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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학(明堂學)
yeodongwon

 

 

(37)여동원 단상

 

 

명당학(明堂學)

 

 

 영혼을 즐겨 그린다는 어느 여류화가가 한국의 유명인사들 전생을 나열해 놓았다. 그 상상이 그럴듯하다.

 

 박정희 ; 신라 때 왕, 최진실 ; 송나라 옹주, 차범근 ; 화랑 무예, 정주영 ; 중국 거상,

 

 그렇다면 나 여동원이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전생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도 있고, 이런 것으로 먹고 사는 점쟁이도 있고, 정신과 의사도 있다 들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이 전생에 관해 관심과 흥미를 갖는다.

 

 전생(前生)이 있으니 금생(今生)이 있고, 금생이 있으니 내생(來生)이 있다는 논리를 펴며,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가 종교의 주제가 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믿어도 될까? 우선 의문부호를 붙인 채 생각을 이어보자.

 

 전문가들에 의하면 특수 장치요법에 따라서만 전생을 투여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우리는 전생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즉 탄생의 순간을 통과하자마자 전생을 몰라버린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내생으로 가는 순간 금생을 몰라버린다는 말이 되는데, 전생과 금생과 내생은 각기 단절된 독립의 생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논리라면 금생에서 인연 맺었던 분들을 죽어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허구가 되고, 이승에서의 삶의 성적표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허구가 된다.

 

 역시 같지만, 이 허구가 얼마나 다행인가. 미래를 모르고 산다는 것, 죽을 날을 모른다는 것, 죽은 후를 모른다는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모른다는 것, 오히려 축복일 수 있지 않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이 얼마나 정직한 삶인가. 왜 사람들은 논리와 상상의 한계를 넘은 엉뚱한 환상의 세계에 관심을 넘어 몽롱해지기를 원할까? 한발 앞도 모르면서 천 발 저쪽을 다 안다는 듯 말하기를 좋아할까?

 

 현세도 엉기며 살아가야 하면서 전생을 알아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가 궁금이야 하겠지만, 그리도 중요할까? 상상의 세계인걸. 물론 탄생을 부여받았으니 질 좋은 삶을 살다 가고 싶기야 하겠지만 글쎄 전 후생을 안다 해서 도움이 될까?

 

 "삶(生)도 모르는데 어찌 하늘(天)을 말하겠는가?"라 고백한 공자야말로 공자답게 정직하다. 내일을 몰라 궁금하고, 궁금하기에 기대가 되고, 그런 희망이 있기에 오늘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점괘를 보고 내일을 설계하는 사람들, 묏자리로 미래의 운명을 거는 사람들을 보면 1+1=2가 된다는 초등학교 산수(논리)나 배웠는지 궁금해진다. 점괘와 묏자리에 의해 대통령도 되고 국회의원도 된다는 나라가 지구상에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얼마나 만화 같은 진풍경인가. 모든 자리(감투)는 사람됨(그릇) 되므로 되는 것이지 어찌 점쟁이의 입이나 죽은 조상의 묏자리로 될까?

 

 아인슈타인도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조상이 묻힌 묏자리는 로또복권이 아니라 죽은 시체의 집일뿐이다. 글쎄, 좌청룡 우백호 구름 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민족의 장래가 과연 밝은 쪽으로 가질까?

 

 한국의 주간지 신문들을 들춰보면 우리 역대 대통령들의 조상 묏자리에 대해 흥밋거리를 넘은 현실적 영향을 주고 있는 양 취급하고 있는데, 앞으로 될 통일 대통령의 조상 못자리 이야기도 나온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우선 조상 묏자리부터 소개하는 것이 약방의 감초가 되었다. 그 중 어느 대통령은 조상의 묘를 옮기자 대통령이 되었단다.

 

 이처럼 대통령 지망생들의 관심이 민심 쪽이 아니라 묏자리라면 대학에 정치학과 대신 풍수지리학과를 신설, 명당학(明堂學)을 연구케 함이 어떨는지?

 

 결론은 망자와 산자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며, 서로 간에 어떤 힘의 행사가 미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만화다. 죽고 삶은 우주순환 질서에 속할 뿐이며, 다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이치대로 부모의 용모, 성격을 닮게 태어나는 것은 조상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후손이 있다는 내림 관계일뿐, 그 관계에 망자의 역할이 있다는 상상은 일종의 기대심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왜 하늘은 종족 번식을 할 때 쇠사슬(chain)처럼 단순연결고리로 이어가게 하지 않고 번거롭게 암수라는 짝짓기 사이에서 태어나게 하여 새끼줄 같은 꼬인 연결로 이어가게 했을까? 아마 사랑으로 남과 더불어 얽혀 살아가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이웃과의 꼬인 인연관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흙이라는 원위치로 환원되면서 자연과의 얽힘에 동참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즉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 행위로 부모와 닮은꼴로 태어나 이웃과 꼬임 인연관계로 얽혀 살다가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자손에게 닮은꼴을 전해주고는 흙으로 사라지는 자연순환질서에 참여한 것만으로 임무 수행을 다 한 것이 되어 전생과 내생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명당은 한갓 흙일 뿐이리라.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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