던 성전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 짓는 초라한 성전의 기초를 보고 통곡을 했다. 그러나 오매불망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귀환을 기다리며, 성전을 사모했던 다른 사람들은 드디어 성전건축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함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이들의 환희에 찬 통곡과 절규하듯 쏟아낸 함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포로 귀환 이후에도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또 다시 우상숭배를 업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민족, 공동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심지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그런 행위는 가장 숭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런 애국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다른 민족이나 공동체의 침략이나 공격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실제로 수없이,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인간들의 공동체 사랑은 자신들 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기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상대방과 구별 짓기의 현장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들끼리 하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테두리 만들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를 다시 드리기 시작한 행위가 이스라엘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 자체에 인간을 구원할 힘이 없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니”(마태 24장9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환난에 넘겨 주고, 심지어 죽이는 일에는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된다. 

또한 예수께서도 민족과 나라를 한 덩어리로 취급하신다.

“인자가 가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하여”(마태 25장31~32절).

그리고는 갑자기 새로운 구분 짓기의 경계를 설정하신다. 그리스도 앞에 모인 모든 민족을 흔들어 섞은 다음에 양과 염소로 나누신 것이다. 인간들의 행위나 혈통이 아닌 그리스도, 그분이 경계를 설정하는데 직접 뛰어드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34절).

 

사도 바울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표현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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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찌질한 선지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자기 존재 증명을 향한 욕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정치권력이든, 재력이든, 종교적 권위든, 명예욕이든 사람들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애를 쓴다. 시기와 경쟁이 여기에서 촉발된다. 심지어 교회 일각에서도 ‘고지론’이라는 이름으로, 원대한 목표를 가지라고 젊은이들을 부추긴다. 물론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은 음흉한 욕심은 쏙 뺀다. 대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고 슬며시 포장한다. 실상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고, 예수를 욕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있다.

성경은 인간 군상을 ‘아담의 후손’ 즉, ‘죄인’으로 단죄하면서 출발한다. 창세기 초반부터 인간의 마음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선언해 버린다. 결국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쐐기를 박고, 계시록에 가서는 인간들이 자기존재 증명으로 힘껏 쌓아 올린 문명,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9장 초반에는 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나온다. 기세 등등한 이세벨과 잔뜩 겁을 먹은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이다. 고대 북이스라엘 아합 임금의 아내였던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만약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신들로부터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겁을 집어먹고 남유다로 도망을 갔다.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하고 기도한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라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가 황당한 것은 앞선 18장의 갈멜산 에피소드 때문이다.

아합왕과 이세벨 당시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푹 절어 있었다. 갈멜산에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 850명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대결을 펼쳤다.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각자 신의 이름을 불러 어느 제단에 불이 내리는지 백성들 앞에서 증명해 보이자는 것이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소리를 치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고, 피를 흘리면서 신의 이름을 죽자고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엘리야는 양동이에 물을 길어 번제물과 제단 주변에 세 번이나 부었다. 제단 주변이 흠뻑 젖은 것을 확인한 뒤 기도했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엘리야는 그 장면을 목격한 백성들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근처 시냇가로 끌고가 모조리 죽여버렸다.

엘리야는 거짓선지자를 모조리 처단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증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일 후에 오히려 길길이 날뛴 것은 이세벨이었고, 엘리야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불이 내렸다는 것을 알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세벨을 향해 ‘너는 정말 답이 없구나’ 하고 지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에게 ‘이런 찌질하고 못난 놈’이라고 꿀밤을 쥐어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눈앞에서 펼쳐진 기상천외한 기적의 장면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께서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하필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실제로 가서 씻었더니 눈이 떠졌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사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맹인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대답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맹인을 쫓아버렸다.

 

사도 요한은 이런 내러티브를 소개하며, 진짜 눈이 먼 사람은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모세, 즉 율법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맹인을 ‘죄 가운데 태어난 놈’이라고 몰아세우는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 먼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육신의 눈은 멀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맹인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께서 결론을 말씀 하셨다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장41절)고 하셨다.

이름을 남기고, 자신을 세상의 왕으로 세워 존재를 증명하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심판 이야기를 꺼내신다. 심판의 내용은 어떤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맹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심판이 선포될 때 바리새인들은 ‘감히 우리를 맹인 취급하냐’고 대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달아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 먹을 떡과 마실 물을 공급하셨다. 힘을 얻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40일을 걸어갔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선지자 엘리사를 세우라는 말씀을 듣는다. “선지자들이 다 죽고 나만 남았다”고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닌한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하신다.

인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자기 증명을 향한 탐욕과 찌질함의 바닥까지 긁어 내시는 분, 세상에서 가장 괄시 받는 존재로 살게 하시는 분, 그럼에도 그들을 끝까지 찾아가 건져내시는 열심, 이것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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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4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이란 사건의 연속이다. 집에서, 직장에서, 학업의 현장에서, 교회를 포함해 각자 소속돼 있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를 비롯해 휘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표류하다 보면 어느새 세월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성경 안에도 사건이 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사건의 무게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혼란은 점점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그 안에서 행간을 읽다 보면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인생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행동강령이나 삶의 지침을 배우려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뭔가 지혜를 찾아냈다고 한들, 그걸 완벽하게 실행에 옮길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 이미 인간의 실패를 전제로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22년)-나답(2년)-바아사(24년)-엘라(2년)-시므리(7일)-오므리(12년)-아합(22년).

구약성경 열왕기상 15~16장에 등장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이다.

어떤 사람이 BC 910년대 어간에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나 60년쯤 살았다고 가정하면, 초대 왕 여로보암 말기에서 아합왕 시대까지 7명의 임금을 경험한 것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고작 7일 만에 폐위된 왕도 있고, 2~22년 재임 기간 내내 죄를 저지른 임금도 있다. 이 기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는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특히 여로보암에게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저주가 선포돼 있었다. “여로보암은 자기도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입니다.”(왕상 14장 16절(이하 새번역). 똑 같은 구절이 15장30절에도 반복된다.

 

저주의 내용도 섬뜩하다. “내가 여로보암의 가문에 재난을 내리겠다. 여로보암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거나 자유인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끊어 버리겠다. 마치 사람이 쓰레기를 깨끗이 쓸어 버리듯이, 여로보암 가문에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쓸어 버리겠다.”(왕상 14장10절)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도 똑같이 죄의 길로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도 그의 부친이 걷던 그 악한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잘못을 그대로 따랐다.”(15장26절)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북 이스라엘 첫 왕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였다. “잇사갈 가문의 아히야의 아들인 바아사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나답과 모든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포위하였으므로, 바아사는 블레셋의 영토인 깁브돈에서 나답을 쳤다.”(15장27절)

 

그렇다고 바아사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고, 여로보암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죄도 그대로 따라 지었다.” 그에게도 저주가 선포되는데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 바깥의 들에서 죽는 사람은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16장 4절)

그 이유도 설명되는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므로, 주님의 노를 격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16장 7절)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신하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있다가 호위부대를 지휘하던 장군 시므리에게 시해됐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16장13절)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들을 지휘하던 사령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회군한 오므리의 군대가 몰려오자 시므리는 왕궁으로 도망을 갔다가,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권을 잡은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지를 사들여 도성을 건설했다.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16장25~26절)

오므리가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30~31절)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과 바아사 시대에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했다고 성경이 기록한다. 세월이 흘러 오므리 시대에는 ‘악한 정도가 이전 왕들보다 심했다’고 한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앞질렀다’고 구약성경 열왕기상에서 썼다.

 

여호와께서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지키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로 모든 이들이 지속적으로 말씀을 어겼고, 우상을 숭배했다. 선지자들의 저주가 눈앞에서 성취되고, 실제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불행이 그대로 닥치는 데도 그들에게는 말씀에 순종할 능력도, 우상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오히려 여호와께 반역의 강도를 더 높여갔다. 

 

지금부터 약 3천년 전의 역사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지금도 죄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은 어느 시대나 똑같다.

이스라엘 정치, 왕들의 족보일 뿐이라고 오해해도 안 된다. 오늘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복에 환장한’ 우상숭배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들 역시도, 3천년 전이나 현대나 그저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눈을 지긋이 감고 바라보는 이가 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다. 당시 교회 안에서 조차 바울을 향해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

이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심플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립보서1장18절)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었다.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교회 사람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0~21절)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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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당연한 권리

 

2010년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부당거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부조리를 조명했던 작품이다. 배우 류승범이 검사 역할을, 황정민은 경찰, 유해진이 건설업자로 등장한다.

검경이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며, 범인을 조작하려 하는 등 현실 못지 않은 시나리오가 긴장을 더 한다. 출세에 눈이 먼 경찰과 검찰의 갈등이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루며, 양아치 같은 검사 류승범은 “대한민국 일개 검사가 경찰을 불쾌하게 하면 안 되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등의 명대사를 남겼다.

검사가 주인인 세상, 검찰이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로 군림하는 세상이다.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범죄 혐의가 아무리 뚜렷해도 기소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런 병폐가 나오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공권력을 사유화 하며, 그것을 권리라고 착각하는 일이 빈번해지면 결말은 뻔하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구약성경 예레미야 2장 35절의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향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너희들이 무죄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신다.

앞서 13절에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존재의 근원인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스스로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죄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족속만이 갖고 있던 문제가 아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5~6절)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통과하던 당시에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궁리만 했을 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 9장 6~7절)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훌륭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태생 자체가 ‘목이 곧은 백성’ 곧 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늘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그분을 항상 거역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만 찾는 어리석은 행태는 예레미야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도 계속 반복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계속 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절)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훨씬 앞서 모세에게도 하셨던 말씀이다.

신명기 31장16절에서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기록한다.

이어 20절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언약과 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레미야 2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너희는 사내를 홀리는 데 능숙하여 매춘부조차 너희에게서 배우게 되었구나(33절, 공동번역)”와 같은 구절도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저주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죄악을 지적하셨으나, 그 근원은 선악과에 닿는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 생각의 주체로 서는 것, 그것을 질책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모든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어느 인간도 선악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선악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모든 세상 일에 자신이 가진 선악지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여호와께서 꾸짖는 내용이 이렇다.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를 이끌어주던 야훼 너희 하느님을 저버리고서야 어찌 이 꼴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제 너희가 나일 강 물을 마시러 이집트로 가다니 웬 말이며, 유프라테스 강 물을 마시러 아시리아로 가다니 웬 말이냐?”(공동번역, 예레미야 2장 18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강대국,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한 것을 질책하신다. 이것을 예레미야서는 부정한 짓을 한 여인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보이는 힘의 세상을 무시하며 살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장2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라기 1장6절)

 

어디를 둘러봐도 도무지 답이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다. 이러니 여호와께서는 탄식하신다.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예레미야 2장21절,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마냥 분노하고 탄식만 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모든 일을 창세 전에 마음 먹으신 대로, 언약대로 반드시 이뤄 내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심은 좋은 포도나무가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다 해도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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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사자에게 물려 죽은 ‘하나님의 사람’

 

교회 안에 발을 디디고 살아온 게 벌써 40년을 넘었다. 돌아보면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적지 않은 기독교 관련 책을 읽었다. 한때 명성을 떨치던 목사나 선교사, 저술가, 부흥사 가운데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었고, 여전히 기독교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도 많다. 과거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설교나 읽었던 책 가운데 지금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 20~30년 후에 2024년을 돌아볼 기회가 있다면 똑같이 고백할 것이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3장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남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다. 다른 한 인물은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로 살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패역한 짓을 일삼자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할 임무를 띠고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갔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벧엘에서 분향하고 있던 여로보암을 향해 여호와의 저주를 쏟아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열왕기상 13장 2~3절)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져 내렸다.

이때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피로를 풀 겸 같이 쉬자고 하며, 선물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하고,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 소식이 벧엘의 늙은 예언자에게 전해졌다. 그는 곧장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갔다. 그리고는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만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절하자, 늙은 선지자는 거짓으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고, 늙은 선지자를 따라 집으로 가서는 떡을 먹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말을 했던 늙은 예언자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왕상 13장 21~22절)고 하셨다.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 나자 나귀 등에 안장을 얹어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와 자기 성읍에서 슬피 울며 장사를 지냈고,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슬피 울었다.

 

이 에피소드는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중구난방처럼 보인다. 여로보암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했던 그를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에 속지 않게 보호해 주시지도 않았다. 또한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던 늙은 선지자의 입을 빌려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 우상숭배에 혈안이 된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3장 2절)

뜬금없는 이름, ‘요시야’가 예언에 등장하는데, 그는 남유다의 16대 왕으로, 기원전 640~609년 사이에 활동했다. 여로보암이나 ‘하나님의 사람’ 보다 대략 300년 후대의 인물이다.

요시야왕의 역사는 구약성경 열왕기하 22장부터 기록돼 있다. 그는 율법책을 발견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각종 우상을 섬기던 제단을 혁파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하 23장 24~25절에 나온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특히 열왕기상 13장의 내용이 열왕기하 23장 15~16절에서 그대로 성취된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이어 17~18절에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무덤 이야기도 언급된다. 요시야는 우상을 섬기던 산당의 제사장을 죽이고 무덤까지 파헤쳤으나 ‘하나님의 사람’과 사마리아의 늙은 선지자의 무덤은 그대로 두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의 최후도 비극이다. 그는 애굽왕과 전쟁을 하다 전사했다. 더구나 율법을 지키려 한 요시야와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됐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왕하 23장 26~27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언도 했고, 신비한 일도 일으켰지만 사자에게 찢겨 죽은 ‘하나님의 사람’. 우상을 부수고, 율법을 회복시켰지만 전쟁에서 전사한 요시야. 거짓말도 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외쳤던 늙은 선지자.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고, 삭제 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여호와의 손길에 이끌려 다녔으며, 인간의 불가능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데 차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데 동원됐던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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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6
왕(王)의 폭주

 

BC 930년 전후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다윗의 손자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 재임 당시의 큰 용사다. 이름도 헷갈리는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르호보암은 남왕국 유다의 세 번째, 여로보암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열왕기상 11장 6~8절)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11절)”고 하셨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의 부지런함을 보고 그에게 다윗의 성읍을 수축하는 일을 맡겼다. 이때 여로보암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전달된다. 선지자 아히야는 예루살렘에서 여로보암을 만난다. 새 옷을 입고 있던 선지자는 의복을 열두 조각으로 찢고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31~32절)라고 전했다.

또한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말미암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37~39절)”는 말씀이 주어졌다.

 

이런 이야기는 솔로몬의 귀에 들어갔다. 나라가 쪼개질 위기에 처하자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고, 그는 애굽으로 도망을 갔다.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여로보암은 백성들을 이끌고 새로 왕이 된 르호보암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12장4절) 하고 제안한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이를 거절했다.

 

뿔이 난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12장16절) 하고 돌아가버렸다. 르호보암은 강제노동 감독관인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일종의 반역이었고, 이때 다윗과 솔로몬 통치로 이어지던 고대 다윗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막상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됐지만 여로보암은 불안했다. “만일 이 백성이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12장27~30절)

그것도 모자라 여로보암은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분향까지 했다. “내 명령과 율례를 지키면 너와 함께 하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무시한 것이다.

여로보암의 결말은 열왕기상 13장 34절에 있다.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우상 섬기기 챔피언들

우상을 숭배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했던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는 잇따라 대적을 일으키셨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11장14절)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11장23절)

또한 여호와께서는 르호보암의 일생에 펼쳐질 일에 대해 그의 아버지 솔로몬에게 설명하셨다.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장12~13절)고 하셨다.

 

르호보암 시대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세워진 다윗왕국이 두 동강 난 것은 표면적으로, 여로보암과의 협상이 결렬됐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란 선지자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먼저 르호보암을 찾아가 ‘조건이 맞는다면’ 계속 다윗 왕국의 백성으로 남겠다고 말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12장 4절)

이때 르호보암은 사흘의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솔로몬 때부터 있던 원로대신의 조언을 구하고, 또한 자신과 비슷한 또래 친구그룹의 이야기도 들었다. 원로들은 여로보암을 비롯한 백성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젊은 신하들은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12장10~11절)라고 입을 모았다.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이 말한 대로 여로보암과 백성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왕으로 다스리던 기간 남유다는 우상을 섬기는데 그 조상들보다 더 뛰어났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왕상 14장22~23절)

 

만약이라는 헛다리

르호보암이 원로 대신들의 조언을 들었다면, 또는 여로보암이 여호와의 말씀을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난장판 같아 보이는 왕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들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솔로몬이나 르호보암이나 여로보암이 아니다. 성경 스스로 이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연출임을 공지하고 있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왕상 12장15절)

그래서 성도는 솔로몬, 여로보암, 로호보암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성경을 다시 읽어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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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3
무엇을 하여야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결말이다.

모든 예수님의 비유가 그렇듯, 이 이야기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이 비유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종교적 위선만 떨지 말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 난관한 봉착한 이웃을 직접 도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인간답게, 사람답게, 최소한 ‘착하게 살자’는 구호다.

 

먼저, AD 3세기에 활동했던 초기 기독교의 교부 오리게네스의 상징적 해석을 보자.

“부상당한 사람은 인류를,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낙원 또는 에덴을, 여리고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강도는 어둠의 세력을, 제사장은 율법을, 레위인은 선지자를,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상처는 불순종과 죄의 결과를 상징하고,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관은 교회를, 주인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주님의 장래 재림을 상징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세상에 살면서 어둠의 세력에게 농락당하며, 죄와 불순종에 빠진 인류의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오리게네스의 이런 풀이는 성 어거스틴을 비롯해 초기 기독교 일각에서 받아들여졌고, 현대에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다. 그것은 성경 전체와 누가복음 10장의 앞뒤 문맥 흐름을 따져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들어 있다. 율법교사는 예수를 떠보기 위해 시험문제를 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질문으로 되받았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하고 구약 모세오경의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 말씀을 인용했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누가복음 10장28절)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다시 예수께 물었다. 이후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께 물은 사람이 또 있었다. 부자 젊은이로, 마태복음 19장과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젊은이에게 ‘살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 구약 출애굽기 19장의 십계명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젊은 부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 젊은이를 ‘유심히, 눈 여겨’ 보시고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돌아갔다.

 

율법교사와 부자 젊은이의 관심은 ‘영생’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일’이 가득했다.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 하는데 골몰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 찾아가 질문을 했지만 실상 그들 마음 속에는 나름대로의 처방전을 갖고 있었다. 율법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부자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켰고, 율법교사 역시 언제든 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방법을 알려주셨다. “이를 행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감이 충만했던 부자 젊은이에게 예수의 말씀이 던져지자 그의 행함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라는 말씀 앞에 섰을 때 그는 ‘영생 없을 자격이 없는 자’로 판명됐다. 물론 그가 재산을 다 팔아 이웃과 나눴다고 한들, 영생으로 가는 길목에 또 다른 계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눈치채야 한다. 그것은 부자 젊은이의 인간적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셨다.

 

율법교사도 ‘자기 존재 증명’에 눈이 시뻘겋게 돼 있었다. 예수님 앞에서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자신있게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물었다. ‘나=강도 만난 자’가 된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너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라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마구 두들겨 맞아서 반쯤 죽은 상태’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내(예수)가 바로 강도 만나 죽어 있는 자들의 이웃이라고 알려주시고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율법교사에게, 부자 젊은이에게 하신 것처럼 “사람으로서 할 수 없으며,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신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또한 율법이 주어진 이후, 착한 삶을 통해 구원받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성경의 말씀이다. 구약 내내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어겼다고,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도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1장22절)”고 해놓고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장10절)”라고 정반대로 들리는 이야기를 하신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지막에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의 행함을 통해 불가능을 확인해 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완벽하게 행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능력으로 말씀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생이란, 구원이란, “내가 무엇을 하여야…”에 있지 않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로마서9장21절)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 대답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에 있다. (9장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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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빛으로, 어두움으로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초반부에는 ‘예수와 니고데모’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에피소드는 1~21절에 걸쳐 이어진다.

보통 이 대목 중간에 등장하는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성경의 핵심 요절로 꼽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 구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쏙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고, ‘영생을 준다는 데 그냥 확 믿어버릴까’ 하는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바리새인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결국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줘 십자가에 매달도록 군중을 선동했던 집단이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사악함을 수차례 지적하셨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죽였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상 세상 모든 사람의 대표다. 그러니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역시 세상 죄인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간 그는 대뜸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2절)” 하고 고백한다. 그 근거는 예수가 그 전까지 행했던 신기한 표적들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서 내놓은 ‘선생님’이란 칭찬 비슷한 멘트를 거부하시고,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신다. 기이한 일에 관심을 둘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을 덧붙인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능통한,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의 수준이다. 실상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종교인의 인식이다. 그들의 시선은 영적인 일에는 어둡고, 오직 육적인 일에만 고정돼 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고 답하셨다.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성경에 이미 예고한 대로 자신이 십자가(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는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혐오하는 뱀 취급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가 당할 것임을 미리 주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3차례 등장한다. 시간이 흘러 3장에 이어 7장에서는 예수를 변호하는 역할로 나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냈다.(7장32절)”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지 않고 돌아왔다. 유대 지도자들은 왜 그냥 돌아왔느냐고 질책했으나 아랫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하고 대답한다.

대제사장 등이 길길이 날뛰자 니고데모가 나서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2절)”고 되묻는다. 당사자의 말을 직접 듣지 않고 어떤 혐의를 씌워 그 사람을 체포하는 게 율법상 맞느냐는 지적이다. 이 때 다른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에게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즉 ‘너도 예수랑 한 편이냐’고 몰아붙인다.

요한복음 19장은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기록한다. 모두가 서슬 퍼런 대제사장 무리에 겁을 먹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부자요, 유대 지도자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의 장례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에피소드는 다소 난해하게 막을 내린다. 3장21절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한다.

어쩌면 이것은 니고데모의 삶에서 드러날 결말을 예고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9장에서도 반복했듯,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밤, 즉 어둠에 속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1절은 어둠과 반대인 빛으로 향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16~20절)

 

이 대목에서 성경은 사람들을 두 갈래로 나눠 말한다. 하나는 구원을 받은 자, 심판을 받지 않는 자, 빛으로 나오는 자들이다. 다른 부류는 벌써 심판을 받은 자, 어둠을 더 사랑한 자, 빛을 향해 가지 않는 자들이다.

이는 세상 상식을 뒤집어버리는데, 누구나 빛을 사랑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정죄, 심판이 선고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21절이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는 자들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들이 빛으로 나오는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뭔가 자랑거리가 있고, 드러낼 만큼 떳떳해서가 아니다. 그들 삶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은혜 안에서 이뤄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은 빛으로 끌려 나가는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풀었다.

똑 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 빛을 미워하고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더더욱 밝은 빛으로 나아간다. 빛으로 나아갈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더욱 발가벗겨지는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은혜 안으로 빨려 들어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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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웃음과 죽음

 

“맛없는 빵에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멋이 없는 인생에서는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은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열 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죽어야 할 이유를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삶에서 곱씹어 볼 만한 주옥 같은 이야기를 했던 주인공은 지리산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다. 한학을 깊이 공부했던 이 씨는 1995년말 펴낸 에세이집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에서 세상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오래 전 어느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선을 끄는 제목의 하얀 표지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당 훈장의 글은 어딘가 신선하고 끌리는 맛이 있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리산 청학동은 하얀 한복에 댕기머리를 땋은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곳으로 인식됐다. 현대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란 선입견이었다.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멸시를 보내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힘없는 이들을 짓밟으면서 힘 센 이들에게는 추파를 던지는 세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바깥 세상을 향한 저자의 지적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책에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즈음의 한국사회는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자신감에다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회의 위기라는 인식이 적지 않게 퍼졌다. 억눌렸던 시민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사회적 혼란도 찾아왔고, 경제적으로는 IMF 사태의 전운이 짙게 드리웠던 시기다.

어쩌면 다소 어수선한 한국의 상황을, 어쩌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 청학동 훈장의 메시지가 그래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청학동의 안개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었다. 세월은 절로 흘렀고 우리의 그 웃음도 흘렀다”고 적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리산 청학동 훈장을 보며 웃었던 ‘웃음’과 청학동 훈장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웃었던 ‘웃음’의 의미는 결코 같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문명세계와 청학동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개역개정)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 6장14절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세상이 분리돼 있음을 고백한다. 기준점은 십자가다. 정확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표준새번역이 쉽게 설명했듯 십자가는 죽음이며, 심판이다. 십자가라는 망원경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면 바울도 죽었고, 세상도 죽었다.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세상이 이미 심판을 당해 죽었다고 선언하고, 세상은 십자가 너머의 바울을 가치 없고, 죽은 존재로 취급한다.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고백을 하게 된 것은 갈라디아의 교회에 복음의 메시지를 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통탄한 뒤 3장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면서 탄식한다.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은혜의 복음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도 행해야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다.

바울은 6장 12~13절에서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자들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바울 자신은 단호하게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고 말한다. 심지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율법을 통해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죽었고, 반대로 할례와 율법을 지킴으로 자랑을 삼으려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바울 자신이 죽은 존재로 보일 것이라고 진술한다.

율법과 할례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랑거리를 만들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초대교회 갈라디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득실득실하다.

매 주일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라는 이름의 메시지가 인간의 행함과 삶에 대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것인지 차분히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는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는 책에서 “인생은 그저 산다는 데는 별 의미가 없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인생은 자기 가치를 찾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나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라고 믿는다”고 적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신과 종교를 수단으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몇몇 문장들은 청학동 훈장의 에세이가 아니라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다.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에서 이 ‘결코’라는 단어 때문에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죽은 존재로 취급을 당했다. 그럴수록 바울은 십자가에 더욱 매달렸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결심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처럼 바울을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은혜와 죽음이 바울을 삼켜버린 것이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일 듯 달려드는 세상을 향해 그처럼 담대하게 “오직 십자가”만 외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1장15절)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회개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위의 잘잘못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러 왔으니,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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