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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
allellu

 

25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 있었다. 어떤 사건을 취재할 때, 일의 과정이나 결과를 추정하거나 예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정보만 갖고 미리 판단하거나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충고였다. 한두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 전언을 조심하라는 선배도 있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어디에선가 살이 더 붙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오보를 내고, 정정보도를 했다. 기사를 쓰면서 결과적으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취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은 고위직 공무원으로부터 A정부기관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준비 중인데, 내용이 아무리 살펴봐도 엉터리라는 제보를 받았다. 관련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에게 물었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는 답을 들었다. 여러 행정기관 간담회 자료도 입수했는데, 그 정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던 중소기업 관련 A기관에 질문을 했다. 담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제일 먼저 문제를 귀띔했던 고위 공무원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더니, “언론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워 일단 발뺌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가 나갔는데 아침부터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왔다. 정책을 준비하던 곳은 A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B였던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사실 확인을 게을리 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A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정정보도를 냈다. 이름을 달고 나간 기사를 정정하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론보도를 위한 취재는 어떤 사실을 알아내려 하는 행위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는 행위에 100% 완벽하기는 어렵다. 예를 든 사례는 사소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무언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늘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서는 ‘앎’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이야기가 1~13절에 소개되고, 16~30절까지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사람들과 엮인 에피소드가 적혀 있다. 31절 이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연달아 나온다.

4장3절에서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다. 34절로 가 보면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또 41절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뜬금 고백을 내놓는다. 

그러니 악마가 광야시험에서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서두를 꺼낸 것은 예수님의 실체를 잠시 헷갈렸거나 전혀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고도 능청을 떨었던 것뿐이다. 악마의 속셈은 뻔한 거짓말로 속이고 넘어뜨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예수께서는 이들 마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사람 안에 들어가 더러운 짓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앎’의 초점은 빗나가 있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특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성경 이사야 61장의 첫 대목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셨다. 이것은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할 일, 즉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회당에 있던 자들이 다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또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한다.(4장22절) ‘놀랍게’ ‘기이하게’라고 번역된 ‘다우마조’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상하게 여기다’는 뜻도 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다음 대목에서 파악된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신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형제까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웃 청년이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여기서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직격하셨다. 예수를 돌팔이 의사쯤으로 취급하면서, 다른 동네에서 했던 것처럼 큰 기적이나 한번 베풀어 보라고 조롱하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면전에서 들추어 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엘리야 시대의 과부와 엘리사 때의 나병환자 나아만 장군을 언급했다. 구원의 은혜는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임했다는 말씀이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그들이 구원 밖에 있는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에 나사렛 사람들은 격분했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절)고 기록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는, 그 예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모세의 제자를 자처하며, 세상 진리를 통달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눈 먼 자들로 들통난 사건이다. 나사렛 사람들 역시 예수를 보았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리에 대한 눈은 멀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은 ‘앎’을 둘러싼 대립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를 ‘틀린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다. ‘선악과’가 낳은 고질 증상이다. 

그러나 눈치가 있다면 곧장 그런 ‘앎’이 의미 없음을 알아차린다. 세상에서 쌓은 지식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거품을 물지만 실제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앎’의 출발점이다. 진짜 가치 있는 ‘앎’이란, 생명을 살리는 ‘앎’이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을 향해 예수께서는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나사렛 사람들의 속마음을 예수께서는 이미 꿰뚫고 계셨다. 

 

다시, 나사렛 회당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눈 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일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장2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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