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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과 수선화
leesangmook

 

 

 

공원에도 그렇지만 집 앞뜰에도 튤립과 수선화가 함께 핀다. 마치 셀카를 내밀고 자매가 사진을 같이 찍는 모습이다. 함께 사진을 찍는 건 뭔가 통할 때의 경우다. 
어쩌면 두 꽃들이 어깨를 맞대는 건 자존심의 수준이 비슷해서일 게다. 전설에 의하면 둘 다 자존심의 덩어리들이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자신을 함부로 내주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결기 때문에 6개월이나 되는 토론토의 겨울을 견뎌내는지도 모른다.


자존심의 강도로 치면 튤립은 수선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비가 오면 튤립은 고개를 숙이고 얼른 꽃잎들을 오므리지만 수선화는 꼿꼿이 피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수선화의 자존심을 일컫는데 이건 자기애(self-love)나 자아도취를 뜻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르키소스가 나온다. 나르시시즘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나르키소스를 나은 어미요정은 예언자를 찾아간다.


“이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는 날 죽게 될 것이요.”가 예언이었다.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그 누구의 구애도 거부한다.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간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만다.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자신을 알아본 결과다. 자기애가 지나치면 재앙이 될 수 있다는 함의다.


튤립의 전설 역시 자존심이 키워드다. 아름다운 소녀는 세 종류의 프러포즈를 받는다. 한 사람은 왕관을 쓴 왕자였고 한 사람은 칼을 찬 기사였으며 다른 또 한 사람은 황금을 보유한 청년이었다.


프러포즈에 실패한 청년들이 떠난 다음 소녀는 죽어서 튤립 꽃이 됐다. 꽃은 왕관 모양이 됐고 잎은 칼처럼 생겼고 알뿌리는 황금알 모양이 됐다. 하지만 왕관 모양은 아니고 손에 들고 흔드는 종(鐘) 모양이라고 해야 맞을 거 같다. 튤립이 피는 건 긴 겨울이 마침내 끝났다는 해방의 종소리가 아닌가.


튤립은 해가 나면 꽃잎을 열고 해가 지면 닫는다. 게다가 비가 오면 꽃잎을 오므리는 비밀은 알 수가 없다. 미모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무뇌아가 아니라는 몸짓이 아닌가. 어쩌면 알뿌리에 정교한 프로그램이 저장돼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 튤립과 40여 년 동거를 하는 동안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 튤립이 새로 피어난다는 사실이다. 알뿌리가 땅굴을 파고 이동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굳이 캐내고 싶지 않다가 이제야 사실을 발굴해야 했고 그건 씨앗이 날아가서 파종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집 종자의 튤립이 옆집 화단에까지 날아가 우아하게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 행로가 오묘하기 그지없다.


꽃이 지고 잎이 마른 후에 구근을 파내면 작은 구근들이 몇 개 생긴다고 한다. 그걸 분리해서 말려서 저장한 다음 가을에 심으면 튤립의 인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화원에서 사온 알뿌리를 심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는 데 40년은 좀 긴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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