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41 전체: 81,481 )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는 밤새에 일어난 일을 다시 떠 올리면서 무릎을 꿇고 절절하게 애원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난 그냥 먹을 것만 구하고 다시 돌아오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제발 아기라도 찾아볼 수 있게 지금 나를 내보내주세요. 혹시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만약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서 내 손으로 묻어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나면 꼭 다시 여기로 돌아올게요. 그때는 아무 처벌이나 다 받겠습니다.”

 나는 정말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 아기가 혹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는 미친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마음속으로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간다면 아이 시신을 찾고 나서 다시 강물에 빠져 죽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절대로 나를 내보내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래도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뜻밖에도 그 보위부장은 딱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더니 “이 여자 내 보내줘”라고 턱짓을 했다. 나는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그는 분명히 나를 내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 옆에 서 있던 40대 아줌마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조카딸아. 어쩌면 좋냐, 밤에 그 어린 갓난아기 잃고 내가 고모가 되어 잘 살펴주지도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 너랑 같이 찾으러 갈게. 모든 게 내 탓이구나!!” 그는 가슴을 쾅쾅 치고 고성을 지르며 폭풍 눈물 연기를 하였다. 갑자기 그녀가 나보다 더 시끄러운 소리로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모두들 뜬금없어 의아했고 보위부장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야. 둘 다 빨리 내보내라.”

 우리는 진짜로 풀려났고 나머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나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나는 보위요원이 따라오는 줄 알고 뒤를 계속 흘끔흘끔 돌아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누구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 아줌마는 감옥 안에서 가장 나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준 여자였는데 그래도 혼자보다는 같이 있는 것이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는 나오자마자 압록강 기슭을 따라서 계속 걷고 또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8달 정도 된 어린이 시신을 본 적이 있냐고 수없이 물어봤지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내가 아기를 키울 수가 없어서 강에 버린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그렇지 젖먹이 아기를 강물에 던져 버리다니 미친년이네….” 사람들마다 싸늘한 눈길로 바라볼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걷기만 하였다. 하지만 집에 계시는 부모님들과 동생을 생각하면 내가 죽는다고 해도 부모님들께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라니 이 또한 커다란 갈등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그 아줌마가 내 옆에 찰떡 같이 달라붙어 맘대로 시도할 틈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살자! 꼭 살아야 한다! 살아서 꼭 돈을 벌어서 나도 잘살고 부모님들도 더 이상 고생하지 않게 도와드리고 형제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가 꼭 살아야 할 이유이고 목표이다. 그러지 않으면 어제는 비록 아들을 잃었지만 앞으로는 부모형제까지 다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에도 강가에는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형제, 가족, 또는 친구 단위로 냄비를 걸어 놓고 저녁을 지으며 사방에 연기를 피워대고 있었고 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내 아기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웬 남자가 3살 정도 되는 여자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 여자애는 촌각을 다투며 죽어가고 있었다.

 며칠째 쌀을 못 먹고 물만 마셔서 살이 붓고 피부가 풍선처럼 부풀어서 피부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고 손대면 금방 피부가 터질 듯이 형편없었다. 이제 그 붓기가 내리게 되면 그 여자 애는 죽을 것이다. 대부분 굶어 죽는 사람들이 비슷한 현상으로 죽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안다.

 아이가 울 힘도 없이 축 늘어져 있는데 나는 아직도 가슴에서 젖이 불어서 몹시 고통스러웠던지라 그 아저씨에게 말했다. “혹시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 안 될까요? 그냥 바라만 보기보다 젖이라도 먹이면 살릴 수도 있어요. “안 될걸요. 젖먹을 힘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한번 물려 볼게요.

 나는 내 아이보다 조금 무거운 3살짜리 여자애를 안고 젖을 물렸다. 하지만 그 아기는 젖을 입에 물 힘조차 없어서 먹지도 못했다. 나는 끝내 꺽꺽 소리를 내며 울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그 여자아기를 그의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도 엉엉 울었다. 우리는 차마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 얼른 자리를 떴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여자 아이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렇게 압록강가에서 뜨거운 7월의 태양은 잔인하게 이글거리며 또 한 명의 어린 생명을 데려가 버렸다. 예상한 대로지만 나는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과연 어떨지 정말 내 눈앞에 지금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너무 숨 막히고 말문이 막혀 한동안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눈길을 돌리는 데마다 사람들이 굶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이런 나라. 과연 이곳은 정녕 사람이 사는 세상인가 아니면 지옥이란 말인가? 당과 수령을 노래하고 충성하고 모든 것을 바쳐온 그 대가가 바로 죽음뿐 이라면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살아야 할 나라가 아니다. 나는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야 한다.

 사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지만 남편의 가족들도 다 굶어서 죽었다. 시어머니와 두 시누이, 그리고 큰 시누이의 2살된 아기마저도 내가 떠난 그다음 해에 죽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두 시누이들은 나와 나이도 비슷한데 어떻게 앉아서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 굶주린 고통을 집안에 앉아서 견디기만 했는지 어차피 죽을 거면 죽음을 각오하고 남들이 다 도망쳐 건너가는 두만강이나 압록강이라도 건넜으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삶의 의지가 약했던 탓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부디 그곳에선 배부르게 지내길 바란다. 남편도 죽을 뻔한 걸 엄마가 달려가서 살렸다고 한다. 그는 며칠째 낟알을 하나도 못 먹고 풀죽만 먹다가 영양실조에 풀중독이 왔는데 얼굴이 누렇게 뜨고 부어서 1주일째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다.

 그가 며칠째 직장을 나오지 않아 누군가가 집에 찾아갔더니 죽어가는 그를 발견했고 또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는 집에 있던 러시아산 비상약을 들고 급히 달려가서 먹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노란 가루약인데 그걸 먹고 조금씩 회복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집 식구들 중에 남자 형제 둘만 살고 나머지 여자들은 끝내 모두 굶어서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그 밖에도 중국으로 탈북할 마지막 희망을 안고 혜산까지 겨우 찾아온 사람들은 끝내 강을 건너기도 전에 힘이 없어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압록강 주변에 발길에 채울 만큼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일제시기에도 이보다 더하진 않았을 것이다.

 1996~1998년 사이에 그렇게 3백만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나는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탈북 후에 만난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상황은 그때가 가장 최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게 바로 페쇄 국가 북한이라는 나라의 실제 상황이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채 감춰진 진실이다.

 나는 이번엔 무조건 탈출에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의지로 불탔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나는 꼭 살아서 돈도 많이 벌어서 부모형제를 도와야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 내 아들 몫까지 꼭 살아남아야 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