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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야 산다
yeodongwon

 

 

 뒤뜰 거름통에다 쓸모가치가 없는 잡초, 낙엽, 음식찌꺼기들을 담아 일년을 썩혀 거름(퇴비)을 만들어 텃밭농사에 대비한다. 거름을 안준 농사는 지으나마나 헛농사다. 농사엔 흙과 씨와 거름과 그리고 정성(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만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다음에 올 생명을 위해 썩어주기 위해서이다. 


밀알 하나가 죽어야 몇 배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에도 쓰여있듯, 모든 것은 죽어 썩어주어야 새싹이 산다. 죽되 철저히 썩어야 땅이 살아 다음 생명체에 죽음 값을 다한다. 


죽되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라는 그것 자체가 토양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어 죽음 값을 다하지 못하니 원죄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이브가 사과를 따먹은 죄 값으로 죽음이 있게 되었다고 하니 나의 이론대로라면 되려 이브의 행위로 말미아마 원죄가 속죄 되었다는 말이 된다. 괴변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내 눈엔 모든 것은 죽어 썩되 철저히 썩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진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죽음이 없다면? 그리고 썩지 않는다면? 끔찍하다.


금, 은, 동, 다이아몬드는 썩지 않아 우리 인간 쪽 세계에서는 값나가는 귀하신 몸일는지 모르지만 자연 쪽에서 보면 플라스틱이나 핵 찌꺼기처럼 골치 아픈 원수 덩어리가 된다.


썩는다 함은 박테리아가 있기 때문이고 박테리아가 기생한다 함은 물이 있기 때문인데 생물을 살리는 것도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땅과 물이 있기 때문이니 철저히 살리고 철저히 죽이는 요인은 같은 통속이다. 이는 삶과 죽음이 한 통속이요 사는 것은 죽고 죽어야 산다 함의 증명이다.


물이 생물을 낳고 키우고 그리고 죽은 후 철저히 썩혀 본 위치 흙으로 되돌리고 죽지 않는 씨앗이라는 영원성이 그 흙에서 다시 물을 받아 움을 틔운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영원히 대를 이어 죽지 않아야 할 씨앗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아닌가? 


햇빛과 땅과 물과 씨앗은 생명체 영원성의 본체이고 힘이다. 그 힘이 과학이고 종교다. 그리고 그 영원성이 창조의 연속이며 진화의 근본이다. 그래서 진화 없는 창조는 영원성으로 보면 쓰레기다.


창조는 더 좋게 되려는 속성에 의해 아름답게 진화된다. 이 창조 미학이 하늘의 근원이라 나는 감히 생각한다.


생명은 죽음을 담보(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죽기위해 태어난다 함이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 개인은 건강한 자연을 위해 죽어 철저히 썩어줄 뿐이다. 헛되고 헛된 허무라 말하지 않음은 양보(죽음)라는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받아드리는 맘, 이것이 자기 완성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늙는 과정이라는 세포의 퇴화를 거쳐 병을 얻어 죽음에 임하고 땅에 묻혀 철저히 썩어 땅이라는 원위치 성분으로 완전무결하게 환원되어 다음 생명체의 밑거름이 되는 순환의 분명한 이치는 절대진리다. 


그래서 사랑은 치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내리사랑이다. 이 내리사랑은 그 어떤 이유도 명분도 끼어들지 못하는 본성적 순수함이기에 어떤 계명에서도 내리사랑에 대해서는 언급이 빠져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있어도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색하다. 부모공경은 십계명 명령에 들만큼 윤리도덕이라는 군더더기 부담감을 필요로 하고 남녀간의 달콤한 사랑도 이해타산이라는 계산이 끼어들어 늘 티격태격 물배기 마음싸움이 잦지만 자식사랑은 뭍 짐승들도 다하는 본능적 자연의 순리라 말 자체가 군더더기가 된다.


혹 자기종교만이라는 우상적 꾀임에 빠져 제 교주(종교) 섬김이라는 치사랑을 자연만상 사랑이라는 내리사랑으로 착각, 타살이든 자살(순교)이든 죽음을 밥 먹듯이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보기가 참 딱하다.


종교는 억지로 죽이고 죽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자연 순환의 순리적 사랑 관계에서 만이 그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씨앗이라는 영원성의 존재에 나의 종교성이 함축되어 있다. 새끼줄에서의 한 가닥 지푸라기처럼…


고려대 양형진 물리학 교수의 말씀으로 끝맺음을 해보자 “태어남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오직 인연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서 진행되는 영원한 과정일 뿐이다.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존재방식이 영원한 삶의 진행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그래서 무상(無常)은 존재자의 있음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존재자의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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