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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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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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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9
당신들의 법대로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를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때는 어린 양의 희생에 힘입어 이집트에서 탈출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다. 이제 진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에 나타나 죽임 당하는 날이 온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가?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라”며 유대인들에게 떠밀었다. 흉몽을 꾼 빌라도의 아내까지 나서 예수와 관련된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들은 “만약 예수를 놓아주면 빌라도 총독 당신은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다”고 협박까지 했다. 결국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라”며 예수를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구명하기 위해 나름 애쓴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물을 떠다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는 행위를 보여주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벗고자 했다.

그러나 빌라도의 말이나 노력,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그는 예수의 죽음에 가담한 가해자였다. 대제사장 무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재판한 세상의 대표였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동의하지 못 하든, 성경은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대제사장 무리의 일원이며, 십자가 사건의 주범 빌라도 소속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일상 생활을 통틀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날마다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나라’에 대한 대화가 등장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끌고 온 대제사장 무리에게 “너희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요구했고, 예수께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8장)

여기서 빌라도는 자신과 유대인 무리를 구분 짓고 있다. 예수 또한 대제사장들과 같은 유대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약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오히려 유대와 로마를 한데 묶었고,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를 한통속으로 분류했다. 이 대목에서 빌라도의 구별짓기는 무력화된다. 예수님의 기준은 바로 ‘이 세상’과 ‘내 나라’로 나뉘기 때문이다.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소속이었다.

빌라도가 “당신이 왕이오?”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라고 대답했다.(18장37절)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개역개정)”라는 번역과 “진리가 무엇이오?(새번역)”라는 질문은 어감에서 차이가 있다. 글로 옮겨진 말은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질문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진짜 진리가 궁금해서 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죄수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던 대화의 흐름상 허황되게 들리는 예수의 진술을 비꼬는 말투였을 수도 있다.

빌라도의 진의는 중요하지 않다. 해답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예수의 대답 안에 있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친히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고통을 받던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유대인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것처럼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다. 예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되어 태어났다. 동시에 유대인과 로마총독 등 모든 인류는 예수를 죽인 가해자로 판명된다. 빌라도의 몸부림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예수의 수난 과정에서 소속이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다. 흉악범이었던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저주하며 세상의 왕 노릇을 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며 예수께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예수는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란 말로 강도의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복음은, 사형 집행이 갑자기 보류되거나, 혹은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는 긴급속보가 아니다. 로마 군병들이 급히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양 손에 박힌 못을 빼거나 상처를 치료한다 해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는 후회조차도 필요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깜짝 놀람과 감사, 예수에 대한 찬양만 있을 뿐이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잡는 복음’(-부크크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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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정의봉의 추억

 

 1949년 6월26일,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는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군 당국은 다음날 ‘우발적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석 달만에 그는 징역 15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위로 군에 복귀했다. 1951년에는 국방장관의 지시로 잔형을 모두 면제받은 뒤 육군 소령으로 제대했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에서 시내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박기서씨는 40cm 길이의 작은 몽둥이,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안두희의 부인을 결박한 뒤 준비한 장난감 권총으로 안씨를 위협했다. 백범 암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라는 것이었다.

 중풍으로 투병 중이던 안두희는 우물쭈물 얼버무렸고, 격분한 박씨는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안두희의 온 몸을 난타했다. 안두희의 목숨이 끊어지자 박기서씨는 경찰에 자수했다. 박씨는 이후 ‘역사가 안두희를 처벌하지 않으니 내가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안두희를 죽인 동기 가운데 하나는 권중희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이다. 권씨는 이 책에 백범 암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울였던 40여 년의 노력을 담았다. 사건 이후 안두희에 대한 처벌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분노한 권씨는 1950년대부터 정부에 탄원을 넣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안두희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듯한 잡지 인터뷰를 하자 직접 죗값을 묻기로 결심했다. 권씨는 1987년을 시작으로 90년대 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안씨를 응징했다. 이 과정에서 권씨는 구속 수감되는 곡절도 겪었다.

20여 년 전 안두희의 죽음과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어 하나는 ‘정의봉’이다. 몽둥이 하나로 역사의 심판을 올바르게 집행할 수 있다면 세상 나무를 모조리 깎아서라도 정의봉을 만들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안두희는 정의봉에 맞아 절명했지만 여전히 역사의 심판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개화기 어수선한 틈에서 친일행위로 동족의 고혈을 빨아 배를 채우던 이들은, 해방이 되자 빨갱이를 때려 잡는 반공투사 변신해 여전히 잘 먹고, 잘 산다. 독립을 위해 애썼던 많은 분들, 그들의 자손은 타국을 전전하며 이방인으로 개고생을 하는데,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친일 배신자의 후손들이 정치인으로 혹은 검찰의 칼을 쥐고 세상을 호령한다.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대법원 판결까지 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조치까지 머뭇거리면서 말이다.

이렇듯 약육강식, 힘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역사에서 심판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행하는 심판 역시 힘의 논리에 지배 당하기 때문이다.

 각자 부르짖는 정의에 대한 잣대, 기대하는 정의 실현의 정도도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는 게 아니라 시효조차 힘있는 자들 멋대로 정해진다. 아예 시효 자체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그런 난장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한국 정치판이다. 한 때는 ‘군바리’들이 겨눈 총부리가 정의봉이었고, 이제는 검찰이 휘두르는 칼이 정의봉 행세를 한다. 애완견에 사과 한조각 들이미는 ‘개 사과’ 정도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가볍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이 불완전하다고 슬퍼할 이유나 여유는 없다. 성경이 심판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장27절)”라고 말한다. 그 심판대는 부정축재를 일삼는 재벌이나 정치인, 고관대작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를 향해 시시각각 진격해오는 대적들에게 있는 힘껏 정의봉을 마구 휘둘렀던, 바로 나 자신이 서야 하는 심판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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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사랑, 그 씁쓸함에 대하여

 

최근 어느 자칭 ‘선지자’의 유튜브 방송을 봤다. 기도 가운데 곧 선출될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언질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실로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지자는 한국 여당을 이끌 후보를 만나서 축복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조만간 서울에서 1980년 광주와 유사한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그런 기도응답을 받은 뒤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며 자유우파와 주사파가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선지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한다. 나무에게, 돌에다, 때로는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에게도 기도한다. 인간이 기도하는 이유는 욕심, 좋게 말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정당의 대표로 누가 선출될 것인지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선지자’의 마음 속에 가득 찬 것도 결국은 욕심이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M. 바운즈가 쓴 ‘응답되는 기도’(드림북출판사)에는 인간들이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저자는 “기도는 약속을 풍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 준다. 기도는 이 약속들을 계속 유지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약속은 기도에 영감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지만 기도는 약속을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시킨다”고 강조한다.

바운즈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힘주어 말한다. 그는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실 일을 행하도록 한다”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 순수한 기도는 절박한 상황들을 면제시킨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기도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해악들을 없앨 수 있다”고 덧붙인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바운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열심히 간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바운즈의 설명은 자칫 하나님이란 존재가 인간들의 내놓는 기도라는 ‘기특한’ 행위에 감동해서 그분의 계획과 언약을 수시로 바꾸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겠다는 인간의 악마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 아무리 성도가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은 바뀔 수 없다. 아니 그분은 성도의 기도에 맞춰 언약과 뜻을 변경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도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기도의 주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죄인 중 괴수라는 것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욕심으로 가득찬 인간들에게 기도를 토해내도록 하신다. 그분의 언약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출애굽기 2장 23절은 이집트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됐다”고 기록한다. 모세를 투입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정이다. 야곱과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내려간 이후 400년이 흘러 때가 되자 아브라함에게 미리 힌트를 주시고 약속하셨던,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끄집어 내시기로 했던 약속을 기도를 통해 신실하게 이뤄가시는 것이다. 사사기에서는 죄악에 빠져가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 넘기시고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삿 3장9절, 3장15절, 4장3절, 6장6절, 10장10절 등) 구원하시는 장면이 반복된다.

바운즈는 성경에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세 가지를 꼽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와 밧세바와의 불륜을 통해 낳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위한 다윗의 기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다. 하지만 이 기도들은 정확하게 응답됐다.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도를 드린 ‘자기의 유익을 우선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그렇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응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그것이 창세 전 언약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 성전 제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복해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그분이 예정하시고 준비하신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계획을 이미 다 밝히셨다. 그 언약에 따라 십자가를 세우셨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다. 바울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기도응답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그 내용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역으로 성도들이 구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유익이 아니라 성령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육신을 입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질병에서 고침 받기 위해, 육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께 드리지 못할 기도는 없다. 그러나 한 번 더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 그분의 응답 방식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두 구절의 공통점은 ‘마음’에 있다. 구하는 것은 전부 너희들 요구하는 대로 이뤄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칭’ 선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들의 마구 씨불이는 설교에 두 손 들고 ‘아멘, 아멘’ 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오직 자기 백성들만 사랑하셨다.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죄의 저주를 받으실 만큼 사랑하셨다. 그 사랑 앞에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육신의 욕심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씁쓸하실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한 단락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교회가 무시한 십자가(부크크 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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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2
2023-01-19
구원받은 바리새인들

 

 바리새인 집단은 2천여 년 전 중동 유대 땅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는 ‘나는 아니라’고 펄쩍 뛰기도 하겠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바리새인이다. 종교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기를 좋아하고, 자신은 구원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를 떠나 아무리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대변한다.

한국의 어떤 분은 구약성경을 다 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 자신의 아내 김건희 여사에 대해 했던 이야기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무수한 거짓말쟁이들을 감옥에 처넣었던 윤 대통령이 설마 공개적으로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운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차별화된 종교행위 추구, 그것으로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행태,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새끼들”이란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이 즐겨하던 짓이었다.

성경에는 또 다른 부류의 바리새인이 등장한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장 4~6절)”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스스로 율법에 완벽하다고 할만큼 자신감이 넘쳤고,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했던 바리새인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삶으로 좇아 살았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장 7~9절)”고 고백한다.

 바울은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아니하고, 금식과 구제,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던 행위에서 축적한 의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던 평판, ‘돈’이 곧 배설물이라고 규정한다. 회심한 이후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율법을 통해 자신이 생산한 의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를 통해 그저 주어진 의에만 관심을 갖는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것을 ‘율법 외에 한 의’라고 표현한다.

 그가 바리새인이면서도 삶의 방향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나니(로마서 1장1절)”에 답이 있다. 구원에 있어 출발점이 전적으로 하나님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갈라디아서 1장1절)”이라는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을 붙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택정함을 입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창세 전에 예정된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진 의를 얻게된 바울은 회심 이후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음을 전파했다. 달라진 점은 그런 열심과 노력이 자신의 자랑거리로 쌓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되레 바울의 삶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자신의 실체를 확인해 나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 표현은 바울이 숨지기 직전 로마 감옥에서 쓴 것으로 전해진 디모데전서에 등장한다. 복음이 선명해질수록 육신의 노력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세상 꼭대기, 최고 부자,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드셨다. 바울은 개척한 교회에서 쫓겨나고, 사도로서 권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 마저 하나둘 떠났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전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한데 따른 것이며, "십자가와 예수 이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바리새인에서 뽑혀 나와 교회로 모인 사람들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20절)”고 적었다. 바리새인으로서 추구하던 ‘돈’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십자가를 받아들인 삶으로 질질 끌려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잡는 복음’(-부크크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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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2
2023-01-12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는다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선 바리새인은 “나는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누가복음 18장11~12절)라고 기도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대표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삶으로 구현하기 위해 세세한 목록을 정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실천했다. 도덕, 윤리적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 바리새인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그들은 이런 ‘율법 지킴’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기를 좋아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 율법을 이용했다. 성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눅 18장11절) 기도했다. 바리새인이 감사한 이유 중 하나는 ‘세리와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세리는 쉽게 말해 세무소 직원이며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유대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돈 때문에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서 기도한 이후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간 것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세리였다는 데 있다.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앞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결론지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리고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다.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택하신 자’다. 택하신 자와 믿음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세상에는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극히 적은 수라고 유추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칭찬하며 당당했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입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는 무리로 분류된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고상한 기도까지 했지만 실상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누가복음 16장15절)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성경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16장14절)이라고 지적한다. 이 단락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붙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를 비웃었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은 이유에 대해 ‘돈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십일조와 구제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 만큼 돈을 좋아하지 않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비웃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 대해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16장15절)이라고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불의, 토색, 간음하지 않고, 금식과 십일조에 열심을 부렸던 바리새인들의 그 행위(돈)가 바로 사람 중에 높임을 받으려는 수작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는, ‘돈을 좋아하는’ 행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치,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고 또한 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려는 그 행위가 바로 재물,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복음서에는 돈을 좋아했던 도둑이 또 등장하는데, 가룟 유다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한복음 12장5절)”고 꾸짖는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도둑’(6절)이며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유다 역시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마태복음 26장24절)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던 자다. 예수님은 제자들 무리 안에 굳이 유다를 포함시켜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세상적 야망을 위해 평생 내달리는 자들이다. 가룟 유다는 당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 땅의 해방을 추구하던 정치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마태복음에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 이후 유다의 배반이 그려진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한다.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모두 근심하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유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면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것을 예언하셨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신행위를 멈출 힘이 유다에게는 없었다. 그 안에 이미 악마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친구로부터 배신 당할 것이 예언됐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뒤늦게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범죄하였도다”고 뉘우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돈, 즉 세상적 가치를 십자가보다 우선했던 제자의 최후다.

 그의 죽음에 대해 성경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마태복음 27장9~10절)”고 기록한다.

 결국 바리새인이든, 가룟 유다든 복음 밖에 있는 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마땅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이란 멈출 수 없는, 지독한 ‘돈 사랑’이다. 저주와 멸망이 마땅한, 불쌍한 죄인이라는 자아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겁을 상실한 채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어떤 목사도 그런 부류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역사 속에서 허용하시는 이유는 택함 받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음의 이야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부크크 출판사, 김용호 )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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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2
'자칭' 목사(중)에게 속지 말라(2)

 

 수년 전 어느 이단 전문가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기독교 100여 년 역사에서 발생했던 이단, 사이비단체의 계보를 잘 정리해 설명했다. 신천지 등 많은 교회가 사이비 이단이라고 이미 정죄한 단체의 교리적 모순은 물론, 이단에서 또다른 유사단체가 갈라져 나온 과정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덧붙여 그는 기독교 일각에서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여러 목사, 선교사들도 기본교리에서 벗어나 있다며 이단으로 내몰았다.

 이단 사이비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단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강을 마치고 문득 들었던 의문은 이것이다. 그가 재판정 판사석에 앉아 많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낙인 찍을 수 있는 권한을 어디서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단 감별사’였던 그 목사는 자신이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이단이 득실거리는데 자신은 어째서 이단 목록에서 빠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최근 한국에는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정죄 논란이 뜨겁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단체가 전 목사를 이단으로 판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전 목사와 기독교 원로 등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단 판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한기총은 전 목사에게 소명 기회를 주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이런 일은 역사 내내 있었다. 예수님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귀신 들렸다’는 모함을 들었고, 사도 바울 역시 유대인들로부터 정통성에 의심을 받았다. 루터와 캘빈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지 않으면 기독교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일단 교회의 본질은 ‘00교회’라는 건물이 아니다. ‘00교회’에 등록하고, 세례 받고, 헌금하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무리도 교회(성도)가 아니다.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시간에 따라 이 세상에 등장한 ‘교회(성도)’는 눈에 보이는 건물, 교회라는 단체에 속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복음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처절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절실한 것을 깨닫고, 부어주신 사랑에 감격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떠난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다.

 그래서 교회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매달린 십자가로 모아진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눈을 돌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며(갈라디아서 6장),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고린도전서 2장)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런 자리까지 밀어 넣으시고, 또한 그렇게 끌고 가신다.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여정이다.

 반대로 교회 밖에 머무는 자들의 특성은 ‘세상’에 대한 자랑과 사랑이다. 한때 사도 바울과 동역하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디모데후서 4장)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형식을 활용해 자신도 구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일생을 바쳤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세상에서 왕 노릇 하기’다.

 그런 면에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치성향에 따라 패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그런 기독교는 애초에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시장경제를 수호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는 것부터 자신들의 근본 소속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이 아니라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사는 데 있다.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시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앞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차분히 고민해 보시라. 자칭 ‘주의 종’들에게 속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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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8
쪼잔한 놈의 기분 좋은 하루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무대로 잘 알려진 이 도시에는 레알 베티스와 세비야FC라는 프로축구팀이 있다. 2007년 무렵 부산아이파크의 겨울 전지훈련을 취재하다 베티스와 세비야의 라이벌 경기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이 라이벌전은 밤 10시에 시작됐다. 베티스 홈 경기였는데, 경기장 주변은 팀을 상징하는 녹색물결로 넘쳐났다. 동행했던 스위스 출신의 앤디 에글리 부산감독은 절대 붉은색(세비야의 상징) 옷을 입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줬다.

원정 온 세비야 팬들은 경기가 시작되고 10분쯤 지나서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 원정팀 응원석에 입장했고, 경기가 끝나고는 베티스 팬들이 모두 경기장을 빠져나간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만큼 경기장 분위기는 뜨겁고 살벌했다.

세비야 주택가를 걷다 보면 집 주인이 세비야 팬인지, 베티스 팬인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창문이나 출입문에 좋아하는 구단 깃발을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 관람한 독일 분데스리가의 라이벌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경기도 인상적이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가가 고막을 찢을 듯했다. 홈팀인 도르트문트 구단은 대규모 응원단을 동원해 그라운드 전체를 노란색 깃발로 뒤덮어 분위기를 띄웠다. 관중들은 잠시도 의자에 앉지 않고 선수들의 움직임에 탄식과 환호를 질렀다.

축구 열기라면 남미도 빼놓을 수 없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기도 한 아르헨티나 프로축구 보카 주니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맞대결은 늘 이야기를 만든다. 라이벌 중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슈페르 클라시코'란 애칭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이지만 보카 주니어스가 빈민층의 지지를 받는 반면 리베르 플라테는 부유층 밀집지를 홈으로 쓴다. 1968년 양 팀 서포터스의 충돌로 74명이 사망했다. 1994년에는 보카가 0-2로 패하자 화가 난 보카 팬들은 리베르 팬들을 집단 폭행해 2명이 숨지는 사건도 벌어졌다. 다음날 경기장 벽에는 '2-2'라는 섬뜩한 문구가 낙서로 남겨져 충격을 줬다.

이밖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리버풀, 아스널-토트넘(잉글랜시 프리미어리그), 셀틱-레인저스(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 등 축구에서 라이벌전은 역사와 종교, 도시와 문화의 충돌을 상징한다.

오죽하면 1969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월드컵 때문에 전쟁까지 했을까. 팬들은 응원하는 팀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광적인 팬이라면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자신의 승리, 패하면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난 5일 카타르월드컵에서 동아시아의 라이벌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16강전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두 팀 모두 8강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이 세계랭킹 1위 브라질에 1-4로 대패했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패배라 담담했고, 최강팀을 상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이 자랑스러웠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일본과 크로아티아의 경기였다. 일본의 8강 진출 가능성이 한국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 떨리는 승부차기 끝에 일본은 고배를 마셨다. 크로아티아 골키퍼의 선방도 있었지만 일본 선수들은 킥을 하기 전부터 이미 바짝 졸아 있었다. 적어도 승부차기만 놓고 보면 애초부터 일본이 이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동아시아의 라이벌이 함께 탈락한 것은 내심 다행이었다. 너무 쪼잔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통쾌했다.

최근 한국의 일부 정치인 집단은 일본에 대해 이웃을 넘어 안보동맹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견해다. 지난 수천 년의 한반도 역사에서 일본은 최소 수백 번 한반도를 침탈했고, 재산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고작 지난 수십 년 큰 사건이 없었다고 향후 수십 년 안에 그런 도발이 또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진정한 동맹이 되기 위해서는 ‘통석의 념을 느낀다’는 둥 눈꼽만큼도 감흥이 오지 않는 사과로 얼버무려선 곤란하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는 말도 결국 뻔한 흰소리다.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잠시뿐, 하루 지나면 또 일상이 기다린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지만 그래도 일본 축구대표팀의 허망한 월드컵 패퇴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고소했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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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어느 캐나다인 가문의 한국교회 사랑

 

 한국교회에서 주일학교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청년들도 교회를 떠난다. 미래 한국교회를 어둡게 전망하는 이유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은 한층 가속화됐다. 복음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식었고, 예배는 재미없고 지루한 ‘행사’가 됐다. 그럼에도 청년들의 삶은 공허하다. 미래와 경제적, 사회적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인 이상 내면과 영혼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기독교 청년들이 신앙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오로지 성경말씀과 예배다. 복음을 통해 속에서 무너진 심령이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캐나다크리스찬칼리지(Canada Christian college, CCC)의 이야기는 많은 울림을 준다. 4년여 전 토론토 미드타운에서 윗비(Whitby)로 캠퍼스를 이전한 이 신학교에서는 매주 광역토론토의 청년 1천500여 명이 모여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강당이 찬양예배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예배가 열리는 날은 어지간한 쇼핑몰보다 큰 주차장이 자동차로 가득 메워진다. 최첨단의 음향과 조명시설은 젊은이들 예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기독교를 떠나는 청년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시기에, CCC가 청년 신앙부흥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CCC가 예배에 참석하는 청년들을 거주지 주변 교회로 연결해 신앙적으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 교회 위주로 미래세대 청년사역이 이뤄지는 한인교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광역토론토 한인교회의 각 청년들, 수천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신앙의 열기에 다시 한번 불을 지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 학교의 변신을 확인하기 위해 3년 여 만에 다시 찾았다. 학교 앞마당에서 바라본 온타리오 호수, 푸른 잔디밭 너머의 윤슬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반짝이며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은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사람들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강아지와 산책을 하며 싱그러운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토론토를 떠나 윗비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학교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 어딘가 어수선했다. 캠퍼스를 옮기고 처음 맞는 졸업식은 대강당이 아닌 잔디밭 광장에서 열렸다. 그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축하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비 때문에 졸업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었다.

코로나 CCC캠퍼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정재천 학인학부 신임 학장의 안내로 둘러본 캠퍼스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깔끔했고,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을 위한 헬스장에는 각종 운동기구가 가득했으며, 프로팀이 경기를 해도 될 만한 풀코트 농구장도 눈길을 끌었다. 풋살경기장의 인조잔디는 최상의 품질을 자랑했다. 학생들이 강의 중간에 쉴 수 있는 휴게공간도 충분했으며, 확 트인 도서관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달라진 한인학부의 분위기였다. 정재천 교수가 최근 신임 학장으로 부임한 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학생들과 학장 사이에 거리감이 사라졌고, 강의실과 붙은 학장실에는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한다.

정 학장은 학생자치회를 조직하도록 해 학교운영의 투명성도 높였다. 또한 재학생들의 불만사항을 자치회를 통해 모으고 교수들과 함께 개선해 나가는 통로도 마련했다.

학교에서 마주친 학생들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고, 정 학장과 농담을 수시로 주고 받을 만큼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또한 음악과와 상담학 전공파트에 전문성을 갖춘 교수 6명이 충원되면서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크게 개선됐다고 학생들은 입을 모았다. 정 학장은 최근 학생과 교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볼링대회를 열 정도로 학교 안에서의 가족적인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학교시설 개선이나 원활한 학사운영이 정 학장의 목표는 아니다. 북미 최대규모 신학교 한인학부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정 학장은 “현대식 캠퍼스나 가족 같은 학교 분위기가 신학교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면서 “캐나다 한인교계와 같이 호흡하면서 복음전파의 전진기지 역할을 맡아야 할 신학교인 만큼 미래세대를 위한 사역자를 세우고 양성하는데 학교 운영의 초점을 맞춰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CCC는 언제든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에 열려 있다. 예를 들면, 한인교회들이 연합으로 찬양예배나 집회를 할 공간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대강당을 개방할 계획이다.

이는 찰스 맥비티 총장의 철학 때문이다. 총장의 삼촌이었던 켄 맥비티 선교사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생명의 말씀사를 세울 만큼 한국선교에 관심을 쏟았다. 성결대 등 3곳의 신학교를 개교하는 데도 힘을 보탠 것으로 전해진다. 찰스 총장도 지난 30년간 수십 차례 한국을 방문해 여러 신학교와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갈비와 불고기가 최고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로 한국 사랑을 드러낸다.

찰스 맥비티 캐나다크리스천칼리지(CCC, Canada Christian College) 총장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올해의 지도자’에 선정될 만큼 캐나다 보수주의 기독교의 중요 인사다. ‘이스라엘협력자재단(IAF, Israel Allies Foundation)’은 매년 전 세계에서 50명의 지도자를 발표하는데, 맥비티 총장은 스티븐 하퍼 전 캐나다연방총리,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 등과 함께 선정됐다. IAF는 맥비티 총장에 대해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이며, 캐나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친 이스라엘 성향의 목사”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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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7
자유의 뒷배

 

1990년대 말, 한국보수야당에는 대권을 꿈꾸는 이른 바 ‘잠룡’들이 많았다. 8룡이니, 9룡이니 경쟁하며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가운데는 한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모조리 합격하고, 법조인 등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정치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꼬리표처럼 약점 한 가지가 따라다녔는데, 당적을 수 차례 옮겼다는 비판이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나치게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한 것 아니냐고.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으며,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다만 혼탁한 상황 때문에 정치지형이 자주 바뀌다 보니 마치 자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처럼 보여 억울하다고 오히려 하소연했다.

정치인이 무슨 소리를 못 하겠는가. 곤란한 질문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정치적 천동설’은 어딘가 위험하다. 다수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야당의 그 잠룡은 결국 대권실패는 물론 서울시장 등에도 잇따라 낙선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6개월을 맞아 방송사들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긍정 지지층은 30% 언저리, 부정평가는 60% 안팎이었다. 그가 대선 때 얻었던 50% 가까운 득표율을 생각하면 취임 이후 지지율을 꾸준히 까먹고 있는 것이다. 6개월간 사건사고나 인사, 정책논란이 많이 불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국민이 아닌 자신과 특정세력을 중심에 놓고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검찰 만능주의다.

예견됐던 부분이다. 2013년 10월21일 검찰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윤석열 여주지청장에게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윤석열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윤석열은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혼외자 논란이 불거진 채총장이 낙마했으나 이후에도 윤석열은 수사를 강행하며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른바 항명파동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윤석열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그에게 ‘강골 검사’의 이미지를 씌웠다.

그러나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정갑윤 의원은 당시 윤 지청장에게 “조직을 사랑하느냐”고 먼저 물었고, 윤은 “대단히 사랑한다”고 답했다. ‘대단히’라는 단어 속에서 검찰에 대한 그의 애착, 정확히 말하면 검찰 특수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윤석열의 이후 행보를 푸는 열쇠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신념이 아니라 ‘검찰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 그것이 자신을 서울지검장과 검찰총장 등 검찰요직에 앉힌 문재인 정부를 향해 반기를 든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검찰총장 재직 시절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다. 이 수사를 두고, 검찰개혁에 대한 반발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윤석열은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면 이는 부패한 것과 같다”는 말로 맞받았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칼을 겨눴다는 의미로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윤석열의 행보는 그의 신념과 거꾸로 가고 있다. 자신이 도륙했던 보수 정치권의 대표로 변신하더니,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검찰 출신 몇몇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모조리 장악했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과 야당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의 형평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칭 ‘헌법주의자’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통령직 수행은 철저하게 헌법정신에 따른 것이어야 맞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취임 이후 광복절 기념사와 유엔 연설 등 공식행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00번 가까이 들먹였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취재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윤석열만이 누리는 자유의 원천은 그가 사랑하는 검찰이다. 노무현을 비롯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윤석열은 검찰, 그것도 특수부 출신이다. 검찰이 수사하지 않고, 기소하지 않으면 있는 죄도 없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윤 대통령이 "여론조사 신경쓰지 않는다. 지지율 의미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검찰인 것이다. "대통령 처음 해봐서"라는, 지지자들과 국민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아무 생각없이 아무 때나 내뱉을 수 있는 것도 검찰을 믿기 때문이다. 검찰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대한민국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학의 천동설이 한 순간에 무너졌듯,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정치적 천동설'도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다. 안기부(국정원) 보안사(기무사) 경찰 등 한때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던 권력의 중추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차례로 권력을 내놓았다. 그것이 역사다.

그런 면에서 국민들의 비판적 여론은 물론 평소 강조하던 헌법적 가치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겠다는 윤 대통령의 행보가 언제, 어디까지 지속될지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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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7
광화문에 핵 발전소를.

 

 지난 8월말 C일보는 ‘유럽 에너지 위기에도 원전 덕에 느긋한 프랑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프랑스 전력 생산의 71%를 원전이 차지하며, 에너지 자급률도 높아 안정적이라는 내용이다. 마크롱 정부가 지난 2월 6기의 신규원전 건설을 발표하면서 기존 원자로 폐쇄 계획을 중단하고, 수명을 늘려 계속 쓰겠다고 선언한 내용도 묶어 전했다.

이 기사는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안정적인 공급처 확보를 위한 장기 대책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원전을 늘리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든 단기간 성과를 낼 수 없는 에너지 정책은 경제·과학적 근거는 물론 안보 측면까지 고려해 추진돼야 한다. 정치·이념적 판단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에너지 위기에도 끄떡없는 프랑스 원전 소개 기사는 독일의 탈원전 정책과 비교, 대조했다. 원전 가동중단과 수명을 다한 원전의 폐기를 선언했던 독일 정부의 정책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천연가스 부족사태에 직면하면서 위기를 맞았고,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처지와 대비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보수언론은 겨울철 난방에너지 부족사태에 직면한 독일이 가동을 중단했던 일부 원전을 3~4개월 정도 재가동키로 하자, ‘탈원전 유턴’이라며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런데, 언뜻 예리해 보이는 C일보 기사와 다르게, 세계 주요언론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로이터통신은 “한때 유럽의 최대 에너지 수출국이던 프랑스가 올 겨울 국내 수요도 감당 못할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보도 시점은 C일보와 비슷한 8월말이다.

 올해 프랑스의 원자력 에너지 발전량이 30년 이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에너지를 수입했으며, 전력요금도 메가와트시(MWh)당 1000유로를 넘었는데, 이는 1년 전 불과 70유로 수준에서 폭등했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그러면서 “독일과 벨기에 등 인근 국가의 전력난도 심해질 것이 뻔한 올 겨울 프랑스는 더 큰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유럽, 원전에 대한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프랑스 원전 56기 가운데 절반가량이 노후화된 부품 교체와 유지보수 문제로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며 “원전 연료 역시 러시아 의존도 높아 스위스의 최대 신생 원자력발전소는 연료확보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유럽의 노후 원전 대부분은 테러나 사이버테러에 취약점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핵폐기물 저장과 처리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CNBC는 '한때 기쁨과 자부심의 원천이던 프랑스 원전, 올 겨울 큰 문제에 직면하다'는 기사에서 "원전의 탄소배출이 적은 것은 확실하지만 경제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프랑스는 가동을 멈췄던 원전을 되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유지보수의 어려움 등으로 추위가 본격화되기 전에 가동률을 높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최악의 경우 지역적인 블랙아웃도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두 개 있을 리 없고, 같은 프랑스 원전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극명하게 엇갈린 점은 독자로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하지만 한국 일부 언론이 왜 그렇게 ‘핵발전 친화적’인 기사를 내보내는지 어지간한 독자들은 안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과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보급정책을 집요하게 캐고 있으며,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감사원까지 나서 사업실태 감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핵 사랑’은 이미 알려져 있다. 대선 후보시절 경북 울진의 한울원자력본부를 방문했으며, 핵발전 비중의 30% 유지(사실상 확대)와 해외에 10기 이상의 원전 수출을 통해 1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보수언론도 이런 분위기에 충실히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한 뒤 벌써 몇달이 흘렀지만 임기 5년간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 주요 국정과제가 무엇인지 희미해졌다. 교육, 노동 등 내놓는 정책마다 줄줄이 국민들로부터 퇴짜를 맞거나 흐지부지되는 상황이다.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경제도 난장판이 되고 있지만 검찰수사 말고는 국민들의 시선을 끄는 이슈가 없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해 본다. 국정과제와 국민의힘 2024년 총선 주요 공약으로 ‘서울 광화문광장에 핵발전소 건설’을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타당성이 있는데, 먼저 한반도에서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이 서울 수도권이란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최근 나온 민주당 김정호 의원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부산, 울산, 강원, 충청 등에서 수도권 등 전국에 전력을 보내는데 따른 송배전 손실량이 금액으로 환산해 연평균 약 1조7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1GW(기가와트) 원전 21기가 1년 동안 가동한 전력량에 달한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만약 광화문에 핵발전소를 건설해 서울 수도권에 곧바로 전력을 공급한다면 송배전에 따른 전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년 동안 절약한 1조7천억이면 청와대 이전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는다.

 또, 윤 대통령의 핵발전소 수출공약과도 맞아 떨어진다. 광화문광장에 최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총동원해 랜드마크 형태의 핵발전소를 짓는다면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BBC가 유럽 노후 원전의 테러 대비 문제를 지적했는데, 서울 한복판에 세운 것만으로도 ‘K-핵발전’의 기술적 자신감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입지를 따져도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부산, 울산, 경주 등 동남권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핵발전소 밀집지역이다. 게다가 최근 경주 인근에서는 지진 발생 가능성이 높은 활성단층이 자주 발견된다. 미국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실제로 발생했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위험 경보가 계속 울리는 동남권보다 서울 수도권 입지를 따져보는 것도 괜찮다.

 한국은 냉각수 문제로 바닷가에 원전을 많이 짓지만 프랑스의 경우 상당수는 강물을 냉각수로 이용한다. 그런 면에서 한강을 곧바로 끌어다 냉각수로 쓸 수 있는 서울에 핵발전소를 짓는다면 C일보의 표현처럼 ‘원전 덕에 느긋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에너지 문제에 정치 이념적 판단이 끼여들어선 안 된다”는 C일보의 충고가 새삼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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