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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7)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는 갑자기 나타난 큰 횡재에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살며시 주저앉으며 그 돈을 집으려 하는 바로 그 찰나! 건너편 아줌마가 나를 보며 갑자기 소리쳤다.

 “도적이야! 저 여자 돈 훔친다.” 갑자기 온 시장바닥이 떠들썩해지고 사나운 시선들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돈이 떨어진 곳 바로 뒤에 앉은 아줌마는 뒤를 돌아보더니 다짜고짜 내가 자기 돈을 훔쳤다고 우겼다. 그리고 그 돈이 자기 주머니에서 떨어진 거라며 돈을 내 손에서 확 낚아채갔다. 그 여자는 막무가내로 나를 자기 지갑에서 돈을 훔친 도적으로 몰았다.

 나는 길바닥에 떨어진 걸 주우려했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시장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그 아낙네들의 고함소리에 기가 눌려버렸고 해명도 소용없었다. 나는 땅에 떨어진 돈을 주울 행운마저 나를 외면하는, 이토록 꼬이고 또 꼬이는 내 팔자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아낙네들은 달려들어 금방 싸대기 한 대 갈길 태세였다. 상황이 무섭게 변해가자 나는 눈물을 하염없이 떨구며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고 그들은 당장 꺼지라고 나를 윽박질렀다.

 막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그만 가슴이 꽉 막혀 하늘에 대고 울분에 찬 원망을 쏟아냈다. 이제 막 집을 떠난 지 불과 2시간도 안 되어 벌어지고 있는 불행한 일들은 마치 나를 집으로 돌아가라고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그만 돌아가고말까 망설이다가 남편을 떠올리며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 앞에는 며칠 동안 연착이 되고 있는 기차를 기다리며 낮과 밤을 지새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피난민들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며칠씩 밖에서 밤을 새운 그들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나는 일단 혜산으로 목표를 정했는데 평양-혜산행 기차는 밤 10시쯤에 도착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8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도 땅바닥에 아무 데나 앉아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어떤 아줌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로 가냐? 어디서 사냐?” 내가 혜산에 가보려고 한다는 말에 그 아줌마는 눈을 반짝이더니 자기도 혜산 사람이라며 아들 치료하러 다니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소아마비가 와서 잘 걷지도 못하는 12살쯤 되는 아들과 함께 말이다. 그 아줌마 아들을 보는 순간 너무도 내 남동생과 비슷하여 갑자기 동정심이 치밀어 올랐다.

 마치 내 남동생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나의 엄마도 동생을 살리려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수많은 고생을 해 오셨기 때문에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장사물건을 가져가는지를 물었다. 나는 혜산에 처음 가보는 거라 돈만 조금 가져간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냥 돈을 가지고 갈바에는 동(구리)을 사 가지고 가면 몇 배로 비싸게 팔아서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혜산에 가면 밀수꾼들을 소개해줄 테니 좋은 값에 동을 팔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때 나한테는 800원 정도가 있었는데 쌀을 10kg 정도를 살 수 있을 만한 돈이다. 나는 혜산에 가본 적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는 터라 너무 잘됐다 싶어 그들 일행과 함께하기로 했다.

 그는 혜산시에 있는 자기 집 인민반 주소와 남편 이름까지 알려 주며 심지어 남편은 군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거처할 곳이 없으면 자기 집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하였다. 뜻밖의 인연에 갑자기 기분이 들뜨면서 이번에 장사가 잘되면 앞으로 이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벌면 되겠다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수중에 있던 800원 중에 750원어치를 동을 샀다. 나 혼자 50원이면 기차 타고 가는 동안 먹을 것을 사 먹을 돈이 될 것이고 도착하자마자 동을 팔아버리면 돈이 금방 생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약 3~4kg 정도 무게의 동 은 짧고 납작하게 만들어 아기 포대기에 숨기려고 했으나 그 혜산 아줌마는 자기 아들 허벅지와 몸에 숨기고 붕대를 감으면 원래 장애인이라 절대 단속에 걸리지 않는다며 또 나를 꼬드겼다.

 동은 단속 물품이라 들키면 무조건 압수당한다. 그리고 요즘 열차검열대들은 동이 있는지 없는지 만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한다. 단속해서 뺏은 동은 저들이 다 가져간다. 그래서 단속을 당하지 않으려고 동을 짤막하게 절단하고 납작하게 두드려서 신체의 여기 저기에 숨기고 붕대를 감거나 두꺼운 옷을 껴입는다. 아기 포대기에 숨기면 아기가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나도 그의 말을 따르기 로 하였다.

 열차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서 ㅇㅇ역에 멈춰 설 때 나는 큰언니의 형부를 발견했다. 그는 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우연히 그를 보고 소리쳐 불렀다. 깜짝 놀라는 그에게 돈이 있으면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하니 그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40원이 있다면서 건네주었다. 그 돈이 없었으면 나는 혜산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 아줌마는 돈 한푼 없다면서 나보고 먹을 것을 사 달라고 강요하다시피 했고 내가 가진 돈은 우리 셋이서 하루만에 다 써 버렸다. 혜산까지 10시간이면 도착할 구간을 정전이 되면서 10시간씩이나 연착이 되어 내가 아기를 업고 다니면서 밥을 동냥하였다. 낯선 사람들한테 체면도 무릅쓰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욕을 얻어먹었지만 그래도 아기 엄마라고 먹을 것을 구걸할 수가 있었고 그것으로 우리 셋은 나눠 먹으면서 3일만에야 혜산역에 도착했다.

 혜산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하고 마주 있는 양강도 소재지이며 신의주와 함께 북한의 가장 큰 국경도시이다. 또한 중국에서 식량이나 의류, 또는 모든 생활필수품들이 밀수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전국의 각지에서 수많은 장사꾼들이 몰려와 도매가로 공산품 및 식량을 사간다.

 그리고 자기 지방으로 가서 소매로 팔게 되면 남는 이윤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신의주 행이나 혜산행 열차는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조금만 한눈을 팔면 순식간에 장사물건들을 훔쳐가버려 대부분 2~3명씩 조를 짜서 함께 움직인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아줌마는 우리 셋이 몰려다니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걷자고 했다. 어차피 출구는 한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나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평소에 꼭 와보고 싶었던 국경역에 도착하고 나니 너무 어리둥절해 사방을 둘러보며 이제 동을 팔아서 쌀을 사서 집에 가져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몇 걸음 앞장서 걸었다.

 한 열 발짝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두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걸었나 하여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면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지금 잘 못 찾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여기저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정신없이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뼈만 앙상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13살 난 아들을 업은 그 여인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이 지역을 잘 아는 터라 출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 아들 몸속에 내가 산 구리가 몽땅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놓치면 나는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아픈 아들을 데리고 나같이 불쌍한 아기 엄마를 사기치고 다니다니. 절대 그럴 수 없어. 나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출구에서 나가는 사람들 마지막 한 명까지 지켜보다가 그제서야 나는 정말 내가 당했구나 하는 충격이 밀려들었다. 과연 이것이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차표와 여행증 검열에 아무것도 내밀지 못한 나는 잡혀서 사무실로 끌려갔다.

 역전 검열대들은 내 설명을 듣고 나서 내가 사기를 당한 거라고, 멍청해서 아직도 상황을 파악을 못한다며 얼뜨기라고 비웃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장애인 아들을 앞세워서 사람들의 동정을 산 다음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검열대원들은 뺏을 것도, 낼 벌금도 없는 나를 바로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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